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부활의 진정한 의미/허영엽 신부
내가 대신학교 4학년 때 아버지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학기말 시험기간 중 어느 날 아침식사 후 당시 1학년이던 동생과 함께 학장 신부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버님이 그동안 편찮으셨나? 조금 전에 선종하셨네.” 그 순간 나의 두 발이 땅으로 푹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태연한 척하며 동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짧은 순간에도 아버지가 무척 아끼셨던 동생이 너무 충격을 받으면 안 된다고 걱정을 했습니다.
나는 갑자기 맞이한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을 마치고도 한동안 아버지와 자주 함께 갔던 장소를 찾곤 했었습니다. 대축일이면 고해성사를 보러 갔던 명동성당과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던 극장들, 처음으로 소설책을 사주셨던 청계천의 헌책방,자주 들렀던 빵집, 늘 볼거리가 많았던 충무로 골목을 갔습니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앉았던 장충단 공원의 수표교 근처의 벤치에서 종일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산소보다 추억이 서려 있는 장소에 가면 아버지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돌아오던 길에 신당동성당 입구에 새겨진 성경 말씀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그 말씀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아버지가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디를 그렇게 헤매고 다니니? 난 늘 네 곁에 있는데.” 나는 그날 성당에 앉아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부터 제 마음은 평화로워졌습니다. 아버지는 부활하셔서 늘 살아계심을 느낍니다. 나의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게 한 것은 바로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부활의 믿음을 나에게 유산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부활이신 주님을 믿고 살면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마치 죽었던 사람이 다시 소생하여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인 하느님의 영광 속에 들어 높여짐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을 죽음을 대하듯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충실한 사람을 절대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인간의 눈에는 비록 실패로보일지라도 결국에는 불의와 악을 진리와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희망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주님의 부활을 한껏 기뻐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 희망을 갖고 새롭게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것입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마산]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안명옥 주교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새로운 생명으로 넘쳐흐르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 신앙공동체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베푸시는 평화의 인사를 기원합니다. 지난 사순시기 동안 우리들은 금식과 재계, 기도와 자선을 실천하고 회개와 보속의 삶을 통해 주님의 부활을 기다려 왔습니다. 인내하며 준비하고 기다려온 사순시기가 있었기에 주님의 부활 축제가 가져다주는 기쁨 또한 더없이 크기만 합니다.
빈 무덤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시어 무덤에 묻히신 주님께서는 끝내 부활하셨습니다.“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요한 20,2) 라는 보고에서 주님께서는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무덤은 죽은 자만이 묻히는 곳으로 유한한 것의 종착역이며 오직 소멸만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음을, 즉 죽음의 지배를 받는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 영원한 삶으로 건너가셨음을 의미합니다. 유한에서 무한으로, 속박에서 해방으로 건너가신 것입니다. 이는 곧 새로운 삶의 방식, 즉 부활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관문, 즉 죽음을 피해 가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죽음 중에서도 가장 비참하� 수치스러운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지난 사순시기 동안 우리들은 여느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음식과 평소 즐기던 기호품들을 절제하였고,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가 단지 이웃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근거를 발견하려고 고뇌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고,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고통과 아픔을 선택한 이웃들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안아주려고 애썼고,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든 기울이지 않든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려고 노력했고, 세상의 유행과 물결에 휩싸이지 않고 흔들림 없이 하느님만을 붙들고 씨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대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깊은 통찰을 얻어,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회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삶은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와 다짐이기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시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셨듯이 우리 역시 지난 사순시기 동안 기꺼이 단식과 희생, 금육 그리고 기도와 보속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비록 주님처럼 물리적인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살아가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멀리하고 평소 즐기던 것들을 놓음으로써 죽음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지나간 과거의 삶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우리도 부활의 삶, 즉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삶 - 탐욕에서 자유로운 삶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삶은 이 세상의 것에 매여 사는 삶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넘어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입니다.“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새로운 삶은 여러 가지 모습이 있겠지만, 저는 구체적으로 탐욕에서 자유로운 삶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특히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곧 우상 숭배입니다.”(콜로 3,5 참조)
지난해 11월 시작하여 수개월동안 전국을 휩쓸었던 구제역은 인간의 탐욕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매우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지금까지 살 처분된 엄청난 수의 가축을 비롯하여, 거기에 따른 막대한 비용, 전국의 매몰지에서 흘러나오는 침출수로 인한 지하수와 토양의 오염을 걱정해야 하는 이번 구제역 파동의 근원적인 원인은 인간의 탐욕입니다. 육고기가 주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소비량이 주식인 쌀 소비량의 절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도한 육류소비는 필연적으로 가축의 대량사육, 즉 자연과 격리된 공장식·기업형 축산과 섭리를 무시한 인위적인 사육을 초래하고, 엄청나게 늘어난 가축을 먹이기 위해 막대한 양의 사료와 물을 소비하게 됩니다. 또한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대량의 항생제와 화학약품들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곧 환경을 오염시키고 나아가 빈곤과 기아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또한 구제역은 관계의 단절을 초래합니다. 구제역으로 인해 서로 만나지 말아야 하고, 각종 모임도 연기되거나 취소됩니다. 이처럼 관계의 단절은 나눔과 소통을 단절시킵니다. 생명의 탄생을 방해합니다. 관계는 결코 소유의 개념이 아닙니다. 서로 존중하고 생명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축을 소유하여 사육하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오만과 독선이 무자비한 살 처분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번 구제역 파동으로 가축을 포함한 자연과 인간 모두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더 큰 문제는 구제역이 이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제역은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2000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먹을거리가 교역상품이 되어버린 2000년 이후부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구제역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지금의 무절제한 육류 소비생활을 바꾸는 것입니다.
