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列國志 제5회
신후(申侯)가 표문을 올린 후, 호경에서 소식을 정탐하고 있던 심복이 밤을 새워 달려와 보고하였다.
“왕이 괵공을 장수로 삼아 병력을 일으켜 우리 신나라를 치라고 명하였습니다.”
신후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우리 신나라는 나라도 작고 병력도 적은데, 어떻게 왕의 대군을 막을 수 있겠는가!”
대부 여장(呂章)이 말했다.
“천자가 무도하여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태자로 세워,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은 관직을 버리고 떠났으며 만민이 모두 원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자는 고립된 형세입니다. 지금 서융의 병력이 바야흐로 강해지고 있는데, 우리 신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속히 서융의 군주에게 서신을 보내 병력을 빌리십시오.
그리하여 호경으로 쳐들어가 왕후를 구하고 천자로 하여금 태자에게 왕위를 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주지업(伊周之業)이 될 것입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먼저 일어나 남을 제압하여, 기회를 잃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주지업(伊周之業)’은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의 업적이라는 뜻으로, 훌륭한 처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이윤은 탕왕을 보좌하여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은나라를 건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재상이 되어 경제를 부흥시키고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다. 주공은 무왕의 동생으로 주왕조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이다. 제1회에서 설명하였다.]
신후가 말했다.
“그 말이 옳네.”
신후는 황금과 비단을 한 수레 준비하여, 사신으로 하여금 서신을 가지고 서융으로 가서 병력을 빌리게 하였다. 아울러 호경을 깨뜨리면, 창고에 있는 황금과 비단을 마음대로 가져가도 좋다고 약속하였다. 서융의 군주가 말했다.
“중국 천자가 실정(失政)하여, 국구(國舅)이신 신후께서 나를 불러 무도한 천자를 죽이고 동궁을 옹립하자고 말씀하시는데, 그건 내 뜻과 같습니다.”
서융주는 마침내 병력 1만5천을 일으켜 3대로 나누었다. 패정(孛丁)을 우선봉, 만야속(滿也速)을 좌선봉으로 삼고, 서융주 자신은 중군이 되었다. 창칼이 길을 막고 깃발이 하늘을 가렸다. 신후 역시 본국의 병력을 동원하여 함께 진격하였다. 거칠 것 없는 호탕한 기세로 호경까지 진격하여, 왕성을 물샐 틈 없이 세 겹으로 포위하였다.
유왕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했다.
“기밀이 누설되어 화가 먼저 닥쳤구나! 우리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 융병이 먼저 당도하였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괵공 석보가 아뢰었다.
“왕께서는 속히 사람을 여산으로 보내 봉화를 올리게 하십시오. 제후들이 구원병을 이끌고 올 것이니, 안팎으로 협공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유왕은 그 말에 따라 사람을 여산으로 보내 봉화를 올리게 하였다. 하지만 제후들의 병력은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지난번에 유왕이 장난으로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희롱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거짓인 줄 알고 아무도 병력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이다.
융병들은 밤낮으로 성을 공격하고 있는데 구원병은 오지 않자, 유왕이 석보에게 말했다.
“적군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으니, 경이 출전하여 한 번 시험해 보시오. 짐이 용맹한 장병들을 선발하여 뒤를 이어 접응하겠소.”
석보는 본래 전쟁에 능한 장수가 아니었지만, 왕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병거(兵車) 2백 승(乘)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갔다.
[병거는 전쟁에 사용하는 수레, 즉 전차(戰車)를 말한다. ‘승’은 수레를 세는 단위이다. 병거 1승에는 갑사(甲士) 3명이 타고, 보병 72명과 거사(車士) 25명이 딸린다. 따라서 병거 1대가 곧 백 명의 군사가 된다. 당시에는 병거의 숫자가 곧 병력의 숫자를 의미하였다.]
신후는 진중에서 석보가 성을 나오는 것을 보고, 손가락으로 석보를 가리키며 서융주에게 말했다.
“저놈이 바로 왕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친 역적입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서융주가 그 말을 듣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누가 저놈을 사로잡아 오겠는가?”
우선봉 패정이 말했다.
“소장이 출전하겠습니다.”
