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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22일 가해 대림 제4주일
제1독서 : 이사 7,10-14
제2독서 : 로마 1,1-7
복 음 : 마태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몇 년 전, 어느 교육에 참여했을 때의 일입니다.
일반인들이 많이 참여하는 교육에 저 역시 참석했었습니다.
가톨릭 안에서도 이 교육 내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침 일찍 교육장에 들어갔을 때 어색함이 가득했습니다.
저와 같은 종교인은 하나도 없고, 다들 회사나 정부 기관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모두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고 의자에 무표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고 또 낯선 공간에서의 교육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교육장의 분위기는 냉랭했고, 이런 곳에서 이틀 동안 함께 교육받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기도 했습니다.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 순간, 어떤 한 분이 교육장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분 역시 교육생이었지요. 그런데 이분이 오자마자 어색한 공간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오자마자 사람들에게 명함을 나눠주며 인사를 했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공간의 분위기를 바꿔 놓은 것입니다.
이분 덕분에 서로 인사도 나누게 되었고, 강의 전에 교육생 모두는 낯섦의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교육시간이 되어 나타난 강사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번 기수는 시작부터 분위기가 다른데요? 가장 뛰어난 모범 기수가 되겠어요.”
한 사람으로 인해 공간 자체가 바뀔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 분위기가 왜 이래?’라는 말은 해도, 자신이 그렇게 바꿔 놓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나를 통해서도 분위기는 충분히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있습니까?
가정이라는 공간, 일터의 공간, 신앙의 공간 등을 기쁨과 행복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우리 각자의 역할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라는 공간을 우리가 잘 꾸려나가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아닌 남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남의 역할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나의 역할이 있는데도 말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예수님 잉태 소식,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의 메시지. 모두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령의 활동, 즉 하느님의 활동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과 예측을 모두 뛰어넘는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각자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역할, 요셉의 역할, 천사의 역할.
그들 각자가 자기 자리에 충실했기에 가능한 일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역할은 지금의 내게도 주어집니다.
내 역할에 얼마나 충실했나요?
은총의 사닥다리 -탄생 예고에 대한 기도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은 대림 4주일입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 사가에 의한 예수님 탄생의 경위에 대해 들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정통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신 분이지요.
유다 전통 안에서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믿었고,
구약에서의 모든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다고 보며
그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 그가 복음서를 쓰면서 염두에 둔 가장 중요한 전제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들었듯이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루가 복음에 의한 예수님의 탄생 예고 대목을 묵상해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루가 복음이 더 깊이 마음에 와 닿고,
묵상이나 관상 안에서 머물기가 더 쉽고, 머룰 때의 느낌이 좋습니다.
탄생 예고를 들으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열린 마음을 지니셨던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도록 청하며 오늘 복음인 루가 1, 26-38로 함께 관상하기로 합시다.
성 이냐시오는 관상할 때, 먼저 장면을 그려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길잡이에서 '장소를 구성'한다고 표현하지요.
먼저 우리 함께 가만히 눈을 감고 성모님 마리아가 사시던 집을 그려봐요.
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하였을 때 마리아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를
상상해보는 것도 이 대목에 대한 기도의 좋은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 전 저에게 피정 지도해 주셨던 신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셔서 함께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수녀님이 기도한 것을 나누는 면담시간에 말씀하시기를
당신은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상상하면서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아직 로사리오 기도가 없었으니까 실제로 마리아가 로사리오를 바치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상상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요. 그리고 어떤 것도 틀린 것이 아니고요.
그 수녀님의 기도 안에서 마리아가 기도드리고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났다는 것이
아주 좋은 느낌을 줄 수 있었음에 공감하면서 저는 행복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요 속에서 천사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어봐요.
“마리아.”
천사는 놀라지 않게 하려는 아주 다정한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고 그 맑게 울리는 소리를 마리아가 듣습니다.
우리도 기도 안에서 우리의 이름을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서는 우리에게 들려주지요.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마리아가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않고 경건하게 지녔는지를 느껴봅니다.
깊은 밤에 마리아의 방에 빛이 비치어 와서 방안을 감돌고 있는 분위기를 그려보면서
제게는 천사뿐만 아니라 거기에 성령이 함께 계시다는 느낌을 지니게 됩니다.
어제 복음에서 들었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 임마누엘이시지요.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 그분이 마리아, 마리아의 마음을 휘감고 계십니다.
한편 천사는 누구인가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메신저이지요.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대사로서 마리아에게 왔습니다.
마리아가 천사를 보고 두려움을 지니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로 하느님을 대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천사는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사실 천사가 말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천사와 함께 성령이 거기 함께 계시면서
아주 따뜻하고 안온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천사가 자기에게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평범한 시골 아가씨,
마리아의 당황한 모습을 그려 보면서 어떤 느낌이 오는지요?
