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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망권(院長望圈)
서원 원장에 추대하는 문서
院 : 집 원(阝/7)
長 : 우두머리 장(長/0)
望 : 바랄 망(月/7)
圈 : 동그라미 권(囗/8)
조선(朝鮮) 정조(正祖) 임금 때 유명한 정승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있었다. 그의 경륜이나 능력도 뛰어났지만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보호하려는 정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정조가 특별히 아꼈다. 그는 학문이나 문장도 뛰어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감탄할 정도였는데, 그 학통(學統)을 거슬러 올라가면 퇴계(退溪) 선생에게 닿는다.
어느 날 채정승이 입시(入侍)했는데,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정조가 물었다. "매우 좋은 일이 있는가 보오?"
"예! 그러하옵니다."
"과인(寡人)도 알았으면 하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를 도산서원 원장에 추대하는 망권(望圈)을 보내왔습니다."
하도 기뻐하는 안색이기에 정조가 "그 일이 그렇게 좋소? 지난번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임명됐을 때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 영의정 임명보다 더 좋은가 보지요?"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러하옵니다."
"그렇게 좋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과인도 한번 했으면 하는데?"
"전하(殿下)께서는 할 수 없는 줄로 아뢰오"라고 했다.
채제공이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 올랐지만 도산서원 원장을 더 가치 있게 생각했던 것이다. 채제공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향사하는 덕천서원(德川書院) 원장도 역임했다.
소천(少泉) 조순(趙淳) 선생이 95세로 서거했다. 원래 경제학자로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88년부터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 여야 당대표, 국회의원 등을 두루 지냈다. 이런 경력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러나 이 분의 경력을 보면, 그 전공과 관계없을 듯한 직책을 많이 지냈다.
도산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 덕천서원, 월봉서원(月峯書院)의 원장을 지냈다. 또 유림단체인 박약회(博約會) 고문, 한문고전 번역기관인 민족문화추진회 회장 등을 지냈고, 한시 창작 모임인 난사회(蘭社會)의 회원이다. 여러 서원의 원장을 맡거나, 한문과 관계된 단체에 관여한 것은, 탁월한 한문 실력 때문이다. 어려서 부친에게 한문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은행 총재를 그만두면서 인사동에 소천서당을 열어 한문을 가르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이 분의 댁 응접실에 도산서원 원장 망권(望圈)을 표구해서 걸어 두었다고 한다.
이 분이 "내 일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는 도산서원 원장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은 한시 짓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돌아가실 때 현임 덕천서원 원장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몇 백 개 퍼즐 맞추는 일을 매우 즐거워 한다. 5만 자의 한자를 가지고 갖가지 생각을 담아내거나 어떤 일을 서술하는 일은 퍼즐의 즐거움에 비할 정도가 아니다.
'망(望)'자는 '어떤 사람이 후보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고, '권(圈)'자는 '동그라미 친다', '낙점(落點)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망권(望圈)'이란 여러 사람들이 희망해 그 어떤 사람을 추대하는 동그라미를 친다는 뜻이다. 또는 그런 문서를 말한다.
■ 서원(書院)
정의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 기구이다.
개관
서원의 기원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제화(定制化)된 것은 송나라에 들어와서이며, 특히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고 도학연마의 도장으로 보급한 이래 남송· 원· 명을 거치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이다.
조선의 서원은 그 성립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기능과 성격 등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중국의 서원이 관인양성을 위한 준비 기구로서의 학교의 성격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서원은 사림의 장수처(藏修處)이면서 동시에 향촌 사림의 취회소(聚會所)로 정치적, 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흔히 서재(書齋)와 사우(祠宇) 등과 혼칭되고 성격도 비슷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본래는 구별되고 있었다.
서원의 성립
1. 서원의 성립 배경
서원이 성립하게 된 배경은 조선 초부터 계속되어온 사림의 향촌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사림들은 향촌사회에 있어서 자기세력 기반 구축의 한 방법으로 일찍부터 사창제(社倉制)와 향음주례(鄕飮酒禮) 등을 개별적으로 시행하여 왔다. 특히 정계진출이 가능해진 성종 이후는 이를 공식화하여 국가정책으로까지 뒷받침 받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구심체로서 유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을 전개하다가, 향권독점을 두려워한 훈구척신(勳舊戚臣) 계열의 집요한 반대와 경재소(京在所)에 의한 방해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다시 사마소(司馬所)를 세워 본래의 의도를 관철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이와 같은 노력은 연산군대의 거듭된 사화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교육과 교화를 표방함으로써, 향촌활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구심체로 서원이 성립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서원이 16세기 중엽인 중종 말기에 성립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사림의 정계 재진출에 따라 그 정책으로 제시되었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교학체제의 혁신에 있었다.
