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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글에...김선생님께서는...
임란당시 왜군의 화승총 수는 오스만의 숫자와 맘먹는다는 예로...
오스만 근처의 일한국이 왜노들의 일본일 수 있단 발상을 하셨는데...많이 무리가 있습니다.
서구가 제공한 화승총이 오스만을 거처 그 옆의 일한(일본???)으로 제공된게 아니고...
애초부터 중원에서 발달한 화약무기가 징기스칸과 그 이후 투르크(알타이인근)의 비잔틴 공략에 활용됐고...
오스만투르크 예하에 있던 서구인들이..모든 군복이나 군편제까지... 특히, 화약기술을 받아 베낀것이 양이들의 화승총과 대포며...
그 성능도 무굴(인도몽골)과 오스만 제국의 화승총이 임란당시만해도 우수했고...
그 성능이 아세아를 따라 잡은건...불가 19세기 부터라 합니다.
임란이나 구한말의 서구제국과 그 멍멍이 왜노들의 화약무기 편제의 위력은...
상대적으로 기병과 각궁의 편제를 신앙같이 했던 동방의 군사편제와...화약무기의 일반인 취급 금지로 상용화가 어려웠던 동방의 약점...
보병위주의 화승총편제와...화약무기의 무분별하다 싶은 다양한 상용&응용이 있었던 유럽의 차이점 때문이였던 겁니다.
왜노들의 화승총이 서구제국의 것보다 일부 우수했다 함은...
그 원천기술국인 중국을 거친 몽골제국하 오스만과 무굴의 제철기술이 월등했기 때문이며...
서양회승총의 핵심 발명으로 착각하는 방아쇠 장치도 중국이 원천 발명국임의 이유고...
왜노들은 그 치하의 동남아&인도양 해양 잡족들이였기에 당연 기술이 서구를 바로 따라 잡을수 있었던 이치요...
왜노들이 포루투갈인의 지도에 의해 첨 화승총을 제조했다 함은...
회승총의 원천기술국인 중국...이를 이은 티무르제국과 무굴제국... 오스만 투루크제국 등의 영향력하의 일한국(페르샤)이 왜노들의 주류가 아니라...
그 왜부의 잡족들이였단 반증인 겁니다.
일례로...
임란당시의 이순신의 배가...
양이들이 지도하는 왜군의 배를 장난감배 처럼 가지고 놀 수 있었던 것도
조선 수군의 대포가 훨씬 장거리요...갑판에 고정시키는 응용술도 몇 배 뛰어났단 반증입니다.
왜노들은...양이들이 전해준 대포를 돗대에 메달아 반동을 줄여야 사용할 수 있었을 정도로...
서구인들이 제공한 왜군함선 제조기술과 포기술은...임란당시까지만해도 조선&중국에 비해 하찮았단 반증도 되는 겁니다.
제시하신 일한국의 국기도...대원제국치하 여러 몽골우르스(무굴) 중 서역 월지의 사한국들 깃발중 한 응용이지..
일장기와의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 보입니다.
물론, 무굴치하의 인도양&동남아 해안 잡족들도 왜노요
그 영향이 현 일본열도까지 뻣친게 양이들의 도움에 의한 임란전으로 보입니다만...
동국조선과 싸웠을 임난 당시의 왜노들 주력은...아무래도 현 일본열도에서 동남아를 거친 세력이 주요세력이요...
월지지역의 왜구들 난은...쉽게 제압당한 명나라(무굴)속지의 반란 수준일 뿐으로 보입니다.
이를 구원하겠단게...열도왜&동남아 왜들의 정명가도 요구인 셈이겠고여...
어쨋거나 왜 잡족들의 해양연맹은...
대륙에서 쫒겨는 이주세력들의 혼혈에 의해...그리 무시할 수준이 아닌...
지금도 해적질이 유행인 아프리카 해안에서 인도양 동남아 연안 현 일본열도까지의 거대한 라인였던건 맞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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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지는 자신의 병원을 실험의 본거지로 삼고, 병의 전염을 막기 위해 환자를 두 부류로 나누었다. 이것은 후에 서양에서 앞다투어 받아들인 검역 격리의 기원이 되었다.
1040년경 중국의 필승(畢昇)이 최초의 이동형 활자 인쇄기를 발명
최초의 이동형 인쇄기는 1403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었다...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중국과 한국의 발명품이 서쪽으로 전해졌을까? 중국의 판 인쇄가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13세기에 독일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1259년)와 헝가리(1283년)를 거친 후에].
유럽의 군사혁명(1550~1660년)
화약 제조법은 850년의 중국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1044년에는 출판을 통해 대중화했다.