그 느낌 안에 오래 머물러 보십시오.
마리아는 분명히 놀랍고 두려운 마음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평화를 느꼈을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지요.
마리아의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마리아는 당황했지만 다만 무서워 떨지 않고 천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할 여유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대사인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 주는 ‘기뻐하여라’는 말을 통해
주 하느님이 늘 기쁨을 주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또한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에 가만히 머물며 성서에 씌어 있지 않지만
“여기 네가 볼 수 없지만 성령이 함께 계신다. 느낄 수 있지 않니?”라고
마리아에게 말하는 천사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 느낌 안에 머물게 되고
그 특별한 평화의 분위기 안에서 맡겨 드릴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아주 특별한 은총, 바로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는데 바로 너의 아들로 오게 된다.
너는 하느님을 뱃속에 품을 은총을 받았다.”
마리아는 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서 특별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느꼈기에 마리아는 겸손한 마음으로 대답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놀라운 응답입니다.
그분의 응답은 ‘강생의 신비를 열었던 문이었고, 구원의 샘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일을 자기 안에 하시리라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맡겨 드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오는가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순간에 일어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깊이 기도하듯 생각에 잠겨 있는 마리아와 기다리고 있는 가브리엘 천사의 모습을 그리며
그 모습에 머물수록 더욱 더 확연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이미지입니다.
마리아에게 특별한 은총을 주셨지만 온전한 자유의지로서 응답할 수 있도록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마음과 모습이 가슴 깊이 전해집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천사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 여인이여!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왜 두려움에 떠십니까?
보십시오. 그분이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서둘러 문을 여십시오!”
주님, 마리아의 겸손한 응답을 통해 강생의 신비의 문을 여시니 감사드립니다.
성모 마리아님, 당신이 드린 완전한 응답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모든 인간의 응답이 되셨습니다.
저희도 당신의 모범을 따라 열린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며
늘 "예"라고 응답하게 도와주소서.
오늘 복음에 대한 묵상으로 오래 전에 썼던 졸시, '은총의 사닥다리' 나눕니다.
어머니
당신의 이름은 사닥다리
하느님과 인간을 오르내리는
은총의 사닥다리입니다
저희의 기도가 당신을 통해
하느님께 닿고
하느님의 은총이 당신을 통해
저희에게 전해지오니
당신은 사랑의 사닥다리입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신
당신의 응답은
강생의 신비를 열었던 문이었고
구원의 샘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드린 완전한 응답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모든 인간의 응답이 되었기에
당신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저희에게 오시는 사닥다리입니다.
당신은 성령의 티 없는 배필
늘 그분 안에
그분과 함께 계시기에
저희가 성령께 다가가는
길이시며
저희가 성령의 내밀한 움직임을
느끼고 알아채는 감지계이십니다
저희가 당신을 부르면
당신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십니다
당신은 저희가 드린 로사리오를
하느님께 드리는
꽃바구니로 바꾸시는 분이시며
하느님 사랑의 편지를 전해 주시는
평화의 배달부이십니다
어머니
당신은 지친 영혼의 쉼터
영적 성장의 배움터이십니다.
당신 안에서
늘 새롭게 시작할 수 있고
당신을 통해
주님을 닮을 수 있는 까닭입니다.
당신은 깊고 검푸른 바다
헤아리기에 신비이시지만
눈을 감으면 당신 얼굴이 보입니다
당신 얼굴은
하느님을 마주하심으로
강물 위에 햇살처럼 빛나시며
담장에 핀 장미처럼 아름다우십니다
어머니
당신의 사랑을 느끼기에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기에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나이다
우리를 도구삼아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함께하신 다는 것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하느님을 잘 모셔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대림초 4개가 환히 빛을 밝히는 그만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음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순명하는 삶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얻기를 바랍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데레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 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마음을 잘 표현해 놓은 성당에 간 적이 있습니다.
미국 샌디에고 한인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1729년에 지어진 미션성당에는
양 팔이 없는 몸통 십자고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의 선한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도 하느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다만 내가 힘들 때는 그 고통에 가려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할 때 양다리 걸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주님의 능력은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언제나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임마누엘”(אמנוּאל)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אמנוּ)라는 말과 엘(אל)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두 말을 합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신비로운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서있던 요셉의 처신을 통해 순명의 역사를, 믿음의 응답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요셉을 바라보면 정말 너무도 기가 막힌 일을 당했습니다.
마리아와 약혼을 하고 잠자리를 한 적이 없는데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요셉으로서는 황당한 일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얼마나 마음이 설레었겠습니까?
그런데 약혼한 처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됩니다.
실망, 또 실망,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놀랍고 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냥 결혼을 하자니 남의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이 되고,
파혼을 하자니 한 사람을 돌팔매질을 당해 죽게 만드는 것이고……
따지고 소문내고, 소란을 피울 수도 있었으나 요셉은 고민하였습니다.
