HTML clipboard내일 기자 회견이 있다는 사실을 제가 미처 모르고 있었군요. 금성동 파출서 예비군 무기고 탈취에 대한 김기광의 자세한 증언이 여기
있습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33&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B1%E8%B1%E2%B1%A4&sop=and
김기광은 나주 사람인데 나주에서 무기탈취한 후 광주공원으로 갔습니다. 무기탈취 특공대의 광주공원 집결 약속은 이미 21일 오전 10시에
정해져 있었는데, 이 사실이 아마 대단히 중요한 사실일 것입니다.
HTML clipboard저는 김동문 기자님의 5월 19일 진도 시민군 목격 증언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을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17/2010051700037.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1_10
에서 찾아냈습니다. 허연식은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 전문위원입니다. 이 사람이 진도 사람인데, 그는 이 기사에서 <18세로 중학교 3학년이던
80년 5월, 고향 전남 진도와 뭍을 잇는 철선(鐵船)이 끊기면서 '광주에 큰일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어요.>라는 말을 했습니다. 19일에 광주로부터 온 시위대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김동문 기자님이 진도시민군 명찰을 단 시민군을 5월 19일 보셨다는 증언은 아주 중요한 증언입니다. 대댜수의 국민은 섬에 무슨 시민군이
있었겠느냐 의아해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허연식의 장모가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증언을 하였습니다. 허연식의 장모는 처음 7년간 그 묘지가 나주에
있었던 시민군 박병규의 모친인데, 그녀의 증언록 링크를 아래에 드리겠습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90&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B9%DA%BA%B4%B1%D4&sop=and
위 증언록 세째 단락에 <광주고속터미널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해남이나 어떤 섬으로 갈
학생들을 한데 모아 인도하는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게 유독 눈에 띄었다.>라는 증언이 있습니다. 서경원과 노금노 등 함평 운동권이 5월 19일
광주고속터미널에서 해남이나 어떤 섬으로 갈 시위대를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섬이란 진도입니다. 실제로 섬으로 갈 시민군을 모집한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해남으로 간 운동권은 21일 73대 차량의 시민군 대병력을 편성하여 박행삼 인솔 하에 광주 진입을 시도했다는
자료를 드린바 있습니다.
위 김양애의 증언록 중간에 보시면 한 단락이 한 문장으로 구성된 <병규의 묘자리 바로 위쪽에는 어느 섬에 산다는 과부의 아들이 죽어
있었다.>라는 증언이 있습니다. 김양애가 시민군 박병규의 묘를 나주군 금천면으로 이장(1987년 다시 망월동으로 이장)하기 직전 망월동에서 어느
섬에 산다는 과부의 아들 묘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해남 지역의 섬은 해남에서 서쪽 방향의 진도입니다. 이로서 진도시민군의 실체가 또 한번
확인되는 것입니다.
위의 허연식의 장모 김양애의 증언록 세째 단락에 <광주고속터미널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해남이나 어떤 섬으로 갈 학생들을 한데
모아 인도하는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게 유독 눈에 띄었다.>라는 증언이 있습니다. 서경원과 노금노 등 함평 운동권이 5월 19일 광주고속터미널에서
해남이나 어떤 섬으로 갈 시위대를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섬이란 진도입니다. 실제로 섬으로 갈 시민군을 모집한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해남으로 간 운동권은 21일 73대 차량의 시민군 대병력을 편성하여 박행삼 인솔 하에 광주 진입을 시도했다는 위 김양애의 증언록
중간에 보시면 한 단락이 한 문장으로 구성된 <병규의 묘자리 바로 위쪽에는 어느 섬에 산다는 과부의 아들이 죽어 있었다.>라는 증언이 있습니다.
김양애가 시민군 박병규의 묘를 나주군 금천면으로 이장(1987년 다시 망월동으로 이장)하기 직전 망월동에서 어느 섬에 산다는 과부의 아들 묘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해남 지역의 섬은 해남에서 서쪽 방향의 진도입니다. 이로서 진도시민군의 실체가 또 한번 확인되는 것입니다.
북한군 이챵룡이 5월 23일 보성에서 체포되었는데, 그 인근 지역 여수에서 온 시민군도 있었습니다. 5월 27일 도청시민군 사망자 15명
중 두 명의 신원이 먼저 확인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이 김양애의 아들 박병규이고, 다른 한 명이 여수 사람이었습니다. 27일 15구, 27일
사망자 중 2명 신원확인 - 박병규(20, 서울 은평구 수색동 30의 2, 동국대 전자계산학과 1년, 흉부관통상), 서호빈(20, 여수시 만흥동
97의 5). (월간조선, 1985. 7)
1991년 보상금 2억 수령후 월북한 윤기권의 모교 대동고등학교 은사가 5.18기념재단 이사장 윤광장인데, 윤광장의 동생으로서 당시 전국의
폭력시위를 총지휘하였던 윤한봉도 나주 예비군 무기 탈취 목격자였습니다. 그는 그의 자서전 운동화와 똥가방 58~59쪽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던 중 나는 광주에서 차량을 타고 내려온 시민들이 나주 경찰서의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 드디어 무장항쟁으로 발전하는구나." 서둘러 복면을 할 보자기를 산 후 시민군들의 차를 타기 위해 가던 나는....>
함평 운동권이 인솔한 무장폭도들이 나주군청으로 몰려갔으며, 진도시민군이 나주군청에서 김밥을 탈취한 사건에 대한 증언을 해주셨는데, 그 사실이
『正史 5·18』361쪽에도 기록되어 있어 제가 인용해 드립니다.
