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 날시에 왠 크리스마스 얘기를 끄집어 내느냐고 생뚱맞게 생각 하시겠지만,
막상 세모가 되면,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느라 정신 없을 것이고, 또 송구영신의 다채로운 행사 때문에 정작 이 날의 참된 이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기에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을것 같아서, 한 반년을 앞당겨 크리스마스 얘기를 하기로 합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그리스도의 탄생 일을 축하 하기 위해 가정마다 모두 케이크를 먹고 즐겁게 지내는 날로 여기고 있다.
인류의 역사상 이름을 남긴 영웅이나 사상가는 많이 있으나 동서를 통하여 전 세계에서 한 사람의 생일을 그것도 2천년이나 지난 뒤에도 축일로 삼는다는 것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부처도 그렇지만 아마도 예수가 인류에게 남긴 정신적 유산이 엄청나게 큰 것이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12월 25일 이라는 날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2월25일이 크리스마스 날 이니까 이날이 예수의 탄신일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사실부터 말하자면, 이 날은 예수의 탄생일이 아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그 날 밤은 목자들이 들판에서 야숙을 하고 있었다고 기록하였으니, 5월에서 10월 사이의 어느 날이 예수의 탄생일이 될 것이다.
적어도 12월 25일에는 유대의 고지, 즉 예수의 탄생지라고 일컬어지는 베드레햄에는 추워서 야숙(野宿)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면 12월 25일은 어떤 날인가?
이날은 원래 로마제국이 축일로 삼았던 태양신의 축제 날이었다. 당시 로마인들의 주 신앙은 태양신이었다. 이날은 절기로 보면 동지(冬至)와 맞아 떨어진다. 날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멋진 시기이다.
4세기에 들어와서, 콘스탄티노플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 들이고, 로마제국 내에서 그리스도 교세가 강해진 결과, 참된 마음의 태양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에서, 이 태양신의 축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축하 하게 된 것이 시작이다.
말하자면 후세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편리한 생각으로 예수의 생일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 탄생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의 부친인 요셉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호구 조사령으로 임신중인 아내 마라아를 데리고 나자렛이라는 마을에서 예루살렘의 남쪽 7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마을 베들레헴이라는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여관에는 그들이 머물 방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외양간에서 자게 되었다.
그곳에서 마리아는 달이 차서 예수를 낳았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요셉은 몸이 무거운 마리아를 감싸주면서 밤이 깊은 베드레헴 거리를 쓸쓸하고 슬픈마음으로 숙소를 찾아 헤매었을 것이다.
이렇게 외양간에서의 탄생이라는 슬픔과 고통과 치욕 속에서 예수의 생에는 시작된다.
‘예수’라는 이름은 요셉이 지어 준 이름이다.
마치 ‘철수’와 같은 이름으로 고유명사이다.
‘그리스도’라는 것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또는 ‘메시아’ 라는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번역 한 것으로 ‘구세주’ 라는 의미를 가진 보통명사이다.
영어로는 Christ 로 번역 되어 있다.
‘크라이스트’는 산스크리트어의 ‘크리쉬나 Krishna’ 에서 나왔다고 한다.
인도의 벵갈지방에서는 ‘크리쉬나’를 ‘크리스토’라고 칭하고 있다.
크리쉬나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완전한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 붙여지는 보통명사이다.
마치 부처가 이름이 아닌 보통명사 이듯이 ‘그리스도’도 이름이 아니다.
‘부처’는 완전이 깨달음을 얻은 자 라는 뜻이다.
‘크리쉬나’는 우주의 핵심이 된 자 라는 의미이다.
‘크리쉬나’는 자장의 중앙, 끌어당기는 사람, 모든 존재의 중심이 된 사람을 의미한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리스도’는 그가 이 세상의 중심이 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붙여준 존칭이다.
예수는 말 했다.
“나는 중심이다.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오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 온다. 만일 너희가 나로부터 멀리 간다면 너희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 와야만 한다.”
따라서 예수를 ‘부처’라고 부르고, 석가모니를 ‘그리스도’라고 칭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싯달타 고다마 (석가모니는 한자로 번역된 이름이고, 부처의 본명은 성이 싯달타이고 이름은 고다마 였다.)도 보리수 아래에서 진리를 깨달았을 때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나는 중심이다. 나는 우주이다.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모든 사람은 나와 같다. 깨달은 사람은 나와 같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될 수 있다.”라고.
만약에 사람들이 진실로 예수가 실천한 행동을 그대로 닮아 행동 할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리스도 가 될것이다.
만약에 사람들이 수행의 완성을 이루어 싯달타와 같은 의식수준에 도달 한다면 그는 부처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세상에서 가장 교활한 사람은 신(神)의 중간 매개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 할 때가 가끔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마음을 마구잡이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진리를 추구하려는 사람,
올바른 삶은 추구하려는 사람,
착하고 바르게 살려는 사람,
조물주에 의지하여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
좌절과 절망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전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돈이나 재물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을 이용 한다면 다른 직업인과 별로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누가 돈이나 재물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 나선 사람, 그리스도 와 부처를 기리는 사람을 이용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교활한 짓이다.