최초의 대포(eruptor)가 1288년경 중국에서 발명..이것은 최초의 유럽 대포가 1326년에 피렌체, 1327년에 영국에서 출현
중국의 대포는 포탄을 운반했는데, 이것은 유럽에서는 15세기가 도어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중국의 대포는 더 단단한 주철로 만들어서 연철로 만든 유럽의 대포보다 더 유용했다. 유럽은 16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중국 대포와 같은 수준이 되었다.
튀르크족의 총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양의 인도와 서구 유럽으로 급속하게 전해졌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총기 수출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질이 좋은 것도 있었다. 특히 오스만 사람들은 유럽에서 만든 것보다 파열률이 적은 철제 총신의 제조로 머스킷 총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오스만 사람이 방아쇠(용두)를 발명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중국인이 발명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로마 '대포의 전신(예를 들어 투석기)'과 중세 유럽의 십자궁에도 방아쇠가 있었지만 이런 것은 화승총 방아쇠의 기본 골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용두는 전적으로 비유럽인의 독자적인 발명이었기 때문이다.
'학구적 (유럽) 세계에 대한 애정이 중국으로 향한 과도기적 해'인 1700년이었다. 그후 80년간 많은 유럽인이 중국에 대한강한 호기심을 보였고.
유독 프랑스가 중국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의견에 동의한다(분명 프랑스 국가의 전제주의가 '전제적인' 중국에 끌린 것도 그 이유의 하나였다).
중국을 유럽의 표본으로 삼기를 거부한 계몽 사상가도 분명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몽테스키외와 페늘롱을 들 수 있다....1780년 이후로는 뒤떨어지고 독재로 인해 숨막히는 야만인의 땅에 사는 '파멸한 사람들'의 중국이라는 믿음으로 끝났다....1780년경에 이르자 상황이 반전되어 '카타이를 평가하는 주기'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중세의 회전식 쟁기보다 1730년의 로더햄 쟁기는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이 쟁기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개발된 것으로 추정된다[네덜란드의 '바스타드(bastard)' 쟁기로 알려져 있었다]. 그후 네덜란드의 기술자들(동앵글리아 지방의 배수 공사에 참여했던)을 통해 영국으로 전해져 많은 부분에서 유사점이 많은 로더햄 쟁기로 발전했다....실제로 네덜란드의 바스타드 쟁기의 모든 면이 중국에서 발명되었고, 발명 시기도 약 2000년 전으로 추정된다....사실 1784년에 우럽인 제임스 스몰(이른바 쟁기의 발명자)이 설명한 쟁기 모델은 중국의 철제 흙판 쟁기를 거의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더욱이 약 1000년 동안 사용한 것과는 저햐 딴판인 새로운 유럽식 쟁기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최전식 풍구(추수 후 곡물의 껍질과 줄기를 분리하는 기구)의 발명 역시 중요한 혁신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2세기에 발명된 이후 거듭 개량된 중국의 회전식 풍구보다 시간적으로 한참이나 뒤떨어졌다. 이것은 철제 흙판 쟁기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직접 전해졌다. 처음에는 1720년대에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프랑스로 전해졌는데, 그곳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다양한 모델이 전해진 스웨덴에서는 요나스 노르,베르그와 같은 스웨덴 과학자들이 개작하기도 했다....이처럼 회전식 풍구는 1700~1720년 사이에 네덜란드 선원들이 직접 유럽으로 전했다(바타비아에서 처음 사용된 사실이 밝혀졌다).
기원전 3세기 중국에서 처음 발명된 다중관 조파기...그것은 수확량에서 30배나 효율적일 수 있었다.중국의 조파기가 유럽인의 왕래가 빈번하던 남중국의 항국에서 멀리 떠러진 북부 지방에 한정되었다는 사실로 설멸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다른 발명품과 달리 조파기는 유럽의 선원들이 직접 전파하지는 않았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그 개념만은 관련 서적과 사용법의 전파를 통해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서 기원한 영국의 주요한 농업 기술들이 영국의 농부들에게 폭넓게 사용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즉 괭이 조파기는 19세기 중반, 로더햄 쟁기는 1820년대, 그리고 회전식 탈곡기는 약 1870년에 대중화했다.
터닙 타운젠트(순무, 클로버와 같은 새로운 사료 작물을 도입해서 생산성을 증대한 인물-옮긴이)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윤작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중 많은 부분이 아메리카와 중국의 도움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영국이 중요한 농업 혁신으로 꼽은 새로운 윤작 기법은 온전히 중국의 것이었다. 놀랍게도 중국인은 6세기에 일찌감치 그 기법을 개발했고...더욱이 18세기에 영국인이 이용한 혁명적인 윤작 작물 가운데 몇 가지는 약 12세기 이전에 중국인이 이미 이용한 것이었다(예를 들어 누에콩, 고무라, 기장, 밀과 보리, 순무 등).