패정이 칼을 휘두르며 말을 박차고 달려 나가 곧장 석보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교전한 지 10합이 되지 않아, 패정은 한칼에 석보를 베어 병거 아래로 떨어뜨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융주는 만야속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일제히 돌격하였다.
융병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성중으로 쇄도해 들어가, 닥치는 대로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베어 죽였다. 함께 성중으로 들어간 신후조차 융병들을 제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다. 성중은 혼란에 빠졌다.
유왕은 미처 군사를 점검하지도 못했는데, 이미 형세가 좋지 않음을 보고 작은 수레에 포사와 백복을 태우고 뒷문으로 빠져나와 달아났다. 그때 사도 정백 우가 따라오면서 소리쳤다.
“왕께서는 놀라지 마십시오! 신이 어가를 보호하겠습니다!”
정백은 어가를 보호하여 북문을 나가 여산을 향해 달려가다가, 도중에 윤구를 만났다. 윤구가 유왕에게 말했다.
“융병들이 궁실을 불태우고 창고를 약탈하고 있습니다. 제공은 이미 난군 속에서 죽었습니다.”
유왕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여산에 당도하여, 정백은 다시 봉화를 올리게 하였다. 봉화는 다시 하늘 높이 올랐지만, 구원병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융병들이 여산 밑에까지 추격해 와서 여궁을 겹겹이 포위하고서 소리쳤다.
“혼군(昏君)을 도망치지 못하게 하라!”
유왕과 포사는 서로 부둥켜안고서 울고만 있었다. 정백이 유왕에게 말했다.
“일이 급합니다! 신이 목숨을 걸고 어가를 보호할 테니, 포위를 뚫고 신의 나라로 가서 훗날을 도모하십시오.”
유왕이 말했다.
“짐이 숙부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짐의 부부와 부자의 목숨이 오로지 숙부에게 달렸습니다.”
[정백 우는 여왕의 막내아들로서, 선왕의 동생이다.]
정백은 군사들을 시켜 여궁 앞에 불을 지르도록 하여 융병들의 주의를 그쪽으로 끌었다. 그 틈에 정백은 유왕을 인도하여 여궁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정백은 장창을 들고 앞장서서 길을 뚫고 나가고, 윤구는 포사 모자를 보호하면서 유왕의 뒤를 따랐다. 얼마 가지 못했는데, 융병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적장은 고리적(古里赤)이었다.
정백은 크게 노하여 이빨을 부드득 갈면서 고리적에게 달려들었다. 교전한 지 몇 합이 되지 않아, 정백이 창으로 고리적을 찔러 말에서 떨어뜨렸다. 융병들은 정백의 용맹에 놀라 도망쳐 버렸다.
유왕 일행이 약 반리쯤 갔는데, 배후에서 또 함성이 일어났다. 우선봉 패정이 대군을 이끌고 추격해 오고 있었다. 정백은 윤구로 하여금 어가를 보호하여 먼저 가게 하고, 자신은 뒤를 막으면서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융병의 철기(鐵騎) 부대가 가로지르고 들어와 유왕 일행과 정백 사이를 차단하였다. 정백은 곧 적군 가운데 빠져 곤경에 처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정백의 창술은 신출귀몰(神出鬼沒)하여, 그 앞을 가로막았던 융병들은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뒤를 이어 달려온 서융주가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사면으로 포위하여 활을 쏴라!”
사면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화살은 옥석(玉石)을 구분하지 못하니, 가련하게도 일국의 현명한 제후가 수만 개의 화살 아래 죽고 말았다.
좌선봉 만야속은 급히 추격하여 유왕이 탄 수레를 붙잡았다. 서융주는 곤룡포와 옥대를 보고 유왕임을 알고 한칼에 베어 죽였다. 백복도 죽였는데, 포사의 미모를 보고서는 사로잡아 수레에 태워 데리고 갔다. 그날 밤 서융주는 장막 속에서 포사를 데리고 즐겼다. 윤구는 수레에 실려 있던 상자 안에 몸을 숨겼지만, 융병들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
유왕의 재위 기간은 11년이었다. 산뽕나무 활과 기초로 만든 화살통을 팔러 왔던 남자가 청수하에서 요녀를 건져 포성으로 달아났었는데, 그 요녀가 바로 포사였다. 포사는 유왕의 마음을 현혹하고 왕후를 능멸하였으며, 오늘날 마침내 유왕을 죽게 하고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다.