부활의 전제 - 죽음의 예행연습
주지의 사실입니다만 부활은 언제나 죽음을 전제합니다. 만약 주님께서 죽음을 거부하시거나 피해가셨다면 부활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삶의 방식의 죽음(포기)없이는 결코 새로운 삶도 없습니다. 옛 삶이 주는 안락함과 달콤함 등 수없이 많은 유혹을 포기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삶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의 삶, 곧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은 옛 삶의 방식으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새로운 가치들을 선사해 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곧 부활의 삶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전제는 탐욕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탐욕의 포기는 우리의 매일의 삶이 죽음의 예행연습임을 확인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마산교구의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만물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약동하는 계절에 우리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주님 부활의 은총을 한껏 누리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분께서 내리시는 평화의 복음을 선물로 받으시고 부활을 증언하는 삶을 다짐함으로서 언제나 행복하게 살아가시도록 기원 드립니다. 여러분들을 마산교구의 교우, 수도자, 성직자로 선물로 보내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부산] 요한 20, 1-9. 사도 10, 34. 37-43/ 서공석 신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제자들이 믿기 시작한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절망하여 각자 자기 고향으로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제자들이 다시 모여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분을 살아 계시다고 선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많은 생명들 같이, 예수님도 죽음으로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어둡다고 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마음이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려고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12,46).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살아계시다고 또 그분이 우리의 빛이라고 아직 아무도 믿지 않았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갔다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무덤의 돌이 이미 치워진 것을 보고, 예수님이 무덤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직감하였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고,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을 향해 달리는 데에는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빠릅니다. 그는 무덤에 먼저 도착하였지만, 베드로를 기다려 줍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고, 뒤따라 들어간 그 제자는 보고 즉시 믿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기 위해 그분이 아끼셨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가서 그 사실을 확인하게 합니다. 두 제자가 함께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먼저 믿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였습니다. 복음서들이 빈 무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 죽음 전까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빈 무덤만 남겼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그분의 죽음에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발생하였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지상의 삶으로 환생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시편의 말씀대로, 그분을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23,4)로 보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이 사흘이라고 말할 때는 72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에, 예수님을 당신 안에 결정적으로 살아 있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분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고 사셨기에,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고...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령, 곧 그분의 힘을 주셔서 예수님이 좋은 일, 살리는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사셨습니다. 권위주의로 경직된 유대교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절대적인 것은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선하고,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라, 예수님은 그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듯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말하듯이 그분은 두루 다니며 선한 일, 곧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예수님이 살아서 행하신 하느님의 선한 일을 실천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자유롭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자유롭게 살라고 주신 생명입니다. 율법에 얽매이고, 성전의 권위에 순종하며 살라는 우리의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에 얽매이고, 우리의 명예욕과 허례허식에 짓눌려 삽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과 능력을 받아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는, 오늘 베드로의 말씀은 사람을 짓누르는 것에서 사람들을 해방하셨다는 뜻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베드로가 그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빛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확인된 사실이지만, 그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신앙인의 길을 배우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사람들 안에 그분의 삶이 관찰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류역사 안에 그런 삶이 계속 발생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성전으로 요약되는 그 시대 유대교의 관행에 얽매이지도 않고,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순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고, 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이라고 그 시대 사람들이 말하던 병자들을 그 병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부활은 우리도 예수님을 배워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라고 초대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배웁니다. 예수님이 자유롭게 하신
실천들을 배웁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우리의 삶이 과제를 가졌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높여 허세를 부리거나, 남을 짓누르면서 죽음을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선한 실천, 고치고 살리는 실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실천 안에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읽어냅니다. 그런 신앙인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십니다. 신앙인은 그런 실천으로 하느님이 선하고 살리신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실천 안에 그분이 살아 계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
[의정부]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16,22)/안창길 신부
찬미 예수님!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님의 두 제자는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 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미 그들과 함께 계셨지만 아직 눈이 어두워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믿음의 눈을 뜰 때 오늘 제1독서처럼 기쁨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 없이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살 때, 그저 텅 빈 무덤만을 보며 탄식할 뿐입니다. 반면에 믿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삶이 변화됩니다. 부활은 순간순간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멍에에서 자유로, 죄에서 화해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고통에서 감사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삶을 대하는 마음부터 새롭게 변화됩니다. 그리고 그 완성으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제 머리 속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16,22)”라는 말씀처럼 크게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그 기쁨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항상 희망을 잃지 말고 힘차게 살아가시길 빕니다.
