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1567년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지역에서 한 귀족 가문의 맏이로 태어났다. 1593년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활동한 그는 특히 칼뱅파의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가톨릭으로 회심시켰다. 1599년 제네바의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602년 교구장이 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2년에 선종하였다.
본기도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 주교가 목자의 사랑을 실천하여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형제들을 섬기며
언제나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제1독서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0,1-10
형제 여러분, 1 율법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만 지니고 있을 뿐
바로 그 실체의 모습은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물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2 만일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예배하는 이들이 한 번 깨끗해진 다음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아
제물을 바치는 일도 중단되지 않았겠습니까?
3 그러한 제물로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될 뿐입니다.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복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이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가 세상에서 복된 프란치스코의 사랑과 온유함을 본받아
하늘에서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인의 사랑법: 하느님의 유전자를 볼 줄 알아야!
오늘 복음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지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라고 하시고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35)
물론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보다 더 따른 사람이 없기에 성모님만큼 완전한 그리스도의 가족은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에겐 핏줄보다 강한 가족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을 그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발견함으로써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려면 예수님의 이 시선을 배워야 합니다.
위대한 형제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잭 캘리라는 한 신문기자가 소말리아의 비극을 취재하다가 겪은 체험담이 있습니다. 기자 일행이 수도 모가디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기근이 극심한 때였습니다. 기자가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어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기자는 한 작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온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배가 불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빨갛게 변해 있었으며 피부는 백 살이나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마침 일행 중의 한 사진 기자가 과일 하나를 갖고 있었기에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 힘이 없었습니다. 기자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받아서 고맙다는 눈짓을 하더니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사내아이가 땅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소년의 동생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동생 곁에 무릎을 꿇더니 손에 쥐고 있던 과일을 한 입 베어서는 그것을 씹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입을 벌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동생이 씹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 온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결국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동생은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형은 왜 동생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것일까요? 부모가 같다는 이유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없어도 부모에게 효도하려 합니다. 받은 것이 있기에 나오는 의무감입니다. 이것이 형제간의 사랑을 만들고 가족을 만듭니다. 형은 사실 동생 안에서 부모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형이 동생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일은 없습니다. 형제들은 형제 안에서 부모의 유전자만 발견이 되면 이렇듯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유전자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누구든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안에는 우리 아버지의 유전자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또 사랑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만약 부모를 사랑하면 형제를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도 성당에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정말 나의 형제요 자매로 생각하고 부르는 것일까요? 어쩌면 친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뜻은 양식을 통해 들어옵니다. 양식을 함께 먹으면 식구가 됩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성당 형제자매들이 혈육의 형제자매보다 덜 형제자매 같다면 어쩌면 우리는 양식을 제대로 먹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 곧 말씀과 성체는 우리가 같은 유전자(DNA)를 지닌 형제들임을 확증해 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족처럼이 아닌 가족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영화 ‘과속 스캔들’(2008)은 잘나가던 서른여섯 은퇴한 아이돌 스타에게 스물두 살 딸, 그리고 그녀에게서 난 여섯 살 손자가 함께 찾아오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았습니다. 차태현은 아직은 잘나가는 연예인이자, 청취율 1위의 인기 라디오 DJ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10대에 사고를 쳐서 자녀가 있고 이미 할아버지라 한다면 그의 인생은 거기서 끝입니다. 그는 딸과 손자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잃을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DNA 검사 결과 친자가 확실한 이상 자기가 살겠다고 딸과 손자를 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는 모든 인기를 포기하고 결국은 가족을 선택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느닷없이 나타난 아이들의 DNA가 자신과 같기 때문입니다. 차태현도 부모로부터 양식을 먹고 컸기 때문에 부모의 뜻이 그 안에 있어서 자기 뜻대로 양심상 할 수 없습니다. 형제가 서로 싸운다는 말은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행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형제들끼리 서로 갈라져 싸우는 이유는 서로 같은 DNA를 부모로부터 받았음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 부모까지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같은 하느님의 성체 성혈을 받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처럼 지내려 노력하지 말고, 가족임을 인정합시다. 한 아버지를 둔 우리들은 가족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고 그래서 부모가 되신 하느님의 뜻이 같은 유전자를 지닌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힘으로는 생겨나지 않던 사랑의 감정이 생깁니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 혹은 하느님의 유전자, 하느님의 뜻을 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온전한 사랑이 실천 되지 못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유전자 때문에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면 우리도 사람이 어떻든 간에 하느님의 유전자를 지닌 것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https://youtu.be/jcaFp0gMRWY
유튜브 묵상 동영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남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는 부부가 있습니다. 이 부부는 평생 살아가면서 이혼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또 상대방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어떨까요? 그런데 어떤 연구 결과를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부부도 평생 살아가면서 200번 정도 이혼을 생각하게 되고, 또 50번은 상대방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극도의 혐오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 부부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될까요? 바로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질 때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삶 안에서 고통과 시련도 커지게 됩니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부부는 두 사람이 서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였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미련한 사람은 상대방을 적으로 여겨서 항상 결점을 없애려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방을 전우로 여기고 기쁨을 함께 나누며 함께 어려움을 짊어집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지혜가 가득해야 합니다. 이 지혜는 자신이 먼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지혜롭고 완전한 사람이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모습도 받아들이면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인생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삶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요구하는 삶이 아닌,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하는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내게 요구하는 사람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마르 3,22).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가까운 친인척이 찾아왔으니 다른 것을 다 뒤로 하고 먼저 만나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군중이었습니다. 영적 갈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육체적으로도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요구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진정한 형제, 누이,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요구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요구를 들어주는 삶을 살고 있나요?
사랑하는 것은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이다(카렌 선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