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서부 전투
북한군은 창녕-영산 축선을 통해 대구-부산 간 美 제8군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부산으로 진출하려 했다. 진주-마산 축선에서는 부산의 목에 해당하는 마산을 점령한 뒤 부산으로 진출하여 전쟁을 종결짓고자 했다. 북한군은 1개 기갑여단, 1개 자주포 대대, 각종 포병의 지원을 받는 5개 보병사단을 창녕-영산 전투와 마산 서부 전투에 투입했다.
美 제25사단이 수비하는 마산 정면에서는 7월31일 심야, 북한군 6사단과 제7사단이 공격을 개시했다. 북한군 제7사단은 7월에 新編(신편)된 사단이었다. 美 제25사단은 곳곳에서 돌파되어 후방에까지 침투했다. 제25사단은 예비인 제27연대를 마산의 서쪽 鎭東(진동)에 투입하여 근접항공지원 하에 반격을 시도했지만, 戰況(전황)은 산지 쟁탈전의 양상을 드러내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러는 사이에 적의 게릴라에게 昌原(창원) 무선중계소가 습격되고, 한국신문협회의 馬山(마산) 지부장이 남로당 마산위원장인 것이 발각되기도 했다. 마산교도소 직원 7명이 남로당원으로 정보를 흘리고 있는 사실이 드러나는 등 불온한 공기가 마산을 뒤덮고 있었다. 이에 킨 사단장은 당시 부산에 이어 경남 제2의 도시였던 마산의 시민 12만 명을 강제 疏開(注: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시키는 것)시켰다.
마산-진주 전투에서의 미군의 피해는 컸다. 오키나와에서 건너온 美 제29연대는 전투력이 감소되어 美 제25사단 예하의 제27연대와 제35연대에 흡수 편성되었다. 美軍 중 가장 전투력이 약하다고 평가된 부대는 흑인만으로 구성된 제24연대였다. 제24연대는 연대장(화이트 대령)과 몇몇 장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흑인인 ‘검은 군대’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이 부대는 7월 예천전투에서 전지를 버렸고, 8월 戰鬪山(전투산) 일대의 전투에서 戰果(전과)도 없었을 뿐 아니라 9월1일 함안전투에서는 2개 대대가 분산되어 작전에 차질을 빚었다. 제24연대는 전투시 언제나 돌파당하여 상급부대 작전을 망치기 일쑤였다.
화가 난 킨 사단장은 8군사령관에게 이 연대를 교체해달라는 건의를 했다. 제25사단은 8월31일부터 9월 초에 걸친 마산 서부 방어전에서 사단장의 과감한 작전 지휘와 병사의 勇戰奮鬪(용전분투)로 방어선을 유지했고, 강력한 포병화력과 농밀한 항공지원으로 敵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9월5일 무렵, 북한군은 공세 의지를 상실하고, 6일에는 주력이 南江(남강) 북안으로 철퇴했다. 그 결과, 美 제25사단은 9월7일 이후부터는 옛 진지의 대부분을 회복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미군이 왜관-창녕-영산 전투에서 낙동강 최대한 이용해 성공했다면, 진주-마산 전투에서는 西北山(서북산)을 중심으로 한 마산 북서쪽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북한군의 파상공격을 저지했다.
기계·안강·포항전투
8월31일 심야로부터 敵 제1군단의 공세가 시작되어 미군이 苦戰(고전)하고 있던 무렵, 부산교두보의 북부인 국군 제1군단 정면에서도 적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9월2일 밤, 북한군 12사단은 杞溪(기계) 남측 수도사단(宋堯讚 대령)의 진지를 돌파해서 安康(안강)을 점령했다. 북한군 제5사단도 포항 정면에서 국군 제3사단(李鍾贊 대령)을 밀어내고, 포항을 점령했다. 동부전선은 또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美 제8군은 예비인 美 제24사단을 투입하고, 사단장 처치 소장에게 이 방면의 한미군을 통괄 지휘하게 했다. 또 육본은 그 직할인 제3사단을 제1군단에 배속했다. 북한군은 계속 남진, 안강 남쪽에서는 毘季峰(비계봉)의 쟁탈전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9월8일에는 수도사단과 제3사단의 틈새로부터 1개 연대 규모의 敵이 침투, 후방의 雲梯山(운제산)을 점령했다. 南下하는 북한군에 대해 포항 정면에서는 제3사단이, 경주 정면에서는 수도사단이 敵들을 포위·고립시켜, 敵의 전력을 소진시켰다. 11일, 국군은 빼앗긴 고지들을 모두 탈환했고 16일에는 攻勢移轉(공세이전)으로 들어갔다.
