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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국성 開城 王氏 개성 왕씨 | |
관향 | 개성시 |
비조 | 고려 국조 원덕대왕 |
시조 | 고려 태조 신성대왕 |
집성촌 | 경기도 개풍군 경기도 이천시 율면 오성리 충청북도 청주시 전라북도 정읍시 |
인구 | 22,452명(2015년) |
3.3. 현황
고려의 국성으로 고려 왕조 개창 이후 474년 동안 번성하였던 대한민국의 성씨 집단이다.
일단 시조는 고려 태조의 증조부 국조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왕씨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국조의 손자 세조 이후로 보인다.[1]
국조와 세조의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왕건의 조상이 왕씨 성을 썼는진 확신할 수 없다. 《고려사》 <고려세계>에는 태조 왕건의 조상이 누군지 알기 어렵다며 《편년통록》, 《편년강목》과 이제현의 <논평> 두 주장을 모두 실었다.
두 가지 주장을 요약하면 《편년통록》, 《편년강목》은 세조 용건 혹은 태조 왕건 대부터 왕씨 성을 썼다고 한다.[2] 반면 이제현은 국조 대부터 이미 왕씨 성을 써왔다고 주장한다.[3] 현실적으론 태조 왕건이 신라계 귀족이 아닌 고구려계 지방 토호란 걸 감안하면 원래 가문에 성씨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방 토호라고 해서 성씨가 무조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견훤의 아버지였던 아자개도 그 속성이 이씨(李氏)였다고 전해진다.
《편년통록》, 《편년강목》은 당나라의 숙종이 고려 '의조'의 친부라 하지만, 이제현의 <논평>은 당 숙종이 고려 '국조'의 친부라고 했다. 결국 둘 다 고려 왕씨 왕실이 당나라 이씨 황실의 직계 후손이란 걸 드러내고자 하는데, 이런 부분은 태조 왕건, 나아가 세조 용건, 의조 작제건 등 왕씨의 조상들이 신라 김씨들이 김일제의 후예를 참칭하는 것처럼 왕권의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한 숭조 사업의 일환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재상이였다고 전해지는 왕산악이나 왕고덕, 당나라에서 무장으로 활약했던 고구려 유민 출신인 왕사례나 왕모중의 사례로 보았을 때 왕건의 선조들도 마찬가지로 고구려 멸망 전후로 신라에 편입된 고구려 왕씨 귀족의 후손일 개연성도 충분하다. 당장 북송의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는 고려 왕실인 왕씨가 고구려의 대족(大族), 즉 큰 씨족 또는 귀족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지방의 유력 호족들과의 결혼으로 엄청난 수를 자랑했던 왕건의 자손들 상당수가 혜종~경종대의 왕위 다툼, 특히 광종대의 숙청에서 대거 살해되기는 했으나, 왕건의 아들 효은태자(孝隱太子)[4]의 자손이나 왕건의 손자 현종이 살아남았고, 특히 고려 왕조를 중흥시키고, 100여년이 넘는 전성기의 서막을 연 명군 현종의 자손들은 매우 번창했다. 왕씨들은 고위 귀족과의 정략결혼이나 왕씨 일족간의 근친혼을 했고, 이는 고려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상당한 수로 늘어났으리라 여겨진다.
다만 왕통에서 이어지는 직계는 인종을 마지막으로 급격하게 쪼그라든다. 인종 이후 의종부터 장성할때까지 성장하는 적자가 많아야 둘셋이었고 출신성분이 낮은 서자들만 많았다. 이런 왕자들을 스님으로 출가시키는 풍속에다, 무신정권과 몽골이라는 외부세력에 의한 권력다툼과 폐위 등이 더해져 차근차근 대가 끊어지기 시작해 우,창을 폐가입진으로 왕씨 호적에서 파냈을 땐 창왕의 18촌, 모계 9촌. 신종의 둘째 아들의 셋째 아들의 둘재 아들의 고손자인 공양왕이 왕위에 제일 가까운 왕족이었다.
&amp;lt;img class='wiki-image' width='100%' src='//w.namu.la/s/136d6ab3623ef095880975b698cd27aebf6887c9d8eb7f5f72caa1e1e98b8b76a24e2bf57507f45c49090ad8e0c386938300d673e7083183fa216006e2a8a6d9294c05255e8b1799125fa7c4e34774bebb6a343ded7c74cc83383b01e85cc4ed09d1e481321f505230a9d69b1f79e96d' alt='상세 내용 아이콘'&amp;gt; 자세한 내용은 왕씨 제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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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개성 왕씨에게 약 20년에 걸친 시련이 닥쳤다. 태조 2년까진 도당과 대간이 왕씨를 주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에도 태조의 보호를 받아 무사했으나 태조 3년의 박위의 점괘 사건으로 유력 왕족들은 백수십명이 삼척, 강화, 거제에서 처형되고 방계들은 성을 바꿔야 했다. 태조 이성계의 장남 진안대군 이방우의 사돈, 7남 무안대군 이방번의 처가였던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5]와 그의 두 아들이 고려 왕조에 대한 제사를 받들었지만 왕우가 병사하고, 두 아들 상장군 왕조(王珇)와 대장군 왕관(王琯)이 무인정사에 휘말려 목숨을 잃어 왕우의 대는 끊기게 되었다. 거기다 왕우의 장녀 삼한국대부인 왕씨는 이방번의 아내였는데, 자식도 없이 남편이 무인정사 때 사망하는 등 왕우의 자손들은 불운이 연달아 터졌다.