지난날 동요에서 이르기를, “달이 장차 떠오르면 해는 장차 지리라. 염호와 기복으로 주나라는 거의 망하리라.”라고 하였는데, 그 예언이 이제 맞아떨어진 것이다. 하늘의 운수는 이미 선왕 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동병선생(東屏先生)이 이를 두고 시를 읊었다.
多方圖笑掖庭中 궁중 여인의 웃음을 보려고 갖가지로 애쓰다가
烽火光搖粉黛紅 봉화 불빛이 요염한 얼굴에 붉게 어른거렸네.
自絕諸侯猶似可 스스로 제후와 절교하여 오히려 이렇게 되었으니
忍教國祚喪羌戎 어찌하여 강융(羌戎)에게 나라를 잃었단 말인가.
또 농서거사(隴西居士)가 이 역사를 이렇게 읊었다.
驪山一笑犬戎嗔 여산의 한 번 웃음이 견융을 불러들여
弧矢童謠已驗真 궁시(弓矢)를 노래한 동요가 징험되었도다.
十八年來猶報應 십팔년이 지나 응보가 있었으니
挽回造化是何人 누가 이 조화를 되돌릴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절구(絕句)가 윤구 등의 비참한 말로를 읊었으니, 간신들의 경계가 될 것이다.
巧話讒言媚暗君 간교한 말과 참소로 암군(暗君)의 비위 맞추고
滿圖富貴百年身 백년의 부귀를 누리려고 온갖 계책 다 썼구나.
一朝駢首同誅戮 하루아침에 머리를 나란히 하여 죽음을 당했으니
落得千秋罵佞臣 천추(千秋)에 간신으로 욕먹는 신세가 되었도다.
또 하나의 절구가 있어, 정백 우의 충성을 읊었다.
石父捐軀尹氏亡 석보는 몸을 내던지고 윤구는 죽었으며
鄭桓今日死勤王 정백도 오늘 왕을 위해 죽었도다.
三人總為周家死 세 사람이 모두 주나라를 위해 죽었지만
白骨風前那個香 백골에 바람이 불면 누구에게서 향기가 날까?
한편, 신후(申侯)는 성중에 있다가 궁중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 황급히 본국 병사들을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모조리 무찌르고 먼저 신후(申后)를 냉궁에서 구출하였다. 그리고 경대로 달려갔는데, 유왕과 포사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한 궁인이 북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왕과 포후는 이미 저 북문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신후는 유왕이 여산으로 갔으리라 짐작하고, 황급히 추격하였다. 도중에 서융주를 만났는데, 혼군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신후는 크게 놀라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애초에 왕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했었는데,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를 줄은 생각지 못했다. 후세에 나를 군주에게 불충한 사람이라 할 것이니, 변명할 거리라도 만들어 놓아야겠다.”
신후는 급히 종자들에게 명하여 유왕의 시신을 거두어 염하게 하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냈다. 서융주가 웃으며 말했다.
“국구는 아녀자 같은 마음을 지녔구려!”
신후는 도성으로 돌아와 연회를 열어 서융주를 대접하였다. 그때 금은보화는 이미 융병들이 다 약탈해 가고 부고는 텅 비어 있었다. 신후는 다른 곳에서 황금과 비단을 거두어 열 대의 수레에 가득 실어 서융주에게 내주었다.
신후는 서융주가 욕심을 채우면 돌아가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서융주는 자신이 유왕을 죽인 일을 세상에 드문 공을 세운 것으로 여겨, 군대를 도성에 주둔시키고서 종일 술을 마시고 환락을 즐기면서 도무지 돌아갈 뜻이 없었다.
백성들은 모두 신후를 원망하였지만, 신후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신후는 마침내 밀서 세 통을 써서, 세 제후에게 보내 왕실을 함께 지키자고 하였다. 그 세 제후는 북쪽의 진후(晉侯) 희구(姬仇), 동쪽의 위후(衛侯) 희화(姬和), 서쪽의 진군(秦君) 영개(嬴開)였다. 그리고 또 사신을 정나라로 보내, 정백이 전사한 일을 세자(世子) 굴돌(掘突)에게 알리고 군사를 일으켜 부친의 원수를 갚으라고 하였다.