수도사단은 9월18일 安康을 탈환하고, 어래산-445고지-145고지-236고지를 연하는 선 부근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敵 제12사단은 방어에 유리한 어래산-445고지-236고지 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완강하게 저항했다.
국군 제18연대는 어래산 점령을 시도한 지 여섯 번 만에 고지를 탈환하고, 북쪽의 봉계동까지 진출했다. 이에 퇴로가 차단된 445고지와 190고지의 敵은 저항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445고지를 공격하던 기갑연대는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면서 기계를 탈환했다.
美 제1기갑사단의 다부동 상실
多富洞(다부동)에서는, 8월 말에 국군 제1사단으로부터 방어구역을 인계받은 美 제1사단이 적의 강습에 고전했다. 제1기병사단은, 영산 정면을 수비하는 美 제2사단에 대한 적의 압력을 줄이기 위해 2일부터 반격을 개시,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특히, ‘9월 공세’시 북한군은 공격개시 시간을 일몰 후 또는 초저녁으로 정했다. 이는 북한군이 다음날 새벽까지 공격부대가 아군 진지 전방 100~150m 거리까지 접근하여 공중에서 관측할 때 피아 구분을 할 수 없도록 하여 유엔 항공기와 포병 사격으로부터의 피해를 방지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3·제13·제1사단의 공격에 의해 대번에 다부동이 점령되어, 제1기병사단은 5일 밤 후방 8km 의 동명면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美 제8군사령부의 중요 機材(기재)가 부산 부근까지 내려간 것은 이때였다. 이런 위기에서도 美 제1기병사단은 국군 제1사단과 연휴해 敵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으며 戰線을 유지하다가 16일에는 攻勢移轉(공세이전)을 맞이했다.
영천전투
全전선에 걸쳐 위기적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충격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북한군 제2군단의 左翼(좌익) 공격부대인 제15사단에 의한 永川(영천) 돌파였다. 영천은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서, 中央線(중앙선)과 大邱線(대구선)의 分岐點(분기점)이다. 적이 영천을 점령할 경우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의 분리뿐만 아니라 아군 유일의 東西(동서) 보급로가 차단될 위험이 있었다. 영천 정면은 국군 제1군단의 좌익으로 제8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다.
국군 제8사단은 9월2일 밤에 개시된 敵 제15사단의 공격은 저지했지만, 3일에는 우익의 제16연대가 무너지고, 4일 오후에는 영천 북방 12km까지 밀리고 말았다. 5일 심야, 敵 제15사단은 豪雨(호우)를 틈타 야포와 박격포 160여 문의 지원 하에 전차 5대를 앞세워 南進(남진)을 계속했다. 국군 제8사단은 중앙부와 우익이 붕괴, 영천의 시가지 바로 앞까지 깊게 돌파되었다. 6일 未明(미명)에는 영천이 함락되었다.
이때 육군본부는 지금까지 제1군단 예하에 있었던 제8사단을 제2군단(劉載興 준장)에 편입했다. 29세의 劉載興 준장의 어깨에 한국 존망이 걸리게 되었다. 바로 이런 시점에 북한군 내부에서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兵法(병법)에 “강을 건널 때는 말을 갈아타지 않는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북한군 제15사단장이 갑자기 朴成哲(박성철) 소장에서 趙光喆(조광철) 소장으로 바뀌었다. 조광철의 직전 보직은 敵 제2군단 포병副사령관이었다. 박성철은 1970년대에 북한의 내각 부수상이 되어 김일성의 특사로 청와대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아직도 그의 경질 이유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어떻든 영천 공방의 긴요한 시기에 양군의 주역이 교체되었던 것이다.
영천 함락과 필사의 탈환
9월5일 오후, 劉載興 군단장은 팔공산을 지키고 있던 제1사단, 新寧(신녕)을 지키고 있던 제6사단으로부터 1개 연대씩 뽑아 제8사단에 배속시켜 영천을 지키고, 이어 반격한다는 작전을 구상했다. 제1·제6사단 모두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영천을 빼앗기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형편이었다. 당시, 영천은 인구 2만 5000명이었지만 교통의 요지였다.
