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기본적으로 이야기 구조이다. 수필도 이야기 형식을 기본 구조로 하자면, 수필과 소설의 차이가 나타나는 수필 형식을 찾아야 하는데, 아직 길을 찾지 못하여 헤메고 있다. 수필과 소설의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재미를 주는 수필 형식을 찾는 것은 오늘의 우리 수필가들이 떠안아야 할 짐이고 숙제이다. 수필가들, 특히 시골에서 유년을 보내고, 시골 마을을 고향으로 가지고 있는 수필가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정서는 거의가 향수 심리가 바탕이다. 향수 심리를 표현하는 방법은 작가마다 다르다. 그 다름이 바로 작가의 수필세계가 된다.
이야기 형식은 문자가 태어나기 이전의 구전문학(음성문학-운문)부터 기본 형식이다. 수필은 특성상 이야기로 만들기 어려운 형식이라고 말한다. 단편적인 소재를 가지고 작가의 사유로 풀어내는 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려고 하다보면 기승전결이 갖추어 져야 하고, 허구가 되기 싶기 때문이다. 이야기 구조가 구전문학에서 오늘의 문자 문학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성을 지닌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재미가 있어서 좋아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 수필화한 소설이 나타나는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소설의 긴 이야기를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성석제는 짧은소설이라는 형식의 글로 단편집을 냈다. 소설 한 편의 길이가 3-8페이지 였다. 읽어보니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에 가까웠다. 1980년 대에 영국 소설가 줄리안 반스는 ‘플로벨의 앵무새’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에세이적 소설’이라고 했다. 이 소설은 플로벨의 소설에 나오는 ‘앵무새’를 두고 작가의 사유세계를 펼쳐 놓았다. 지적 수필, 즉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쓴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여러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독립된 하나의 소설이다.)
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밀란 쿤데라의 최근 소설 ‘느림’은 에세이 형식으로 쓴 여러 글들이 모여 전체의 소설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소설 형식으로 쓴 수필도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수필은 기본적으로 산문체이다. 산문은 구전문학의 운문체에서 문자가 발명됨으로 나타난다. 문자로 기록함으로 문장의 길이가 길어지고 복잡해진다. 긴 문장에서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법칙성과 규범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논리성이고 합리성이다. 산문체 문장의 특성은 논리성이다. 문장이든, 단락이든 ‘왜’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산문체의 특성이다. 문장이나 단락 자체가 왜에 대한 대답으로 이어지면 구조상으로 이야기이다. 따라서 산문에서는 운문과 다르게 문장의 문법적 구조를 강조한다. 문법적 구조이어야 논리적으로 내용 전달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김귀선의 수필에서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은 생생하고, 세세함이다. 현장을 세세한 분위기 묘사를 통하여 의미를 만들어 낸다. 직접적이지 않고 은유적이다.
‘바우 아재’의 경우는 사건이 시간을 따라 진행하는 형식이 아니다. 그때그때의 분위기 묘사와 바우아재의 의식을 통하여 바우아재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암시한다. 그런 방법으로 시간따라 진행하는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구성으로 따진다면 수필이라기도, 소설이라기도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또한 수필이 아니라기도, 소설이 아니라기도 말하기 어렵다. 이 점이 김귀선의 수필이 갖는 속성이다. 김귀선 수필의 대부분이 이런 형식을 따른다.
그렇다면 김귀선의 수필에서 전통적인 기법으로 쓴 수필은 없을까. 흔치는 않지만 있다. ‘사소한 슬픔’은 어릴 때의 친구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수필가들이 소재로 삼는 내용이다. 그 소재를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구성하였지만, 전통 수필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의 수필집에서 전통적인 기법으로 쓴 수필은 겨우 몇 편이다. 그의 수필이 눈 앞에 펼쳐지듯이 너무 세세한 현장 묘사를 한 때문에 소설의 방식에 가깝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소설 형식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사소한 슬픔’을 우리의 수필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유년시대를 회상의 기법으로 불러내는 것과 같은 형식으로 보았다. 그러나 전개 방식은 사뭇 다르다. 불현 듯이 어린 날이 떠올라서 전화를 했는데, 자신도 확실한 이유를 몰라서 ‘그냥’ 전화를 했다고 했다.
‘그냥’에 함축된 의미가 무엇일까. 그것은 누구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향수심리이고, 향수심리는 사람들이 품고 있는 이상향이라지 않는가. 나는 전통 수필에서도 뛰어난 수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전문을 보기로 하자.
사소한 슬픔
김귀선
“그냥------(……).”
나도 몰래 흘러나온 말이다. 그 많던 할 말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웬일이냐고 되묻는 J의 말에 나는 ‘그냥’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한달 전에 J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다. 반가움에 나는 어떤(쩐) 일이냐고 물었다. J는 세 번째 똑 같은 말을 대답을 했다.
“그냥------(……).”
혹시 말하기 어려운 부탁이라도 있나 싶어 말꼬를 터 주려 이것저것 줄기를 건드려보비만(건드려보지만), 전화를 끊을 때까지 ‘그냥’이라는 것 외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녀가 남긴 두 음절이 귓가에 맴돌았다. 떨쳐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궁금증의 물이량(물이랑)으로 번져나갔다.
