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글 : https://cafe.daum.net/shogun/2DR/4941
이르쿠츠크 독립군 2,000여명의 곤란
1922. 1월경
러시아 내전에서 전설적인 활약은 했다는 데 일본군과의 교전기록은 찾아보기 힘든 여단장 오하묵이 이끌게 된 이르쿠츠크의 1,400여명에서 ~ 2,000여명의 독립군 부대는 러시아 대기근과 겨울이라는 곤란에 부딪친다.
스탈린시대 러시아 아무르 주에서 탄압받았던 사람들의 명단. 고려인, 중국인들도 수백명 이상이 적혀 있다.
이르쿠츠크에서 발행된 코민테른 잡지
(이르쿠츠크파의 자화자찬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91쪽 등을 살펴보면)
1921년 말부터 1922년 초쯤
러시아 정부 군부에서 이르쿠츠크에 있는 고려 군대에 대하여 1922년 1월 1일부터는 고려 자체에서 공급 문제를 해결하라 하였기에 공급의 곤란이 발생하자,
1922년 1월 동양대회에 참가한 고려혁명 23개 단체대표에서 고려혁명에 대한 원조 및 군대에 대한 위급문제를 볼셰비키 정부 외교부와 교섭하기 위하여 대표단에서 교섭단원으로 4인을 선정하여 외교를 진행한 결과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의 소개로 볼셰비키 정부 외교부에 교섭한 결과 희망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 군대 문제에 대한 요구는 현재 무장과 또는 다소 활동비 기십만원을 원조하여 연해주 즉 중로국경까지 출동시켜주던지 불연(不然)하면 일난(日暖)을 기다리기 위하여 1922년 5월까지 극동공화국 영내가 아닌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 지대에 주둔케하고 전과 같은 공급을 요구한다는 것을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 건의하니 동양비서부에서는 위 요구에 대하여
“고려공산당 임시간부의 승인을 득하라” 하였다고 한다.
임시간부 중 한명이 이 무렵 모스크바 쪽에 도착한 이동휘 선생이었다.
즉 이르쿠츠크파만을 지원하던 동양비서부가 앞으로는 상해파와 무슨 일이든 협의를 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에 공헌은 없고 ‘자유시 참변’이라는 해악을 남긴 슈먀츠키가 퇴진하고 러시아 공산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기로는
이것은 무산혁명을 인도하는 국제공산당에서 고려 민족혁명을 원조함은 역시 세계혁명을 운전함에 긴요한 도화선을 구함이니 민족혁명도 후원함은 물론이거니와 고려에 공산당이 있기 때문에 그 공산당의 정견에 따라 후원하겠다는 제 3국제공산당의 정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동휘 선생은 이 무렵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독립군 부대의 개편을 원한 것으로 보인다. (임시간부 중 이동휘, 홍도외 간부 6인은 원동에서 도착 전이었다고 한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kd&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kd_035_0010&position=-1
이르쿠츠크파에서는 교섭단원의 동의만으로 볼셰비키 정부 군부에 교섭하여 군대에 대한 공급을 5월 15일까지 연기한 것으로 주장하지만, “잘 된 것은 자기가 다 한 것”이라 말하는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인지라 전부 믿을 수는 없으며,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 문서에 따르면,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한인 대표중 일부가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독립군 2,500여명에 대한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나온다.
김철수, 이지택 등이 은거하였다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표현이다. 김준엽, 김창순 등과의 인터뷰를 비롯하여, 신문 잡지 등과도 줄기차게 인터뷰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편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일부 인사들의 주장은 오늘날 공개된 일본, 러시아의 기록물들과 대조하면 상당히 다르다.
이르쿠츠크 독립군 부대의 반발
그리고 이르쿠츠크 독립군 부대에서도
류동열, 이청천 외에도 채영, 이다물, 황하일, 송세주, 김표돌 등 14명 이상이 오하묵 등의 전횡에 반발하기 시작한다.
자유시 참변이 반발의 원인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1922년 1월 극동인민대표대회
1922년 1월 21일경부터 2월 2일경까지 러시아 서울인 모스크바와 산크트피졔르부르크에서 ‘극동인민대표대회(Съезд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х и революционных организаций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가 개최된다. 혹은 ‘동양인민대표대회’라고도 한다.