劉 군단장은 당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차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 美 제8군과 제1기병사단을 찾아가 전차의 지원을 간청했다. 그러나 긍정적 답변을 얻지 못했다. 이미 마산, 영산, 왜관, 안강, 포항 등 이르는 곳곳마다 부산교두보는 뚫리고 있있다. 이런 위기에 美 8군에게는 이미 예비부대가 없었다. 미군은 부산으로부터 철퇴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던 만큼 좋은 반응을 얻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워커 사령관은 제8군사령부의 기간요원만 대구에 남기고, 나머지를 부산으로 이동시켰다. 5일, 육군본부도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전했다. 데이비드슨 라인으로의 철수도 거론되었다. 데이비드슨 라인은 미군이 철수에 대비해 울산 북방에 설정한 선이다.
劉 군단장은 탱크 지원을 필사적으로 호소하던 중, 美軍의 모욕에도 견뎌내야 했다. 이런 곡절 끝에 다음날의 단 하루만 전차 5대를 지원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러는 사이에도 북한군의 진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5일 밤, 적은 호우를 뚫고 영천시내에 침입, 제8사단의 중앙과 右翼(우익)을 격파했다. 6일 새벽, 영천 시가지를 점령되어 美 제8군은 충격에 빠졌다. 이제 끝났다고 체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6일 아침, 미군의 전차 1개 소대(5대)가 도착하면 劉 군단장은 제8사단 공병대에 영천 탈환을 명했다. 북한군은, 영천에 처음 나타난 미군의 최신형 M-46패튼 전차에 경악했다. 영천 탈환한 6일 오후, 제1·제6사단으로부터 증원부대가 도착하자, 劉 군단장은 제1사단 제11연대를 영천 남쪽에, 제6사단 제19연대를 영천 북쪽에 배치하고, 북한군의 저지를 명했다.
8일 오전 11시30분, 전차 40대를 앞세우고 밀어닥친 적에게 다시 영천을 내주고 말았다. 워커 중장에 따르면, 맥아더가 영천 방어에 가망이 없어 보인다면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고려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군 중 2개 사단과 정부인사 및 민간인 등 10만 명을 西사모아諸島(제도)에 망명시키는 案(안)까지 검토되었다는 것이다.
제8사단은, 영천 북쪽에 제21연대와 제19연대, 영천에 사단 공병대와 제5연대의 일부를 배치함과 함께 영천 남쪽에는 제11연대를 배치해서 대구 방면에의 돌파저지선을 형성했다. 또 전력이 감소된 제16연대와 제3연대의 일부는 예비로서 후방에서의 정비를 명받았다.
대구인가, 경주인가? 북한군의 大실책
북한군 제15사단은 영천 → 대구 인근 河陽(하양) → 대구로 가는 경로와, 영천 → 阿火(아화)고개 → 경주로 가는 것 등 두 방향을 선택할 수 있었다. 영천에서 대구까지는 34km, 경주까지는 28km 거리였다. 敵 제15사단은 일거에 대구로 향했다. 만약 왜관·다부동 방면에서부터 끼고 들어갔다면 대구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부산교두보는 붕괴되었을지 모른다.
아화고개. 지금 그 근처에는 경부고속도로의 慶州(경주)터널이 뚫려 있다. 아와고개를 넘으면 바로 玉門谷(옥문곡)이다. 1500년 전 서라벌을 기습하려던 백제의 특공대가 숨어 있던 군사적 요충이었다. 玉門谷(옥문골)의 백제 특공대는 선덕여왕이 파견한 대장군 金閼川(김알천)에 의해 섬멸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라벌이 신라의 王都(왕도)였던 시절의 얘기이다. 낙동강 방어전 당시 美 8군사령부의 소재지는 대구였다. 어떻든 북한군은 대구가 아니라 경주를 지향했다. 왜인가?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 목표가 당초부터 경주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敵 제2군단의 제8사단은 하양을 향해 공격 중이었다. 경주가 목표라면 제8사단과 제15사단의 공격은 전혀 별개로 결행된 것으로 되어버리고 만다. 목표의 선정을 놓고 군단과 前 제15사단장 박성철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을까, 병참선의 확보에 위험이 느껴졌을까. 대구와 경주의 전략·전술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왜 이렇게 천박했을까. 지금으로서는 수수께끼이다. 결국, 북한군은 千載一遇(천재일우)의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북한군 탱크, 휘발유 떨어져 각개격파 당해
육군본부는 각지로부터 가능한 병력을 끌어 모아 영천에 투입했다. 이들 부대는 영천 남쪽 4km의 임포동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또 일부는 영천 쟁탈전을 전개하는 등 방어선을 구축하다가, 드디어 반격의 轉機(전기)를 노렸다. 9월9일, 제2군단은 드디어 총반격을 개시. 영천 북쪽의 제21연대와 제19연대는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했다. 한편 영천 남쪽 임포동에서는 제5연대를 선봉으로 삼아 모두 5개 연대가 반격으로 전환했다. 북한군에게는 반격을 저지할 힘이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敵 전차는 휘발유가 떨어져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돌파에 성공하고서도 증원부대와 보급이 뒤따르지 못해 오히려 국군에 포위당해 각개격파되었다. 10일 이후 ‘영천 위기’가 해소되면서 유엔군의 전면 철수는 백지화되고, 이때부터 반격의 전기가 도래했다.
