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셔온 글입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
2006/01/13 09:23 http://blog.naver.com/bhjang3/140020908919
한시 분석의 여러 국면에 대한 고찰 -김시습 <無諍碑>의 분석 사례를 중심으로- 沈慶昊* Ⅰ. 머리말 한시는 한문학의 꽃이라고 말한다. 감정과 사상을 절제된 언어 형식으로 담아내었기에, 참으로 매력적이다. 한국 한시는 중국 한시의 형식과 기법을 수용하면서도 독특한 형식과 기법을 모색하고 독자적인 예술성을 구현하였다. 단형이든 장형이든, 한시는 대체로 절제된 언어 형식으로 감정과 사상을 드러낸다는 점에 미학적 특성이 있다. 한시보다 짧은 형식으로 일본의 하이쿠[俳句]가 있지만, 하이쿠는 분위기의 제시와 연상에 주력하므로, 한시처럼 완결된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지 못한다. 아니, 전달하려고 의도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문학작품이 그러하듯, 한시도 문학적 내용과 문학적 형식의 통일로 이루어진다. 문학적 내용이란 예술가가 대상과의 특정한 관계를 의식하고, 대상과 맺는 관련이나 태도를 작품 속에 표현한 것을 말한다. 문학적 형식이란 작품의 각 부분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내적 구조와, 이념이나 정서를 지양하고 표상하게 도와주는 외적 구조를 통틀어 말한다. 문학작품에서는 문학적 내용이 문학적 형식을 규정하는 구실을 하지만, 문학적 형식은 내용의 전개를 도와주거나 때로는 그것을 방해하면서 역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므로, 문학작품의 미학적 성취를 고찰할 때에는 반드시 그 형식을 고려하여야 한다. 한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시의 미학적 특성을 논할 때에는 형식이 지닌 양식성과 일탈성에 주의하여, 문학적 내용이 그 형식을 통해 충분히 전개되었는지 아니면 제약받았는지 살펴야 한다. 따라서 한시 분석에서 형식의 문제를 논하는 일은 문학적 형상이 내용과 형식의 통일과 긴장 속에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그런데 시의 내용에 대한 분석도 결코 단층에서 이루어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사적과 역사적 상황을 고려에 넣어 의미를 분석하는 일, 유사한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노래한 같은 시기의 다른 작가와 대조를 통해서 의미를 분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나아가, 그 시가 지니고 있는 이면의 주제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사상사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이 글에서는 김시습의 <無諍碑무정비>라는 작품의 분석 사례를 통하여, 한시 분석의 여러 층위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이 시는 김시습의 사상적 고뇌를 이해할 때에 매우 중요한 시라고 생각되는데, 그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 한시의 소재와 내용은 실로 무한하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한시는 소재로 삼아, 진지한 탐색을 하고, 의미 있는 해석을 하여 왔다. 그런데 한시는 제목을 이해하면 그 시의 내용을 반 이상 파악한 것이라는 옛 어른들의 가르침이 있다. 시의 제목 속에는 그 시의 소재가 드러나 있기에, 시의 제목을 이해하면 그 소재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전개되는 시의 내용을 파악하기 편리하다. 한시를 소재별로 보면, 자연물이나 생활 주변의 사물을 노래한 시(詠物詩영물시), 역사를 노래한 시(詠史詩영사시), 역사를 노래하되 무상감을 주로 드러낸 시(懷古詩회고시), 옛 일을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시(故事詩고사시), 개인의 회포를 표출한 시(詠懷詩영회시), 사회의 문제를 다룬 시(社會詩사회시), 풍속을 노래한 시(紀俗詩기속시), 철학적 내용을 다룬 시(道學詩도학시), 불교적 깨달음을 다룬 시(禪詩선시), 특정 인물을 그리워하여 지은 시(懷人詩회인시), 서한을 대신하거나 기념을 하여 주는 시(贈答詩증답시), 여성의 정감이나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시(艶詩염시) 등등, 생각나는 것만 거론해도 대단히 많다. 김시습의 <無諍碑무정비>는 비문을 소재로 하면서, '무쟁대사(화쟁대사)'의 일생사적을 회고하는 시이므로 회인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생전에 자신과 교류가 있었던 사람을 소재로 한 것은 아니라 작고한 사람을 추모하는 시이므로, 협의의 회인시가 아니라 광의의 회인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해 김시습은 용장사에서 29세의 봄과 여름을 지냈다. 이 무렵에 창작한 <無諍碑무정비>라는 시에서 김시습은, 불법의 이치를 글로 읽어 터득할 수는 있지만 진리를 진정으로 체득하지 못함을 고백하였다. 그대는 보지 못했나 君不見 군불견 新羅異僧元旭氏신라이승원욱씨 剔髮行道新羅市척발행도신라시 然而密行大無常연이밀행대무상 騎牛演法解宗旨기우연법해종지 我曹亦是善幻徒아조역시선환도 其於幻語商略矣기어환어상략의 이 시의 첫구에서 말하는 '신라이승 원욱씨'는 元曉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무쟁대사'란 곧 원효의 追諡인 '和諍大師'와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만 元曉를 元旭이라 한 것은 '曉'와 '旭'이 다같이 아침해를 뜻하는 글자라서 바꾸어 쓴 듯한데, 왜 꼭 그렇게 바꾸어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無諍碑는 경주 분황사에 있었던 원효 대사의 비인 和諍大師碑를 말한다. 원효는 고려시대 때 菩薩이나 聖師라 불렸다. 대각국사 義天은, 원효의 오른쪽에 나아가는 先哲이 없다고 하였고,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馬鳴이나 龍樹라야 필적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마침내 고려 숙종 6년(1101)에 원효와 의상에게 國師의 호를 추봉하면서 두 분을 동방의 성인이라고 하였으며, 원효에게는 '和諍'의 호를 追諡하였다. 이때 진영이 그려지자, 金富軾은 <和諍國師影贊>을 지었다. 70년 뒤 명종(1171∼1197) 때에는 崔惟淸(1095∼1174)의 <화쟁국사비명>이 분황사에 세워졌다. 또한 원효의 유법을 계승하는 海東宗 혹은 芬皇宗이 12세기 중반에 종파로서 확립되어 있었다. 화쟁국사비는 정유재란(1597년) 때 분황사가 재가 될 때 파손된 듯하여 대좌만 남았고, 1976년에 작은 조각이 발견되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동금석서}에 40여자의 탁본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원효의 사적을 적은 비문으로는 또, 신라 애장왕(800∼808) 때 高仙寺 삼층석탑 부근에 세워진 誓幢和尙碑가 별도로 있다. 그 파편은 1915년에 閼川 상류 暗谷里에 위치한 고선사 터에서 발견되었으며, 비 조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효는 나이 서른 넷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려다가 고구려 군에게 붙잡혀 돌아왔고, 마흔 넷에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려다가 도중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서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라고 깨달아 그냥 돌아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김시습은 <무쟁비> 시에서, 원효가 당에 들어가 불법을 배웠다고 하였다. 원효가 중국에서 불법을 배웠다는 전승도 있었던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원효의 전기가 <元曉不羈>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또 소를 타고 거리를 다니면서 빨래하는 여인에게 말을 걸고,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먹었으며, 돌아간 사복의 어머니를 장사지냈다. 