[인천] 기쁜 부활 축일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장기용 신부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죽음을 넘어 새로운 생명이라는 부활의 기쁨을 선물로 주신 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사순시기부터 지금까지의 그릇된 삶에 대한 회개의 삶을 강조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자신의 삶의 희생과 절제를 통해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자선을 베풀 것을 강조하였고, 사랑이 없는 율법의 실천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사순시기에 우리의 참된 금육과 단식이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자신의 회개와 사랑이 담긴 희생과 절제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이 이웃에게 베풀어 지는 것이 율법의 참된 단식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본당에서도 모든 교우분들께 그 의미를 설명하고 내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한 주에 한끼 식사를 사순1주간부터 부활대축일 주일까지 봉헌하여 본당의 어려운 이웃분들께 한 주일의 부식을 전해드리자고 하였습니다.
결과가 궁금하시죠? 결과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결과는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서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동참한 분들이 더 많았을까요? 아닌 분들이 더 많았을까요? 그 또한 지금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7주에 걸쳐 어려운 이웃분들을 위해서 관심을 갖고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사순시기에 회개와 희생과 절제를 통해 이웃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부활대축일을 끝으로 그 사랑을 멈추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입니다.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옛 삶을 버리고 회개를 통해서 새 생명으로 나아가는 그 기쁨이 부활이지 않습니까? 이 말대로라면 우리는 옛 삶을 버리고 회개의 삶을 통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이고 회개를 통해 새 생명을 얻어 이젠 새로운 삶을 살게되었다면 그 새로운 삶을 끝없이 살아가야겠지요! 그것이 진정한 부활을 체험한 사람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부활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삶이 아니라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부활의 참된 체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나에게 참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씁쓸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우여러분 부활 때마다 서로가 웃으며 나누는 인사말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다”라는 인사가 그 의미도 깨닫지 못한 채 그냥 입으로만 나오는 어색한 인사말이 되지 않도록 내가 결심한 새로운 삶을 끝없이 살아 마지막 날에 진정한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부산] 우리의 삶에 동행하시는 주님/황철수 주교
부활하신 주님께서 모든 분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축복해주시기를 빕니다.
부활 신앙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다루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부활을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http://blog.chosun.com/drssirem/4305844 참조)
이러한 결과를 보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심에 대해서 실망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응답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당신은 부활을 믿느냐’ 하는 질문보다, ‘부활은 이러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당신은 이런 부활을 믿느냐’ 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달라질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말로써 표현되는 그 깊은 의미는 단답형으로 대답되어지는 단순한 뜻을 훨씬 넘어서는 다층적이고 중첩적인 이해를 요구합니다.
이미 복음서의 부활의 증언이 이러한 의미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면서 먼 길을 같이 동행했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증언’(루카 24, 16),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안만으로 이해한 사람은 유령으로밖에 보지 못했다는 증언’(루카 24, 37). 이것은 부활에 대한 신앙이 일회적인 발현 사건으로 확립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살아있지만 실상은 죽은 삶’을 자각하고, ‘죽는 것 같으나 진정 살아있는 삶’에 놀라고 감동하는 과정을 통해서 체험되고 깨달아지는 생명의 길입니다.
