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당스라는 단어는 19세기 말, 문예사조의 명칭으로 퇴폐주의, 쇠미, 쇠퇴를 뜻하는 프랑스 말입니다. 반사회, 반도덕성을 모방하고, 인공미나 추악한 것에서 미를 찾는 일에 탐닉을 했습니다. 인간 본연의 본능대로 흘러가 보자는 것입니다. 보들레르, 베를렌, 말라르메, 랭보 등의 악마주의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은 M.블레시, 로당바크, 라포르그 등 상징파 시인들이 스스로를 데카당이라 부르며, 대중들에게 외쳤습니다. 너희들도 원래 이런 게 좋지 않니? 연극들 하지 말고 본능에 충실해 봐! 이러한 일군의 데카당들은 자기들이 속했던 시대를 풍미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이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조는 문학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어, 하나의 시대정신 화가 되어 보수주의자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데카당스는 인간 본연의 실체를 폭로시켜가며 이미 결정된 역사의 지향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인간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자기의 쾌락과 행복과 기쁨을 위해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될 것이고, 역사는 점점 더 추악한 마귀의 실체를 드러내며 쇠락해 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인생과 역사의 과정이며 종국입니다. 하나님은 이 인생과 역사를 마귀의 손에 붙여 경륜해 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피조물들의 결국이 어떠한 파국을 맞게 되는가를 반드시 증명해 내야 합니다.
그런 와중에 인간들의 자정 운동이 펼쳐집니다. 우리 인간은 소중하고, 그 소중한 인간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이 역사는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그렇게 지리멸렬하게 놓아 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덕 운동이 일어나고, 여기저기서 사회 정화 운동이 일어납니다. 세상을 개혁하여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이 주인공인, 인간을 위한, 유토피아를 만들어 내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 측의 노력은 건강한 시민의식으로, 의로운 혁명으로, 건전한 개혁으로, 포장이 되어 인간들의 자존심을 한껏 부추겨 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들의 눈물겨운 자정운동 또한 데카당스 못지않게 인간들의 자기 행복 찾기, 자기 가치 찾기의 자기 자신이 주인인 더러운 시도인 것입니다. 데카당스(반사회적, 반도덕적 퇴폐주의)가 인간들의 노골적인 자기 행복 찾기의 폭로라면 그러한 데카당스와 맞서는 인간들의 자정 운동은 감추어진 은밀한 자기 주인공 되기의 추악한 행보인 것입니다. 그 둘의 양상은 모두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이 세상을 움직여 살아 보겠다'라는 선악과 따먹은 가짜 하나님들의 다른 가면일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러한 인간들의 자정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세리나 창기 같은 죄인들은 뱀보다도 못한 자로 보였던 것입니다. 자기들은 열심히 노력하여 그만큼의 자정을 이루어 냈는데 세리나 창기 같은 이들은 자기들의 자정을 위해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파렴치하고 불성실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리나 창기들이 인간들의 보편적 가치와 보편적 자존심의 평균 점수를 깎아먹고 있는 자들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더 미웠던 것입니다. 왜 저런 인간들 때문에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렇게 더럽게 오염이 되어야 하느냐고 분개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창녀 노릇하고 세리 노릇 하는 게 잘 하는 일이어서가 아니라, 그들만이 예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데카당스의 흐름 속에 들어 있는 세리나 창기, 그 대척점에서 자정 운동을 하겠다고 부산을 떠는 바리새인들 모두가, 죽은 흙으로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누가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느냐가 관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가 인생의 목적과 내용을 이렇게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3:18-20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 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곳으로 가거니와
이 인생과 역사는 하나님의 시험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험이 무엇을 증명하는 시험입니까? 인생이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는 헛된 것임을 경험하게 하고 교훈하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생은, 역사라는 그들의 건축물을 세워가면서 결국에는,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이며 언젠가는 한 번에 사라질 짐승들의 우리 건설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콧김, 하나님의 생기가 은혜로 가입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것이라는 걸 이 역사는 증명해 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짐승들이 역사라는 짐승 우리를 건설하면서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들의 행위와 업적과 공로를 가치 있는 것으로 우기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강해 49장-1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