전화 한 통화의 눅진한 여운이 종일 그림자로 따라 다녔다. 흘려들을 수도 있는 그 말에 나는 왜 이리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일까. 참을 수 없어 저녁쯤에 J의 집으로 전화했다. 하지만 집을 비웠는지 전화를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십 년 동안 왕래가 없었던 우리 사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녀는 내게 전화를 했고, ‘그낭(그냥)’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무슨 절박한 고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반가움에 연락해놓고는 선뜻 할 말이 나오지 않아 같은 말만 반복했던 것일까?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만 해도 짠해지는 나처럼 그녀도 뻐꾸기와 뜸부기 소리가 그리웠던 것일까. 그래서 같이 얘기할 친구를 찾았던 것일까.
J는 초등학교 친구이다. 공부를 잘 했지만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 가난한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상처를 알기 전에 일찌감치 꿈을 봉해버리는 것어(이)었나 보다. 내가 하얀 교복 칼라를 나풀거리며 영어 알파벧(알파벳)을 배울 때 고향을 떠난 그녀는 방직공장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일찌감치 도회지 생활에 젖어든 거이다(것이다).길의 방향이 달랐다(던.) 그녀와 나는 자연 만남이 뜸해졌다. 그러던 중 언제부턴가 친구들과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에 대한 걱정은 길게 꽈리를(똬리를) 틀다 또 다른 궁금증으로 부풀어 친구들의 입김을 타고 서울로 부산으로 날아다녔다. 어디로 꼭꼭 숨어버린걸까. J에 대한 얘기가 친구들 사이에서 나올 때마다 어릴 적 추억이 물안개처럼 일어났다.
J가 살던 곳은 우리 동네보다 한참이나 더 산골에 있었다. 버스는 없었고, 세상과의 소통은 오솔길이었다. 책보를 허리에 맨 단발버(머)리들이 오솔길을 따라 오르내렸다. 고무신은 이슬에 젖어 자주 미끄러웠다. 산중턱에 제 편할대로 앉은 집들은 볕이 오래 들어 봄나물 말리기에 좋았다. 명절엔 망아지처럼 친구들과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그 높은 산동네에서 놀다가 밤이슬에 젖으며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녀는 유난히도 들꽃을 좋아했다. 교탁 위의 도자기 화병엔 항상 J가 꺾어 온 꽃들이 피어 있었다. 봄에는 진달래, 여름엔 검은 점이 찍힌 빨강색 산나리를 한 묶음씩 들고 왔다. 가을엔 연보라 색 들국화를 억새와 꺾어 왔다. 가끔은 윗옷 앞자락에 산딸기나 오디도 보듬어 와서 다투어 내미는친구들 손바닥에 집히는데(대)로 나누어 주었다.
제 앞만 보면(보며) 살다가 자식들 중(‧)고등학교에 가게 되자 나도 팍팍한 일상에서 좀 벗어날 수 있었다. 동기회 소식이 왔고, 나도 참석했다. 한 친구가 그 동안 궁금해하던 J의 소식을 물고 왔다. 식당(안)이 조용했다. 그녀는 결혼했고, 아이도 셋이나 두었다고 했다. 소식은 그것이 다였다. 또 다시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른 봄날, 은빛 버들강아지를 꺾어 들고 학교 앞 언덕을 넘어오던 모습이 떠올랐다. 학교를 마치고 해 질 녁(녘)까지 우리 동네 당수나무 숲 풀밭에서 공기놀이를 했던 짓(것)이랑 가끔은 농사일을 거드느라 한참이나 학교를 나오지 못했던 날들도 생각났다. 그녀를 생각하면 짠해오는 그 무엇, 나는 그 자체를 추억이려니 여기며 일상으로 다시 찾아(젖어)들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난, 얼마 전이었다. 동기회때다. 그녀가 참석할 것이라는 소식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추억 이야기에 밤이 모자랄 것 같았다. 무슨 말로 말꼬를 틀까. 그녀의 기억은 나를 (그녀는 나와의 추억을) 얼마나 기억할까.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인사 이후엔 서로가 말이 없었다. 절벽을 마주한 채 멀리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녀가 며칠 전 뜬금없이 내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었을까.) 본인도 궁금한 것이 많았던 것일까. ‘그냥’이라는 함축 언어 테두리에 소리없이 흐르는 그 무엇, 은근히 마음을 조렸다(조였다). 만날 수만 있다면 세월의 더께를 벗어나려고(벗어버리고) 밤새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나다. 웬일이냐는 그녀의 재차 물음에 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는다. 수많은 단어들이 허공에서 부딪히다 사라질 뿐이다. 어쩐 일이냐는 그녀의 음성이 다시 수화기로 들려온다. 예상치도 않은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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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향수심리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향수는 오늘의 우리 수필가들에게 정서의 바탕을 구성해준다. 김귀선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작품을 통해서 향수심리를 표출하였다. 이 작품은 다른 작가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J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작가는 J를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향수심리는 현실이 아닌 이샹향이다. 이상향은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욕망일 뿐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내면을 차지하고 있는 욕망은 무엇일까. 작가의 욕망은 ‘그냥’이라는 말이 함의한다. 함의하고 있는 작가의 욕망이 무엇인지는 작가 자신도 모른다. 그래서 ‘그냥’이라는 말만 반복한다. 더 깊은 읽기를 한다면 알고는 있지만 드러내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일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가 ‘~이다.’라고 생각하였다면 그것이 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읽어낸 욕망은 사실은 독자의 욕망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