법을 어기지도 않고 마리아를 죽음에로 몰아넣지 않으면서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결국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시대 상황으로 봐서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라는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ihsouς)는 ‘예슈아’(ישוע)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발음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1독서 이사야 7장 14절을 보면,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삶의 상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요셉에게 닥친 일은 믿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한 해명도 설명도 없습니다.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말라.’는 식입니다. 사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렇게 보통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물론 마리아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한
순명도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 다 설명해 주고 다 보여준 다음에 믿으라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협력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응답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구원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믿음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응답의 역사를 보면 아브람은 일가친척을 떠나
하느님께서 보여줄 낯선 땅으로 떠날 것을 요청 받았고 또 떠났습니다.
그리고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기꺼이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15,6).
탈출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었던 모세의 삶의 여정을 보면
인간적인 정의감에 불탔던 그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불과 삼백 명으로 십오만 병사에 대항해 싸우는 기드온,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메시지를 순명으로 받아들인 마리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순명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이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큰 사람이 되려면 이러한 단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갈등과 상처를 가슴에 담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요셉의 태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사방에 소문을 내고, 따지고 망신을 주며 보복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철저하게 배려하는 큰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남의 허물을 일삼아 찾아다니고 들추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없는지요.
이웃의 잘못만이 눈에 띄는 사람이라면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주변에는 진실한 사람이 없고 하느님께서도 함께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이라면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입니다.
힘겹고 어려워하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사람,
만나면 위로와 기쁨이 되고 하느님의 축복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궁지에 몰린 마리아를 감싸주고 품어주려 했던 요셉의 모습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 요셉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최선책으로 결정한 것은 다 소용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혼자 고민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이해득실을 따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한가운데서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더더욱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울 때
그때야말로 그 안에서 주님의 뜻에 맞는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 길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는 길이라 해도 그 길이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와 연결되지 않은 길이라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목적지를 향한 길이라면 그 길을 가야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내가 이것을 감당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 때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게 여겨지는 일, 궂은 일, 곤란한 일에 직면해서 피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십시오.
길의 상태가 아니라, 그 길의 끝이 어딘가를 생각하십시오.
바로 그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 응답 안에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길 청하며
매일 매 순간 우리 마음속에 아기 예수님을 탄생 시켜 드려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운전면허 시험은 필기와 도로 주행으로 이루어집니다.
필기시험은 컴퓨터 앞에서 문제를 풀면 됩니다.
20문제 중에서 14문제만 맞추면 합격입니다.
도로 주행을 하기 위해서는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인터넷에 예상 문제가 있었습니다. 필기시험 전에 3번 정도 문제를 풀어보았습니다.
다행히 아는 문제가 나왔고, 필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모든 시험은 어렵고, 합격한 모든 시험은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의 탄생이 다가옵니다.
지난 대림 4주간을 돌아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의 모든 예언자가 미리 밝혀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예수님께서 이미 와 계심을 알려 주었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깨어 있음’입니다.
깨어 있음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차원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는 강물을 거꾸로 올라갑니다. 새는 힘차게 날아오르며 노래 부릅니다.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차원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속한 것입니다.
문학, 음악, 미술, 건축, 수학, 철학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하였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으로 오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미는 진, 선, 미를 추구하면서 문명의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의미는 욕망이라는 전차가 되어 문명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차원입니다. 종교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이를 도와줍니다.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건 겸손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림 제2주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소중함’입니다.
카인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고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형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따지려면 하느님께 따져야 했습니다.
야곱의 삼촌 라반은 야곱에게 14년 동안 노동을 시켰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작은딸 라헬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7년 동안 일한 야곱은 결혼식에 큰딸 레아를 아내로 얻어야 했습니다.
야곱은 억울했지만,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서 삼촌의 집에서 7년 더 일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의 아내를 탐했고, 부하는 전쟁터에서 죽도록 했습니다.
이세벨과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나봇에게 누명을 씌어 죽였습니다.
자신들은 더 좋은 포도원이 있었지만,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올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에 이사야 예언자는 놀라운 꿈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을 것이고 그 싹이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아브라함에게 강한 믿음을 주어서 새로운 민족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모세에게 놀라운 지도력을 주어서 파라오의 압제를 벗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지혜와 슬기의 영이며 경륜과 용맹의 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 하면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놀고,
어린아이가 사자와 함께 놀 수 있게 만든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꿈이고, 이것은 어떠한 과학과 기술로도 이룩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모두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대림 제3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가난한 이들을 돌봄’입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선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은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쁜 꽃이 그 고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두운 땅속에서 끊임없이 양분과 물을 찾아 고생하는 뿌리의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기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이렇게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한 고마운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사람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아프리카 원주민을 대상으로 34년째 선교하고 있는 개신교 선교사 박상원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아직 신앙이 없을 때 결혼하여 아기를 임신했습니다.