부활의 깊은 의미를 깨달은 주님의 제자들이 전해준 복음서는 부활에 관련한 부분만이 아니라, 모든 곳이 부활의 빛 속에서 말해지는 생명의 소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한 복음서는 복음서를 쓴 목적에서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21, 31) 라고 밝힙니다.
우리 모두는 생명을 추구하지만 ‘썩어 없어질 생명, 영원과 단절된 시간속의 생명’에 머물 위험이 많습니다. 주님을 통한 ‘영원으로 확장된 참 생명의 길’로 복음서는 우리를 간곡히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 축일을 지내며 주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의미도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 길’을 고백하고 우리의 삶에 새롭게 새긴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 길은 거창한 어떤 일들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에서 그 길은 시작됩니다. 온갖 욕망과 애증이 교차하는 세상살이가 이 길의 소중함을 무디게 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죽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에 온전히 성공하여 참되게 살아계신 주님께서 모든 분들의 삶에 동행하시기를 빕니다.
[군종] 2011년 부활 메시지/ 유수일 주교
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것을 기쁨 속에 경축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스승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참혹하게 처형되시던 모습을 지켜보았던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요안나 그리고 살로메 등 몇몇 여인들은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을 용감하게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드림으로써 사랑과 존경의 마지막 표현을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만이 아니고 죽으신 후에도 변함없이 예수님께 충실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무덤에서 엄청난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있어야 할 무덤은 비어 있었고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라는 천사의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너무도 놀라운 일이라서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잠시 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심으로써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만나는 영광을 입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의 중심으로 보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1코린 15,3-4)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아직도 의심하거나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고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들에 대해 말합니다.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5-8) 부활하여 나타나신 예수님을 목격한 이들 가운데서 상당수가 바오로 사도가 이 편지를 쓰는 당시에도 생존해 있었음을 증언해줍니다. 이 증언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발현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실 및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여러 번 발현하신 사실과 더불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한 같은 코린토전서 15장에서 부활신앙의 중요성을 이렇게 역설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 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덧없는 것이 되고, 누구보다도 이 신앙에 의지하여 독신정결, 가난 그리고 절대 순명의 삶을 택해 일생을 살아가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는 한없는 좌절과 절망감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에,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이 삶이 요구하는 많고도 큰 포기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성소를 항구히 그리고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옛 구약의 백성들이 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 떨어지는 유혹을 받은 것처럼, 오늘에도 우리의 순수한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유혹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언동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번 부활시기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게 하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은혜, 곧 새 생명을 얻는 은혜를 갖다 주었습니다. 이런 의미 때문에 교회는 예부터 부활 대축일 때 세례 예식을 많이 거행해 왔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받는 세례의 근원을 그리스도의 부활에다 두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여기서 새로운 삶이란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영혼을 의미합니다. 본능과 내 중심과 이기심에 의해 지배되던 과거의 내가 죽어버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거룩한 영적인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각자에게 이토록 깊은 내적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을 맞는 우리는 “세례 받은 나는 과연 변화되었는가?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가?”라고 자신에게 심각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금년에 우리 교구는 군선교 6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뜻 깊은 해를 맞이하면서 금년 한 해를 특별히 “감사와 정화의 해”로 삼고, 이 표어를 우리 각자가 실천에 옮기려 애쓰고 있습니다. 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이들이 보이는 삶의 특징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감사의 자세가 증가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인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일곱 마귀에게 시달리는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새 인생을 살게 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 대한 깊고도 변함없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고, 이 감사의 마음이 그로 하여금 어떤 위험도 감수하고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게 한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 감사의 자세는 그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만나게 하는 큰 축복을 누리게 해주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베푸는 사랑이 사랑의 보답을 받게 해 주는 것처럼, 감사의 자세 역시 이렇듯 큰 축복의 보답을 받게 해줍니다. 저는 사목교서에서 “감사의 삶은 예배의 근원이자, 신앙, 희망, 사랑의 세 중심 덕들이 맺어주는 가장 큰 열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활 대축일을 맞으면서 무엇보다도 마리아 막달레나가 보여준 감사의 자세를 본받으면서 언제나 어떤 처지에서나 감사하는 삶을 추구하도록 합시다.(1테살 5,18 참조) 저는 개인적으로 국토방위를 위해 헌신하는 모든 군인들에게 늘 감사드리고, 전사한 우리 군인들, 특히 6.25사변, 두 차례의 서해 교전, 그리고 작년에 있은 천암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에서 전사한 우리 군인들의 고귀한 희생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우리 군종교구의 가족 모두는 그 누구보다 국토방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지닌 채 이 부활절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다 준 “새 생명”의 은혜는 또한 “정화의 삶”을 향하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주시어, 이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삶을 기쁘게 또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욕망들은 다양합니다. 욕망들이 위대한 선물인 만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행복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불행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욕망들이 복음의 정신에 따라 사용되어야지, 잘못 사용되면 타락인 욕심으로 변질되어 여러 탐욕들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저자의 기도처럼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주소서.”(시편 51,12)라고 마음의 정화를 위해 기도드리도록 합시다. “마음의 정화”가 바로 “욕망의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정화는 넓은 변화를 포함하기에 욕망들을 정화하는 기능만이 아니고 두 마음이 빚어내는 “위선의 자세”까지 정화하는 기능을 지닙니다. “정화의 삶”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참 행복”(마태 5,3-11)의 하나로서 말씀하신 축복, 곧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는 축복을 누리게 해 줄 것입니다. 정화의 길을 충실히 걷기 위해 참회와 보속의 삶을 더욱 열심히 추구하도록 합시다.
