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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평 함락
태왕 을불은 서진의 낙양이 흉노족에게 무너진 직후인 재위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군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고구려는 서안평 함락에 성공하여 요동군을 압박하였다.
당시 요동군은 영가 3년(서기 309) 이래로 소희련 목환진 등 선비족의 거듭되는 약탈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을불의 서안평 함락은 이러한 정세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서안평은 동천 임금 재위 16년에도 고구려의 공격 대상이 된 지역으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천 임금 때에는 고구려가 서안평을 습격하여 타격을 가하는데 그쳤으나 을불은 서안평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서안평의 위치에 대해서는 압록강 하구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신의주에서 압록강 너머 바로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 오늘날 만주의 단동에서 ‘안평락미앙(安平樂未央)’이라는 글이 새겨진 와당이 출토되었는데 이 와당에 ‘안평’이라는 글이 보이므로 단동 지역이 곧 서안평이라는 것이다.
단동을 서안평으로 보는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평양 지역에는 낙랑군이, 만주에는 요동군이 존재하였다고 보고 단동은 이 두 군이 서로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하므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가 단동 지역을 장악하면 낙랑군은 요동군에서 차단 격리되어 육로로 고립됨으로써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낙랑군은 중국으로 통하는 육로를 잃어버려 ‘독안에 든 쥐’가 된다는 주장이다1).
이는 곧 고구려가 먼저 서안평으로 추정되는 압록강 하구를 장악하여 낙랑군을 외부의 지원으로부터 고립시킨 뒤 타격을 가함으로써 효율적으로 낙랑군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동에서 발견되었다는 와당이 단동이 곧 서안평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안평락미앙(安平樂未央)’은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평안을 바라는 길상문일 뿐 고유 지명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2).
설사 ‘안평(安平)’을 지명으로 볼 수 있다고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안평’일 뿐 ‘서안평’일 수는 없다. 만약 단동이 ‘안평’이라고 하면 ‘서안평’은 이보다 더욱 서쪽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을불이 서안평을 차지하기 이전인 동천 임금 시기에 고구려가 삼국 시기 손권의 오나라와 서로 통교하였는데 만약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존재하였다면 이것은 이미 동천 임금 시기 이전부터 낙랑군이 고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와 오나라는 바다를 통하여 통교한 것이 확실한데 이것은 이미 고구려가 만주에서 북한 지역에 이르는 고구려 영토 내의 해안을 확보하였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고 이것은 곧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 지역과 북한 지역을 서로 갈라놓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낙랑군에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존재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을불이 굳이 압록강 하구 지역을 공격하여 낙랑군을 ‘고립’시킬 필요는 없었다. 이미 평양 지역은 그 이전부터 고구려에 의해 만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3).
낙랑군 정복
낙랑군 정복은 을불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삼국사기”는 을불이 재위 14년(서기 313) 한 차례 공격으로 낙랑군을 차치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수년에 걸쳐 이루어진 원정의 결과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낙랑군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안평 공략 직후(서기 311)부터 본격적인 군사행동이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낙랑군에서 고구려에 대한 항쟁을 주도하고 있던 세력의 중심인물은 요동의 장통(張統)이라는 자였다. 장통의 영향력은 낙랑군의 이웃에 있는 대방군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장통은 고구려의 공세에 맞서 수년이나 대항하였지만 마침내 장통의 세력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결국 장통은 왕준(王遵)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해 4월 천여 가(家)만을 이끌고 낙랑군을 떠나 모용외에게 투항하였다. 이것으로 사실상 낙랑군과 대방군은 빈껍데기만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구려는 같은 해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고 그 다음해(서기 314)에는 대방군을 침공함으로써 두 군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그 곳을 고구려의 영토로 삼았다.
낙랑군은 서한이 위만조선 지역에 설치한 네 개의 군 가운데 처음 설치되었던 지역에 최후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군이었다. 임둔, 진번 두 개의 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었고(시원(始元) 5년, 서기전 82) 현도군은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서쪽으로 후퇴하였다.
낙랑군은 기존 지역을 고수하였으나 안팎의 토착세력의 압력과 중앙권력의 부침으로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갱시(更始) 3년(서기 25)에는 토착인 왕조(王調)의 봉기로 인하여 낙랑군의 정권이 토착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기도 하였다. 왕조의 정권은 5년간이나 지속되었으나 동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침공으로 무너지고 말았다(서기 30년).