그런가 하면 분황사에서 {화엄경소}를 쓰고 황룡사에서는 사자후를 토하였다.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이후로는 속인의 의복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小性居士라고 칭하였는데, 광대의 짓을 모방하여 큰 박을 舞弄하면서, {화엄경}의 사상을 부연하여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 人, 一道出生死)"고 주장하였다. 곧 철저한 자유가 衆生心에 내재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그 스스로 그러한 자유인으로서 거리에서 <무애가>를 부르고 무애 춤을 추면서 교화하여, 가난하고 몽매한 무리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하게 되었다. 李仁老(1152∼1220)도 원효가 無 行을 통하여 대중을 교화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원효 大聖은 백정 노릇하고 술장사하는 시중 잡배들 속에 섞여 지냈는데, 한 번은 목이 굽은 조롱박을 어루만지면서 저자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無 라고 이름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 호사가가 금방울을 위에 달고 채색 비단을 밑에 드리워 장식하고 이를 두드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물러갔다가 하였다. 그리고 經論에서 偈頌을 따와서 무애가라고 하매, 밭가는 노인까지도 이것을 본받아 유희로 삼았다고 적었다. 김시습의 <무쟁비>에서 거리의 아동과 부녀자도 친숙하게 되어 원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무개라고 하였다고 적은 것은, 원효를 중국의 馬祖(709∼788)에다가 견준 것이다. 마조는 당나라 什 의 키 장수 집 아들이었는데 득도하여 고향에 가자, 빨래하던 노파가 보고서 "저 애가 참 기특도 하군, 키 장수 집 아들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마조는 "고향에 와서 가르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군"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민중적인 사람이었음을 뜻한다. 사실 원효는 신라 불교에 가장 활력을 불어넣은 민중사상가였다. 원효는 광대의 노래에 무애가를 붙여 부르고 다니면서, 개인적인 깨달음을 강조하였다. 불교의 사상을 강렬한 국가의식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없었다. 한시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命意 구조, 詩趣·詩味의 깊이, 詩品의 높이일 것이다. 聲調나 押韻 따위는 末梢에 지나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 말초를 간과한다면 결코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한시는 형식에 따라 크게 고시(고체시)와 근체시(금체시)로 나뉘는데, 평측법과 압운법, 대우법 등을 익혀서 형식을 변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악부시는 근체시가 생겨나기 전에 성립되어 모두 고시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었지만, 근체시가 성립된 이후 문인들에 의해 擬作된 악부시나 악부의 풍격을 지닌 시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악부시는 그 나름의 전통에 근거하여 발전해왔다는 문학사의 실상을 고려하여 하나의 양식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김시습의 <무쟁비>는 일명 '君不見體'라고 불리는 칠언고시 형식이다. '군불견'의 세 글자가 첫 구에 붙어 있지만 이 체는 각 구가 7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칠언고시라고 불린다. 氏(상성 紙/평성 支) 市(상성 紙) 梓(상성 紙) 里(상성 紙) 易(거성 ) 子(상성 紙) 이 3개의 分段은 命意 구조와 관계가 있다. 제1 분단은 신라 승려 원효가 불법을 깨우친 뒤 '混同緇白'하면서 민간에서 불법을 선포한 일, 제2 분단은 원효가 {金剛三昧經論}·{大乘起信論疏} 등 100부 240여권이나 되는 저술을 남겨 후대 교학의 존경을 받은 사실을 서술하였다. 다음으로 제3 분단은 원효가 고려 때 追諡를 받은 사실을 서술하고, 자신은 불법을 논하지만 참된 진리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안타까움(혹은 불교적 진리와 자신과의 거리 확인)을 토로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시는 상성 紙韻을 本韻으로 사용하되 거성 韻을 통압하였다. 따라서 압운의 방식으로 보면 通韻詩이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主從通韻이다. 古詩는 역사적 발생 사실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수나라 이전에 沈佺期·宋之問의 성률론이 대두되기 이전에 나온 시를 지칭한다. 광의로는 {시경}과 {초사}까지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제외하고 태고의 가요로부터 양한·위진남북조 시기의 樂府·歌行 등을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청나라 沈德潛이 편찬한 {古詩源}에 수록한 시들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謝靈運이 개창하였다고 하는 근체시 형태의 고시이다. 이 고시는 對偶[對仗]를 사용하고 음률을 애써 갖추며, 한 편을 8구로 짜는 형식이다. 漢魏詩의 慷慨한 시정신을 회복하고자 하였던 명대 前後七子 가운데 한사람인 何景明은 사령운 시의 '시 형식이나 시어가 모두 대우를 사용한 것(體語俱俳)'을 비판하여, 고시의 법이 사령운 때문에 망하였다고 말한 바 있다. 셋째, 근체시 성립 이후라도 근체시의 율격과 달리 고풍을 모방하면서 의식적으로 새로운 형식을 추구한 시를 일컫는다. 이 신식 고시는 절구 같이 기승전결로 조직하지 않고 율시처럼 대우의 聯을 엄격하게 두지 않는다. 고시는 대부분 5언과 7언을 위주로 하지만, 5·7·3·4·6언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또한 근체시의 法을 따르지 않으므로, 통상 '不 '을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 즉, 사령운 류의 고시를 제외하고는 고시는 대부분 평측의 제한을 받지 않고 압운법도 비교적 자유롭다. 하지만 사령운 류의 고시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신식 고시에도 고시 나름대로의 압운법이 있어서, 本韻·通韻·換韻의 세 종류가 있다. 본운은 시 전체에 하나의 운만 사용하는(一韻到底, 一韻獨用) 것으로, 당대의 고시는 대부분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시 형식은 필력이 있어야 종횡한 가운데 直敍의 기세를 간직할 수 있다. 또 측성운의 칠언고시 가운데는 杜甫·韓愈·蘇軾의 예에서 나타나듯, 안짝[出句] 마지막 글자에 측성자를 두어 꿋꿋한 기격을 살리는 예가 있다. 통운은 인접한 운을 함께 아울러 쓰는 것인데, 한 글자의 운만 우연히 벗어난 偶然出韻, 운의 사용에 주종이 있는 主從通韻, 두 운을 대등하게 사용하는 等立通韻, 세 개 운 이상을 사용하는 통운 등이 있다. 한편, 환운은 의미 단락이나 가락의 변화에 따라 운을 바꾸어 쓰는 것으로, 2구 1전운, 4구 1전운(四傑轉韻之格), 隨意轉韻의 형태가 있다. 4구 1전운 형식은 초당에서 중당에 걸쳐 발달하였는데, 칠언고시에서는 서두에 운을 두 번만 쓰고 바로 환운하는 促起式, 마지막 부분에 운을 바꾸어 운을 두 번 쓰고 시를 종결하는 促收式을 쓰기도 한다. 명나라 복고파의 문인 何景明은 이 4구 1전운의 형식을 중시하였고, 조선조의 많은 시인들이 역시 이 형식을 선호하였다. 이 시 형식은 수식에 치우쳐 부화하게 될 염려가 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各句押韻한 시구들로 이루어진 栢梁體가 있다. 