더 크고 강한 말을 개발하게 한 새로운 품종 개량법이 출현했다. 하지만 그처럼 특별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이 18세기 초에 이루어진 '동양 가축'-오스만 제국에서 들여온 아랍 암말들(다알라 아라비안, 바이어레이터크, 고돌핀 바브)-의 수입이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배제되었다.
케네스 포머런츠는 궁극적으로 1800년 이후로 영국과 중국 사이에 '큰 격차'가 벌어진 것은 영국이 얕고 건조한 중국의 광산에 비해 깊고 풍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물을 밖으로 뽑아 올리는 데 필요한 증기기관이 영국에서 발명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포머런츠의 주장은 세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심층 채광은 전국시대(기원전 5세기~221년)에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송대까지 가장 깊은 광산이 평균 91미;터에 달했다(명,청 시대에는 몇몇 광산의 깊이가 914~1463미터에 달했고, 약 2591미터나 되는 광산도 있었다). 둘째, 많은 광산이 지하 수면 (보다) 아래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며, 때문에 배수가 필요했다(예를 들어 북부 장쑤성의 저지대 광산들). 로버트 하트웰은 그곳에서 "11세기에 걸친 운영 규모의 증가는 배수 장비에 대해 많은 투자를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장비 중에는 어쩌면 쓰촨 지방의 염정(鹽井)에서 사용한 것과 유사한 수력 양수기가 포함되어 잇을 수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피터 골라스는 다음과 같이 설며한다. 아주 적은 양의 물(지하수)도 석탄 채굴에 큰 걸림돌이 되는데, 중국에서 이 문제는 더 심각했다. 많은 양의 석탄이 엄청난 양의 물을 함유한 석회층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폭넓은 복합 지층으로 인해 물이 채굴 과정에 유입되기 쉽다. 결국 지하수 제거는 중국이 석탄을 채굴하는 데 가장 크고 가장 일반적인 문제였다...그러나 중국 광부들에게는 너무 많은 물보다는 오히려너무 적은 물이 더 큰 문제였다....증기기관에 대한 적요(摘要)는 인쇄 형식으로 왕정(王禎)의 <<왕정농서(王禎農書)>>(1313년)에 처음 나타난다...윌킨스의 발명품(수력 기관)은 다소 왕정의 기계와 닮은 점이 있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유일하게 추가된 것이 바로 크랭크축의 사용이었다(이것은 500~1700년 사이에 유럽인이 독자적으로 이룩한 네 가지 독창적인 혁신 가운데 하나였다). 더욱이 공기 흡입과 배출 작용을 동시에 수행하는 펌프인 중국의 상자형 풀무는 풀무질을 할 때마다 피스톤 한쪽에서는 공기를 배출하고, 반대쪽에서는 동량의 공기를 빨아들였다. 이것은 와트의 엔진과 '외형적으로 밀접한 유사성'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17세기 말에 중국인이 증기 터빈을 개발했다는 사실도 증명해준다.
중국이 11세기에 목탄 대신 석탄을 사용했다는 사실..더욱이 용광로는 원래 기워전 2세기에 중국에서 유래했고, 5세기가 되면서 중국인은 강철을 생산하기 위해 연철과 주철을 함께 용해하는 '혼합-용해' 공정을 개발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1863년의 지멘스-마르탱법과 같지만 1400년 전에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도 1850년까지도 영국은 높은 생산 비용 때문에 비교적 낮은 수준의 강철(철과 비교해서)만을 생산했다. 이런 상황을 전환한 것이 바로 베서머 전로법의 발명(1852년)이었다.
1788년 영국의 철 생산 수준은 1078년 중국의 수준보자 더 낮았다. 또한 영국인이 11세기 중국에서 생산한 제품의 낮은 가격을 따라잡은 것은 19세기가 다 되어서였다.
인도 역시 영국을 앞섰다. 인도의 우츠 강철은 19세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순수한 철이었으며, 특히 다마스쿠스 강철로 유명한 페르시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국 제품은 18세기 말까지도 다마스쿠스 종류보다 주악했다. 심지어 1842년까지도 인도의 철과 강철은 영국의 것보다 우수하지는 않더라도 쓸 만했으며, 세필드에서 생산된 것보다 훨씬 더 가격이 낮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때까지도 인도의 용광로 수는 영국에서 발견된 수의 약 50배였다는 점이다(영국이 호황을 누린 1873년에도 영국 용광로 수의 10배에 달했다).무엇보다 서양의 제철업자들은 인도와 페르시아 제품의 높은 품질 때무에 좌절하고 있었다.
