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42기 중 서른 여덟 번째로 여주의 영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을 소개합니다.
바로 옆의 영릉(英陵, 세종과 소헌왕후)과 이름이 같아서 흔히들 효종릉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순서는 제가 직접 다녀왔던 순서대로 합니다.
여주 영릉과 영릉
영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
위치 :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269-10
조성 연도 : 1659년(현종 즉위), 1673년(현종 14), 1674(현종 15)
왕릉 형식 : 동원상하릉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동원상하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 아래로 조성한 능으로,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조성하였다. 효종 영릉과 경종 의릉 2기가 해당되며, 왕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다.
▷ 영릉(寧陵) 이야기
영릉(寧陵)은 조선 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다. 영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최초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위에 위치한 봉분이 효종의 능이고, 아래 봉분이 인선왕후의 능이다. 이렇게 능을 위아래로 조성한 이유는 쌍릉의 형태처럼 봉분을 나란히 조성할 경우, 풍수지리상 생기가 왕성한 정혈(正穴)이 벗어나기 때문에 위아래로 배치한 것이다.
원래 영릉은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현 구리 동구릉 내 원릉 자리에 조성되었으나, 조성 직후부터 능침 석물에 문제가 생겨 보수가 계속되자 능 안에 빗물의 피해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1673년(현종 14)에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능을 옮길 때 방을 열어보니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두 능의 봉분은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에 십이지신을 문자로 새겼다. 효종의 능침과 인선왕후 능침 석물은 각각 조성되었으나 곡장은 효종의 능침에만 둘렀다.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표석이 있는데, 조선왕릉 중 최초로 세운 표석이다. 조선 전기 세종의 옛 영릉까지는 신도비를 세웠으나 문종의 현릉을 조성할 때 신도비를 없애었다. 이후 효종의 영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표석을 세울 필요성이 논의되어 1682년(숙종 8)에 세웠다. 영릉 입구에 있는 재실은 제향을 준비하는 건물로 현재 조선왕릉의 재실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다.
▷ 효종(孝宗) 이야기
효종(재세 : 1619년 음력 5월 22일 ~ 1659년 음력 5월 4일, 재위 : 1649년 음력 5월 13일 ~ 1659년 음력 5월 4일)는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 11) 경행방 어의궁에서 태어났다. 1623년 아버지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1626년(인조 4)에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듬해 형 소현세자와 부인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는데, 형 소현세자와 다르게 효종은 볼모생활을 하면서 청나라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효종은 1645년(인조 23) 형 소현세자가 먼저 귀국 후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자 바로 귀국하여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아버지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효종은 두 차례의 호란(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여 청나라를 향한 북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세력이 강해져 실현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1654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청나라와 러시아의 전쟁(나선정벌)에 출정하였다. 이후 1659년(효종 10) 창덕궁 대조전에서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인선왕후(仁宣王后) 이야기
인선왕후 장씨(재세 : 1618년 음력 12월 25일 ~ 1674년 음력 2월 24일)는 본관이 덕수인 신풍부원군 장유와 영가부부인 김씨의 딸로 1618년(광해군 10)에 경기도 안산군(현 시흥시)에서 태어났다. 1631년(인조 9) 당시 봉림대군이었던 효종과 혼인하여 풍안부부인(豐安府夫人)이 되었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의 결과로 남편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가게 되었다. 1645년(인조 23) 남편 효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효종과의 사이에서 1남(현종) 6녀(숙신·숙안·숙명·숙휘·숙정·숙경공주)를 낳았으며, 1659년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가 되었다. 이후 1674년(현종 15) 경덕궁(현 경희궁) 회상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 여주 효종 영릉재실(驪州 孝宗 寧陵齋室)
재실은 왕릉을 관리하는 관리자(종9품 참봉이나 종5품 영)들이 지내며 업무를 보는 곳이자 제향을 준비하는 곳이다. 영릉 재실은 효종 영릉이 현 동구릉 경내 영조의 원릉 자리에 조성될 당시에 지었던 건물로, 1673년(현종 14) 영릉을 여주로 옮길 때 같이 옮겨온 것이다. 조선왕릉의 재실 중 안향청, 제기고, 행랑 등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재실의 기본형태가 잘 남아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 여주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驪州 孝宗大王陵(寧陵) 淮陽木)
회양목은 회양목과의 나무로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인데 효종 영릉 회양목은 키가 크고, 다른 회양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물학적인 가치가 큰 나무이다. 이 회양목은 1673년(현종 14) 현 구리 동구릉 내에 있던 효종의 영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함께 옮겨져 재실에서 300여 년 동안 자란 나무로, 2005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첫댓글 나도 명당인줄 알아보겠다. 진짜 양지 바르네..ㅋ
왕릉 자리는 정말 다들 명당이더군요
광해군, 연산군묘만 제외하고...
@베라루빈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입장에서 진짜 묘자리가 중요한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만.. 그래도 명당이란 곳에 저렇게 해놓으니 후손들이 보기에는 뿌듯 하지 싶네요.
@《해인재인강인》아빠
맞습니다. 얼마나 명당자리인지는 저 파랗게 잘 자라는 잔디를 보면 잘 알 수 있죠.
그래서 왕릉 인근의 학교들은 소풍을 전부 왕릉으로 간답니다.
존아침입니다 위원장님
정회원님께서 먼저 왕림하시고 인사까지 주시다니....
"소인, 죽여주시옵소서~~~"
@베라루빈
이상한 방법으로 준게이들 갈구는분 있다고 해서 구경하러왔습니다.
@《해인재인강인》아빠
햄 33인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