주로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1, 2구씩 지어 연결하는 聯句에 사용되지만, 한 시인의 한 작품 속에도 이용되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형식 논의에 비추어 김시습의 <무쟁비>의 句形과 韻屬을 살펴보면, 그것이 여타의 칠언고시와는 달리 매우 분방한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구형을 보면, 한 편을 8구로 짜고 대우를 사용하는 사령운의 고시 형식이 아니라 이른바 신식 고시의 형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앞서 말하였듯이 그 운속을 보면 세 개의 分段을 이루고 있다. 제1분단에서는 각 구마다 압운하는 백량체의 압운방식을 사용하였다. 제2분단에서는 짝수 째 구에 旨(상성 紙) 企(거성 )을 통압하여 칠언고시의 일반적인 격구 압운 방식을 취하되, 홀수 구에는 箱(평성 陽)과 常(평성 陽)의 동일 韻屬의 글자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곧 한시의 잡체시 가운데 하나라고 할 雙韻法을 취한 것이다. 이러한 압운 방식은 매우 이례적이다. 김시습의 {매월당집}을 전부 조사하여 보더라도 이와 같은 형식으로 지은 것은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 김시습은 '고시 19수'의 형식을 이용한 고풍 19수도 남겼지만 대부분의 고시는 신식(악부가행체 포함)를 따르고 있다. 그의 신식 고시는 본운의 예도 있고 통운의 예도 있다. 통운의 경우는 우연출운이나 주종통운이 대부분이므로, 의도적으로 통운을 하려고 한 것이라기보다 시상의 전개에 따라 우연히 본운을 벗어난 글자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김시습은 근체시에서도 落韻의 예가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압운을 검속하지 않는 작시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김시습은 환운의 고시도 많이 지었으나, 임의로 운을 바꾸는 방식을 주로 사용하였지, 특정한 규칙을 지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연환법을 간혹 사용하였지만 한 시 전체에 연환법을 관철시킨 예는 없다. 역시 시상의 전개에 따라 수의전운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한편 고시는 고시 특유의 리듬감 형성을 위해 동일한 글자나 어구를 자주 중복하기도 한다. 즉 고시는 근체시에 자주 보이지 않는 조사나 대명사, {시경}에서 흔히 사용된 허자(言·云·載), 혹은 복합어로 이루어진 부사어구(一何·何其·誰云·無乃·不如·那堪)를 쓰는 일이 많다. 그러나 김시습의 고시는 그러한 어구들을 '의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상의 전개에 내맡겨서 자유롭게 산문구를 사용하거나, 평소 익숙한 대로 근체시의 예처럼 정제되어 있는 시구를 사용하였다. 이 <무쟁비>에서는 근체시의 익숙한 구법을 주로 사용하고, 간간이 산문구를 사용하였다. "我曹亦是善幻徒, 其於幻語商略矣"는 산문구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이 <무쟁비>의 이 '자유스러운 고시 형식'은 조선후기에 고시의 형식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형식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던 것과 대조된다고 하겠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복고파의 고시와 악부가행체 창작이 참조되고, 새로운 시형식에 대한 실험이 다각도로 전개되면서 고시의 형식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다. 金昌翕이 장편 고시와 악부가행체를 실험한 것은 한시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그도 악부가행체에서 '성률'에 구속되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후기에는 악부가행체를 버리게 된다. 각 구의 장단이 일정하지 않고 환운을 사용하여 일견 자유스러워 보이는 시형식이 실은 일정한 '성률' 규칙에 의하여 구속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한편 丁若鏞에 이르러서는 오언고시와 칠언고시를 통하여 '억세고 뻣뻣하며 기이하고 굳세며 힘차고 크며 한가하고 깊으며 맑고 밝으며 일렁이는 듯 넘실대는 듯 한 음(蒼勁奇堀雄渾閒遠 亮動 之音)'을 만드는 것이 '성정을 도야하고 읊어내는(陶詠性情)' 시의 효능에 부합한다고 하되, 고시에는 고시 나름의 형식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즉 그는 칠언고시의 제 형태 가운데 환운식(연환식)과 일운독용식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며, '평·입·상·거성을 착종한다'는 것은 출구의 끝자와 운각, 그리고 다음 안짝구 끝자의 성조를 착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설은 王士禎(<王文簡古詩平仄論>)의 고시론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정약용은 칠언고시의 평측과 관련하여 왕사정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칠언고시의 평측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는 당송의 칠언고시들에서 실현된 평측법을 귀납적으로 분석하여 독특한 평측론을 정리하였으며, 자신의 시에서도 그러한 규칙을 준수하였다. 이렇게 정약용이 고시의 성률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논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의 고시는 성률 규칙을 무시한 완전한 자유시로 나간 것은 아니었다. 각 시인들의 고시를 살펴보면, 오언고시, 칠언고시, 환운의 잡운시가 일정한 성률 규칙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시의 작품이 역사 현실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해석하는 일을 文脈的 해석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문맥적 해석을 위해서는 작가의 삶의 궤적을 면밀하게 고찰하여야 한다. 김시습의 <무쟁비>가 지닌 문맥적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 시가 창작된 즈음에 김시습이 어떠한 행적을 보였는지, 傳記的 고찰이 필요하다. 1463년(세조 8년, 계미) 가을, 29세의 김시습은 서울로 올라갔다. 불교와 유교에 관련된 서적을 사서, 금오산으로 가져가 침잠하여 읽어서, 근본문제를 착실히 공부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는 서울에서 효령대군을 만나게 되고, 그의 요청으로 내불당에서 불경을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세조는 재위 3년 6월에 경상도 관찰사로 하여금 대장경 50부를 인출하게 하여 각 도의 대사찰에 나누어 소장케 하였다. 또 재위 7년 6월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고승 信眉·守眉·弘濬과 대신 尹師路·黃守身·韓繼禧 등의 주재로 불경을 간행하고 역경하도록 하였다. 그 자신도 국역과 구결에까지 참여하였다. 그 결과 {능엄경}·{법화경}·{금강경}·{심경}·{원각경}·{영가집} 등 주요 경전들이 국역 간행되었다. 금강반야경·법화경을 금서(金書)하게 하고 {지장경}·{범망경}·{기신론}을 金字로 베끼는 불사도 거행하였다. 또 영산회상곡을 만들고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본한 {월인석보}를 간행케 하였다. 어쩌면 김시습이 효령대군과 대면한 것은 그에게 불법을 전수하여 峻大師의 중개에 의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김시습은 18세 되던 1452년(문종 2년) 여름에 모친상을 마치고 과거 공부를 하기 위해 曹溪에 머물렀는데, 마침 거기에 錫杖을 머무르고 있던 峻上人에게서 불법을 배우게 된다. 이 사실은 <贈峻上人>시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준상인이 곧 涵虛堂 己和(1376∼1433)의 제자 弘濬이라는 설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 있다. 