유수는 토착인들의 항쟁을 진압하고자 왕준(王遵)을 태수로 삼아 낙랑군을 치게 하였다. 동한의 군사가 요동에 이르렀을 때 중국계 낙랑군 사람인 군삼로(郡三老) 왕굉(王閎)의 주도로 여러 관리들이 모의하여 왕조를 죽이고 동한의 군사를 맞아들임으로써 토착인들의 항쟁은 실패하였다.
서기 2세기 말에는 독립적인 지방 세력인 공손씨(公孫氏)가 낙랑군을 장악하였다. 공손강(公孫康)은 건안(建安) 시기(서기 196~220)에 낙랑군을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였는데4) 이로써 낙랑군의 세력과 범위는 더욱 축소되었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유배지나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하였으며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 속에서 크게 위축되었고 결국 고구려에게 병합되었다.
낙랑군의 위치
낙랑군은 그 위치에 대해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데 크게 평양설과 만주설로 나눌 수 있으며 평양지역에서 만주에 걸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5). 평양설의 주된 근거는 평양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이다.
이곳에서는 일제 침략기 이래 한(漢)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나무덧널무덤과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의 유적과 효문묘동종6), 신사비7)와 같은 여러 한(漢)나라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하지만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과는 모순되는 기록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만주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부여(夫餘)가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부여가 동한 영초(永初) 5년(서기 111)에 보병과 기병 7~8천명으로 낙랑군을 공격했다고 전하고 있다8). 만약 낙랑군이 평양에 존재했다면 송화강 유역의 부여가 고구려를 통과하여 낙랑군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9).
고구려가 태조 임금 94년(서기 146)에 동한의 요동군(遼東郡)을 공략하여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존재했다는 주장과 모순된다. 어떤 이들은 낙랑태수나 대방현령이 요동군에서 고구려에게 사로잡힌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설득력이 없다.
낙랑태수의 가족과 대방현령이 함께 낙랑군으로 이동 중 마침 요동군에 들렀을 때 또는 이들이 요동군에 머무르던 시기에 ‘우연히’ 고구려가 요동군을 공격할 확률이 얼마나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주장이다10).
그러데 을불이 재위하던 시기에 고구려의 서울은 평양성(平壤城)이었다. 고구려가 서울을 평양성으로 옮긴 것은 동천 임금 21년(서기 247)의 일이었다.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으로 인하여 환도성이 무너져 서울을 옮긴 것이다. 평양성은 을불의 아들인 고국원 임금이 환도성으로 옮길 때까지 고구려의 서울이었다.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평양성이 요하 유역의 심양이라는 주장도 있고11) 국내성, 강계, 졸본 또는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2)
그런데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나 윤두수(尹斗壽)의 평양지(平壤志)에 따르면 평양에 동천 임금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평양에 높이가 한 길이 넘는 큰 무덤이 있었는데 도둑이 무덤을 파헤쳐 그 안이 모두 드러났기 때문에 무덤 안에 새겨진 동천 임금의 무덤이라는 글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13).
이미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을불은 서기 302년에 현도군을 공격하여 그 포로를 평양으로 옮긴 적이 있었다. 황해도에서는 포로로 끌려온 것으로 보이는 현도태수의 무덤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에14) 당시 포로를 옮긴 평양은 오늘날의 평양일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곧 평양이 고구려가 낙랑군을 정복한 서기 313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의 영토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낙랑군과 평양이 서로 다른 곳에 존재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을불은 소금 장수를 하면서 압록(鴨淥)에 이르렀고 비류하(沸流河) 가에서 조정의 신료들에게 발견되었다. 비류하는 고구려의 첫 도읍인 졸본 지역을 흐르는 비류수가 틀림없을 것이다. 압록은 요하를 가리키기도 하지만15) 압록강을 이르기도 한다.
을불이 살해의 위협을 받으면서 쫓기는 신세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을불이 옮겨 다닌 곳은 고구려의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6). 그렇다면 평양성이었을 곳이라고 추정되는 곳 가운데 심양이나 집안, 강계 등보다는 평양이 당시의 서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평양에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평양성과 낙랑군이 모두 존재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17) 평양성이 평양에 있었다면 낙랑군은 만주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18).