조광조(趙光祖)로 대표되던 신진 사류들은 지치(至治)의 재현을 목표로 도학정치의 실시를 주장하며 여러가지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였다. 그 중의 하나인 문묘종사 운동은 사람마다 도학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하고 이를 숭상하도록 하기 위하여 도학에 뛰어난 학자를 문묘에 제향하여야 한다는 명분에 근거를 두고, 사림계 유학자인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 등의 종사를 추진하였다.
이는 그 자체가 사림계의 학문적 우위성과 정치입장을 강화해주는 측면과 함께 향촌민에 대한 교화라는 명분을 동시에 갖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서원이 발생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한편, 당시의 훈척계열이 쇠잔한 관학을 존속시키는 방향에서 그 개선책을 모색하였던 반면, 사림계의 경우는 그들이 내세우는 도학정치를 담당할 인재의 양성과 사문의 진흥을 도모하기 위해 위기지학(爲己之學) 위주의 새로운 교학체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물론 그들이 곧 실각함으로써 관학에 대체할 새로운 교학기구의 모색은 중단되었지만, 이러한 과정이 뒷날 사림의 강학(講學)과 장수(藏修)를 위한 장소로서 서원의 출현을 가져온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2. 서원의 성립 과정
주세붕은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을 모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를 세워 배향해 오다가 1543년에는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최초로 건립하였다. 또한 영남감사(嶺南監司)의 물질적 지원과 지방유지의 도움으로 서적과 학전(學田)을 구입하고 노비 및 원속(院屬)을 확충하는 등 그 영속화를 위한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이를 기초로 유생을 교육하여 여러 명의 급제자를 내게 하는 등 서원체제를 갖추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백운동서원은 어디까지나 사묘가 위주이었고, 서원은 다만 유생이 공부하는 건물만을 지칭하여 사묘에 부속된 존재에 그쳤다.
서원이 독자성을 가지고 정착, 보급된 것은 이황(李滉)에 의해서이다. 이황은 교화의 대상과 주체를 일반백성과 사림으로 나누고, 교화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담당할 주체인 사림의 습속(習俗)을 바로잡고 학문의 방향을 올바르게 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오로지 도학을 천명하고 밝히는 길밖에는 없으므로,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도장으로 중국에서 발달되어온 서원제도가 우리 나라에도 필요한 것이라고 하여 서원의 존재이유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논리적 근거 위에서 그는 마침 풍기군수에 임명되면서 우선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 안에 그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그는 그 뒤 고향인 예안에서 역동서원(易東書院) 설립을 주도하는가 하면, 10여 곳의 서원에 대해서는 건립에 참여하거나 서원기(書院記)를 지어 보내는 등 그 보급에 주력하였다. 초창기인 명종 연간에 건립된 서원수가 18개 소인 사실을 감안한다면 서원보급에 미친 그의 영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외면적인 확대와 아울러 서원의 내용면에서의 충실에도 유의하였다. 유생의 장수처로서의 강당과 존현처로서의 사묘를 구비한 서원체제를 정식화하고, 원규(院規)를 지어 서원의 학습활동과 그 운영방안을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부터 계속된 향촌에서 사림활동의 구심체적 기구의 모색 노력은 중종초 조광조 일파의 신진사류에 의한 문묘종사 운동 및 새로운 교학체제 모색을 통하여 그 타당성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서원의 형태로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며, 이황에 의하여 정착, 보급되기에 이른 것이라 하겠다.