홍준은 효녕대군·信眉·學祖·金守溫과 함께 기화 선사의 문인으로, 이미 세종 말년에 왕실의 예우를 받으면서 법력을 넓혀 갔다. 세조 3년(1457) 무렵에는 군주의 비호를 받아 신미와 함께 기화의 {금강경오가해설의}를 {금강경오가해}에 편입하여 간행하였고, 신미와 함께 {선종영가집}을 교정하였다. 당시 국가적 불경 언해사업에 참여하고 있던 그가, 왕실의 호불 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김시습을 효령대군에게 소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마침 그때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해서 {묘법연화경}을 언해하려 하고 있었다. {묘법연화경}은 고려와 조선에서 가장 많이 필사되고 간행된 불교 경전으로, '법화경'이라고 줄여서 말한다. 김시습은 1463년 가을,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열흘 동안 내불당에서 열흘 남짓 역경사업을 돕게 된다. 당시 {묘법연화경}의 간행에 간여하였던 인물로는, 鈴川府院君 尹師路, 의정부 좌찬성 남원부원군 黃守身, 예조판서 延城君 朴元亨, 호조판서 창녕군 曹錫文, 병조판서 茂松君 尹子雲, 공조판서 金守溫, 仁順府尹 原城君 元孝然 등이 있었다. 1463년 9월 2일에 윤사로가 上箋文을 올렸다. 당시 김시습은 군주가 불교를 숭상하는 것에 대해 그저 찬양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불당에 안치된 순금 불을 바라보면서 그는 이렇게 읊었다. 여수의 교룡이 요기를 내뿜고 麗水蛟龍吐 氣 南蠻 霧亦可畏. 김시습은 작은 순금 불에 절하며 국가의 안녕함을 비는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사금을 채취하고 백성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고, 또 불상을 주조하느라 만금을 허비하였으니, 그 불상이 과연 고통받는 백성을 위로하고 살려내어 줄 수 있겠는가? {연화경} 번역을 구중 심처에서 하니 蓮經譯自九重深 一句頻迦出衆禽. 김시습은 이 시의 뒤에 자신의 감회를 적었다. "한나라의 등란과 당나라의 현장은 불경을 한역한 공이 있다. 하지만 등란은 '胡人'이었고 현장은 불경을 해석하는 중으로서 한 때에 자랑거리였을 뿐이다. 그들에 비하여, 우리 군주(세조)는 文治와 武功이 역대의 제왕보다 뛰어나며, 정무를 보시는 여가에 백성을 제도할 목적으로 직접 불경을 번역해서 백성을 교육시키려고 하시니, 참으로 천고의 제왕 가운데 다시 듣지 못할 업적을 이루었다." 이렇게 김시습은 세조의 불경 언해 작업을 극구 예찬하였다. 내불당에 역경에 종사할 때 세조가 송이버섯 5·6개, 포도 7·8송이, 율무 한 움큼, 팥배 7·8개를 차례로 보내온 일이 있었다. 그러자 김시습은 "주상이 몇 군데나 보내는가?"라고 中使(내시)에게 물었다. 내시는 "종실이나 戚里가 계절 음식물을 바칠 때마다 반드시 文昭殿에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는 이 곳으로 보내고 나서야 자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시습은 세조의 정성을 찬양하였다. 세조가 송이버섯, 포도, 율무, 배 따위를 보내 온 데 대하여 고마워하기보다, 세조가 먼저 선왕을 제사하고 부처를 봉양한다는 純孝와 純誠을 지녔다는 사실에 감동하였다. 김시습은 "지금의 주상은 내란을 크게 안정시키고 선대의 유지를 이어 받았으니 그 공덕의 아름다움은 만세에 전할 만한 것으로 사실상 천고에 한번 있을 만한 것이었다"라고 말하였다. 세조에 대해 그는 "회천의 소가 풀을 먹음에 익주의 말이 배부르듯이" 요순의 정치를 기대하였다. {맹자대전}은 {四書五經大全} 가운데 하나로, 세종 때부터 조선 유학의 기본 텍스트가 된 책이다. 또 {성리대전}은 역시 세종 때부터 성리학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는 데 가장 많이 참고가 된 책이다. 한편 {자치통감}은 세종 때 역사학과 정치학의 이론적 토대가 된 책으로, 세종 스스로 경복궁의 思政殿에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訓義를 달았다. 세종 때는 문학과 정치학을 나란히 발전시켰는데, 정치학의 기본 이념은 司馬光의 {자치통감}과 朱熹의 {자치통감강목}을 주요한 근거로 삼았다. 세종은 1421년(세종 재위 3) 3월에 {자치통감강목}을 鑄字所에서 간행하도록 명하고, 다음해 겨울에 집현전의 교정이 끝나자 1423년 8월에 하사하였다. 1434년(세종 16) 6월에는 '자치통감훈의'의 편찬을 지시하였고, 집현전 인원을 늘렸다. 김시습의 스승 李季甸도 이 일에 참여하였다. 1436년(세종 18) 2월 계해에 이르러 {資治通鑑思政殿訓義}가 반포되었다. 그 해 7월에는 다시 이계전과 金汶에게 {통감강목}에 훈의를 끼워 넣도록 지시하여, 1438년(세종 20) 11월에 {資治通鑑綱目思政殿訓義}가 병진자의 활자로 간행되었다. 통감사정전훈의}와 {자치통감강목사정전훈의}의 편찬에 스승 이계전이 직접 참여하였으므로, 스승의 학문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기 위해서라도 김시습은 {통감}을 철저히 공부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김시습이 역사를 노래한 시나 역사적 인물의 일대기를 쓴 글에서 이 {통감}의 정통사관과 절의관이 배어 나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김시습은 다시 경주로 내려갔다. 아마도 이때 남산의 용장골의 茸長寺 부근, 혹은 天龍寺 부근에 山室을 짓고, 이름을 金鰲山室이라고 한 듯하다. 그는 절의의 뜻을 더욱 굳혔으며, 결함세계를 응시하는 비통한 감정을 시로 토로하였다. 다시는 세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하지만 금오산실에서 일생을 마치려던 김시습의 계획은, 1465년(세조 11) 3월 그믐에 경주부 관원들이 찾아오면서 틀어졌다. 효령대군이 종마를 보내어 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하라고 종용한 것이다. 세조는 원각사에 雲水千人道場을 베풀고 승려들을 불렀다. 운수천인도량은 천명의 승려를 초빙하여 공양하고 법회를 여는 일을 말한다. 千僧供養·千僧齋·千僧會라고도 한다. 빈비사라 왕이 천명의 비구에게 공양하겠다고 약속하여, 그가 죽은 뒤 摩訶迦葉이 일천 명을 모아 經藏을 결집한데서 기원한다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군주와 귀족들이 자주 천인도량을 베풀었다. 세조가 천인도량을 베풀려 하자 여러 승려들이 모두 "이번 모임에 설잠이 없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세조가 김시습을 부르라고 명했다. 3월 그믐에 효령대군은 김시습에게 종마를 보내어 상경을 종용하였다. "성상께서 옛 홍복사를 중수하여 원각사라 명명하고 중들에게 낙성회에 모이도록 소집하였는데 내가 선사를 성상께 추천하였더니 성상께서도 경사스러운 모임에 참석하라고 명하셨소. 그러니 선사께서는 산중이나 계곡에서 먹고 마시던 마음을 풀고서 거절하지 말고 참석하시오." 날짜를 다투어 상경한 그는 천인도량에 참석해서는, 효령대군의 요청으로 讚詩를 지어, 당대의 현실을 聖代로서 인정하였다. 시가에 버려졌던 급원(절터)이 給園初 市街前 聖曆鴻圖萬萬年. 고위 관료들과 여러 문신들이 치하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김시습은 "온갖 정치를 제대로 하고 불교도 숭상하니, 백관들이 비로소 태평성대를 축하하네"라고 생각하였다. 세조가 지은 手契券을 두고 지은 시에서는 "불법을 널리 반포하여 요 임금 때와 같은 태평에 가깝고 (중략) "라고 하여, 세조의 치세를 인정하였다. 또한 대사면이 있자, "부처의 감식은 귀신같아 쉽게 알 수 없지만, 鷄竿의 혜택은 뭉게 구름처럼 피어오른다"고 하였다. 계간은 사면령을 내릴 때 닭의 목각을 장대에 높이 내걸었던 옛 풍습에서 나온 말이다. 이 무렵 김시습은 불교가 현세간에서의 실천을 중시하므로 그것이 유교의 치국의 이념과 조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즉각 금오산으로 돌아가지를 않았다. 세조가 불의의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에 대하여는 분노하였지만, 시대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다. 김시습이 <원각사 찬시>를 지어 효령대군에게 바치자, 효령대군은 그것을 즉각 세조에게 바쳤다. 세조는 그것을 보고서 "이 찬시는 매우 훌륭하다. 