영천의 섬멸전은 착착 진행되어 13일까지에는 북한군 제15사단을 격멸하고, 거의 당초의 전선을 회복했다. 전투 종료 후 북한군의 전사자는 4000 명, 포로는 309 명에 달했다. 국군은 전차 5대, 장갑차 2대, 차량 85대, 각종 포 14문, 화기 2327정을 파괴 또는 노획했다.
북한 제15사단은 완전히 전력을 상실하고, 국군은 부산교두보를 지켜낼수 있었다. 북한군이 한국의 들판에 자라고 있던 벼를 추수해 먹을 수 있는 시기까지 버티지 못한 것은 국군과 유엔군에게는 큰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생포된 敵 제15사단 소속 軍官(군관)은 “김일성이 직접 수안보와 김천, 두 곳에 나타나 인민군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들에게 9월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전했다”고 밝혔다.
속출하는 敵軍 도망자
북한군 檢察局(검찰국)이 만든 ‘拘留人(구류인)명부’라는 제목의 40쪽 짜리 등사판 명부가 있다. 미군 北進(북진) 시 노획한 적의 문서이다. 1950년 5월25일부터 동년 10월10일까지 군규위반으로 체포된 600여명의 병사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태반이 도망에 의해 체포된 된 자들이다. 그것도 8월 이후 급증하고 있다. 도망에 성공한 병사는 수십 배인 1개 사단 병력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다. 예컨대 어느 병사는 1950년 7월에 입대하여 8월25일에 도주했다가 체포되어 재배치되었는데, 9월14일에 다시 도망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영산 방면에 전개한 敵 제9사단 통신대대의 정치담당 副(부)대대장은 8월31일의 ‘정치보고’에 이렇게 썼다.
<8월29일의 공습에 새 대원 3명(非당원)이 행방불명 되었다.
8월30일의 공습에 무전차가 파괴되어 器材馬車(기재마차)에 배치된 새 대원 4명이 공습에 겁을 먹고 행방불명되었다(그 중 1명은 당원).>
도망자 激增(격증)에 애를 태운 김일성은 8월 초(일자 미상) 제81호 명령이라는 것을 발효했다. 이것을 위반하면 총살에 처해졌다. 이것은 구두명령으로 ‘탈취 문서’ 중에서도 활자화된 것은 전무하다. 그러나 부대 내부의 극비문서 중에 많이 언급되어 상당히 맹위를 떨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노획된 적병들의 수첩에 메모되어 있는 바에 의하면 81호 명령의 골자는 이렇다.
<1. 모든 부대와 부대장은 명령받은 지역과 자기 진지로부터 1보도 퇴각할 수 없다.
2. 모든 비겁자를, 전장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자를 직위 고하를 불문하고 그 자리에서 총살할 것.>
이 81호 명령이 하달된 이래, 즉결 총살되는 풍조가 퍼져 병사들은 동료가 들이대는 총구의 공포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에 의문을 품는 분위기도 만연했던 것 같다. 무자비하게 명령을 관철하라는 지령도 있었다. 북한군 제9사단 문화부사단장 최달원은 8월28일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모든 군무자들에게, 적의 포화력과 항공폭격의 곤란한 전투상황에 있어서 최고도의 완강성과 대담성으로써 실의와 비겁과 정지와 후퇴를 모르고,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조국통일의 완수에 바치도록 동원할 것. 전투 비겁행위는 엄히 처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단은 곧 총살이다. 그들은 이 처단을 당 조직과 民靑(민청) 조직을 통해 집행하라고 명했다. 북한군의 정치부원들에 대해 “전투도망자를 무자비하게 처단하는 활동을 주저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북한군 병력의 상당수는 동료의 총에 의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낙동강 방어전투의 현장에 敵의 시체가 겹겹이 쌓이게 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