한편, 서원의 건립은 본래 향촌 유림들에 의하여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국가가 관여할 필요가 없었으나, 서원이 지닌 교육 및 향사적(享祀的) 기능이 국가의 인재양성과 교화정책에 깊이 연관되어, 조정에서 특별히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그에 따른 서적과 노비 등을 내린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특전을 부여받은 국가공인의 서원을 사액서원이라 하며 비사액서원과는 격을 달리하였다.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이 백운동서원에 대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어필(御筆) 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노비를 부여하여,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그 뒤 전국의 도처에 서원이 세워지면서 사액을 요구하여, 숙종 때에는 무려 131개소의 사액 서원이 있었다. 그 뒤 영조 때에는 서원폐단의 격화로 인한 강력한 단속으로 사액은 일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서원의 전개
조선시대에 건립된 서원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후일에 이를수록 인물 위주로 남설(濫設)되어 사우와의 구별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첩설을 금지하는 조처로 처음에는 사우로 이름하였다가 금령(禁令)이 완화되면 서원으로 승격시킨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서원으로 설립 되었다가 금령에 저촉되어 사우로 강호(降號)되거나 아예 철폐된 것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 때 편찬된 '조두록(俎豆錄)'과 고종 때에 증보된 '문헌비고' 및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 등에 기재된 서원명단을 토대로, '서원등록(書院謄錄)' 및 '승정원일기' 등 연대기류에 나타난 철폐된 서원을 조사하여 합하면 대략적인 건립추세는 짐작할 수 있다.
서원은 전 시기에 걸쳐 8도에 417개 소가 있었으며, 사우는 492개 소에 달하고 있다. 그런데 후기, 특히 숙종 때 서원이 남설되면서 부터 서원과 사우의 구별이 모호해졌으므로, 사우까지도 서원과 비슷한 성격으로 파악하여 양자를 합하면 모두 909개 소에 이른다.
1741년(영조 17) 서원 철폐론의 당시 서원과 사우 등 여러 명칭을 모두 헤아린 숫자가 1,000여개 소에 가깝다고 말한 것이 통계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 통계에 나타난 서원건립의 추세를 중심으로 하고 거기에 따른 내용적인 면에서의 변천을 고려하여 조선 서원의 전개과정을 살펴본다면, 우선 명종까지의 초창기, 선조에서 현종에 이르는 시기의 발전기, 숙종에서 영조 초까지의 남설기, 그리고 영조 17년 이후의 서원철폐 및 쇠퇴기 등의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초창기의 서원
초창기에 건립된 서원의 숫자는 19개 소(중종 이전에 이미 3개 소의 서원이 건립되었다는 사실은 신빙성이 없어 제외)이다. 이는 당시의 정계가 전반적으로 척신계에 의하여 주도된 사정을 감안할 때 상당한 진척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초창기임에도 불구하고 사액된 곳이 4개 소나 되는 것은 서원이 이 시기에 이미 관설에 준하는 교학기구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황 및 그 문인들에 의한 서원보급 운동이 거둔 하나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이황의 거주지이며 그 문인의 활동이 성하던 경상도지역에 전체의 반이 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척신세력으로서도 관학의 쇠퇴상을 더 이상 방치할 수만은 없는 단계에 이르러, 그 대체기구로서 서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향 인물인 안향· 정몽주(鄭夢周)· 최충(崔冲)· 최유길(崔惟吉) 등이 사림 이전의 고려시대 인물이었던 관계로 척신세력의 반발을 받지 않았던 것도 서원의 설립이 활발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 시기는 서원의 내용면에서도 장차의 서원 발전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즉 서원의 전반적인 면에 걸친 건전한 운영을 도모하기 위한 규정으로, 이황의 '이산서원원규(伊山書院院規)'를 기본으로 각 서원별 원규가 작성되어 이에 의한 강학활동이 활발하였다.
또한 지방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향촌 유지를 중심으로 하여 주로 서원전(書院田)과 어물(魚物)과 소금 등 현물조달 체제의 영속화를 통한 안정된 재정기반 구축과 원속과 노비 등의 확보책이 추진되고 있었다. 명종 말과 선조 초의 활발한 사림의 공급은 바로 이러한 서원의 건전한 운영을 밑바탕으로 하여 가능하였던 것이다.
2. 발전기의 서원
서원은 선조 때, 사림계가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 이후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우선 양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선조 당대에 세워진 것만 60여개 소를 넘었으며, 22개 소에 사액이 내려졌다. 그 뒤 현종 때까지는 꾸준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여 연평균 1.8개씩 106년간 193개소가 설립 되었으며, 그 가운데 0.9개가 사액서원이었다.