환궁하여 그를 인견할 것이니 그 때까지 이 절에 머물러 있게 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김시습은 세조를 만나지 않았다. "오직 산수나 즐기면서 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라고 술회한 말속에 은미한 뜻이 담겨 있다. 김시습은 백성들이 불교에 쏠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기 시작하였다. 세조가 왕세자에게 사리를 거두게 시키는 것을 보고는 시를 지어, "다만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시키지 않는다면, 천추의 이 즐거움도 크게 허물 될 것 없으리"라고 하였다. 불교에 의한 우민화 정책을 우려한 말이다. 이것은 뒷날 수락산에서 지은 논문 <松桂>나 <雜著·1>의 논조와 통한다. <잡저·1>에서 그는, 군주의 불교 숭상을 비판하고 백성을 근본에 두는 정치를 하여야 한다고 더욱 강한 어조로 논하게 된다. 즉 "불교를 믿음에는 손실도 있고 이익도 있다"라고 전제하되, 수나라 문제의 호불은 오히려 백성들에게 피해가 없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세조의 지나친 호불은 엄중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계하였다. 그래서 "옛날 고려의 태조는 도선의 도참술을 믿고서 삼한을 통합하여 5백년의 基業을 물려주었지만 그 이후 공민왕은 편조의 청담에 빠져 자신의 한 몸도 (중략) "라고 말하였다. 그는 세조의 호불 정책을 비판하였다. 세조의 정권에 대하여 아부하지도 않았다. 호불 정책은 대중의 삶을 피폐하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군주의 호불 정책에 따라 잇달아 이루어지는 불사는 결국 불교를 대중의 삶에서 유리시켜 군주를 생불로서 신격화하고 불사를 통하여 새로운 권력구조가 고착화하기 마련이었다. 김시습은 세간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이미 그는 원각사 낙성회 시의 서문에서, 달려가 치하하고 곧 돌아와 여생을 마치려는 것이 평소의 심경이었다고 밝혔다. 더구나 그는 세조에게서 仁政과 好佛의 균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금오산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김시습은 이른바 호국불교, 귀족불교와 결렬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무쟁비>에서 그가 추모하였던 원효와 마찬가지로 不羈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심에서 나온 것이리라. Ⅴ. 주제 사상의 논의와 평가적 해석 한시에 대한 해석은 주제 사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評價的으로 해석하는 층위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김시습의 <무쟁비>가 지닌 주제 사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평가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 시에서 김시습은 불법의 이치를 글로 읽어 터득할 수는 있지만 불교의 진리를 진정으로 체득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래서 불교교리를 幻語라는 자조적인 말로 표현하였다. 봄비 흩뿌리는 이, 삼월 春雨浪浪三二月 扶持暴病起禪房 김시습은 삶의 의미를 佛法에서 확인하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하지만 참된 나를 찾기 위해 좌선을 한다든가 公案을 본다고 한다면 승려들이 자신을 선승으로 규정하고 떠받들려고 부산을 떨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참된 나의 추구는 종파적 分相으로는 설명할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김시습은 이 봄에 영원한 방랑 길에 올랐다. 하늘이 그에게 허여한 59년은 고뇌의 나날이었고 보면 너무도 길었다. 하지만 자신의 참 모습을 찾아 나선 역정의 도달점까지는 아직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그는 자각하였다. 김시습은 최후의 도달점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기성의 사유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꾀한 자유인이이었다. 불교 내부의 각 종파의 차별상을 극복하려 하였을 뿐 아니라 불교의 內典만이 아니라 유교의 外典이 담고 있는 사상의 종파적 차별을 극복하려 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을 논할 때 서로 교통시켜 논하는 '格義'의 방법을 잘 사용하였다. 원효의 교학은 性相融會과 和諍思想으로 개괄된다. 즉 원효는 {十門和諍論}을 지어, 이설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하여 일승불교를 건립하고자 하였다. 그는 諍論이 집착에서 생긴다고 보고, 일체의 他義가 모두 佛義임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불교 내부의 서로 다른 사상에다 각각 그 존재할 수 있는 의의를 남겨 주는 敎判(= 敎相判釋)의 형태를 더욱 발전시킨 것처럼 여겨진다. 원효의 화쟁 사상은 그것을 뛰어넘어, 세속의 진리를 이중긍정하면서 동시에 세속적 생활에서의 외곬의 집착으로부터 해방할 것을 추구하는 이중부정의 모습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시습 자신도 어떤 특정한 종파가 절대 진리를 구현한다거나 지시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에게서 유교나 불교는 모두 부분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다. 김시습은 이렇게 말하였다. "禪의 이치는 아주 깊어서 다섯 해나 생각해서야 투명하게 깨우쳤다. 이에 비하여 우리 유학의 도는 본래 등급이 있어서, 건강한 사람이 사다리를 오를 때 한 발을 들면 곧바로 한 층을 올라가게 되는 것과 같다. 불교처럼 돈오해서 상쾌한 즐거움은 없지만, 여유 있게 차츰 젖어드는 맛이 있다." 이것은 유가의 입장에서 불교를 포섭한 논리이다. 그로서는 사실 종파적 分別識이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로서는 傳奇小說까지도 인간 삶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민간의 설화를 수집하고 허구를 가미하여 {금오신화}를 지었다. 그렇다고 그는 비분강개의 뜻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것조차 妄念이라고 인식하면서도 그 망념에 자주 휘둘렸다. 김시습은 우주의 근본이 되는 '道'는 하나이지만 그것이 각각 다른 형태로 나타나서 혹은 유교, 혹은 불교로 성립된 것이라고 보았다. 현실의 세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철학적인 다른 학설들이 모두 그 존재할 의의가 용납되는 이상, 불교의 내부에 있는 여러 가지 다른 주장들도 모두 용납되어야 된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조동오위}에 관심을 가지는가 하면, {원각경}을 읽었으며, {화엄석제}를 지었다. 김시습의 사상은 유불도의 특정 교파나 종파로 개괄될 수 없다. 김시습의 문집에 나타난 시나 논술은 모두 유가적 종지에서 씌어졌지만, 그는 사실 <묘법연화경별찬>과 {화엄일승법계도주}에서 화엄과 법화 사상을 긍정하였다. 그런데 화엄과 법화는 圓敎로서의 특징을 지니며, 따라서 김시습의 불교학도 원교로서의 특징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의 불교 관련 저술은 순수불교의 저술로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유학의 입장에서도 일관성이 있다. 특히 김시습은 一然의 {重編曺洞五位}(1260)를 주해하여, 선종 가운데서도 신라 無相, 중국의 馬祖 등이 執勞를 중시하였던 법맥을 이었다. 그는 세상과의 모순을 고민하고 울분 속에서 전국을 방랑하면서 체험 사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 여러 편의 시에서 무위도식을 배격하고 노동 생활을 찬미하는 한편, <生財說>과 같은 글에서 재물의 가치를 중시하였다. 또 그가 평소 농사를 지었고 수학하러 온 자제들에게까지 화전을 일구고 산전을 개간하게 하였다는 일화를, 이이는 <김시습전>에서 특기하여 두었다. 