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 소복곡지(素服哭之)와 백제의 황칠
백제의 역사를 고찰하다 보면 일반적인 역사 상식을 뛰어넘는 사서의 기록을 만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제의 임금은 황제를 칭하지도 않았으며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하였던 조그마한 나라 정도로 인식을 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의 한 사람으로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루었다는 당태종 이세민을 꼽는다. 당태종이 고구려와 여러 차례 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하고 후회를 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당태종이 백제의 무왕(武王)이 죽었을 때 소복(素服)을 입고 통곡을 하였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당태종, 백제 무왕 사망 시 소복(素服)입고 통곡
<구당서> 권199 ‘동이열전’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정관 15년(641년) 장(璋)이 죽자 그 아들 의자(義慈)가 사신을 보내 표(表)를 받들고 상을 고하자 태종이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였다(十五年 璋卒 其子義慈遣使 奉表告哀 太宗素服哭之).”라고 하여 백제 무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42년(641년)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武)라고 하였다. 사신이 당나라에 들어가 소복을 입고 표를 받들어 ‘임금의 외신(外臣)인 부여장(夫餘璋)이 죽었다(君外臣扶餘璋卒).’라고 하자 제(帝)가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哀悼式)을 거행하였다.”라고 되어있다.
<삼국사기>의 내용은 <신당서>의 내용과 같다. 일국의 제왕이 다른 나라의 임금이 죽었을 때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였다는 예는 <구당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서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우리를 대등한 관계가 아닌 동방의 작은 오랑캐 제후국 정도로 여기는 중화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경천동지할 내용이다.
천하의 당태종이 백제 무왕의 죽음에 소복을 입고 곡을 하며 애도식을 거행하였다면 그 상하관계가 자명하다.
옛날에는 황제의 죽음은 ‘붕(崩)’이라 하고, 제후나 왕의 죽음은 ‘훙(薨)’이라 하며, 벼슬아치는 ‘졸(卒)’이라 하며, 일반 사람들은 ‘사(死)’라 하였다.
<신당서>를 인용하여 기록한 <삼국사기>에서는 당태종을 ‘제(帝)’로 기록하고 무왕의 죽음을 ‘훙(薨)’으로 기록하는 등 스스로를 비하한 면이 있지만 무왕이 당태종에게 올렸다는 표문에는 분명하게 당태종을 ‘제(帝)’가 아닌 ‘군(君)’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신하가 황제를 지칭할 때 ‘군(君)’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군(君)’은 처음에는 제왕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후대에는 봉지를 받는 제후의 개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구당서> 등 중국의 사서들은 중화사관에 의해 기록되다 보니 무왕의 죽음을 사대부나 벼슬아치의 죽음처럼 ‘졸(卒)’로 기술하여 놓고는 황제가 소복을 입고 애도식을 거행하였다고 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기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태종이 고구려와의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고 안시성을 잘 지키라 하며 비단 백 필을 하사하였다고 하는 것하고 똑같다.
혹자는 이에 대해 당태종의 너그럽고 황제다운 인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이는 치욕을 감추기 위한 곡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당태종과 백제의 무왕과의 관계를 보면 백제 말기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안기’의 모습 - 여기에서 백제의 왕을 대왕 폐하라 하고 있다.>
당태종을 무왕 표문에 '제(帝)' 아닌 '군(君)'으로 기록해
<삼국사기>와 <구당서> 그리고 <신당서>를 보면 백제의 무왕이 소위 당나라에 바쳤다는 물품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무왕이 첫 번째로 바친 것은 과하마(果下馬)이며 그 다음은 명광개(明光鎧), 철갑(鐵甲), 조부(雕斧) 등이다. 이는 모두 전쟁물품이며 전투장비들이다.
키가 3척이며 말을 타고 과수나무 아래를 지날 수 있었다고 하는 과하마는 <후한서>와 <삼국지>에서는 예(濊)에서 난다고 하였는데 백제에서도 산출이 되었다는 것은 예와 백제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백제 말기에 예의 땅을 차지하였다는 말이다.