가장 부끄럽고 흉악한 짓임에 틀림없다.
만약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대리인인지 아닌지를 입증 해 보여야 할 것이다.
예수은 말 하였다.
“만일 너희를 유혹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보라, 천국은 하늘에 있다’라고 말 한다면,
그들의 말을 믿지 말라. 그렇지않으면 너희는 영원히 그 천국에 도달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예수는 분명히 말 하였다.
“만일 너희를 유혹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보라, 천국은 하늘에 있다’라고 말 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 보다 먼저 갈 것이다..
만일 그들이 너희에게
‘천국은 바다 속에 있다’라고 말 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 보다 먼저 갈 것이다.”
…
“천국은 너희 안에 있고, 너의 밖에도 있다.”
…
“만일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안다면 너희는 알려 질 것이고,
너희가 살아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리라”
…
“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하면
너희는 빈곤 중에 있게 되고
너희 자신이 빈곤 하리라”
…
옛 기록을 보면, 신의 나라는 언제나 다른 어느 곳에 실재로 있는 것처럼 설교 되어 왔다.
신의 나라, 즉 천국은,
시간 속에, 공간 중에, 항상 어느 다른 곳엔 가에 있고, 지금 여기에는 없는 것이었다.
왜 그래 왔는가? 왜 신의 나라는 지금 여기, 바로 우리 옆에는 있지않은가?
왜 신의 나라는 미래에 있어야 하며, 여기가 아닌 저 멀리 다른 공간에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생각하는 사념 때문일 것이다.
사념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사념은 시간 없이는 존재 할 수 없다.
시간이 많을수록 더 많은 사념이 인간을 채우면서 흘러 다닌다.
그때 그것은 수많은 욕망을 만들어 내고, 인간은 그 욕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교활한 사람들은 언제나 천국이 미래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천국은 사람이 죽고 난 뒤에나 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도 선한 사람만이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미래만이 사념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한동안 편히 숨을 쉬고 평안을 느낄 수 있다.
확실히 신의 대리인 들은 우리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처’나 ‘그리스도’는 그러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나 ‘부처’는 시간의 관점에서 이야기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와 부처는 영원의 관점에서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나 부처와 닮은 삶을 지내기를 원 한다면, 끊임없이 자신을 불편함과 고통 속에서 지낼 엄숙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부처는 시간과 미래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와 그리스도는 당장 오늘, 당장 이 순간을, 지금 이 곳에서, 지금 이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라고….. 그리하여 당장 이 곳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시간이 필요한가?
시간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다.
만약 욕망이 채워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욕망이 아닐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억겁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채워지지 않고 언제 까지나 남아 있는 것이 욕망의 속성이다….
그것은 자꾸자꾸 일어난다.
우리가 그것을 채우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욕망은 점점 더 일어 난다.
우리가 욕망을 채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그 욕망은 키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충족이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내일이 필요하고, 모레가 필요하고, 글피가 필요하고, 더 많은 날이 필요하고, 백년이 필요하고, 천년이 필요하고, 만년도 모자란다.
모든 욕망의 모습은,
절대로 충족이라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배고픔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시장 끼가 돌아오기 위해서 사라진다.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배고픔이 영원히 사라지는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것은 욕망의 속성이 아니다.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들의 기본적인 생리적 욕망들이다.
그것들은 반복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반복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최면에 걸리게 된다.
왜냐하면, 반복은 최면이기 때문이다.
어제 우리는 그것을 하였고, 오늘 우리는 그 것을 하고, 내일 우리는 그것을 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욕망을 되풀이 하고 있다. 그리고 되풀이 하면 할수록 우리는 거기에 더욱 빨려 들어간다.
욕망에는 밑 바닥이 없다.
그것이 충족 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바닥이 없는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면 어느 세월에 다 채울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항아리에 바닥이 있는지 없는지도 살펴보지 않았다.
교활한 대리인들은 이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나 부처는 절대 대리인이 아니다.
진실로 종교적인 사람은 신의 대리인이 아니다.
참된 종교적인 사람은 우리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강하게 되길 바란다.
절대로 우리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에는 바닥이 없다는 진리를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지만,
왜 인간은 그러한 진리를 가차없이 잊어버리는 것일까?
여기에서 다시 예수의 말을 상기 해 본다.
“만일 너희를 유혹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보라, 왕국은 하늘에 있다’라고 말한다면…..”
“여기가 아니라, 하늘 높은 곳 어디에,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 아주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 신의 천국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갈 것이다……”
예수는 누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는 바로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고 있는 교활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좋은글 잘 머물다가 갑네다.
태초에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에 적절한 이름을 붙혀 존경해 왔죠 우린 그를 신이라 부르지만 지브란의 어록에 있지요
내가 신을 밑는 이유는 부모가 만들어준이유도 있지만 내안에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잠시 쉬고며생각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