사대부들의 눈에 비친 그의 기이한 행적은 그가 불교를 그 자신의 중심사상에 의하여 수용한 독특한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無相 즉 신라 김화상의 제자에 馬祖(道一)가 나고, 마조의 제자에 西堂(地藏)과 百丈(懷海), 南泉(普願)이 나왔는데, 백장은 '하루 노동을 하지 않으면 하루 밥을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대명제를 외쳤고 남전은 '소가 되고 말이 되라, 밭을 갈고 짐을 지라'고 질타하던 異類中行(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중생 속으로 들어가 실천하라)의 대명제를 내세웠다. 백장과 남전의 외침은 일연선사가 {중편조동오위}를 지으면서 莖草禪으로 새롭게 부각시켰다. 설잠 김시습은 바로 일연을 계승하여 {曺洞五位要解} 不分卷 未整稿(1493)를 남긴 것이다. 김시습은 일연을 이어 服務勞役과 사회봉사가 출가승으로서의 궁극의 도리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金安老의 {龍泉談寂記}에 보면, 여러 비구들이 김시습을 神師(고승대덕)로 추대하여 '금 참빗으로 때를 벗겨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김시습은 법회를 열게 하고는, 소 한 마리를 끌고 오게 하고 다시 꼴 다발을 가져오게 한 뒤, 꼴 다발을 소 꽁무니에 놓고는 "너희들이 불법을 듣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유이니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일에 대하여 김안로는 "미혹되어 사리에 어둡고 무식한 자를 일반에서 이르길 '소 꽁무니에다 꼴을 주는 격'이라 한다"고 풀이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명확한 설명이 아니다. {趙州錄}에 보면 남전이 거세한 검은 물소[水 牛]를 한 마리 끌고와 법당의 주위를 돌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祖堂集조당집}의 南泉和尙 남천화상장에 보면, 남전의 임종을 지켜보던 제자가 선생께서는 죽으신 뒤에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 남전이 검은 물소가 되겠다고 답하였다. 제자가 자기도 선생의 길을 따르겠다고 하자, 그러면 꼴을 한 줌 입에 물고 오라고 하였다고 한다. 김시습이 소를 끌고 오게 하고 꼴을 소 꽁무니에 놓았다는 일화는 이 남전화상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김시습은 "너희들은 꼴을 한 줌 물고 가야 할 것이거늘, 어째서 꼴은 꽁무니에다 두고 있단 말이냐?"하고 질책하였던 것이니, 이류 속으로 들어가 실천하지 않고 국가의 대 법회에나 참석하는 작태를 못마땅해 하였던 것이다. 김시습은 {碧巖錄벽암록}에서 '발밑을 비추어 보라(照顧脚下조영각하)', '발밑을 보라(看脚下간각하)'고 하였던 책략을 중시하였다. 불교의 도리는 일상의 작법 하나하나에, 일상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로 행하는 데 있다는 것이니, 다시 말해 인생의 근본은 일상 속에서의 영혼의 체험(soul experience)을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사실 그러한 책략은 유가 사상에서 '일상생활의 그때그때(日常應緣之處일상응록지처)'를 중시하는 실천 태도와 통한다. 유교든 불교든 "이치를 밝히 알아서 잘 이해하고 풀었던" 김시습이었기에, 바로 그러한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김시습은 어릴 적부터 경서에 통했고, 세조의 왕위 찬탈을 겪으며 유학적 명분·절의에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러면서도 세상일 잊는 데 과감하지 못하여 환속과 탈속을 자유로이 하면서 끊임없이 세상을 응시하였고, 유학의 본질을 파악하고 유학적인 삶을 살고자 하였기에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공부하였다. 자유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은 유불도의 어느 한 종파로 개괄되지 않는다. 양심의 독특한 체험·作略이 그 사상의 정화이며, 世網에서 벗어나기를 그토록 갈망하였으면서도 결코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았으니, 유학이 경계한 '果忘'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Ⅵ. 남는 문제 : 풍격의 논의 예술작품으로서의 시는 詩品시품이 높아야 한다. 시품 가운데서도 자주 논의되는 것이 곧 風格풍격이며, 그것은 시품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김시습의 이 <무쟁비> 시를 두고 풍격을 운위할 수 있을 것인가? 본래 풍격이란 작자의 개성이나 예술적 내재 역량의 발로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한시 연구에 있어서 풍격의 문제는 작품 감수의 총체적·최종적 층위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풍격은 작가와 작품에 나타난 개성·특질인 만큼 창작자 내부의 '志' 및 그것을 운용하는 '氣기'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풍격에 대한 분석법은 인상비평의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다. 남용익의 {호곡시화}는 고려조 시인에 대하여 色韻색운·聲律성률·氣力기력을 논하였고 조선조 시인에 대하여는 調格조격·情境정경·體制체제를 말하였으니, 색운·성율·기력·조격·정경·체제는 모두 작품을 비평하는 다양한 준거들이다. 중국의 경우, 청의 王士禎왕사정은 神신 氣기 意의 體체 骨골을 거론하였고, 姚조 는 神 氣 理 味 格 律 聲 色을 비평의 기준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만큼 시의 풍격을 논하는 기준은 매우 다양할 수가 있다. 그런데 기왕의 풍격론은 景과 情의 직조 방법, 경물의 크기와 역동성이나 색태 등에 초점을 두어 왔으므로, 情景의 교융 양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어야 풍격에 대한 논의를 운위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詩趣가 함축되어 있지 않고 사상감정을 直敍한 시에 대하여는 풍격을 따지기 곤란하였다. 여기서, 시의 풍격 논의는 내용과 형식의 결합 방식을 중심으로 새롭게 논의할 여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풍격 개념은 종래의 시론에 근거를 두면서도 한시의 본질적 특성을 고려하여 확장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한시의 운법. ○ 통운(通韻) : 비슷한 운목(韻目)을 하나의 운(韻)처럼 통합하여 쓰는 것. 이 3개의 分段분단은 命意명의 구조와 관계가 있다. 제1 분단은 신라 승려 원효가 불법을 깨우친 뒤 '混同緇白혼돈치백'하면서 민간에서 불법을 선포한 일, 제2 분단은 원효가 {金剛三昧經論금강삼매경론}·{大乘起信論疏대승기신논소} 등 100부 240여권이나 되는 저술을 남겨 후대 교학의 존경을 받은 사실을 서술하였다. 다음으로 제3 분단은 원효가 고려 때 追諡추시를 받은 사실을 서술하고, 자신은 불법을 논하지만 참된 진리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안타까움(혹은 불교적 진리와 자신과의 거리 확인)을 토로하였다. 덧글 쓰기 엮인글 쓰기
따라서 한시가 지닌 미학적 특성과 주제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러 국면에서 진지한 탐색이 필요하다.
Ⅱ. 제목 이해와 소재 파악
김시습은 호남 지방의 여행이 끝나가던 1462년, 경주로 발걸음을 옮겼다. 28세의 나이였다. 그는 禪房寺선방사 등 절간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되어서는 靈廟寺영묘사에 들렀다. 月城월성과 鮑石亭포석정, 五陵오능, 경순왕 사당, 鷄林계림을 찾았다.
신라 이승 元旭 원욱씨가
머리 깎고 신라 저자에 도를 행한 것을.
당에 가서 불법 배워 고국으로 돌아와
僧俗승속을 넘나들며 민간에 행하여
거리 아동과 아녀자도 쉽게 깨우치니
그를 두고 아무개 집 아무개라 가리킬 정도.
그러나 큰 無常무상의 도를 가만히 행하여
소 타고 법을 펴서 宗旨종지를 풀이하니
불경의 疏抄소초가 책 상자에 가득해
후인들이 보고서 다투어 따랐다.