이 외에도 만주에 낙랑군이 자리했음을 보여주는 여러 문헌사료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낙랑군이 만주에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은 대부분의 기록이 미천 임금 을불이 낙랑군을 정복한 서기 313년 이후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고구려가 낙랑군을 정복한 이후 낙랑군은 만주의 모용선비의 영토 내에 다시 설치되었기 때문에 만주에 낙랑군의 흔적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역사서에 기록된 낙랑군의 위치가 과연 초기의 낙랑군을 설명하는 것인지 모용선비의 영토 내에 다시 설치된 낙랑군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호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를 만주 지역으로 볼 수 있는 서기 313년 이전의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는 상(商)나라의 왕족 기자(箕子)가 상나라의 쇠퇴 후 이주한 곳을 낙랑조선이라고 하였고19) 동한 시기의 인물인 응소(應劭)도 낙랑군 조선현이 기자의 이주지라고 설명하였다20).
그런데 서기 1973년 만주 요령성 객좌현(喀左縣) 북동촌(北洞村)에서 발견된 저장구덩이에서 기자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다. 구덩이 안에서 발견된 네모난 솥(方鼎)의 바닥에서 ‘기후(箕侯)’라고 읽을 수 있는 글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북동촌의 유적은 객좌현 지역에 기자 본인은 아니더라도 기자와 관련이 있는 집단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한때 낙랑이 객좌현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중국 삼국(三國)시대 위(魏)나라 사람인 장안(張晏)도 낙랑이 요서(遼西) 지역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는 조선에 습수(濕水), 열수(洌水), 선수(汕水)라는 세 강이 있고 이 강이 합하여 열수(洌水)가 된다고 설명하면서 낙랑조선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런데 열수는 오늘날 중국 하북성(河北省) 동북쪽을 흐르는 난하(灤河)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21). 따라서 이 기록에 따르면 낙랑군이 난하 부근에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만주에서는 낙랑군의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된 바 없다. 최근 요서(遼西) 지역에서 임둔군(臨屯郡) 봉니가 발견된 바 있는데 만일 봉니가 나온 곳이 임둔군 설치지역이 확실하다면 낙랑군 또한 요서 지역에 존재했을 것이다22). 다만 봉니는 기물이나 문서를 밀봉하기 위해 사용한 작은 진흙 덩어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봉니의 성격상 공문서를 보내는 곳과 받는 곳에서 모두 나올 수 있으므로 임둔봉니의 발견지역이 옛 임둔군의 설치 지역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처럼 낙랑군이 평양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에는 여러 의문점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하여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낙랑군의 위치 문제는 그보다 앞서 존재한 위만조선 및 고조선의 강역과 성격에 대한 이해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평양이 낙랑군의 중심지임이 확실한 것으로 증명된다고 해도 낙랑군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 풀어야할 의문이 많이 남아 있다.
만약 평양이 낙랑군의 중심지라면 을불은 낙랑과 대방군의 정복을 통해 남진의 기반을 성공적으로 마련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낙랑군이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에 따르면23) 을불은 낙랑군을 정복함으로써 고구려의 영토를 난하(灤河) 유역까지 확대했다고 한다24).
평안남도 황해도 지역 지배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 지역의 낙랑군 존재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구려 대무신왕 27년(서기 44) 이후 이 지역에 동한의 군현이 존재했음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한(東漢) 광무제(光武帝)가 살수(薩水) 이남, 곧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군현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25).
석암리 9호 무덤에서는 매우 화려하고 정교한 금제 띠고리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당시의 문화를 대표하는 물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때문에 당시의 일본인 연구자들은 이 무덤을 낙랑태수의 것으로 판단하였다26).
하지만 석암리 9호 무덤의 부장품들은 일개 태수가 소유하기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유적에서 발견된 황실용 칠기 역시 태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이것은 이 지역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토착세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군현 주위에는 군현세력과는 별개로 낙랑국27), 대방국 등 토착인의 나라가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낙랑국은 옥저 지역과의 연계를 통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 백제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등 세력 확대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 지역에는 다양한 정치세력이 혼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해도 안악 지방에 자리한 안악3호무덤은 고구려의 태왕릉으로 추정되는데 대략 4세기 중반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므로 적어도 4세기 전반에 평안남도와 황해도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음은 의심할 바 없다.