[진(晉)나라와 위나라의 임금은 주나라와 같은 ‘희(姬)’ 성이고, 진(秦)나라 임금의 성은 ‘영(嬴)’이다. 춘추전국시대 진나라는 晉·秦·陳 셋이다. 晉은 낙양 북쪽에 있는 대제후국인데, 후에 한·위·조 3국으로 분리된다. 秦은 중국의 가장 서쪽에 있는 제후국인데, 지금은 작지만 점점 강대해져서 훗날 천하를 통일한다. 陳은 낙양의 동남쪽에 있는 중간 정도 크기의 제후국이다. 앞으로 이 세 나라는 구분을 위해서 한자로 표기한다. 왕의 후계자는 ‘태자’라 하고, 제후의 후계자는 ‘세자’라 한다.]
한편, 정나라 세자 굴돌은 나이가 23세였는데, 신장이 8척이고 머리가 영특하며 풍채가 비상하였다. 부친의 전사 소식을 듣자 슬픔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흰 전포에 흰 띠를 두르고 병거 3백승을 거느리고 밤새워 호경으로 달려왔다.
탐마(探馬)로부터 미리 보고를 받은 서융주는 정나라 군대를 맞이하여 싸울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굴돌이 도성 밖에 당도하여 곧장 공격하려 하자, 공자(公子) 성(成)이 간하였다.
[왕의 아들은 ‘왕자(王子)’라 하고, 제후의 아들은 ‘공자(公子)’라 한다.]
“우리 군대는 아주 급하게 달려왔기 때문에 무척 피로하며 아직 휴식을 취하지도 못했습니다. 우선 영채를 튼튼히 쌓고 해자를 깊이 파서 방어할 준비를 한 다음에, 다른 제후들이 다 모인 후에 함께 공격해야 합니다. 그것이 만전지책(萬全之策)입니다.”
[‘만전지책’은 조금도 허술함이 없는 완전한 계책을 말한다.]
굴돌이 말했다.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을 때는 군사를 돌이키지 않는 법이오. 게다가 지금 서융주는 승전했기 때문에 교만해지고 싸우려는 마음이 가득 차 있소. 또 융병들은 약탈하느라 정신이 없고 느긋해져 있을 것이오. 이때 우리의 예봉(銳鋒)으로 쳐들어가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소. 만약 제후들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렸다간, 우리 군사들의 마음이 해이질 것이오.”
[‘예봉’은 날카로운 창끝인데, 예리한 기세를 말한다.]
굴돌은 군사들을 휘몰아 곧장 성 아래까지 돌진했다. 그런데 성 위에는 깃발도 하나 보이지 않고 북소리도 울리지 않은 채 아무런 동정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굴돌은 성 위를 향해 큰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개돼지 같은 도적놈들아! 왜 성을 나와서 결전을 하지 않느냐!”
하지만 성 위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굴돌은 성을 공격하라고 좌우에 명하였다. 그때 갑자기 성 밖의 숲속에서 징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왔다. 서융주가 이미 계책을 정하고 미리 성 밖에 군사를 매복해 두었던 것이다. 굴돌은 크게 놀라 황급히 창을 들고 적을 맞이하여 싸웠다.
그때 또 성 위에서 징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성문이 활짝 열리면서 또 한 떼의 군마가 달려 나왔다. 굴돌의 앞쪽에서는 패정이 돌격해 오고 뒤쪽에서는 만야속이 돌격해 왔다. 굴돌의 군대는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대패하여 달아났다. 융병들은 30여 리를 추격하다가 비로소 돌아갔다.
굴돌은 패잔병을 수습하고, 공자 성에게 말했다.
“내가 경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패전하게 되었소. 이제 어떤 계책을 써야 하겠소?”
공자 성이 말했다.
“여기서 위나라 도성 복양(濮陽)이 멀지 않습니다. 위후(衛侯)는 노련하고 경험이 많으므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정나라와 위나라가 병력을 합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굴돌은 그 말에 따라 군대를 돌려 복양을 향해 나아갔다.