중국의 직조 기술자들은 13세기에 이미 산업용 방적기(영국의 것들과 비슷한)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발명해놓았다....실제로 기계 구조에서 조작이 결코 쉽지 않은 (영국의 18세기말 중반) 다축 방적기는 모시 섬유를 짜던 대형 방적기의 품질에 미치지 못했다. 유일한 차이점은 중국의 기계가 면직물보다는 견직물 생산에 이용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견직물 기술의 전파가 영국의 면직물 기술의 발전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최초의 연철제 현수교는 65년 중국(유난성 칭다오)에 출현했고, 주철제 현수교는 580~618년 사이에 진샤강 위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중국의 예들은 '서양 기술자들을 고무시켰다고'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현수교에 대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보고를 들은 윌리엄 체임버스 경과 같은 많은 영국 건축가들이 이를 논의했고, 심지어는 토머스 텔포드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우리는 주로 듣는 영국의 산업적 독창성의 또 다른 증거는 1798년, 최초로 거리에 출현한 가스등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이 영국의 '혁신' 전 약 2000년 동안 조명을 목적으로 천연가스를 활용했다는 사실이 다시 은폐된다. 영국의 굴착용 날 역시 약 61미터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하나의 승리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 깊이는 914~1463미터에 달하는 중국의 깊은 광산에서 사용한 굴착용 날에 비하면 너무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중국인은 기원전 1세기에 이미 긴 날을 사용했다. 서양이 중국을 따라잡은 것은 19세기가 다 되어서였다.
영국은 만국박람회 (1851년) 이전에는 90퍼센트를 나무로 제작했다. 더욱이 강철이 영국에서 대량생산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싼 가격이 된 것은 1852년 이후였다.
1750~1858년 사이에 영국에 건설된 6000킬로미터의 운하는 약 700년 전 송대에 건설된 5만 킬리미터의 운하에 견주면 상당히 하찮은 수준이다.
1715~1815년의 국방비 D1(일반 및 특별 군사 지출) 지출은 1850~1913년의 거의 3배이며, 심지어 1914~1980년(두 차례의 세계전쟁이 있었던 기간)에 지출한 비용을 훨씬 상회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1715~1815년의 D2(일반 및 특별 군사지출과 군사 차관에 대한 이자 지불) 지출이 1850~1913년에 국가가 모든 부분에 지출한 비용의 2배이며, 특히 1914~1980년 사이의 D2 지출보다 현저하게 높다는 사실이다.
1688년부터 1815년 까지 축적된 영국의 국가 부채는 국민소득의 180퍼센트이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1914년 차르 제국의 부채는 국민소득의 47퍼센트, 1913년 빌헬름 2세 치하 독일은 9퍼센트, 1990년 미연방은 59퍼센트였다.
역진세는 산업 투자에 이용할 잉여물을 거둬들이기 위해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적용됐다(누진세의 예:간 접세)
1715~1815년 사이에 부과된 영국의 역진세가 국민소득의 10퍼센트에 달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사실이다. 이는 중국의 명,청 왕조뿐만 아니라 산업화가 진행되던 독재 정권하의 러시아(8퍼센트)의 경우를 모두 추월하는 수치이다. 1715~1815년까지 영국의 간접세는 중아 정부 재원의 66퍼센트에 달한 반면, 직접세는 고작 18퍼센트에 그쳤다. 게다가 영국에서는 저소득층의 세금 증가율이 소득 증가율을 넘어섰지만 차르의 독재 정권하에서는 농민의 소득 증가율이 세금 증가율을 웃돌았다.
(1800~1845년간) 영국의 관세가 매우 높은 수준이었고, 나름대로 산업화를 겪고 있던 여타 유럽 국가들의 관세보다 높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실제로 고도의 산업화를 겪고 있던(1800~1845년)영국의 관세율을 산업화를 겪으며 보호 무역주의를 표방한 독의 경우보다 6배, 러시아(보통 주요한 유럽의 산업국가로 추정되었던)보다 1.5배 가량 높았다.
1715~1790년 사이 관세 수입은 국민소득의 2.6퍼센트, D1(국방비)의 37퍼센트에 달했다. 1790~1815년 사이 관세는 나폴레옹 전쟁을 지원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증가해서 국민소득의 3.8퍼센트, D1의 25퍼센트에 이르렀다. 이 수치는 1815년 이후 다시 증가했다. 120년 동안 일관적으로 추진된 군국주의의 영향으로 발생한 국가 부채의 엄청난 이자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815~1850년 사이에 관세 수입은 국민소득의 4.5퍼센트, 연간 평균 이자 지불액의 70퍼센트에 육박했다(이자 지불은 중앙 정부 지출의 50퍼센트를 약간 상회했다). 심지어 1850~1913년 사이에도 역진세를 적용한 관세 수입이 국민소득의 2퍼센트에 달했으며, D1의 약 60퍼센트를 충당했다.