3.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한없는 은혜들을 묵상하고 또 그 은혜들을 누리면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도록 합시다. 특별히 “부활찬송”의 다음 구절을 마음을 다해 바치도록 합시다. “오, 오묘하도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오, 헤아릴 길 없는 주님 사랑! 종을 구원하시려 아들을 넘겨주신 사랑!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것을 기쁨 속에 경축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스승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참혹하게 처형되시던 모습을 지켜보았던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요안나 그리고 살로메 등 몇몇 여인들은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을 용감하게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드림으로써 사랑과 존경의 마지막 표현을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만이 아니고 죽으신 후에도 변함없이 예수님께 충실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무덤에서 엄청난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있어야 할 무덤은 비어 있었고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라는 천사의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너무도 놀라운 일이라서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잠시 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심으로써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만나는 영광을 입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의 중심으로 보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1코린 15,3-4)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아직도 의심하거나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고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들에 대해 말합니다.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5-8) 부활하여 나타나신 예수님을 목격한 이들 가운데서 상당수가 바오로 사도가 이 편지를 쓰는 당시에도 생존해 있었음을 증언해줍니다. 이 증언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발현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실 및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여러 번 발현하신 사실과 더불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한 같은 코린토전서 15장에서 부활신앙의 중요성을 이렇게 역설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 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덧없는 것이 되고, 누구보다도 이 신앙에 의지하여 독신정결, 가난 그리고 절대 순명의 삶을 택해 일생을 살아가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는 한없는 좌절과 절망감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에,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이 삶이 요구하는 많고도 큰 포기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성소를 항구히 그리고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옛 구약의 백성들이 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 떨어지는 유혹을 받은 것처럼, 오늘에도 우리의 순수한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유혹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언동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번 부활시기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게 하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은혜, 곧 새 생명을 얻는 은혜를 갖다 주었습니다. 이런 의미 때문에 교회는 예부터 부활 대축일 때 세례 예식을 많이 거행해 왔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받는 세례의 근원을 그리스도의 부활에다 두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여기서 새로운 삶이란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영혼을 의미합니다. 본능과 내 중심과 이기심에 의해 지배되던 과거의 내가 죽어버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거룩한 영적인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각자에게 이토록 깊은 내적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을 맞는 우리는 “세례 받은 나는 과연 변화되었는가?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가?”라고 자신에게 심각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금년에 우리 교구는 군선교 6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뜻 깊은 해를 맞이하면서 금년 한 해를 특별히 “감사와 정화의 해”로 삼고, 이 표어를 우리 각자가 실천에 옮기려 애쓰고 있습니다. 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이들이 보이는 삶의 특징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감사의 자세가 증가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인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일곱 마귀에게 시달리는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새 인생을 살게 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 대한 깊고도 변함없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고, 이 감사의 마음이 그로 하여금 어떤 위험도 감수하고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게 한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 감사의 자세는 그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만나게 하는 큰 축복을 누리게 해주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베푸는 사랑이 사랑의 보답을 받게 해 주는 것처럼, 감사의 자세 역시 이렇듯 큰 축복의 보답을 받게 해줍니다. 