한국의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등 독립운동관계자들이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운동 방향을 토론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 대회의 참석자는 대략 150명 정도였으며, 한국대표단은 여운형, 이동휘, 김규식, 000 등 23개 단체 52명 정도로 알려졌다.
다수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고 러시아 내전이 안정화되기 시작할 무렵의 러시아가 한국의 독립운동과 사상계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러시아 공산당 중앙의 지도하에 코민테른(제3 국제공산당)이 개최한 이 대회에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인 레닌, 트로츠키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장 : 지노비예프
코민테른 총비서 : 사파라프
동양비서부장 : 슈먀츠키 (퇴진결정에 반박하기 위해서 온 것으로 보인다)
등이 참석하였다.
러시아내전에 참여한 중국계 파르티잔 부대
유명한 고려인 역사학자 박바리스, 혹은 B.D. 박
(1931년 1월 4일 소련 블라디보스토크 출생. 2010년 12월 24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작고)
이 대회 기간중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중국•일본 등의 대표들과 한국 대표들의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지도자 레닌, 코민테른 총비서 사파라프(Сафаров),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 김규식, 여운형, 구오남, 홍범도, 일본대표 센카타야마(片山潜), 중국대표 왕, 인도대표 등의 만남이 있었고, 한국측 통역사는 최고려였다.
1922년 2월 17일경
이르쿠츠크의 한국인 여단을 고쳐 특립 연대로 줄이고 연대장은 오하묵이 군정위원장은 박승만을 그대로 임명하였다.
그 무렵 근무 장교가 137명, 군인 총수가 1,451인이었다고 한다. (병노자를 제대시켰다고 한다.)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기를 한국인 독립군 여단을 다시 연대 편제로 줄인 이유는 처음부터 여단 병력 규모에 부족한 군인수로 여단을 편성하는 것은 허장에 불과하고,
또 기관 시설 및 공급상 어려움을 감안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세계 신문상 보도와 같이 몇천만여명의 기민(飢民)이 도로에 전전하는 그 지대에서 검정떡 한쪽이라도 고려인들에게 여유롭게 주지 못할 것이며,
세계혁명을 원조하는 볼셰비키 정부가 아니면 군복 한벌을 고려 군대에 지급할 리가 만무할 것이라 한다.
이르쿠츠크 독립군 교육의 어려움
즉 대기근과 경제침체에 시달리던 러시아 볼셰비키 측의 독립군 병력 감축 요구가 있었던 것이다.
대략 1921년 8월말경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여 10월 28일경 군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교육에 나섰을 때는 이미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겨울이었고 야외활동이 불가능한 시기였다.
1922년 2월 17일경 한국인 여단을 연대로 축소하기까지 제대로 된 군사 교육이 불가능하였고 사상 교육과 한글•러시아어 교육에 집중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기를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독립군 부대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것은 양심상 고통이 있는 시기였고
이와 같은 형세에 있음에도 원조를 주려는 볼셰비키 정부와 원조를 받으려 하는 고려군대 서로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만 하는 것이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성공이후 세계를 놀라게 한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정신상 지도를 받는 일반 교육은 만족할 수 있었으나, 몇 년간의 내전에 따른 대기근 시기 식량 등의 공급은 원활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무렵 볼셰비키 러시아도 유럽쪽의 내전은 끝난 형편이었으며, 동시베리아 지역의 일본군 철군만이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군인수를 줄여 생업에 투입하여 수년에 걸쳐 급감한 경작지 등을 회복하고 산업생산을 복구하려고 노력하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물질상 공급에 대한 경비 축소를 연구함도 러시아 볼셰비키의 지도를 받아야만 했던 이르쿠츠크파로서는 어쩔 도리 없이 따라야만 했던 것이다.
즉 이르쿠츠크에서의 독립군 병력 감축은 러시아 대기근에 따른 식량난과 경제침체, 일본과의 평화교섭 등 때문이었다.
1925. 1. 20. 일경 북경에서 소련과 일본 대표간의 조약 체결
첫댓글 여단장 오하묵이 이끈 독립군 부대가 러시아 대기근과 겨울이라는 곤란에 부딪치군요 독립군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고 러시아 볼셰비키 측의 독립군 병력 감축 요구가 있었군요 이르쿠츠크에서의 독립군 감축은 러시아 대기근에 따른 식량난과 경제침체 일본과의 평화교섭 때문이었군요
예. 그렇다고 합니다..
러시아도 불행하던 시기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