명광개는 황금처럼 밝게 빛이 나는 쇠로된 갑옷을 말한다. 명광개는 백제의 세 개의 섬(三島)에서 나는 황칠(黃漆)을 갑옷 표면에 입혔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일반적으로 칠하면 검은 색의 옻칠을 떠올리기 쉽지만 백제에서는 황칠이 생산이 되었으며 <신당서>에서 소개하고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백제의 기후는 온난하며 오곡 잡과와 채소가 많으며 내지(內地)와 같다. 백제 해도(海島)에는 황칠나무가 있는데 모습은 작은 종려나무와 비슷하나 크다. 6월 중에 즙을 채취하여 기물(器物)에 칠을 하면 황금과 같고 그 빛이 눈이 부시다.”라고 하였으며,
<절강통지(浙江通志)>를 보면 “<명일통지(明一統志)>에서는 (절강 지역의)순안(淳安), 수안(遂安), 수창(夀昌)의 세 개의 현에서 난다고 하였으며 <본초강목>에서는 절강 동쪽에서 나는데 소가(小榎)나무와 흡사하고 6월에 즙을 채취하여 사물에 칠을 하면 황금색으로 금과 같다고 하였다. 즉 <신당서>에서 말한 황칠이다.”라고 하였으며
위 <절강통지>에서 말하는 ‘절강성에서 나는 황칠이 <신당서>에서 말한 황칠’이라면 절강성 지역이 삼국시대의 백제 강역이라는 셈이 된다. <신당서>에서 황칠에 대한 기사는 ‘동이전 백제 조’에만 나오기 때문이다.
<황칠이 생산되었다는 절강성의 순안, 수안, 수창 지역 - 대청광여도에서 편집. ‘성씨고략’에 의하면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와 8대 성(姓) 중의 하나인 목(木)씨가 오흥군에서 많이 있다고 하였는데 바로 절강성의 소흥 일대 지역이다.>
황칠은 백제가 망하면서 신라칠로, 고려시대에는 고려칠로 불렸다. 그렇다면 양자강 이남지역은 백제 지역으로 있다가 후대에 신라로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 전의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 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와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는 기사가 사실로 확인이 되는 셈이다.
부여의 백제 사신, 하루 만에 양자강 도착?
양자강 이남지역이 바로 ‘월(越)’지역이라는 것은 역사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은 다 안다. 북주의 역사를 기록한 <주서(周書)>와 <북사(北史)> 등의 여러 사서에서 “백제는 진(晉)나라 때부터 송(宋), 남제(南齊), 양(梁)나라 시기에 양자강 유역을 점거하였다(自晉宋齊梁據江左).”는 기사가 이를 확인시켜 준다.
또한 고구려를 침략하여 패망의 길로 들어선 수(隋)나라 양제의 기록에서도 백제의 양자강 유역 점거를 간접 확인할 수 있다.
<수서(隋書)> 권3에서 수양제는 낙양에서 강도(江都, 양자강 하류 유역, 장보고의 ‘해신’드라마로 유명했던 양주(揚州)지역임)로 가는데
“대업7년(611년) 2월 기미(己未), 상이 조대(釣臺)에 오르고 양자진(揚子津)에 이르렀다. 여러 관리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고 차등을 두어 하사품을 나누어 주었다. 경신(庚申)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기사는 <삼국사기>에도 611년에 무왕이 봄 2월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고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여 국지모(國智牟)를 보내 수나라를 돕고자 하니 수양제가 기뻐하여 석율(席律)을 보내와서 무왕하고 서로 모의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위 <수서>에서 수양제가 강도로 가서 연회를 베푼 기미(己未)와 경신(庚申)은 하루 차이이다.
충청도 부여에 있는 백제가 어떻게 이역만리의 수양제가 강도에서 연회를 베푼다는 사실을 알고 장안이나 낙양이 아닌 양자강 유역으로 하루 만에 갔었겠는가?
또한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는데 백제가 어떻게 대륙의 지리와 고구려의 사정을 알고 향도(嚮導) 역할을 하며 수나라 편을 거들었겠는가?
이는 백제의 강역이 양자강을 끼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나라 양제는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백제의 도움을 얻고자 양자강으로 갔던 것이다.
백제가 수나라의 향도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당나라와 교역을 하였던 당시의 첨단 군사물품들이 고스란히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으로 이끈 도구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태종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명광개 일만 개를 획득하였다는 기사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백제의 강역이 광대하였다는 것은 왕이 거처하는 도성이 두 개일 뿐만 아니라 22개의 담로를 두고 있었으며 단군조선 시대부터 이어져온 정치 군사적 제도 때문이다.
<송서(宋書)> 권97 동이열전 백제 조에는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와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좌우현왕(左右賢王)은 유라시아 대륙을 섭렵했으며 한(漢)나라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흉노의 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사기>와 <한서>에 이르기를, “그 나라는 선우(單于)를 칭하기를 탱리고도(撐犁孤塗) 선우(單于)라 한다. 흉노에서 하늘을 ‘탱리(撐犁)’라 하고 자식을 ‘고도(孤塗)’라 하며 선우는 광대한 모습이다. 하늘의 (광대한)모습을 본떠 선우라고 말한다. 좌우현왕과 좌우녹리, 좌우대장, 좌우대도위, 좌우대당호, 좌우골도후를 제도를 두었다. 흉노에서는 현(賢)을 도기(屠耆)라고 한 까닭으로 항상 태자를 좌도기(左屠耆)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역사, 때 되면 소리치며 다시 일어난다
천손사상을 갖고 있는 흉노의 이러한 제도는 단군조선의 일원으로 존재하였을 당시에 존재했던 것이며 좌우현왕 제도도 단군조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군세기> ‘21세 단군 소태’ 조에 “개사원(蓋斯原)의 욕살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멸망시키고 많은 군대를 손에 넣어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단군조선 삼한(三韓) 중에 번한(番韓)을 가리켜 우현왕이라 하는 것이며 고등이 죽고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소태 단군의 뒤를 이어 22세 단군조선의 단군으로 등극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좌우현왕 제도는 단군조선으로부터 흉노에 이어 백제가 그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다.