그때 남편이 국비 장학생으로 독일에 1년 동안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유학 가 있던 중 남편이 신앙을 갖게 되었고 목사가 되겠다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영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줄 알고 영국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계속 반송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말라위라는 나라에서 남편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곳으로 오라는 편지였습니다.
그때 남편이 떠난 해에 태어난 아들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박 선교사는 가족이 함께 살아야한다는 마음으로 아들을 데리고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남편이 가족을 위해 처음으로 자기 돈을 써서 보낸 비행기 표는 가장 싸구려였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갖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말라위는 남편의 편지에서처럼 아프리카의 알프스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살림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집에 먹을 것도 없는데 박 선교사의 남편은
가난한 원주민들을 불러와 자신들의 음식을 나누어 먹였습니다.
자기 아이는 영양실조에 걸려 가는데 원주민들만 생각하는 남편이 미웠습니다.
아이에게 계란 하나도 먹이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에 대해 박 선교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매일 싸움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절대로 목사는 되지 말라고 말했고 아들도 동의하였습니다.
피골이 상접하는 어려운 삶을 살면서 남편에 대한 불만이 커지다보니
박 선교사는 황달과 말라리아 병이 심하게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얼마 살지 못할 것이란 진단을 받습니다.
박 선교사는 죽어도 좋으니 몸은 한국에 묻어달라고 신신당부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엔 죽어서도 묻히기 싫었던 것입니다.
하루는 너무 아파 죽을 것 같다고 남편을 흔들어 깨웠는데
남편은 피곤하여 그냥 짧게 기도해주고 잠을 푹 자면 나을 것이란 말만 하고는 자러 갔습니다.
열불이 터져 밖으로 뛰쳐나와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하느님 저 너무 아파요.”라며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사랑하는 내 딸아!”
처음엔 누가 온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느낌이 이상하여 무릎을 꿇고 “아버지!”라고 불러보았습니다.
“그래, 너는 내 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지금까지 박 선교사는 하느님은 남편만 사랑하고 남편만 아프리카로 불러주셨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아프리카에 온 것은 재수 없이 결혼을 잘못해서 온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듣고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눈물이 한없이 솟구쳤습니다.
“그래, 너는 내 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불렀다. 내가 너를 사용할 것이다. ...
그러나 너는 거듭나야 한다.”
이 말씀과 함께 수많은 자신이 한 지도 모르는 잘못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다 먹어버려 아들 밥이 없을까봐
몰래 밥을 떠서 감추어두는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남편이 한 끼 먹을 쌀만 사다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프리카 아이들과 놀 때 아프리카 아이들에게는 빵을 얇게 썰어주고
자신의 아들에게는 두껍게 썰어주던 것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너는 네 아들을 사랑해서 밥도 감추어두고 빵도 두껍게 썰어주었지만
나는 너희를 먹이기 위해 내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죽여야만 했다.”
기절할 정도로 용서해 달라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주님께서 뽑아 파견한 남편을
계속 대적하며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왜 그러느냐며 어깨를 잡았습니다. 이미 새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박 선교사는 자신은 더러운 몸이니 몸을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발에 얼굴을 대고 지금까지 너무 악한 아내였던 것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남편도 아내를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그 이후 남편과 함께 부르심 받은 선교사로서 열심히 선교하고 있습니다.
아들도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참조: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 박상원 선교사, 2019 다니엘기도회 말씀, 유튜브]
개신교 선교사지만 참으로 하느님을 체험한 것 같아 좀 길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세상에서 자기만큼 큰 죄인이 없음을 알게 되어서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처음의 박 선교사는 오늘 복음의 요셉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요셉은 성모 마리아의 소명을 이해할 수 없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하였습니다.
속으로 얼마나 혼자 임신하고 돌아온 성모 마리아를 판단했겠습니까?
그러나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말하자
요셉은 바로 눈물로 회개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아버지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소명’을 주심과 동시에 만나주십니다.
그러니 소명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면 하느님을 만나 뵈올 준비도 안 된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인지, 아닌지를 알려고만 한다면 하느님은 반드시 그 대답을 주십니다.
박상원 선교사도 자신이 부르심이 있어 아프리카로 왔는지, 아닌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소명을 알려주시러 다가오십니다.
그 소명을 받아들임이 곧 하느님을 뵈옵는 길입니다.
저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문을 가질 때마다 주님께서 만나주신 기억이 납니다.
주님께서는 올바른 길을 알려주시기 위해 당신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매 일상에서도 작은 것들을 하느님의 소명으로 여길 때
작게나마 하느님을 매번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보면서 살고 싶거든 ‘이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아닐까?’를 끊임없이 물어보아야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뜻 안에 당신을 감추시고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사람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