지역별로는 초창기의 경상도 일변도에서 점차 벗어나 전라· 충청· 경기도 지역에서의 건립이 활발해졌다. 그래서 한강 이북지역에서도 차차 보급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특히 황해도의 경우는 선조 연간 이례적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와 같이 전국적인 확산을 보게 된 것은 사림의 향촌활동이 보다 자유로워진 정세의 변화라든가, 특정 유학자의 서원보급 운동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다 깊은 요인은 붕당정치(朋黨政治)의 전개에 있었다. 사림의 집권과 함께 비롯된 이 붕당은 그 정쟁(政爭)의 방식이 학문에 바탕을 둔 명분론과 의리(義理)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므로, 당파형성에 학연(學緣)이 작용하는 바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러한 학연의 매개체인 서원이 그 조직과 확장에 중심적인 몫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각 당파에서는 당세 확장의 방법으로 지방별로 서원을 세워 그 지역 사림과 연결을 맺고 이를 자기 당파의 우익으로 확보하려 하였다. 반면에 향촌사림으로서는 서원을 통하여 중앙관료와의 연결을 맺어 의사 전달과 입신출세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기에 서원건립을 놓고 양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서원이 수적 증가는 현저하였다. 그렇지만 아직 남설이라든가 그로 인한 사회적 병폐가 우려될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 때까지만 하여도 붕당이 권력구조 균형의 파탄을 초래할 지경에 이를 만큼 격화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인조와 현종 때의 복제논쟁(服制論爭)에서 나타나듯 그 논쟁의 초점이 학문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않아서, 그 논리적 기초의 심화와 공감대의 확산을 위한 장소로 서원의 소임이 크게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이나, 정경세(鄭經世)· 허목(許穆)· 윤휴(尹鑴)와 같은 당파의 영수이면서 학자이었던 인물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왕성한 강학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면서 학적 기반을 구축하면서 서원의 건전한 운영을 꾀하였던 것이다.
서원의 양적 증가가 곧 그 문란을 의미하지 않음은, 배향자의 대부분이 조광조나 이황· 이이· 조식(曺植) 등 사화기의 인물이거나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유학자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지 않은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서원의 발전은 양적인 증가에서뿐만 아니라 기능의 확대라는 면에서도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서원은 단순한 사림의 교학기구에만 그치지 않고 강학활동을 매개로 하여 향촌사림 사이의 지면을 익히고 교제를 넓히는 곳으로서의 구실과, 특히 향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의견교환이나 해결책을 논의하는 향촌 운영기구로서의 기능을 더하였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향촌방어를 목적으로 한 의병활동이 활발하였고 또 그것을 일으키기 위한 사림의 발의와 조직의 편성에 서원이 그 거점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심지어는 향풍(鄕風)을 문란하게 한 자에 대한 훼가출향(毁家黜鄕)이라는 향촌사림의 사적인 제재조처까지 단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남설기의 서원
서원은 숙종대에 들어와 166개 소(사액 105개 소)가 건립되는 급격한 증설현상을 보였다. 연평균 건립수가 3.6개 소로서 발전기의 두 배를 넘어섰으며, 사액도 2.5배(연평균 2.3개 소)가 증가되어 남설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경종과 영조 초기에 다소 줄었지만, 반면에 사우의 수는 격증하였다.
사우의 건립 추세는 현종 때까지 서원에 비교가 되지 않았으나 1703년(숙종 29) 이후 현저한 증가 현상을 보여 서원을 능가하고 있으며, 경종과 영조 초에 와서는 서원을 압도하였다. 영조 초의 17년 사이에 무려 137개 소가 건립되어 연평균 8개 소라는 엄청난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남설이 문제되던 이 시기는 서원 명칭으로의 건립이 금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금령을 피하여 대신 사우를 건립하는 사례가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경우 서원과 사우의 구별은 실제적으로 무의미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우의 격증을 서원남설의 한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원남설은 외면적인 숫자의 격증만이 아닌 내용에서도 나타났다. 예컨대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전국에 44개 소(사우 포함)나 되었다. 당시 10개 소 이상에 제향된 인물이 10여 명에 이르는 데서 보이듯 동일한 인물에 대한 중첩된 서원건립이 성행하였다.
제향인물도 뛰어난 유학자이어야 한다는 본래의 원칙을 벗어나, 당쟁 중에서 희생된 인물이나 높은 관직을 지낸 관리, 선치수령(善治守令), 행의(行誼)있는 유생, 그리고 심지어는 단지 자손이 귀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써 추향(追享)되는 사례가 자행되었다. 서원의 이러한 첩설과 남향은 이 시기에 당쟁이 격화되고 그 폐단이 표면화된 데에 원인이 있었다.