국사로 뒤늦게 無諍무정이라 시호 내려
곧은 돌에 새겨 자못 칭송하였다.
비갈 위 금가루는 광채가 찬란하고
불화와 文辭문사도 역시 좋아라.
우리도 幻語환어 잘하는 무리라서
환어에 대하여는 대략 아는 편.
다만 나는 옛 도를 좋아해 뒷짐지고 읽을 뿐
아아 서쪽서 오신 분[부처]을 보지는 못하누나.
入唐學法返桑梓입당학법반상재 混同緇白行閭里혼동치백행려리
街童巷婦得容易가동항부득용이 指云誰家誰氏子지운수가수씨자
諸經疏抄盈巾箱제경소초영건상 後人見之爭仰企후인견지쟁영기
追封國師名無諍추봉국사명무정 勒彼貞珉頗稱美늑피정민파칭민
碣上金屑光燐燐갈상금소광인인 法畵好辭亦可喜법화호사역가희
但我好古負手讀단아호고부수독 嗟不見西來士차불견서래사
김시습의 <무쟁비>의 넷째 구에 나오는 '混同緇白'이란 말은 원효가 僧俗을 넘나들었다는 뜻이다. 남조 梁나라 때 王僧孺가 지은 <懺悔禮佛文> 등에 이미, 緇는 僧徒, 白은 속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예가 나와 있다.
김시습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 흑백 시비를 가리지 않고 불법을 전하였던 원효의 삶에 크게 공감하여 이 시를 썼던 것이다.
Ⅲ. 형식의 분석
그런데 이 시의 형식상 특징을 자세히 알아보려면 압운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때 압운법은 당시 유통되었던 平水韻 즉 詩韻에 의거한다. 이 무렵 다른 작가들 시 가운데는 {洪武正韻}의 운을 따른다고 일부러 밝힌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미 송나라 때 {禮部韻略}(丁度 등 편찬) 계열의 운서가 고려에 수용된 이후로 시운은 곧 평수운을 가리켜 온 것이 분명하다. {홍무정운}의 운이라는 것도 詩韻으로 사용될 때는 分韻 체계가 평수운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었다.
<무쟁비> 18구의 句末 글자의 韻屬을 살펴보면, 이 시는 다음과 같이 3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살필 수 있다.
常(평성 陽) 旨(상성 紙) 箱(평성 陽) 企(거성 )
諍(평성 庚) 美(상성 紙) 燐(평성 眞/거성 震) 喜(상성 紙) 徒(평성 虞) 矣(상성 紙) 讀(입성 屋) 士(상성 紙)
제3분단에서는 旨(상성 紙) 企(거성 )을 통압하여 칠언고시의 일반적인 격구 압운 방식을 취하였다.
그렇다면 김시습이 이 <무쟁비> 시에서 각종의 압운 방식을 복합적으로 사용한 것은 의도적인 형식 실험의 결과였을까? 아니면 시상과 리듬의 흐름에 따라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하여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 엄격한 일운도저의 본운시를 구사하지 않고 시상을 자유스럽게 전개하다가 이러한 파격적인 형식의 고시를 낳았다고 생각된다.
한편, 신식 고시는 근체시(특히 율시와 배율)와 달리 대우(대장)를 하지 않는다. 특히 일운도저한 칠언고시에서는 대우를 전혀 쓰지 않는 것이 두보와 한유 이래의 격식이다. 고시에서는 대우를 하더라도 통사 구조를 어긋나게 하거나 부분적으로만 대우를 하여 투박한 맛을 살리며, 심지어 동일한 글자를 중복시켜 대우를 이루기도 하고, 여러 구에 걸쳐서 어구를 중복하여 대우를 형성하기도 한다. 김시습의 이 <무쟁비> 시는 대우를 쓰지 않았으니, 두보와 한유의 시풍을 이으면서, 형식성을 배격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고시는 근체시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시 형식이다. 그러나 고체시라고 해도 그 나름대로의 평측법이 있다는 사실이 당·송의 실제 작품들에서 귀납적으로 유추된다. 당송 고시의 평측 상황을 귀납적으로 정리한 현대의 학자 王力은, 5언이든 7언이든 고시라면 일반적으로 三平調를 사용하고, 四平脚·孤仄·平仄相間은 그리 사용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으면서, 고풍시의 평측도 아무렇게나 쓴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러한 詩史의 흐름과 대비하여 볼 때, 위에서 살펴본 김시습의 <무쟁비>의 형식은 실은 너무도 파격적이다. 한시 창작에서 익힌 다양한 시 양식을 한 데 모아둔 듯하다. 심정의 자유로운 표출을 위해 '무작위적으로' 여러 형식을 한데 얽어두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混同緇白'하였던 원효의 '不羈(얽매이지 않음)'의 삶을 그리는 데 매우 적절한 방법이자, 원효의 삶을 모범으로 삼고자 하였던 김시습 자신의 정신지향을 표출하는 데에도 가장 효과적인 형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Ⅳ. 전기적 고찰과 문맥적 해석
효령대군은 왕실을 중심으로 밀교와 같은 성격의 불교를 신앙하는 일에 가장 앞장을 섰다. 더구나 세조도 사대부들의 권력을 억제하고 왕실의 존엄성을 높이기 위해서 불교를 장려하고 있었다. 세조(재위 1455∼68)는 이미 대군으로 있을 때 "釋氏의 도가 공자보다 나음이 하늘과 땅의 차이뿐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즉위 뒤에는 '호불의 군주'로 자처하였다. 원각사를 창건하는 등 사찰들을 창건하거나 중수하였고, 대규모의 간경사업을 벌였다. 정인사를 세우고 해인사·상원사·월정사·회암사·신륵사·표훈사·유점사·낙산사 등의 사찰을 중수하였으며, 정업원을 다시 세웠다. 또 대군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금강산의 장안사·정양사·표훈사 등을 순행하며 물자를 지원해 주었고, 명복기원을 위한 기신제나 수륙제, 사찰건립 및 불상조성에 따른 경찬회와 각종 법회 등을 수시로 열었다.
남만의 독 안개도 두려운데
땡볕을 무릅쓰고 일만 근 모래를 일어
어쩌다 얻은 몇 알이 귀하기도 하다.
두렵고 놀라운 일 몇 번이나 겼었는가
일백 번 단련하느라 만금을 쏟아서
천자에게 올려서 보물이 되었다만
몇 년이나 백성의 내장을 쪼개었던가?
몇 덩이를 녹여서 겨우 반 자 크기거늘
참모습보다 낫다니 잠꼬대 같은 소리.
우리 임금이 백보대(연화대)에 안차하고
아침저녁 종을 치며 주문을 읽네.
길이 온 백성 부유하고 비바람 순조로와
온 세상 태평하여 신선의 나라되게 하소서.
비록 작은 몸뚱이지만 관계됨이 매우 크나니
백성들을 위로하여 살려내어 줄 것인가?
觸熱淘沙一萬鈞 往往數粒逢可貴.
可畏可愕幾番遭 入冶百練輸萬費.
入貢帝庭便成珍 幾年鑿破民腸胃.
數錠鑄出半尺許 面目過眞如幻語.
我王置之百寶臺 朝朝暮暮撞鐘 .
壽國富民風雨序 四海安妥爲 洲.
一軀至小所係巨 頗可勞民蘇息不.