다행히 조선왕조가 안정된 태종 때부터 왕씨들에 대한 탄압을 풀어주기 시작해 세종과 문종을 거치며 복권되었다. 이중에 이름이 남은 이들이 후일 숭의전 부사로 고려 왕실에 올리는 제사를 맡게 되는 왕순례(王循禮)[6]와 개성 왕씨의 동양군파 중시조인 왕미(王亹) 등이었다. 왕미의 경우 그동안 외가 성인 민씨로 행세했다고 하는데, 《태조실록》 태조 3년 4월 26일 기사를 보면 왕손이 아닌 왕씨는 외가 성을 따르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태종 13년부터 왕씨들이 드러나도 처벌하지 않은 채 덮으며 넘어가고, 문종 대에 이르러서는 전 왕조의 왕족들로 하여금 고려 왕실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그에 따른 물품 등을 지급하는 식으로 예우해 주기 시작하면서 차츰 복성했다. 세조는 생일 잔치에 왕순례를 초대해 2품에 준하게끔 우대했다.
단종~세조 시기부터 개성 왕씨는 사족의 일원으로 조선 사회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사족들은 중앙에서 벼슬한 쪽과 지역 향촌사회에서 영향력 확대에 주력한 쪽으로 갈리는데 개성 왕씨는 후자쪽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789년 편찬된 《왕씨 족보》를 참고하면 전라도 지역, 구례와 여산, 조선 왕실의 본향이기도 한 전주에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구례 지역에선 왜란-호란 시기 의병활동을 바탕으로 확고한 지배 사족으로 자리잡았다. 다만 철학왕국인 조선 사회에서 내세울만한 이름난 학자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1789년 그때까지 전해오던 가전기록을 바탕으로 《왕씨 세보》를 다시 편찬했고, 태조 신성대왕 왕건이 수도로 정한 개성을 본관으로 했으며, 태조의 아들 중 종법상 서열이 15번째였던 왕원을 1세 조상으로 했다. 이것은 고려가 망한 지 거진 400여년 만의 일로 정조 대에도 개성 왕씨를 찾아내 본성을 쓰게 하기도 했다. 퇴계 이황과 교분이 있었던 왕희걸은 왕씨 문중에서 최초의 문과급제자로 기록되었고,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다. 선조 때 왕의성은 의병을 일으켜 청주 전투에서 공을 세워 순조 4년에 지평(持平)·도승지로 증직되었다. 흥선대원군 대에는 대원군이 왕씨 인물을 중용하겠다는 뜻을 밝혀, 동부승지를 지낸 왕정양 등이 벼슬한 인물로 이름을 오르내렸다.
하여간 왕미의 후손들이 현재 개성 왕씨의 90%를 차지하는 평양공(平壤公)파[7] 이외에도 계속 살아남아 근근히 씨족을 이어간 동양군(東陽君)파[8], 양양공(襄陽公)파[9], 안경공(安慶公)파[10], 시중공(侍中公)파[11] 등 등이 존재한다. 현재 존재하는 개성 왕씨 인구 2만 명 중에 평양공파 이외의 나머지 파인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겨우 2천 명이니 이 성씨가 얼마나 조선 시대에 근근이 이어져 내려왔는지 알 수 있다.부자는 망해도 삼 년을 간다고 하듯이 물론 이걸 거꾸로 얘기한다면 족보를 위조하거나 구입해서 가문에 편입된 사람이 적다는 얘기도 되지만... 사실 개성 왕씨가 공식적으로는 복권이 상당히 늦게 되어서 가문에 편입해봤자 메리트가 딱히 없었을 것이다. 즉 개성 왕씨인 사람들은 대부분 진짜 고려 왕실의 후예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지금 수백의 본이 이어지는 조선의 전주 이씨나 신라의 경주 김씨 및 밀양 박씨, 가야의 김해 김씨와 비교해본다면 그야말로 안습일 따름이다. 다만 순수혈통을 이어나갔다는 점 때문에 조선 중기 이후에는 그만큼 유교사회에서 가문의 정통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전화위복의 극단적 사례인 셈이다.
다만, 왕씨 복귀가 허용된 이후로도 복귀하지 않고 외가의 성이나 바꾼 성을 그대로 쓴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개성 왕씨의 유명인으로는 연예인 전지현[12], 왕영은(초대 뽀미 언니), 왕종근, 왕석현, 왕상은 등이 있다.
여담으로 본향인 개성시와 매우 유사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건국사 이전에는 역사서에 존재가 없었다는점, 고려 시기에는 각각 왕성(王姓)이랑 왕도(王都)로 흥했다가 고려가 망하자 그저 그런 존재로나마 없어지지 않고 후대로 이어나갔다는 점, 즉 흥망성쇠를 각각이 왕성(王姓)/왕도(王都) 역할을 한 고려라는 국가와 함께 했다는 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