서원은 이제 학연의 확대를 기한다는 면에서 보다는 정쟁에 희생된 자기파 인물에 대한 신원(伸寃)의 뜻을 보다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또 붕당의 원리가 포기된 상태에서 외면적인 당파의 양적 확대에만 급급하여, 경쟁적으로 향촌사림을 포섭하려 하자, 자연히 서원조직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서원의 남설과 사액의 남발을 더욱 부채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원남설은 오직 당쟁문제로만 초래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17세기 후반 이후 현저해진 현상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사족 사이에 동족 내지 가문의식이 강화된 결과로 나타난 후손에 의한 조상제향처 내지 족적 기반 중심지로 서원건립이 자행되었던 것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성행할 수는 없었다. 그러한 행위가 서원 본래의 취지에 벗어나기에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따라서 국가로부터 통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서원 금지령이 내려진 1703년(숙종 29) 이후 서원 대신 사우가 격증한 것은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다.
서원의 남설은 필연적으로 그 질적인 저하를 수반하고 사회적인 폐단을 야기하였다. 그것은 제향 자격에 의심이 가는 인물이 봉사 대상으로 선정되는 사실과 함께 점차 그 성격에 있어 제향 일변도의 경사가 마침내 사우와의 혼동을 초래하였고, 그에 반비례하여 강학활동은 위축되게 마련이었다.
또 점차 타락의 도를 더해가는 당시 사림의 기강이나 능력으로 보더라도 더 이상 서원이 학문기구로 활용되기 어려웠다. 서원이 날로 증가하지만 사문은 더욱 침체하고 의리 또한 어두워질 뿐이라는 서원 무용론까지 대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에 서원철폐의 명분이 되었다.
서원의 사회적 폐단은 건립과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지방관에게서 갹출하는 구청(求請), 양정(良丁)을 불법적으로 모점(冒占)하여 피역시켜 양정 부족현상을 야기하여 양역폐를 격화시키는 폐단, 교화를 구실로 대민착취 기구로 전락된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쟁의 격화로 서원의 정치적 비중이 커지는 속에서 중앙의 고관이 향촌의 1개 서원에 진신유사(搢紳有司)로 추대되어 일정한 상호보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질적인 저하에도 불구하고 향촌사회에서 서원이 누리는 권위는 강대하였으며, 바로 이 점이 사회적 폐단을 야기할 수 있는 근본요인이었던 것이다.
4. 훼철기의 서원
서원문제는 1644년(인조 22) 영남감사 임담(林墰)의 서원남향에 대한 상소에서 처음 제기되었으며, 그 뒤에도 효종과 현종 연간을 거치면서 간헐적이기는 하나 그 폐단을 논하는 상소로 인한 논의가 조정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서원건립이 허가제로 결정되고 첩설금령이 발포되며, 때로는 집권파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당파에 속하는 인물을 제향한 서원이 남향을 구실로 사우로 강호되거나 심지어는 한두 곳이 훼철(毁撤)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숙종 초까지만 해도 남설로 인한 서원의 문란상은 심각하게 인식되지 않아서 아직은 서원옹호론이 우세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 마련된 서원대책은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서원에 대한 통제가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 것은 1703년(숙종 29)에 이르러서이다. 이때 전라감사 민진원(閔鎭遠)은, 조정에 알리지 않고 사사로이 서원을 세우는 경우 지방관을 논죄하고 수창유생(首倡儒生)을 정거(停擧)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이에 왕이 찬동함으로써 서원금령이 강제성을 띠게 되었다.
서원금령은 그 뒤에도 수시로 신칙되어서 1713년 말에는 특히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의 요청으로 1714년 이후부터의 첩설(疊設)을 엄금하고 사액을 내리지 않을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 1717년에는 8도의 관찰사에게 숙종 29년 금령 후 창건된 서원에 대한 조사를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1719년(숙종 45)부터 왕이 하나하나 존폐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경상도의 경우에는 훼철을 단행하기까지 하였지만, 곧 숙종이 죽어 중단되고 말았다.