1875년('자유화 시대'의 절정기) 제조품에 대한 평균 관세는 유럽 10퍼센트, 미국을 포함하면 14퍼센트에 달했다.
1688년 이후로 군비가 급증하면서 정부는 차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1796~1931년 사이에는 무역 수지가 해마다 저자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주로 저소득층에게서 거둬들인 역진세를 부유한 금융 투자자들에게 이자로 지불했다. 결국 빈곤층(소비자)에게 얻은 소득을 부유층(저축자와 투자가)에게 재분배한 셈이었다. 나는 총 대부금의 약 80퍼센트를 런선의 자본시장에서 발행했다고 주장한다(나머지 20퍼센트는 암스테르담 자본시장에서 조달했다). 이는 영국이 지불한 총 이자의 약 80퍼센트가 런선시의 금융 투자자들에게로 직행했다는 의미와도 같다. 결국 세금의 역진성을 감안할 때, 이자의 50~60퍼센트를 저소득층이 지불했다고 가정할수 있다. 이런 점에서 1715~1850년 사이에는 국민소득의 약 5퍼센트가 가낭한 노동자층,중하위층 소비자들에게서 부유한 금융 투자가들에게로 넘어갔다고 본다. 이는 경이적인 수치다(영국이 1850~1913년 사이에 국방에 지출한 액수의 거의 2배와 맞먹는다). 더욱이 나폴레옹 전쟁 중재분배된 금액은 국민소득의 9퍼센트를 약간 밑돌았다.
영국이 '문명의 선물을 전해줄' 매체인 불평등 조약이 강행되었다. 브라질(1810년), 중국(1842~1858년), 일본(1858년), 샴(1824~1855), 페르시아(1836,1857년), 오스만 제국(1838, 1861년)을 비롯한 많은 비서구 구가들과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은 해당 국가의 관세 자유권을 박탈했고 전체적으로 관세를 최대 5퍼센트까지 제한했다.
영국은 1700~1850년 사이에 32퍼센트에 달하는 평군 관세의 혜택을 누렸다.
1882~1894년 사이에 (영국에서) 인도로 수출하는 면포에 대한 관세가 면제되었다(1859~1882년 사이에 5퍼센트 낮아졌다).
17세기 영국의 경제가 인도산 직물의 순수한 수입자였던 데 비해 1815년에는 약 4000만 파운드(약 1만 8143톤)에 해당하는 2억 5000만 야드(약 22만 8600킬로미터)의 면포를 수출했다. 1873년에는 영국 면포 수출의 40~45퍼센트가 인도로 향했다. 따라서 한때 영국에 면포를 수출했던 인도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완제품을 인도로 수출하는 랭커셔 사업을 위한 면 재료 공급국으로 변모했다. 욬먼데 영국 직물 산업의 발전이라는 사회적 대가가 인도의 산업을 파괴했던 것이다.
스탠리 엥거먼(Stanley Engerman)과 로저 앤스테이(Roger Anstey)는 노예 무역에 따른 수익은 투자 비율이나 국민소득에 비해 지극히 낮은 비율에 불고하다고 주장하면서 이 가은 사실에 반기를 들었다['저비율' 주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바버라 솔로(Barbara Solow)는 엥거먼의 자료를 평가하면서, 1770년 동안 '노예 무역의 수익이....전체 투자의 거의 8퍼센트, 상업 및 산업 투자의 39퍼센트였으며, 이는 낮은 비율은커녕 엄청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비교를 위해서 미국의 경우, 1980년에 이루어진 개인 투자에 대한 국내 기업의 총 수익률이 약 40퍼센트라는 말도 덧붙였다. 더욱이 오늘날 미국에서 총투자에 대해 8퍼센트 이사의 수익을 올리는 유일 산업은 단 하나도 없다. 윌리엄 데리티(William Darity)는 1784~1786년에 노예 무역으로 거둬들인 수익률이 그로부터 약 200년 후 미국 자동차 산업이 올린 수익률의 3배 이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노예 무역의 수익에 대한 로저 앤스테이의 평가는 엥거먼의 것보다 훨씬 더 인색하다. 그의 자료는 그것이 국민소득의 0.11퍼센트에 불과했으며 이는 '사라질 뻔한 영국의 산업혁명에 대한 자금 지원에서 노예 무역이 지닌 커다란 중요성의 신화를 비웃을 만한 수치'임을 시사한다. 중요하게도, 이 수치는 '저비율' 주장이 면과 철 산업(영국 산업혁명의 원동력이었던)의 자본 투자에 적용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사실상 두 가지 산업 내의 투자 수준은(앤스테이의 과장된 추정치와 크게 대조된다) 1780~1800년 사이 국민소득의 각각 0.22퍼센트 정도였다....이상하게도 그는 저출률을 국민소득의 7퍼센트로 평가하면서도 노예 무역이 총 투자를 0.11퍼센트 정도만 끌어올렸을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이 수치는 투자에 대한 수익률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높았기 때문이다. 수익의 50퍼센트가 면 공업에서 발생했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이 전체 산업 투자의 25`30퍼센트에 대한 자금을 조달했을 것이다. 이는 결국 '고비율'을 주장할 만한 수치다.
