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w_kDEra4EIc?si=AkmT47hXuu_-XGZN
(Dmitrij Shostakovich : Chamber Symphony Op. 110 a)
arranged by Barshai from String Quartet No.8
쇼스타코비치는 Hamlet햄릿과 같은 비극에서부터 풍자영화 New Babylon 이르기까지근 40 편에 달하는 영화에도 음악을 만들었다. 그는 1960 년 여름을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머들며 "5일 낮과 5일밤 (Five Days & Five Nights)" 라는 反戰 反파씨즘 영화에 음악을 담당하였다. 그때 쇼스타코비치는 독일의 피렌체로 불릴만큼 아름다웠던 도시가 2차대전 당시의 연합군의 융단 폭격으로 처참한 폐허의 덩어리로 변하는 일련의 영화 장면과 더블어 아직도 복구되지 못한 채로 남겨진 전쟁의 상처를 목격하며 깊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 충격을 그해 7월 12 - 14 일, 사흘이란 단기간에 음악으로 표현하여 "파씨즘과 전쟁의 희생자를 추모하며" 라는 註를 달았으니 이것이 "현악 4중주 8번" 이다.
이 작품은 다시 Barshai(왼쪽 그림)와 Sandezkis 두 작곡자에 의해 오케스트라로 편곡되었으며 Chamber Symphony" 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 - 2차대전 -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자유로운 왕래를 방해하기 위하여 독일 철도망의 요충지인 드레스덴에 1945 년 2월 14일부너 15일까지 3900톤의 폭탄을 쏟아 넣었다. 철도 시설의 주요부분이 모두 도심 가운데 위치하고 있고, 더구나 일기도 좋지 않아 오폭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도 막심하여 사망자가 25,000에서 35,000(역사가들 추정치)에 이르며 가옥 222,000 호 가운데 약 15만호 이상이 파괴되는 재앙을 가져 왔다. 그후 역사가 들은 이를 제2의 홀로코스트라고 평가하고 있다.
20세기 러시아가 낳은 베토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에는 뛰어난 피아니스트로서도 각광을 받던 인물이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피아노과 출신인 어머니에게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던 그는 작곡보다 피아노 연주에서 먼저 신동으로 눈에 띄었다.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그는 불과 16세이던 1922년,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당시 음악원장이던 글라주노프는 그의 탁월한 천재성을 알아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듬해인 1923년에 피아노과를, 그리고 2년 후인 1925년 작곡과를 졸업하게 되었다.
당시 졸업작품인 교향곡 1번은 쇼스타코비치의 천재성을 세상에 널리 알린 작품으로 남았다. 1927년 쇼팽 콩쿠르에서 쇼스타코비치는 특별상을 받으며 탁월한 피아니스트로서의 능력도 인정 받았다.학업시절 쇼스타코비치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계를 돕기도 했는데, 당시 그는 무성영화의 배경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상당히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서방에서는 재즈풍의 스트라이드 피아노 연주풍이 무성영화 시대를 풍미했는데, 쇼스타코비치는 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완전히 소화해냈고, 영화의 스토리의 전개에 따른 즉흥적인 연주 감각도 익히게 된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이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즉 템포나 악상의 갑작스런 비약을 지닌 아이러니컬한 멜로디가 유연한 흐름을 타고 이어지는 경우가 그것이다. 1933년에 피아노와 현악 오케스트라, 그리고 독주 트럼펫이라는 특이한 편성으로 작곡된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에 이런 모습은 극명하게 드러난 다.
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 1906∼1975
소련 작곡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광산기사로서 음악애호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어머니에게 피아노 초보교습을 받은 뒤 1919년에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 입학하여 L. 니콜라예프에게 피아노를, M. 스타인베르크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25년에 졸업하였다. 26년 졸업작품 《교향곡 제 1번》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명성을 높였다. 다음해에는 쇼팽국제콩쿠르에서 명예상을 받았고 그 후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하였다. 계속하여 10월혁명에 붙인 《교향곡 제 2 번(1927)》, 메이데이를 위한 《교향곡 제 3 번(1929)》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많은 영화음악에도 손을 대었다.
34년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1963년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로 개정 초연)》이 초연되어 호평을 받자 유럽을 비롯하여 미국에서도 잇따라 상연되었는데, 이 오페라에서 사용되었던 전위적 수법은 36년 1월 《프라우다》지에서 철저한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쇼스타코비치는 37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방침에 따른 작풍으로 《교향곡 제5번》을 작곡하여 압도적인 성공으로 명예를 회복하였고, 그 후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 레닌그라드음악원·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후진을 지도하였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다시 <서구 부르주아적 형식주의에 빠졌다>고 A.A. 주다노프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그는 평이한 어법으로 소련의 국토개조계획을 칭찬한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1949)》를 발표하였다. 다시 53년 I.V. 스탈린 사후에 발표한 《교향곡 제10번》에서도 논쟁을 일으키는 등 늘 화제대상이 되면서 정력적으로 대작을 작곡하였다. 소련의 이른바 <해빙기>를 맞아 60년대부터는 반체제적 텍스트를 사용하고, 내용도 사색적인 경향을 취하는 등 새로운 전개를 보였다.
작품은 오페라·발레음악·영화음악과 극의 부수음악을 포함하는 관현악곡·협주곡·실내악곡 외에 피아노독주곡과 가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특히 극음악의 작품이 많으나 내용과 밀도에서 교향곡과 현악 4 중주곡이 창작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곡이 넘는 교향곡은 생애를 통하여 몰두하였던 장르로 모두가 대작인 동시에 작곡가가 놓였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작품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지니고 있다. 전 15곡의 현악 4 중주곡은 후반에 집중 작곡했으며, 매우 세련되고 충실한 내용을 보여 B. 바르토크의 현악 4 중주곡과 함께 20세기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작풍은 서유럽의 모더니즘 영향을 받았던 1920년대, 다시 서방측의 새로운 기법에 접근했던 말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30년 스탈린에 의한 <형식에서 민족적, 내용에서 사회주의적>으로 요약되는 정치적 요구에 따라 평이한 신고전주의적 양식을 취하면서 장대한 효과를 올렸다. 그의 사후 수년 후에 발표된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은 그의 숨겨진 내면을 알 수 있는 실마리로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1922년∼27년까지 결혼 전 사랑하던 타디야나 글리벤코에게 보낸 편지가 91년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자료 : 야후지식
https://youtu.be/uGoxfQ2H3ns?si=RLzJQWt8Mkjn9Kg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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