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여름 길은 제대로 나지 않았는데
오이넝쿨의 손은 하늘을 더듬더라
그때 노란 꽃이 후두둑 피기 시작하더라
아직 여름 길은 나지 않았는데
바다로 산책 나간 새들은
오이 향이 데리고 저녁이 닫히기 전 마을로 돌아오더라
오이꽃에서는 바다의 향기가 나더라
바다에 빠진 태양 빛 같은 새들의 수다 속에서
꽃은 지고 오이 멍울이 화반에서 돋아나더라
여름 길이 열리고 그 노란 꽃 가녘에
흰나비는 스르르 속옷을 열더니 쪼그리고 앉더라
먼 사랑처럼 기어이 휘어지면서 오이가 열리든 말든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5.02.28. -
어린 시절 저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봄, 아버지는 오이 모종을 몇 개 구해오셨습니다. 저와 동생들은 열심히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며 오이가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여름이 막 시작될 즈음 별 모양의 손톱만 한 노란 꽃이 피더니 얼마 후 꽁무니에 작은 멍울이 생겼습니다. 꽃이 말라버리고 나자 오이는 점점 통통해지기 시작했지만, 자라는 속도가 너무 더뎠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덜 자란 오이를 따버리고 후회했습니다. 덕분에 작은 오이 하나를 키워내는 데에도 얼마나 큰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한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오이꽃에서는 바다의 향기가 나더라”는 문장이 낯설지 않습니다.
〈최형심 시인〉
days of wine and roses/Beegie adair/transcribed by Ay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