저는 사목교서에서 “감사의 삶은 예배의 근원이자, 신앙, 희망, 사랑의 세 중심 덕들이 맺어주는 가장 큰 열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활 대축일을 맞으면서 무엇보다도 마리아 막달레나가 보여준 감사의 자세를 본받으면서 언제나 어떤 처지에서나 감사하는 삶을 추구하도록 합시다.(1테살 5,18 참조) 저는 개인적으로 국토방위를 위해 헌신하는 모든 군인들에게 늘 감사드리고, 전사한 우리 군인들, 특히 6.25사변, 두 차례의 서해 교전, 그리고 작년에 있은 천암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에서 전사한 우리 군인들의 고귀한 희생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우리 군종교구의 가족 모두는 그 누구보다 국토방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지닌 채 이 부활절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다 준 “새 생명”의 은혜는 또한 “정화의 삶”을 향하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주시어, 이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삶을 기쁘게 또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욕망들은 다양합니다. 욕망들이 위대한 선물인 만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행복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불행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욕망들이 복음의 정신에 따라 사용되어야지, 잘못 사용되면 타락인 욕심으로 변질되어 여러 탐욕들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저자의 기도처럼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주소서.”(시편 51,12)라고 마음의 정화를 위해 기도드리도록 합시다. “마음의 정화”가 바로 “욕망의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정화는 넓은 변화를 포함하기에 욕망들을 정화하는 기능만이 아니고 두 마음이 빚어내는 “위선의 자세”까지 정화하는 기능을 지닙니다. “정화의 삶”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참 행복”(마태 5,3-11)의 하나로서 말씀하신 축복, 곧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는 축복을 누리게 해 줄 것입니다. 정화의 길을 충실히 걷기 위해 참회와 보속의 삶을 더욱 열심히 추구하도록 합시다.
3.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한없는 은혜들을 묵상하고 또 그 은혜들을 누리면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도록 합시다. 특별히 “부활찬송”의 다음 구절을 마음을 다해 바치도록 합시다. “오, 오묘하도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오, 헤아릴 길 없는 주님 사랑! 종을 구원하시려 아들을 넘겨주신 사랑!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춘천] 부활은 계획한 거짓말이 아니었으나 부활은 계획된 것이었습니다/김재복 신부
오늘 복음은 과거 간음한 여인이었으나 부활의 증거자가 된 마리아 막달레나 한 사람만을 전합니다. 법정 증언의 효력이 있으려면 두 명이어야 하고, 권위있는 사람이 전해도 믿을까 말까한데 왜 요한복음은 그녀만을 전하는 것일까요?
부활을 전하는 복음은 ①무덤 방문자 ②무덤에서 만난사람 ③전달내용 ④제자들의 무덤 방문여부 ⑤사건순서 등에서 차이점을 보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복음은 제자들이 “세 여자” 혹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헛소리로 여기고 (루가 24,11)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것을 일관되게 전합니다(마르 16,11). 그래서 나중에 발현하신 예수님께 불신과 완고한 마음에 대해 꾸지람을 들었다고 합니다(마르16,14).
이런 복음의 차이점과 제자들의 불신은 오히려 부활이 세 여자와 제자들이 짜고 계획한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만일 계획된 거짓말이라면 힘없고 세상이 믿지 않을 여인들이나 간음한 마리아 막달레나와 했겠으며, 설사 그랬더라도 계획된 거짓말이라면 차이점이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내용에 일관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적 신분이 낮은 여자들, 그중에서도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비천한 마리아 막달레나를 선택하신 것은 하느님의 탁월한 선택이며 계획이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처지와 행보는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냈다”는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계책도 깨뜨릴 수 있는(마태 28,11-15)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힘 없는 여자와 부활을 믿지 않은 제자들이 무덤에서 주님을 꺼낼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빨리 전해지라고 부활 소식을 전하는 첫 선포자로 수다스런 여자를 선택하셨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유머처럼 ‘빨리’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되게’ 전하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지식이나 영향력있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시는 이를 전달자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보다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빨리 달렸다는 말씀도 묵상하게 됩니다.
부활은 계획한 거짓말이 아니었으나 부활은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참된 부활 선포’를 위해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모든 이들에게 드러내셨다. 주님께서는 큰 자에게는 큰 존재로 드러내셨다. 주님께서는 작은 자에게는 작은 존재로 드러내셨다. 주님께서는 천사들에게는 천사로 드러내셨고, 인간에게는 인간으로 드러내셨다.”
부활을 축하합니다! 부활을 전합시다!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