1750년 이후로 많은 흑인 노예 농장은 역구의 부재 지주들이 소유햤다....실제로 18세기 말에 식민지에서 거둬들인 식민지 소득은 영국 총 투자의 약 50퍼센트에 달했다.이중 상당액이 영국의 산업에 재투자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산업화의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1770년에는 서인도에서 단독으로 거둬들인 수출 이익이 전체 영국 개인 투자의 38퍼센트 혹은 국민소득의 2.5퍼센트에 달했다. 이는 이 이익의 단 15퍼센트 만이 영국의 면 공업 전체에 투자되었다는 말과 같다(즉 '고비율' 주장).
18세기 후반에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 흑인들이 생산한 상품 대 원재료의 비율은 83퍼센트였다(1850년에도 69퍼센트였다). 여기서 단연 두드러지는 부분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흑인 노예들이 거의 독점적으로 생산한 목화솜의 공급이었다. 그런데도 엥거먼은 노에 무역에 따른 총 수익이 영국 국민소득의 극히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라고 주장했다(저비율 주장). 그러나 노예들이 생산 목화솜이 아니었다면 영국의 면공업은 산업화에 지대한 역할을 할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케네스 포머런츠는 1861년과 1862년 (남북전쟁기간)에 노에를 기반으로 한 미국의 목화솜 수출이 중단되자 영ㄱ국의 면포 소비는 55퍼센트에 그쳤고 가격은 2배로 뛰었다고 지적한다.
조지프 이니코리(Inkori)는 노예 무역과 서인도 무역에 대한 보험 이자가 영국 전체 해상 보험 시장의 63퍼센트에 달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1784~1786년에 그 수익은 영국 총 투자의 55퍼센트 혹은 총 개인 투자의 64퍼센트에 달했다( 이 수치의 약 80퍼센트는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 와 무역으로 형성되었다). 이것의 중요성은 면 공업에 투자한 금액이 영국의 총 투자액의 단 4퍼센트에 불과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면 공업의 총 투자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삼각무역(세 나라 간에 순환적으로 수출입을 행하는 무역 형태-옮긴이) 수익의 약 9퍼센트가 필요했을 것이다. 확실히 9퍼센트느 일반적으로 영국의 산업화에 투자할 수 있는 금야글 과소평가한 수치다. 또한 제국적인 무역을 통한 총 수익이 영국 총 투자액의 55퍼센트 이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유럽으로 건너간 많은 수출품들이 사실은 수입한 식민지 생산물(주로 흑인노예를 부리는 식민지에서 생산 되었다)의 제수출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의 면 공업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삼각 무역으로 창출된 수익은 9파센트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있다.(아마도 6퍼센트에 불과했을 것이다).
항해 조례와 식민지 체계가 정확히 국내 수요가 감소한 시기에(즉, 국내 총 소유가 위축되고 있을 때) 영국의 보증된 독점적 수출 시장을 확립한 사실을 중요하다. 따라서 영국의 산업 수출이 1700~1770년 사이에 150퍼센트 이상 상승한 반면 국내 시장은 단 14퍼센트의 성장에 머물렀다. 더욱이 유럽에 대한 영국의 제조품 무역 점유율이 84퍼센트(1700년)에서 45퍼센트(1773년), 그리고 29퍼센트(1855년)로 떨어지면서 유렂의 무역 시장이 얼어붙었다. 만약 모든 식민지들을 포함시킨다면 영국의 제조품 수출률은 1700년에는 14퍼센트, 1773년에는 55퍼센트, 1877년에는 71퍼센트로 급된다....여기서 관건은 시긴지 시장드이 18세기 동안 증가한 영국의 많은 산업(약 70퍼센트)을 흡했다는 사실이다.
