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 사도요한 주교님의 종신서원 미사 강론
인보성체수도회
2024.11.18.
오늘은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인보성체수도회의 설립 기념일에 즈음하여 여기 앞에 계신 네 분 젊은 수녀님이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하느님과 교회에 봉헌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러한 훌륭한 딸을 낳아 곱게 길러 하나님께 봉헌한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분들을 맞아들여 훌륭한 수도자가 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던 본당 신부님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기본적인 예의범절부터 시작하여 인격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도록 이분들을 기르고 다듬어준 양성 담당 수녀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분은 이 네 분 수녀님들에게 영적 물적으로 도움을 준 인보성체수도회의 수녀님들과 여기에 모인 교우들입니다.
이러한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오늘 이분들이 종신 서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기원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은 창세기 3장 9절에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짓고 숨어 있던 아담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만나실 때마다 항상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심지어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기에 우리 인간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다 알고 계심에도 그분께서 물으시는 까닭은 정작 우리 인간이 간혹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제대로 깨닫고 항상 깊이 의식할 수 있도록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한참 벗어나서 잊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하느님의 모든 부르심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부르시어 항상 이곳을 떠나 저쪽으로 가라고 분부하십니다.
예를 들어 오늘 제1독서처럼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친족과 함께 편안하게 살던 고향을 떠나 장차 보여줄 땅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부르시어 종살이하던 이집트를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떠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어부들을 부르시어 물고기를 잡던 호수를 떠나 당신을 따르라고 분부하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떠나야 했고, 그곳이 바로 그들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자리였습니다.
오늘 종신서원을 하는 수녀님 여러분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이 장차 가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이제 여러분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가야 할 곳은 외적으로는 주님께서 장차 장상을 통하여 여러분을 파견하시는 자리일 것입니다. 파견되는 소임지가 여러분이 머물러야 하는 삶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15세기 어떤 신비학자가 강조한 내용인데, 여러분을 파견하신 주님께서 그 소임지에 이미 당신의 발자취를 남겨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이 파견받아 소임지에 가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그곳을 찾아가셨고, 여러분이 그곳에서 무언가 활동하기 이전에 주님께서 먼저 활동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곳은 이미 거룩한 곳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사옥 방문을 하실 때마다 방문국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당신이 방문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찾아가시어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는 것을 깊이 의식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파견되는 장소가 이렇게 거룩한 곳이라면 이제 여러분이 수행해야 할 과제는 주님께서 오랫동안 그곳에 남기셨던 그 사랑의 흔적을 다시 새롭게 찾아 돋보이게 하는 일 이외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곳에서 온갖 정성을 들이시고 사랑을 베푸셨지만, 그 사랑의 자취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잊히거나 때로는 온갖 잡초와 가시덤불에 덮여 알아볼 길이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화와 사목 활동이란 앞서 활동하신 주님의 사랑의 자취를 다시 찾아 새롭게 각인시키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일이 여러분의 주된 과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 사랑의 흔적을 찾고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계속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먼저 그 사랑에 잠겨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일차적으로 머물러야 할 삶의 자리는 어떤 외적 장소가 아니라 여러분을 손수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인격입니다. 여러분이 파견되는 소임지도 여러분이 서 있어야 할 자리이지만, 그곳에 제대로 서 있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 강조하듯이 여러분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주님께서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셨던 놀라운 업적들을 헤아리고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시어 뽑아 세우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의 종이 아니라 그분의 다정한 친구가 되었고,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얻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셨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조금 후에 거행할 서원 예식에는 이런 중요한 진리를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예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도 서원의 표지인 반지 수여 예식입니다. 여러분에게 수여되는 반지는 여러분이 영원한 임금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하였음을 드러냅니다.
말하자면, 그분의 배필이라는 표지입니다. 반지를 받음으로써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더욱 완전히 결합되어 완전한 사랑을 끊임없이 실천하고 그분만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예식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의 자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이 분명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도자의 본연의 자리라는 점에서 마지막으로 최후 만찬 석상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었고, 주님께서도 그를 당신의 가슴에 품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주님의 심장과 고동을 같이 하며 마침내 사랑받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랑의 샘인 주님의 가슴에서 극진한 사랑을 늘 새롭게 체험했고, 바로 여기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는 힘을 길어올렸습니다.
따라서 우리 축성생활자의 자리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마음에 가까이 다가서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끌어안아주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온갖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품에 나가기를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종신 서약을 아는 이분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수도자, 그리고 모든 교우들이 그리스도의 심장과 고동을 같이 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