<車渠螺>에서 그는 "우리 임금 수나라 문제보다 불교를 좋아해 탑 쌓고 상서 부름 그만 못할 게 없다네"라고 하였다. 그런데 세조를 수나라 문제에 비긴 것은, 뒷날 그가 수락산 시절에 지은 <隋文>편에서 "만일 마음을 바치지 아니하고 몸을 바치고 재물을 바치는 것이 백천만을 헤아린들 무엇이 道에 유익하겠는가"라고 말한 내용과 대조할 때 그 비판의 뜻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김시습은 세조의 불심과 효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의 {연화경} 번역 사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찬하였다.
한 구절의 頻迦가 뭇 새 울음보다 뛰어나다.
범어 서적이 秦나라(즉 중국)에 이르렀으나 언어가 난삽하고
구마라습이 중국어로 번역했으나 취지 찾기 어렵네.
낭랑한 諦語는 은하처럼 밝고
역력한 眞詮은 오묘한 음을 演繹하였네.
한나라 당나라의 번역한 자취를 보건대
玄 과 騰蘭이 어찌 우리 군주 마음과 같으랴.
梵 到秦言尙澁 華言自什趣難尋.
琅琅諦語昭雲漢 歷歷眞詮演妙音.
觀彼漢唐飜解迹 蘭能似我王心.
김시습은 열흘 남짓 내불당의 역경사업을 도운 대가로 얼마간 돈을 받았다. 그 돈으로 그는 {맹자대전}·{성리대전}·{자치통감}·{노자} 등의 서적을 구입하였다.
김시습이 {통감}을 구입한 것은 당시 사대부 지식층의 독서 경향과 무관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치
이보다 한 해 전 1464년(세조 10) 5월에 효령대군이 檜巖寺에서 원각법회를 열었을 때 여래가 나타나고 수백 개의 사리로 분신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세조는 왕세자 및 대군들과 의논하여 원각사를 창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옛 興福寺(혹은 弘福寺라고도 함) 터(지금의 탑골공원)를 중심으로 부근의 가옥 200여 호를 철거하고, 중앙에 大光明殿을, 왼쪽에 禪堂을, 오른쪽에 광장을 만들어, 이듬해 4월에 낙성을 보았다. 흥복사는 弘福寺라고도 하며, 조선 태조 때 조계종 본사로 지정되었다가 태종의 억불정책으로 폐사되어 그 터는 公 田으로 되어 있었다. 6월에는 전국에서 동 5만근을 모아 종을 주조하기 시작하여 이듬해(1465년) 정월에 완성하였다. 또 1468년(세조 13) 4월 8일에는 10층 석탑(3층 기단, 10층 탑신)을 완성하여 분신 사리와 신역 {원각경}을 안치하였다.
김시습은 칩거의 뜻을 돌연 바꾸어 낙성회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처음에는 망설였을 것이다. 하지만, 뒷날에 술회하듯이, "좋은 모임은 늘 있는 것이 아니며 번창하는 세대는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달려가 치하하고 곧 돌아와 여생을 마치리라"하고 생각을 고쳤다. 천인도량을 여는 것이 진정한 참회의 의식일지 모르며, 그것이 올바른 정치가 구현되는 轉機가 될 지도 모른다고 기대하였을 듯하다.
성군의 큰 계획으로 만 만년 가게 되었네.
솜옷에 둥근 머리는 부처님 만나는 날이요
치건에 도포 입고선 요순 시대를 송축하네.
향연은 어가 따라 너울거리고
서기는 불상을 감싸 면면하구나.
逸民이 여기 참여할 줄 누가 알았으랴
오색 구름 꽃 속에 주선함이 즐거워라.
服圓 逢竺日 緇巾曲領頌堯天.
香煙 隨龍駕 瑞氣 繞佛邊.
誰信逸民參盛會 五雲朶裏喜周旋.
경찬회에는 솜옷에 둥근 머리를 한 승려와 치건에 도포 입은 유가 문신들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거기에 김시습은 逸民으로서 참여하였다. 솜옷에 둥근 머리를 한 승려의 모습이었지만, 스스로를 정계와 단절한 채 은거한 일민이라고 규정하였다. 김시습은 정치와 무관한 일민으로서 자기의 시대를 태평 시대로 보고, 그 태평 시대를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표시하였다. 하지만 이 '일민'이라는 표현 속에는 당시의 조정에 서지 않으며 당시의 정치 현실을 완전히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하는 微意가 담겨 있다.
그러나 세조에게서 참회의 자세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불교는 세조의 정치 권력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이용되었다.
김시습은 서울에 있은 지 '며칠이 되지 않아' 길을 떠났다고 술회하였다. 길을 떠나는데 세조의 召命을 두 세 번이나 받았으나, 끝내 질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고 금오산으로 향하였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실은 그는 여름 한 철을 서울 부근에 머물렀다. 서울 체류가 며칠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심리적인 시간을 말한 것에 불과하다.
이미 신라 불교에서도 義相 조사가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곧 하나(一卽一切, 多卽一)'라고 외치면서 결국은 권력구조의 고착화에 기여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원효대사가 <發心修行章>에서 말한 "行者라도 지음이 맑으면 온 하늘이 함께 찬양하지만 道人이라도 속세에 연연하면 착한 신이 버린다"고 한 말이 지닌 대중구원의 메시지를 더욱 좋아하였던 것이리라.
그는 훗날 59세 되던 1493년(성종 24, 계축)의 봄날 무량사 禪房에서 병들어 누워 있으면서 다음과 같이 심경을 토로하게 된다. <무량사에 병들어 누워>라는 시이다.
선방에 병 든 몸을 일으켜 앉는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고 싶다만
다른 중들이 거양한다 부산떨까 두려워라.
向生欲問西來意 却恐他僧作擧揚
<무쟁비> 시에서 김시습은 화쟁대사 원효가 민중 속으로 들어가 불교를 전파한 사실에 깊이 공감하였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원효가 불교 내의 특정 종파에 집착하지 않고 和諍的 사유를 하였던 것에 대한 공감이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김시습의 이 <무쟁비>는 정경의 교융을 드러낸 시도 아니고 詩趣가 깊은 것도 아니므로 풍격을 논의할 여지가 아예 없는 듯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시의 풍격을 논할 수 없는 것일까? 시취는 없지만, 앞서 보았듯이 이 시는 격률의 면에서 독특한 풍격을 구현하였다. 사령운 풍의 고시 형식을 취하지 않고, '무작위적으로' 여러 고시 형식을 한 편 속에 뒤섞어 써서 사상감정을 자유롭게 유출하였다. 이것은 곧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수행하는 시인의 '강개한 풍모'를 담아내어, 시 자체가 강개한 풍격을 구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후기의 일부 복고주의 시인들이 漢魏詩의 강개한 풍격을 닮으려 악부시를 실험하다가 자칫 형식주의로 전락하였던 것과는 달리, 이 시는 진정으로 자연스럽게 강개한 풍격을 구현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 東, 冬 / 江, 陽 / 支, 微, 齊, 灰 / 魚, 虞 / 蕭, 肴, 豪 /歌, 麻 …
○ 전운(轉韻) : 보식(譜式) 규정에 의한 운(韻) 바꿈. 음악에서의 조바꿈과 유사함.
☞ 東, 江 / 支, 佳 / 眞, 文, 元 / 寒, 刪, 先…
○ 환운(換韻) : 보식(譜式) 규정에 의하지 아니한 운(韻) 바꿈.
○ 일운도저(平聲一韻到底) :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운목(韻目)에 속하는 글자로 압운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