1700~1800년에 관한 내 계산에 따르면 영국의 '주변' 무역은 국민소득의 약 15퍼센트 정도로 추산되낟이것은 어마어마한 수치다. 또한 19세기 동안에는 훨씬 더 증가해서 1858년에는 국민소득의 34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수치에 육방하기도 했다(1850~1913년 사이 영국 국방비의 900퍼센트 이상에 해당한다. 더욱이 사각 무역네서도 그수치를 1750~1800년 사이 양국 국민소득의 약 12퍼센트에 달했다
(영국의) 평균 관세는 1800~1809년 사이에는 36퍼센트 증가했고, 1810~1819년 사이에는 44퍼센트까지 증가했다가, 1820~1829년 사이에는 55퍼센트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1830년과 1839년이 되어서도 평균 관세율은 38퍼센트라는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영국의 관세는 1846~1860년 사이에 20퍼센트에 달했고, 1860~1879년 사이에도 10퍼센트로 높은 수치를 유지하다가 1880~1913년에 가서야 겨우 6퍼센트로 떨어졌다.
유럽의 무역 정책은 자유무역보다는 현저한 보호무역으로 유명했으며, 이런 상황은 17세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게속되었다. 특히 영국은 1700~1846년 사이에 32퍼센트의 평균 관세를 징수했다. 더욱이 유럽의 평균 산업 관세는 1820년에 19퍼센트, 1875년에 10퍼센트, 1913년에는 19퍼센트에 달했다.
유럽 군사 혁명(1550~1660년)의 토대가 된 기술들-화약, 총과 대포-은 모두 850~1290년 사이에 일어난 중국의 군사 혁명 동안 개발되었다(이슬람 중동 역시 크게 기여했다).
Angus Maddison, Monitoring the World Economy
Paul A. Bairoch, Economics and World History
Kenneth Pomeranz The Great Divergence
Gang Deng, Vhinese Maritime Activities and Socioeconomic Development
Clive onting World History
Tsuen-Hsuin, Science
Eric. L. Jones Growth Recurring
J.J. Clark, Oriental Enlightenment
Bray, Science
Robert Temple The Genius of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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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lver flag with engrailed fly, charged with three red crescents, is hoisted above numerous cities held by the Grand Khan. The name of the country, Cathay (spelled Catayo), is also inscribed on the map (so the flag might be classified as Chinese, too). The cities with the flag which can easily be identified are [1, 2, 3]: Cambaluc (spelled Chambalech), Grand Khan's capital (present-day Beijing); Zayton (present-day Quanzhou, Fujian province), the port from which Marco Polo eventually left China; Lop, off the Lop Nor lake, the westernmost city held by the Grand Khan; Camul (spelled Camull; present-day Khamil or Hami, in Xinjiang autonomous region), Sindaciu (spelled Sinacius; present-day Xuanhua, Hebei province) and Ciagannor (spelled Ciagamor; present-day Guyuan, Hebei province [4]), the cities which Marco Polo passed through on the way from Lop to Cambaluc; and Fugui, which might be a misspelling of Fugiu (Fuzhou, Fujian province [5]) - although there is also a city of Fugio (without the flag), Fugui is the one whose location seems to better correspond to the real city. About the flag itself, there seems to be no evidence that the Grand Khan had really used a flag with such design: it seems to be more appropriate to some of other khanates, whose rulers and their Mongol subjects had converted to Islam by the time when the Catalan Atlas was made. In Wikipedia, a black flag with three red discs, which is shown as the Timurid flag [6], seems to be erroneously derived from the Grand Khan's flag described here, whose silver field has darkened by age to almost black and crescents are no longer easy to be recognized as such. Nevertheless, all this seems to speak in favour of the suggestion that a flag of a Muslim khanate might have been attributed to the Grand Khan by the mapmaker.
Tomislav Todorovic, 21 April 2007
The golden flag with the red square in centre is in fact the flag of Persia from the "Libro del conoscimiento de los reinos" [7] (so it might also be classified as Iranian). In the Catalan Atlas [2, 9], it is shown with engrailed fly, except above the city of Hormuz (spelled Hormissiom), where it is rectangular. Of other cities with the flag, those easy to identify are Kerman (spelled Creman), Qeshm (spelled Chesi), Bukhara (spelled Bocar) and Samarkand (spelled Samarchanti), although the last two were actually in the Chagatai Khanate. Curiously, Tabriz, the capital of Ilkhanate, is not shown in the map, although the Il Khan himself is depicted as "King of Tabriz" ("Rey del Tauris").
Tomislav Todorovic, 21 April 2007
The flag of this khanate, whose ruler Kebek ("Lo rey Chabech") is depicted in the map, is white with a gold square in centre. It has engrailed fly, except above a city called Baldassia [2, 9, 10], where it is rectangular. Of other cities with the flag, those easy to identify are Khotan (spelled Cotani) and "Many cities built by Alexander the Great", in present-day Afghanistan and Tajikistan, which are represented by two cities only [2]. Unlike other Mongol flags in the map, this one is always shown with the sinister hoist (in the attached images as well). The design might be a combination of those of two flags from "Libro del conoscimiento de los reinos": the flag of Persia (see above) and a silver flag with a gold vertical stripe, which was attributed to the "Empire of Almalik" ("Imperio de Armalec"), named after a city, nowadays ruined, in Xinjiang, China, but said to have held northeastern parts of India as well; that flag was also attributed to several Indian states, most notably Sultanate of Delhi ("Reinado de Delini") [7, 8].
