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 자운영 꽃들이 지리산과 섬진강 주변의 들녘을 점령하고 있다. 아니, 보랏빛 꽃구름이 지상에 안착한 것이다.
저 만화방창 꽃천지를 어이 마다하랴. 애마의 시동을 걸었다.
날마다 내려다보는 아랫마을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4대 명당 중의 하나라는 운조루 앞에 잠시 모터사이클을 세우고 카메라를 꺼낸다.
산중에 사는 가난한 시인, 더 좋은 말로 초를 치자면 청빈을 꿈꾸는 시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럭셔리 투어러'이니 내가 생각해도 한편 우습기도 하지만 어이하랴.
내 인생에 시창작이 없는 것이나 내 인생에 바이크가 없는 것이나 둘 다 상상초자 할 수 없는 것을...
25년간 13대의 바이크를 갈아타며 여기까지 왔다. 90cc부터 시작해 혼다와 할리데이비슨 등등 오다보니 이제 끝까지 온 셈이다.
2종 소형이야 있지만 자동차 면허증은 아예 딴적이 없으니 당연히 차를 몰아본 적도 없고, 오직 대중교통과 바이크만을 탔으니...
내게 있어 바이크는 레저가 아니라 그야말로 일상생활이다. 그러니 무리하게 과속할 일도 없고 날마다 안전운행, 지리산과 전국을 누비는 것이다.
또한 바이크 복장이 곧 일상복이니 시낭송을 하러 가든지, 강의를 하러 가든지, 서울에 출판 일을 보러 가든지, 상가에 가거나 결혼식에 가든지, 때로 예의에 걸맞지 않아 눈총을 받더라도 여벌의 옷을 준비하지 않는다.
한번 예의에 어긋나면 눈쌀을 찌푸리지만 늘 그러면 어느새 용서가 되는 법.
그동안 년간 50,000km 정도를 꾸준히 타온 셈이니 참, 주인을 잘못 만난 바이크 입장에서는 행인지 불행인지...
담배가 떨어져 아랫마을 가게에 가거나 폭설이 내리거나 옛길을 찾아 비포장 산길을 갈 때면 세컨 바이크 효성 RX 125가 있으니 LT의 단점은 커버되고 아무 걱정이 없는 셈이다.
어쨌든 오늘(4월23일)은 구례 섬진강변 길을 달려 하동군 악양면을 다녀왔다. 국도 19호선과 지방도 861번 도로는 아무리 달려도 질리지 않는 강길, 물길, 꽃길이다.
다음주면 갈아엎어져 천연의 녹색비료가 될 자운명꽃들을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고, 하동군 평사리의 한산사에 올라 무딤이들과 섬진강을 내려다 보고, 전남과 경남의 도경계 근처에 있는 등나무 아래 휴게소에서 3천원짜리 잔치국수 한 그릇을 먹으니 오늘 또 하루가 충만 또 충만이다.
오늘만 같아라, 오늘만 같아라. 주문을 외며 롱텀 그 첫 얘기를 마친다. 모두 모두 안전운행 하시고, 지리산에 오시면 함께 861번 지방도를 타고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에서 물길 백리, 산길 백리인 지리산 실상사까지 달려봅시다.
#PS 4년 전에 쓴 시 한편 올립니다.
우리는 폭주족이 아니다
이원규<시인>
우리는 폭주족이 아니다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던 기마민족의 후예다
풀잎 대신 휘발유를 마시고 푸다다다 모터사이클을 타는 기마민족의 아들이다
지리산을 넘고 전국의 국도를 달리며 바이크 위에서 가부좌를 틀면 그래 그렇지 온몸의 숨구멍이 열려 바람이 내 몸인지 내 몸이 바람인지 일초직입의 경지가 따로 있으랴
초원이 없고 몰아야할 소 떼가 없지만 바람의 정면에 서서 애써 참던 눈물을 흘리면 지금 바로 여기가 만주벌판이요 몽골 대평원 속도도 없이 어찌 반속도를 꿈꿀 수 있으랴
360만 기마족 형제들이여 기마민족의 후예들이여 우리의 선조들은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달렸다 신라시대의 화랑도들은 서라벌에서 지리산 노고단까지 달려와 활을 쏘았다
바람의 시위를 당기며 푸다다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 일주를 나설 때 천둥 벼락이 치고 소낙비가 쏟아지면 어떠랴
우리는 폭주족이 아니다 말을 타고 몽골 대평원을 달리던 칭기즈칸의 후예 만주벌판을 달리던 독립군의 아들이다
우리는 폭주족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마지막 기마족이다 |
첫댓글 늘 귀한 글 일고 아름다움과 멋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오랫만 입니다. 남해 류경완 입니다. 잘 지내시죠. 가끔 이곳에서 글을 접합니다. 바이크 타고 남해 바람도 한번 쐬러 오시죠.
아...자유가 느껴집니다*^^*
날마다 내려다 보이는 마을이 오미리라면 문수골에 사시나요?? 저도 구례군 토지면이 고향인데...^^ 지리의 정기를 타고 난 셈이죠...ㅋㅋ 어쨌든 바이크도 멋있고 님은 더욱 멋있습니다...^^
산방님의 자유가 보입니다. 산방님 글과 사진 보면서 남도에 살았던 때를 엄청 그리워하고 있습니다.몇년 후 다시 짐 싸서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야 겠어요. 그때 문수골 가면 정식으로 차 한 잔 대접 받고 싶은데....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