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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절에 그렇게...
6 학대의 기억은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다
권영심
어린 시절의 동무들과 인연이 끊긴 것이 오래이지만, 어쩌다 다시 연결되어 전화 통화라도 하고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
ㅅㅇ이도 그런 경우인데 서울에 살 때, 백화점에서 그녀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그런 난리가 없을 만큼 반가워 했다.
완전 귀부인으로 변모한 그녀에게서, 어릴 때의 ㅅㅇ이를 찾기는 불가능했다. 그녀와 나만이 아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뜨아했을 것이다. 그만큼 ㅅㅇ이는 내 기억 속의 아픈 추 억이었다.
그녀는 강남에서 큰 식당을 두 개 운영하고 있었고, 아이들도 셋이나 되는데 둘은 외국 유학 중이라고 했다. 남편과는 이혼했고 혼자 살지만, 정말 유복하고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남항동시장의 정지가시나가 강남 사모님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운전하는 고급 차를 타고 이촌동에 있는 집에 갔는데, 살림 도우미까지 있는 멋있는 빌라였다. 나는 울면서 그녀의 성공을 기뻐했고, 정말이지 아버지에게 그녀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녀는 통곡했고, 사진을 하나 보여 주었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울 아버지 산소에서 그녀가 찍은 사진이었는데, 오래 전에 그녀는 엄마를 찾아가서 아버지 산소를 알아내어 가끔 차를 몰고 가서 실컷 울고 온다고 했다.
친아버지는 장례식은 물론, 살아 생전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마음 속의 증오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아직도 타오르고 있어, 죽어서도 용서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 누구도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이해해야만 했다.
ㅅㅇ의 집은 우리집과 같은 옷가게였고 어른부터 아이까지 무척 친했다. 큰 딸인 ㅅㅇ과 내가 아주 친한 동무였기에, 아버지는 그녀를 남달리 예뻐했다. 엄마끼리도 친했고 ㅅㅇ 의 아버지는 울아버지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우리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즈음에,ㅅㅇ의 엄마가 교통 사고로 죽고 세 딸은 불시에 엄마가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내의 사고 후 그는 꽤 많은 합의금을 받았고 공공연하게 여러곳에서 중매가 들어왔다. 웃기지만 얘가 셋이나 있는 홀아비가 가게가 있고 집이 있으면 처녀장가 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낼로 인자 모른데이. 울아부지는 바로 새엄마를 데꼬 올기라. 새엄마가 들어오면 낼로 정지가시나로 만들낀데, 우야믄 좋노?"
엄마가 죽은 슬픔보다도 아버지가 재혼을 하면 어떡하느냐고 ㅅㅇ은 두려워 했고 그것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일 년이 가기도 전에 ㅅㅇ의 아버지는 친할머니의 주선으로 재혼을 했고, 그새엄마는 팥쥐엄마와 백설공주의 왕비를 합쳐 놓은 만큼이나 질이 나쁜 여자였다.
정말 나쁜 여자라고 아버지가 여러번 ㅅㅇ의 아버지와 다툴 정도였으니, 어린 내 판단만은 아니었다. ㅅㅇ은 중학교 이 학년을 진급하지 못 하고 학교를 퇴학 당했는데, 무단 결석을 되풀이 한 때문이었다.
새엄마는 ㅅㅇ이 학교를 가기 싫어 한다고 했고 그녀의 배가 불러오자, ㅅㅇ은 완전히 부엌데기가 되었다. 아버지는 ㅅㅇ의 아버지를 불러 몇 번, 아이를 학교는 보내라고 말했으나 그 남자의 대답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어차피 딸인데 중학교 안 가면 어떠냐, 맏이이니 나머지 동생들을 위해 혼자 좀 참고 고생하면 집안이 다 편안하니 형님은 참견 하지 마시라고 말했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 딸 하나 쯤은 아무래도 된다는 말이었다.
새엄마는 아들을 낳았고 그 때부터 그 여자는 집안을 완전히 휘어잡은듯 했다. 가학 행위는 할수록 그 도가 높아진다고 했는데,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집안 일을 다 하고 아이까지 등에서 떼놓지 못 하는 ㅅㅇ을, 그 나쁜 여자는 무던히도 괴롭혔다.
걸핏하면 머리채를 쥐고 조리돌림을 했고, 손에 쥐어지는 아무것으로나 때리는 것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너무 심한 짓거리를 보고 엄마와 아버지가 말릴 때면, 눈을 얼마나 무섭게 치뜨면서 삿대질까지 하고 덤벼 들었다. 그런데도 ㅅㅇ의 아버지는 일절 참견하지 않아, 시장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했다.
그 시절에 새엄마의 구박과 학대는 일상적인 것이어서 웬만한 것은 모른체 하기 마련이었는데, 그 여자의 행동은 정말 인간의 짓이 아니었다. 언젠가 ㅅㅇ에게 뜨거운 물을 끼얹어 허리 아래 로 화상을 입었는데, 그것을 치료해준 사람은 우리 아버지였다.
나는 울기만 했고, 병실에 누워 있는 ㅅㅇ에게 아버지는 집을 나가라고 했다. 용산에 아버지의 친구가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라고, 보내 주겠다고 했는데 ㅅㅇ은 고개를 저었다.
둘 째가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자기가 집을 나가면 그 둘째 동생 이 자기 신세가 되기 때문에 안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ㅅㅇ의 손을 꼭 쥐면서 기특하다고, 그 마음을 잃지 않으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고 위로해 주었다. 며칠 병원에 있지도 못하고 강제 퇴원을 한 것은 부모 때문이었다. 별거 아닌 것으로 병원에 자빠져 있다고 그 여자가 난리를 쳐서,ㅅㅇ은 물집이 터진 몸으로 퇴원했다. 밤마다 우리 가게로 와서 아버지가 연고를 발라 주고 밥을 먹게 했다.
"반드시 벌을 받을 거이야, 반드시..."
탄식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둘째 동생 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으로 일하러 간 얼마 뒤, ㅅㅇ은 집을 나갔고 그 가출을 도운 것은 아버지였다.
ㅅㅇ가 어디로 갔는지 아버지는 내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어느 곳에서 무사히 잘 지낸다고 알려 주었다. 둘째는 돈을 벌어 왔기에 구박하지 않았고,셋 째가 힘들었지만 ㅅㅇ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내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아버지는 함구했고 그렇게 잊혀져 갔다. 둘째와 셋째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집을 나갔고 나중에 알게 된 것은 ㅅㅇ이 데려간 것이었다. 그 후 수 십 년이 지나 서울에서 ㅅㅇ을 만났고, 나는 궁금했던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두 동생들도 같은 서울에서 너무나 잘살고 있고, 몇 년 후엔 땅을 사 놓은 지방에 큰 집을 지어 함께 살거라고 했다. 새엄마와 이복 동생들이 숨 쉬고 있는 부산에는 결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악무는 ㅅㅇ의 심정을 나는 이해한다.
그녀의 지난한 삶의 이야기는 지금도 가끔 새벽마다 이어지고 있지만 나는 언제든지 들어 준다. 그녀의 이야기속에 언제나 등장하는 내 아버지의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대받은 기억의 생생함을 어제 일인듯 기억하고 살아가는 ㅅㅇ 의 고통을 덜해 줄 방법이 없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