Tomislav Todorovic, 21 April 2007
This flag has engrailed fly and two red charges on silver field (which was almost blackened by age until present time). One of the charges is a crescent and the other looks like a simplified form of the tamga from the flag of Idel Ural. On different copies of the flag, the crescent has different size; it is often smaller than shown here, sometimes even reduced into a simple oblique stroke and conjoined with the other charge into a sigle symmetrical object; the other charge also sometimes lacks the oblique part [2, 3]. It was obviously difficult to draw the charges always the same way. The cities with this flag which are easy to identify are [2, 7, 8]: Sarai, the capital (spelled Sarra) - there is also a depiction of the ruler, "Jani Beg Lord of Sarai" ("Jambech senyor de Sarra"); Tana, present-day Azov, Russia; and Urgench, Uzbekistan (spelled Organci, with a cedilla under the c; nowadays ruined). This flag is a variant of the flag of "Emperor of Sarai" ("Emperador de Sara") from "Libro del conoscimiento de los reinos" [7] and might be the one that had really existed, considering the similarity of its charges with those from the flag of Idel Ural.
Tomislav Todorovic, 21 April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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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수정중에도...계속 에러가 발생...로그인을 10번정도 했네여...ㅡ. .ㅡ...제 컴퓨러... 종합수술 좀 해야할 듯 합니다.
머리가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새로운 사실과 기존의 지식이 충돌을 하니, 내 편한대로 생각을 하면 또다른 왜곡이 생길것이고 확실한 정의도 없고,이렇게 글을 읽으며 또 다시 머리가 빙빙돌고....우리선조의 발걸음을 되짚어보는 것이 역사인데 처음부터 잘못된 역사를 배우다 보니 부정의 마음이 앞서고, 연구하시는 분들도 서로 다른 생각이 첨가되어 한 가지 사실?이 여러각도로 조명되다 보니 객관적인 사고로 하는 것이 많은 시간이 흘르고 이곳에서 얻은 단편적인 지식이라 이렇다할 주장도 못하고 .. 어찌되었던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확고부동했던 학설들이든...어설픈 가설 수준이든...다방면의 검토로 상식적 모순들이 없다면...그게 진실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일본과 왜를 동일시 하는 시각이 김홍필님의 글에서 나타나는데 왜는 족발이 들이고 일본은 백제의 후신 으로 최남석은 보고 있습니다 소서노 비류 온조가 그 시조이지요 / 페르시아= 비류백제 =일한국 이 일본이라는 등식은 자료제시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최소한 임란때부턴...왜노들도 일본이란 호칭을 썼을 것으로 보입니다...인도양 토왜들이 현 일본 열도를 접수했거나...현 일본열도 원주민들이 전체 왜들의 맹주가 됐거나 두 가지 경우로 보입니다...일본이란 말 자체가 해뜨는 자리를 얘기하니...무조건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기준으로 해뜨는 동쪽을 일본이라 했다기 보단...유라시아 대륙의 끝인 태평양이 일본이요...가장 동쪽에 있던 현 일본열도...북해도나 캄차카반도가 일본국의 조건이 됀다 예상합니다.
영미와 서구열강이 합세해서 100년동안 거짓말을 강요하고 있으니... 고작 백수십년 전의 진실이 다 묻혀버리는군요. 결국 이에는 이, 힘에는 힘이라는 걸까요? 힘을 가지게 된 북한이 어떤 선택을 할지 조마조마해집니다.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양이들과 왜노들만 호흡을 맞춘다고...정작, 당사자인 고려(조선)인들이 완벽히 속았을 리 없다 하겠습니다...고려(조선) 내부로 부터도...이 역사 왜곡이 필요했던 세력이 있었을 것이고...전 그걸...고대명칭 삼한이자...월지국(가라국)지역이 고향인...몽골통치기 사한국 출신 ... 시싼반납(운남~사천~인도북부)출신 대한뎨국(떼국) 세력들이라 예상합니다.
북조선의 상당수 인원들은...내외몽골 초원에서 쫒겨난...만주에서 쫒겨난 청&몽골조선인들로 예상되나...그 지도급들과 상당수 인민들은 어쩔수 없이 남한과 마찬가지로 산동에서 동북삼성으로 구한말때 이주한 대한제국 출신들이 많은 것으로 사료되니...역사진실 규명이 북조선도 난해한은 마찬가지일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