이어 경종 때 사액서원의 면세지를 3결로 확정하되, 토지는 서원자체에서 마련할 것이며 위토(位土)가 3결에 차지 못한다고 해서 민전(民田)을 점거하는 일이 없도록 규정하였다. 종래는 사액서원에 대하여 토지 3결을 편액과 함께 사급한 것으로 보고 이것이 사액서원이 가지는 특전이라고 하였으나, 실은 국가로부터 토지지급은 없었고 여기서 보듯이 단지 면세권만 3결에 한하여 지급하였던 것이다.
이어 서원구청을 금단하고 원속과 보노(保奴) 등을 일체 폐지하는 등 강경책을 썼으며, 특히 대사성 이진유(李眞儒)의 주장으로 1703년 이후의 첩설서원은 그 편액을 철거하게 하였다. 이는 소론의 노론서원에 대한 보복이었다 하여 영조 즉위 후 편액을 다시 걸게 하였다. 이와 같이 숙종 말년 이후부터 단행된 강력한 서원통제책은 계속된 정권교체로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서원폐단에 대한 조야의 인식이 깊어지고 서원통제론이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며, 1741년(영조 17)의 서원철폐는 여기서 이미 준비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조가 서원철폐를 단행하게 된 계기는 그의 탕평책 실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1741년은 노론이 결정적으로 우세를 확립한 시기로 신유대훈(辛酉大訓)이 반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으로서는 탕평파를 이용, 노론의 일방적 권력행사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조낭관(吏曹郎官)의 통청권(通淸權)과 사관의 천거권을 폐지하는 등 탕평에 예의 주력하였다.
따라서 서원에 대해서도 그것이 노론· 소론· 남인 사이의 분쟁을 유발하고 정국을 혼란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 건립에 따른 시비를 근원적으로 봉쇄할 목적으로 탕평파의 협조를 얻어 1714년 갑오 이후 건립된 서원은 물론 사우와 영당 등의 모든 제향기구(祠院)를 일체 훼철하게 하였던 것이다.
영조의 이 조처는 지방관의 책임 하에 철저하게 진행되었고 19개의 서원을 포함하여 합계 173개소의 사원이 훼철되었다. 그 뒤 서원첩설 및 남설의 경향은 크게 둔화되어 거의 정지상태로 되었다. 이는 탕평하에서 의리논쟁과 인물시비가 기피되는 정치사안이 되자 이와 직결된 서원건립 문제가 자연히 외면되었기 때문이다.
또 순조 이후의 세도정치 하에서 의리나 명분 자체가 무의미해졌기에 더 이상 관심을 끌 수 없었던 데 이유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지방관에 대한 처벌이 건립을 효과적으로 봉쇄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원금령이 정조와 철종 연간에 한두 차례씩 내려지게 된 것은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없이 이제는 가문의식과 관련하여 후손에 의한 건립이 종종 시도되었던 데 그 까닭이 있다.
실로 서원훼철과 같은 강경조처로 서원금령의 강화는 지방관의 서원에 대한 물질적 보조를 거의 단절케 해서 서원재정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끝내는 이를 메우기 위한 대민작폐의 심화와 함께 서원재정 담당을 기화로 한 후손의 서원관여를 더욱 조장하여 19세기 이후는 전국의 서원이 대부분 후손에 의하여 운영되고 또 건립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한편, 서원건립이 중단된 것과 반비례하여 이미 교화의 방향을 상실한 사림층의 대민착취와 서원의 부패로 인한 민폐는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세도정치의 외형적인 지주로서 노론측 당론의 소굴이었고, 충청도 유림의 여론을 좌우하는 거점으로 전국에 광대한 수세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복주촌(福酒村)을 두어 지방재정을 좀먹고 관령(官令)보다 더 위세가 당당한 묵패(墨牌)로서 향촌민에 대한 착취를 서슴지 않던 화양동서원의 작폐는 19세기 이후의 서원이 사회에 끼친 역기능적인 폐단을 극적으로 말해 주는 예이다.
그러므로 실추된 왕권의 권위를 높이며 강력한 중앙집권하에 국가체제의 정비를 꾀하던 흥선대원군은 서원의 일대 정리에 착수하였다. 흥선대원군은 1864년(고종 1)에 이미 민폐문제를 구실로 사원에 대한 조사와 그 존폐여부의 처리를 묘당에 맡겼으며, 1868년과 1870년에 미사액서원과 사액서원으로 제향자의 후손에 의하여 주도되면서 민폐를 끼치는 서원에 대한 훼철을 명령하였다.