최초로 중원대륙을 통일하였다는 진시황의 진(秦)나라는 통일 후 15년 만에 망하였고,
한족(漢族)의 영원한 중심이라는 한(漢)나라는 북부여의 도움으로 건국되어 한무제 때의 전성기를 지나 백년도 되지 않아 멸망하였다.
앞서 언급한 당태종 이세민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측천무후라는 일개 여자에 의해 22년 만에 사직을 고하였음에도 당나라를 존속시킨 것으로 호도하고 있다.
일개 나라의 존속기간이 나라의 강성함과 꼭 비례한다고 할 수 없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중에 백제가 가장 짧은 678년의 존속기간이었음에도 위 중국의 나라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역사가 길면 그만큼 부침(浮沈)의 폭도 컸을 것임으로 단편만으로 모든 것을 조명하지 못할진대 잘못된 역사를 고정화시키는 편견은 낙화암 저편으로 사라져야 한다.
역사는 때가 되면 소리치며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완) |
첫댓글 백제의 세 개의 섬(三島)에서 나는 황칠(黃漆)을 갑옷 표면에 입혔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황칠이 나오는 나무들은 완도지역이였습니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백제의 기후는 온난하며 오곡 잡과와 채소가 많으며 내지(內地)와 같다.
백제 해도(海島)에는 황칠나무가 있는데 모습은 작은 종려나무와 비슷하나 크다.
6월 중에 즙을 채취하여 기물(器物)에 칠을 하면 황금과 같고 그 빛이 눈이 부시다.”
백제 해도(海島)란 코리아 대칸이 태어난 다도해 지역인 완도지역을 의미합니다..
수.당 시기는 백제가 중국 동해안 지역을 중국에게 상실하고 동백제 지역인 열도지역만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 태종 시기에 황칠이 난다는 것은 <흠정만주원류고>"백제 해도(海島)"기록내용대로 바다의 섬지역인 완도 지역 밖에 없습니다..
완도의 황칠나무 http://durl.me/5ahav4
황칠은 세계에서 딱 한 곳, 한국에서만 나며 그것도 난대림이 펼쳐진 해남 완도 등 서남해안에서 생산된다. 한때 한반도의 황칠나무 중 70%가 자생했다는 제주도는 도민들 대부분이 황칠나무를 잘 몰라 땔감이나 부목용으로 벌채를 해 지금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계곡(서귀포시 상효동의 자생군락지)에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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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은 동이민족으로 일제의 조선사 편수회에 의하여 왜곡이 되었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왜곡 되었는지는 감을 아직도 못 잡고 있으니 허구 반도설이 아직도 설쳐대는 것이조 일제의 왜놈들의 조작한 역사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벗어 난후에 삼국을 이야기 해야지 허구 반도설에 억매여 있으면 진실을 왜곡 할수 있기에 중공은 대조선 망국후 손문이 대조선의 역사를 바꾸어치기하여 역사를 조작 했으니 중공사는 한 백여년 정도의 역사로 백년 역사를 가지고 허구 중화족을 만들어 사천년의 역사조작으로 속이고 있습니다 ,,,,,,,
태양해님 고맙습니다^^
역사를 잃어버린 것만으로 서럽고 억울한데
그 잃어버린 역사를 이야기해도 아니라고 박박 우기는 역사 철부지들은
역사를 왜곡한 자들보다도 더 쓸개빠진 자들입니다
황칠은 옻칠처럼 나무의 표면에 흠집을 내고 받아낸 수액을 정제해 만드는 도료이다. 성질이 맑고 투명하여 장식물이 가진 본연의 재질을 살려주면서도 스스로 화려한 황금 빛을 내뿜는다. 그 빛은 매혹적이나 천박하지 않고 고상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황칠나무는 적어도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 수종이다.삼국이 정립한 이래, 백제는 활발한 무역을 통하여 인삼과 황칠, 모시저포를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하였다. (홍사준1972) 따라서 백제에서 산출되는 황칠은 이미 인접국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백제 무왕 25년(627), 당고조는 백제 땅에 사신을 보내어 황칠을 채취하게 하였고, 그것을 철갑에 칠하니 모두 황금색으로 빛났다. (책부원구, 외신부 조공조)
당시 당고조는 618년에 일반 백성들이 의복을 적황(赤黃)으로 염색하는 것을 금지 시킨 상태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금빛으로 우러나는 갑옷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위엄과 권위를 가진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아들 당태종도 백제가 만든 금칠 갑옷에 다섯 가지 색깔로 칠하여 갑옷을 만들어 입으니, 그 갑옷 또한 햇빛에 빛났다. (신당서, 동이 고려전)
황칠나무에서 나오는 금칠에 대한 중국인의 인상은 아주 깊었다. 당나라 때 두우(枓祐)는 『통전(通典)』에 “황칠나무는 백제의 서남해안과 탐라 즉 제주도에서 자라며, 음력 6월 무렵에 채취하는데 워낙 소량이긴 하지만 기물에 칠하면 금색 광채를 띤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후 ≪당서≫를 비롯한 숱한 기록들이 금칠에 주목하였고,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등 황실과 이 땅에 온 많은 사신들이 황칠을 요청했던 것도 신비로운 금칠나무였기 때문이었다.