<나주군청은 이날 오후부터 시위대의 근거가 된다. 군청에 가면 먹을 것이 많다는 소문에 시위대들은 이곳을 집결지로 택해 군청 마당을 가득
메운다. 군청은 시위대에 주먹밥까지 제공한다. 당초 주먹밥은 나주경찰서에서 광주로 파견나간 경찰들의 식사용으로 요구해 노안동국교에서 헬기로
수송할 예정이었으나 헬기가 오지 않자 대신 시위대의 식사가 된 것이다.>
김동문 기자님과는 정반대 입장으로 나주예비군이었으면서 시민군이었던 자들이 있는데, 그 중 세 명의 이름이 이재권, 최성무, 박춘호입니다.
나주시민군 중 14명은 1981년 3월 특별가석방되었습니다, 『正史 5·18』 362쪽에 보면 실제로 김동문 기자 일행과 시민군 사이에 전투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기록이 있어 제가 아래 그대로 인용해 드립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해남· 강진 · 영암· 목포 등으로 갔던 시위차량이 나주를 거쳐 광주로 향하나 곳곳에서 매복 계엄군에 의해 사격을 받거나
전복을 당해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한다.>
참, 혹시 광주사태 당시에는 새마을과에 근무하였으며, 1995년 당시 나주시 공보담당관이었던 이영규씨를 아시는지요. 『正史 5·18』 361쪽에
이분의 아주 중요한 증언이 있어 제가 아래 그대로 인용해 드립니다.
<광주 직행 버스로 목포쪽에서 올라오는데 운전기사가 영산포에서 내리라고 했다. 택시를 타고 군청에 들어오니 각 면에서 계속 행정전화로 정보가
올라왔다. 남평파출서가 털렸다는 전화가 계속 걸려 오고 이어 산포·금천 등에서 연이어 무기 탈취 사실을 전해왔다. 상황을 보러 옥상에 올라가
보니 나주경찰서 직원들은 담을 넘어 도망가기에 바빳고 나주대교 쪽은 각양 각색의 시위차량이 줄지어 목포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북한의 1985년도 5.18 도서 "광주의 분노" 36쪽에 그 사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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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518cafe/Qx1z/1
에서 보시면 <라주군에서는 22일 봉기자들이 군 ≪경찰서≫와 ≪라주지서≫, ≪파출소≫들을 습격파괴하고 괴뢰군청을 점거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괴뢰군청은 나주군청으로 김동문 기자님 지인 이 준위님이 목격하신 대로 나주군청이 함평 운동권이 인솔하는 시민군에 점거당하였습니다.
그리고 36쪽에 "라주군에 진출한 폭동군중은 괴뢰경찰서 ≪산포지서≫, ≪로안지서≫ 등 5개의 괴뢰경찰서들을 습격하고 놈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모조리 빼앗아내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북한 자료가 놀랍도록 정확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영규씨 증언 아니면 알 수 없던 사실을
북한은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21일 총리실에도 이렇게만 보고되어 있습니다. <나주경찰서 무기 피탈 내용, 카빈 7백80, M1
2백35, 실탄 4만6천4백발, 38구경 12정, 45구경 16정. 군 트럭과 버스 30대를 동원, 30명씩 분승, 영광으로 무기탈취자 출동,>
북한에서 훨씬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주에서 온 무기탈취 시민군 중에 북한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시민군 인솔자 중에
함평 운동권이 있었는데, 함평 운동권이란 당시 남민전 점조직이었던 카톨릭농민회 회장 서경원과 총무 노금노 등을 말하는 것이며, 서경원은
간첩이었음이 1989년에 드러났습니다.
이영규님 증언 외에는 그 어느 남한 자료에도 산포지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황석영의 1985년 도서 "광주5월민중항쟁의 기록-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221쪽에서만 <...이들은 계속해서 영산포읍 영강동 지서에 진입하여 탄약 2상자 획득했다. 이들 시위대는 자신들이
획득한 무기로 완전무장한 다음 나주군 노아면, 산포면 등에서 시위하였으며, 이날 오후 5시 경에는 획득된 무기를 싣고 광주로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대중의 사조직으로 알려진 김봉수에 대한 기록인데요. 영암사람으로 국민학교 중퇴 학력으로 광주운동권이었던 김봉수 일행이
노아면과 산포면에서 시위하였나요?
김봉수 일행은 군용 레커차로 나주경찰서 무기고를 들이받아 파괴시킨 자들입니다. 황석영은 그들이 노아면과 산포면에서 시위하였다고만
기록했지만, 이영규님이 증언하는대로, 그리고 북한 5.18 도서에 기록된 대로 그들은 산포지서와 노안지서에서도 무기를 탈취하였던 것입니다.
김동문 기자님의 수기 "광주의 진실은"에 실린 내용들이 이렇듯 5.18측 자료와 북한도서로도 속속 사실로 확인되어지고 있습니다.
역사학도
http://www.study21.org/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