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Youtube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지은 업의 과보를 피해 갈 방법)
2차 가공자: 여성시대, 정글은 언제나 맑음 뒤 흐림
글 작성자는 법문을 설파한 영상 속 장본인이 아니며, 영상 제작진 또한 아닙니다. 일개 시청자로서 좋은 영상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2차 가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성자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을 캡처하여 작성한 것이므로 단편적이고 주관이 섞인 글임을 잊지 말아주세요. 캡처뿐 아니라, 스님의 말씀까지도 가독성을 위해 실례를 무릅쓰고 많은 부분을 수정하였습니다. 영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하는 글임을 명심해주세요.
한 가지만 더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무단스크랩 하지 말아주세요. 비록 원작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자격도 없지만 이 글을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인 노력을 존중받고 싶습니다. 스크랩이 가능한 다음카페 내에서만 공유 부탁드립니다.
특히 더쿠 유저분들은 가뜩이나 재가공된 이 글을 출처(여성시대) 없이 재차 편집•수정하여 스크랩하지 말아주세요. 왜곡의 여지가 충분히 있으며 글 작성자에 대한 무례입니다.
인생은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
운명론에서는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방법론을 논할 수 없게된다.
그대신 뜻대로 안 되는 인생에 대한 답답함에 나온 숙명론이 있다.
▪︎신에 의해서
➡️ 신께 잘 보이기 위해 기도를 한다.
▪︎전생에 의해서
➡️ 후생을 위해 현세에 착하게 산다.
▪︎태어난 년•월•일•시에 의해서
➡️ 정해진 운명을 미리 확인한다.
부처님은 이 모든 걸 부정하셨다.
운명은 바꾸어 나갈 수 있다고 하셨다.
담배를 한 시간 동안 한 갑이나 피우는 사람이 있다. 그를 보고 우리는 그가 내일도 담배를 피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측은 그의 특별한 노력이 없는 이상 99%는 맞아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100%라고는 할 수 없다.
흡연의 욕망에 그가 끌려다니지 않는다면? 업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면?
피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인연의 과보(업보)로서 이미 어쩔 수 없지만 그 마음이 일어남에도 다시 피울 것인지는 그에게 달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업보'
업 즉, 카르마라는 용어는 흰두교와 불교에서 함께 사용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흔히 쓰는 '업보'는 흰두교적 개념이다. 윤회나 업보 등 우리가 불교 용어로서 알고 있는 것들은 사실 대부분이 이미 불교 교리와 많이 멀어져 있다.
우리가 '업보' 대신에 비슷한 의미로 많이 쓰는 '인과응보'의 개념 또한 불교 교리라 볼 수 없다. 부처님께선 보복을 하지 말라 하셨으니, 자연적 보복이라 볼 수 있는 인과응보 또한 불법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불법은 투명하기에 헷갈릴 이유가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운명은 어떻게 전개가 될까
불교에서 카르마라는 것은 확정돼 있는 게 아니고 변화한다. 수많은 과오들이 있었다고 해도 내 노력에 의해서 지금 이 순간부터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간 흡연을 해온 과오가 있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흡연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욕구의 노예가 되어 다시금 흡연자로 되돌아가는 것, 그러한 것들 따위가 바로 불교가 말하는 업이다.
카르마의 지배를 한 번 뿌리쳤다 해서 그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1초 후에, 2초 후에, 3초 후에, 4일 후에 그때 그때 수시로 일어나는 욕구로부터 끌려다니지 말아야 한다. 일어난 욕구로 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세운 것이 불교의 계율이다. 계율을 지키는 것 즉, 이미 일어난 욕구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대결정심이 필요할 정도로 힘들다. 욕구가 일어날 기미를 알아차림이 더 중요하다. 찰나 찰나에 깨어 있어야 한다. 나도 모르게 무지(무의식)에 의해 끌려가지 않기 위하여 매 순간 순간 내 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 마음 속엔 반응만 있을 뿐, 업의 노예는 없다.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죄라는 건 무엇인가?
죄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 즉 무아다. 고통의 실체가 없기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고통은 변할 수 있기에 즉, 소멸할 수 있기에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무상과 무아가 불교철학의 핵심이다.
불교에는 과오로 인한 잔인한 숙명도, 인과응보도 없다.
첫댓글 찰나 찰나에 깨어 있기, 현재를 알아차리기 ... 요가 수행 중에도 자주 듣는 말인데 일상에서 지키기가 쉽지 않네 ㅠ 그래도 좋은 글 덕에 한 번 더 생각하고 가! 고마워 여시 😊
맞아, 인과응보가 있다고 믿으며 악인/가해자가 잘 사는 모습 보고 고통받는 것 조차 불교 교리에는 업인 거야, 스스로 고통받는 거지. 악인/가해자의 처우와 상관없이 스스로 벗어나고 해탈해야 한다는게 불교 교리임.
근데 이래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 거 같음 ㅋㅋㅋ 내 마음 편한데에는 좋지만 세상의 부조리를 개선해주지는 않음
여시야 두 번째 문단 때문에 생각이 많아졌어
정리가 잘 안 되네
생각해 봐야할 부분을 집어줘서 고마워
@정글은 언제나 맑음 뒤 흐림 앗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난 무교라 별 생각없이 썼는데 혹시 종교를 폄하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조심스럽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구이긴 한데 무조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음! 투쟁하는 개개인이 평정심을 갖기 위해서, 특히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정신줄 잡는데에 종교도 좋은 수단 중 하나라고 보거든 ㅎㅎ
여샤 두번째 문단 진짜 좋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단어 되게 여러 생각을 곱씹게 만들어
넘 재밌다
참 좋은말이다
좋은말이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여시 정말 통찰이 뛰어나다..
그게 바로 불교가 결국에 말하고자 하는 '무아'야
나라는 건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함이 불교의 시발점이래
맞어...! 원래 불교는 자아란거는 없다 하고 그래서 ‘무아’라고 하잖아.. 무아지경도 불교 용어인거고.. 불교는 자아란 건 없다고 하잖아 여시 말이 맞는거같아 나도그래서 불교 교리 좋아함ㅋㅋ
나무아미타불
좋은글이다
헐 글 너무 고마워!!
필사하고싶어진다 고마워 글쓴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