"신비의 금빛 천연도료로 알려진 1,000년 전 황칠이 처음으로 확인됐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의 황남동 신라제사(祭祀) 유적에서 흙 그릇에 담긴 채 발견된 유기물 덩어리를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에 맡겨 성분분석을 한 결과 황칠로 확인됐다고 8일 발표했다. 보존과학실의 연구에 따르면 이 물질은 전남 해남에서 자라고 있는 황칠나무의 황칠과 성분이 똑같고, 해남과 완도 산 황칠에만 들어있는 베타 셀리넨 성분도 검출됐다."-(오미환기자 mhoh@hk.co.kr)// 고로 1만년을 전후한 마고성 서남해 지역은 봉황과 무궁화의 텃밭이면서 삼지창 모양을 하고 있는 황칠나무의 텃밭이기도 합니다.
어? 이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군요. 이렇게 훌륭한 분이 왜 그토록 비열한 글을 올리는지 모르겠군요. 당신에게는 신과 같은 거룩한 신성과 아름다운 마음씨도 이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당신의 얼굴은 당신 자신이 만드는 겁니다.
좌우현왕제도와 황칠에 대한 내용은 윤복현님의 말씀이 설득력이 있어보입니다.
서울 사나이 이 친구 골때린 친구네..내 게시글에 비방욕설반말로 악플다는 인간 쓰레기들이 얼마나 많았는데..너 운영진이면 그런 애들부터 탈퇴시키던지 경고조치하던 해야 완장친 자격이 있는거 아니야?
역사는 때가 되면 소리치며 일어난다라....
백제담로제국방으로 스크랩 합니다. 자료 감사드려요.
넵 호두님 항상 수고가 많으십니다
고맙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은 명쾌한 글이네요.
'잘못된 역사를 고정화시키는 편견은 낙화암 저편으로 사라져야 한다.'
'역사는 때가 되면 소리치며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주 명문입니다.
좋은 글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박도사님 고맙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천부님 고맙습니다^^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
넵 고맙습니다^^
대륙의지명이 담겨있긴하네요
천겁님 고맙습니다^^
저들(지나인)들이 쓴 사서에 기록을 했다는 것은
백제가 현재의 저들의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백제 구다라의 영역..[구당서]"백제 영역은 (본국에서)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본국 서남해 마한지역을 중심으로 서해를 건너 서백제 지역에 해당하는 중국 동해안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기록내용입니다.<송서(宋書)> 권97 동이열전 백제 조에는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와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에 대한 기록내용은 백제대왕이 거처하는 본국 서남해 마한지역을 중심으로 서백제 지역은 좌현왕이 다스리고, 열도지역에 해당하는 동백제지역은 우현왕이 다스렸다는 의미가 됩니다..그리고 서남해 해상네트워크를 통해서 백제 담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한단고기 - 단군세기檀君世紀]乙未五十二年右賢王高登薨基孫索弗婁襲爲右賢王帝巡狩國中南至海城大會父老祭天歌舞仍召五加與之議傳位自謂老倦于勤欲委政於徐于餘 環薩水百里而封之命爲攝主號曰奇首右賢王聞之遣人勸帝止之帝綜不聽
"을미 52년(B.C.1286),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세습하여 우현왕(右賢王)이 되었다. "
흉노.백제가 계승한 좌.우현왕 제도는 이미 단군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통치방식이였음을 알 수 있으니, 흉노제국이 단군조선에서 분가한 갈래이며, 백제는 단군조선(부여)을 계승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니다..단군조선의 좌.우현왕 제도가 흉노의 영향인 것 처럼 날조하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