이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벽돌무덤이 4세기 중반 이후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으며 벽돌무덤의 재료로 쓰인 기년명전 또한 서기 353(영화 9년)까지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위 주장을 뒷받침한다28).
특히 황해남도 장수산 일대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유적은 서기 313년 무렵에는 고구려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29).
이 지역은 산악 지형이 많은 남북한 지역에서는 드문 평야지대로서 농산물의 수확량이 높고 인구밀도도 비교적 조밀한 곳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이 지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해 왔다.
일찍이 대무신 임금은 최리가 통치하고 있던 낙랑국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여 한때 평안남도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였으나 동한 광무제 유수에게 패배하여 청천강 이북으로 후퇴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남진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략 3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황해도까지 미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서천 임금 17년(서기 286), 고구려는 황해도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추정되는 대방국을 침공하였고 대방국과 혼인관계에 있던 백제가 대방국을 지원함으로써 대방국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충돌하고 있다.
또한 신라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3년(서기 300) 3월에는 낙랑국과 대방국이 신라에 귀복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평안남도 및 황해도 지역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어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던 토착 세력이 고구려에 의해 밀려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미 을불의 등극 이전에 고구려가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을불은 낙랑군 정복이후 서기 314년에는 대방군을 정복하고 서기 315년에는 다시 현도군을 공파 점령함으로써30) 재위 12년 이후 벌였던 대외전쟁을 일단락 짓게 된다. 약 4년 동안 벌인 전쟁 결과 을불은 고구려와 맞닿아있는 모든 적의 군현들을 소멸시키거나 무력화하였다.
1) 李萬烈, 1976, <<講座 三國時代史>>, 知識産業社(서울), 128쪽.
2) 李秉斗, 1987, <中國古代 郡縣 位置考 -遼東 ․ 樂浪 ․ 玄菟郡에 대하여->, 단국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2쪽.
3) 박노석, 2004, <서기 3세기 초의 고구려와 魏의 외교 관계>, <<全北史學>> 24, 12~13쪽.
4) <<三國志>> 卷30 <烏丸鮮卑東夷傳> 第30 韓.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5) 大原利武, 1933, <朝鮮の古代史に就て>, <<文敎の朝鮮>> 91, 24쪽.
6) 윤내현, 1994, <<고조선연구>>, 一志社(서울), 392쪽. 저자는 이 책에서 효문묘동종(서한 문제(文帝)의 사당에서 쓰이던 용기)이 9호분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효문묘동종은 당시 발견자의 증언에 따르면 선교리(船橋里)의 철도 공사현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수집품으로서 동종이 나온 유적은 무덤이었다고 한다.
동종이 발견된 유적에서는 여러 거울의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일본인 연구자들은 이 거울 파편 가운데 일부를 서한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였고 서기 1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關野貞 等, 昭和 2, <<古蹟調査特別報告 第四冊 樂浪郡時代の遺蹟>>, 朝鮮總督府, 215~220쪽; 리순진, 2001,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 중심(서울), 217쪽.
7) 국립중앙박물관 편, 2001, <<낙랑>>(축약 보급판), 솔(서울), 34쪽. 이 비의 건립연대는 원화(元和) 2년인데 원화 2년은 서기 85년으로 책에서 84년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8) <<後漢書>> 卷85 <東夷列傳> 第75 夫餘國.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 寇鈔樂浪.”
9) 大原利武, 1933, <朝鮮の古代史に就て>, <<文敎の朝鮮>> 91, 24~25쪽.
10) 기수연, 2005, <<『후한서』 「동이열전」 연구 -『삼국지』 「동이전」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백산자료원(서울), 99쪽.
11) 윤내현, 1991, <<윤내현 교수의 한국고대사>>, 三光出版社(서울), 127쪽.
12) 張傚晶, 2000, <3世紀 高句麗王의 平壤移居와 王權强化>,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8~21쪽.
13) <<東史綱目>> 第2上 高句麗 東川王 22年 秋9月.
14) 李秉斗, 1987, <中國古代 郡縣 位置考 -遼東 ․ 樂浪 ․ 玄菟郡에 대하여->, 단국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62~63쪽.
15) <<三國遺事>> 卷第3 <興法> 第3 順道肇麗. “遼水一名鴨淥 今云安民江.”
16) 張傚晶, 2000, <3世紀 高句麗王의 平壤移居와 王權强化>,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57~58쪽.