정나라 군대가 이틀 정도 행군했는데, 저 멀리서 먼지가 크게 일어나면서 무수한 병거가 나타났는데 마치 거대한 담장을 두른 듯하였다. 가운데 병거에 한 사람의 제후가 앉아 있었는데, 비단 전포에 황금 띠를 두르고 있었다. 노안(老顔)에 백발을 휘날리며 마치 신선 같은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 제후가 바로 위무공(衛武公) 희화로서, 그때 나이가 이미 80이 넘었다.
굴돌이 병거를 멈추고 큰소리로 말했다.
“저는 정나라 세자 굴돌입니다. 서융의 군대가 도성을 침범하여, 저의 부친이 전사하셨습니다. 저의 군대가 또 패전하여 구원을 청하러 가는 길입니다.”
위무공이 두 손을 맞잡고 대답했다.
“세자는 마음 놓으시오. 과인은 온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왕실을 지킬 것이오. 秦과 晉의 군사도 머지않아 당도할 것이니, 어찌 개돼지 같은 놈들을 걱정하겠소?”
굴돌은 위무공이 먼저 앞서 가도록 길을 양보한 다음, 병거를 돌려 다시 호경을 향해 나아갔다. 위무공과 굴돌은 호경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각각 하채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보내 秦·晉 두 나라의 군사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아보게 하였다. 탐마가 돌아와 보고하였다.
“서쪽에서 징소리와 북소리가 크게 울리고 병거 소리가 땅을 진동하고 있습니다. 깃발에는 ‘秦’ 자가 크게 쓰여 있습니다.”
위무공이 굴돌에게 말했다.
“秦은 비록 부용(附庸)에 지나지 않지만 서융의 풍속에 익숙하고, 병사들이 용맹하고 싸움을 잘해 서융이 두려워하오.”
[‘부용’은 큰 제후국에 부속된 작은 나라를 가리킨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제후의 지위에도 이르지 못했던 작은 秦나라가 훗날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위무공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북쪽으로 갔던 탐마가 돌아와 또 보고하였다.
“진군(晉軍)이 이미 당도하여 북문 쪽에 영채를 세웠습니다.”
위무공은 크게 기뻐하며 굴돌에게 말했다.
“두 나라의 병력이 당도하였으니, 대사는 이루어진 것과 같소.”
위무공은 사람을 보내 秦·晉 두 군주를 초빙하였다. 잠시 후 두 군주가 위무공의 영채로 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두 군주는 소복을 입은 굴돌을 보고 위무공에게 물었다.
“이 분은 누구십니까?”
위무공이 말했다.
“이 분은 정나라 세자입니다.”
위무공은 정백이 전사한 일과 유왕이 피살된 일을 자세히 얘기하였다. 두 군주는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위무공이 말했다.
“이 늙은이는 나이만 많고 무식합니다. 하지만 신하된 자로서 의리를 저버릴 수 없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 누린내 나는 놈들을 소탕하는 것은 전적으로 두 상국(上國)에 의지하고자 합니다. 어떤 계책이 있으십니까?”
[‘상국’은 상대방 나라를 높여 부르는 것이다.]
진양공(秦襄公)이 말했다.
“서융은 여자와 재물을 약탈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아직 방비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밤 자정에 병력을 동·남·북 3로로 나누어 공격합시다. 서문만 비워 놓으면 저놈들은 필시 그쪽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그때 정나라 세자를 서문 밖에 매복하게 하여, 저들이 달아날 때 뒤를 추격하면 반드시 전승을 거둘 것입니다.”
위무공이 말했다.
“그 계책이 참으로 좋습니다!”
* 계속 5회 ~~
첫댓글 유왕을 패망에 이르게 한 세력이 견융입니다.
통칭 서융이라고 합니다.
북적. 동이. 남만 이렇게 동서남북 오랑캐(?) 4 세력이 내내 중원의 한족 세력을 괴롭혔습니다.
만리장성도 동.서.북의 오랑캐 침략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열국지를 보니까 국가의 수장이 띨띨하면 다른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 있습디다
세계사 한국사를 보더라도 국가의 원수가 션찮으면 다른나라에 먹힙디다
우리 대한민국도 좋은 정치가가 나와야 되겠습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