17) 張傚晶, 2000, <3世紀 高句麗王의 平壤移居와 王權强化>,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52쪽.
18) 申采浩, 1990, <<조선 상고사 Ⅰ>>, 일신서적출판사(서울), 200쪽.
19) <<漢書>> 卷28下 <地理志> 第8下.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敎其民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20) <<漢書>> 卷28下 <地理志> 第8下 樂浪郡 朝鮮縣 注. “應劭曰 武王封箕子於朝鮮.”
21) 李秉斗, 1987, <中國古代 郡縣 位置考 -遼東 ․ 樂浪 ․ 玄菟郡에 대하여->, 단국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71~72쪽.
22) 복기대, 2001, <臨屯太守章 封泥를 통해 본 漢四郡의 위치>, <<白山學報>> 61, 47~65쪽.
23) 김종서, 윤내현 등은 요서지역, 신채호 등은 요동반도, 그리고 손영종, 정인보 등은 요동반도에서 요서지역 등에 걸쳐있었다고 주장한다. 윤내현, 1994, <<고조선연구>>, 一志社(서울); 김종서, 2005, <<한반도를 식민지배해 온 것으로 왜곡되어 온 한사군의 실제 위치 연구>>, 한국학연구원(서울); 申采浩, 1990, <<조선 상고사 Ⅰ>>, 일신서적출판사(서울), 135쪽; 손영종, 2000, <<고구려사의 제문제>>, 신서원(서울), 316쪽; 鄭寅普, 1947, <<朝鮮史硏究 下卷>>, 서울신문社(서울)의 권말 지도를 볼 것.
24) 尹乃鉉, 1987, <韓國 上古史 體系의 復元>, <<東洋學>> 17, 228쪽.
25) 1세기 후반 이후의 귀틀무덤에서는 기존에 일반적으로 부장되던 장검이나 대도와 같은 무기의 부장이 급격히 줄 뿐만 아니라 그 이전과는 달리 거마구의 부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위에서 살펴본 광무제가 왕조의 토착정권을 무너뜨린 것과 관련하여 설명하기도 하지만 광무제가 낙랑 지역에 군현을 설치함으로써 일어난 변화로 해석할 수 있다. 오영찬, 2006, <<낙랑군 연구 -고조선계와 한(漢)계의 종족 융합을 통한 낙랑인의 형성->>, 사계절(서울), 166~169쪽; 吳永贊, 2001, <樂浪 馬具考>, <<古代硏究>> 8, 23쪽.
26) 關野貞 等, 昭和 2, <<古蹟調査特別報告 第四冊 樂浪郡時代の遺蹟>>, 朝鮮總督府, 69쪽.
27) <<與猶堂全書>> 第6集 <疆域考> 卷1 樂浪別考; 申采浩, 1990, <<조선 상고사 Ⅰ>>, 일신서적출판사(서울), 96~97쪽; 박노석, 2003, <고구려 초기의 영토 변천 연구>, 전남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92~103쪽; 윤내현, 1998,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서울), 112~145쪽. 정약용은 낙랑을 낙랑군에서 분리된 토착세력의 나라로서 춘천 지역을 중심으로 세워진 것으로 본 반면에 신채호, 윤내현 등은 낙랑을 낙랑군과는 전혀 별개의 기원을 가진 나라라고 주장하였다.
28) 이인철, 2000, <<고구려의 대외정복 연구>>, 백산자료원(서울), 48~58쪽.
29) 안병찬, 1999, <장수산일대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 <<조선고대 및 중세초기사 연구>>, 백산자료원(서울), 164~165쪽. 고구려의 장수산일대의 장악 시기를 4세기 초로 보고 있다.
30) 申采浩, 1990, <<조선 상고사 Ⅰ>>, 일신서적출판사(서울), 199쪽.
첫댓글 고구려의 서진정책이 오호 십육국 시대를 촉발 시켰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진나라와 고구려와의 싸움으로 인한 북방 국경선의 약화를 초래했고, 거기에 고구려의 서진 정책으로 인한 압박을 받은 북방 민족들이 중원으로 이동을 촉진시켰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당시 동북아시아의 평균온도가 낮아졌는데 이로 인한 기후의 악화로 북방 여러 민족들이 남하하였고 이것이 중국의 정치적 혼란과 연결되어 오호십육국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