이어 1871년에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에 대하여 1인 1원(一人一院) 이외의 모든 첩설서원을 일시에 훼철하여 전국에 47개 소의 사원만 남겨놓게 된 것이다. 이때 존치된 47개 소는 서원명칭을 가진 것이 27개 소, 사(祠)가 20개 소이다.
서원의 구성과 배치
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축물은 크게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과, 원생과 진사 등이 숙식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이 외에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 책을 보관하는 서고, 제사에 필요한 제기고(祭器庫), 서원의 관리와 식사준비 등을 담당하는 고사(庫舍), 시문을 짓고 대담을 하는 누각 등이 있다. 이러한 서원건축은 고려 때부터 성행한 음양오행과 풍수도참 사상에 따라 수세(水勢)와 산세(山勢)와 야세(野勢)를 보아 합당한 위치를 택하여 지었다.
건물의 배치방법은 문묘나 향교와 유사하여 남북의 축을 따라 동·서에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정문과 강당과 사당 등을 이 축선에 맞추어 세우고 사당은 별도로 담장을 두른 다음 그 앞에 삼문(三門)을 두어 출입을 제한하였다. 이 부근에 제사를 위한 제기고가 놓이고, 강당의 앞쪽 좌우에 동·서재를 두었으며 강당 근처에는 서고와 장판각 등을 배치하였다. 고사는 강학구역 밖에 한옆으로 배치한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 대부분의 건물은 검소한 선비정신에 따라 복잡한 포(包)나 장식을 피하고 익공(翼工)이나 도리집 등의 간소한 양식으로 화려하지 않게 꾸민 것이 보통이며, 단청 또한 사당에만 긋기, 얼모로 등을 사용하였다. 또한 지형에 따라 사당과 강당과 부속건물 등의 지반(地盤)에 차이를 두어 주된 것과 부속된 것의 공간구성을 적절히 계획하였다.
담장으로 외부 공간과의 구획을 지어 분별하게 하였지만 담장의 높이는 높지 않게 하거나 그 일부를 터놓아 자연과의 조화를 깨지 않고 적응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어, 내부에서 밖을 바라볼 때 자연의 산수를 접할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 서원건축의 특징이다.
경내의 조경 또한 철따라 피고 지는 꽃과 낙엽수를 심어 계절에 따른 풍치를 감상하도록 하였고, 경외에는 송(松)과 죽(竹) 등의 나무를 심어 푸른 산의 정기와 선비의 기상을 풍기게 하였다. 나무들은 대체로 산수유· 느티나무· 은행· 작약· 살구· 모과· 진달래· 개나리· 난초· 모란· 매화· 단풍 등을 심었다.
서원의 교육활동
1. 서원의 운영
서원행정도 국가의 일정한 영향하에 있었으나, 그 세부운영과 교육에 관한 예조의 지휘 감독은 없었다. 서원의 교육은 자체적으로 제정한 원규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원규에는 서원의 입학자격과 원임(院任)의 선출절차, 교육목표 및 벌칙조항이 수록되어 있다.
서원교육은 원장(院長)· 강장(講長)· 훈장(訓長) 등의 원임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원장은 산장(山長), 혹은 동주(洞主)라 불렸고, 서원의 정신적인 지주이면서 유림의 사표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원에 따라 다소간 차이가 있었으나, 원장은 퇴관한 관료이거나 당대의 명유석학이 맡는 것이 관례이었다. 선조 때 이이(李珥)는 교육의 실효를 거두기 위하여 원장은 휴관자(休官者)나 퇴관(退官)하여 은일한 자 중에서 가려뽑아 녹봉을 지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강장은 경학과 예절에 대한 강문을 담당하고, 훈장은 학문근면과 훈도를 책임지었다.
그 밖에 서원관리를 위하여 재장(齋長)· 집강(執綱)· 도유사(都有司)· 부유사(副有司)· 직월(直月)· 직일(直日)· 장의(掌議)· 색장(色掌) 등의 직책을 두었다. 이러한 재임(齋任)의 선출은 추천제도에 의하여 선출하였으며, 때로는 관부(官府)의 인준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임기는 2, 3년이 통례이나, 원장은 일기(一期)의 향사 혹은 종신직이었다.
서원의 입학자격은 시대별, 지역별 혹은 서원별로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대체로 입원의 자격은 별로 까다롭지 않았고, 생원과 진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일반적이다.
백운동서원, 이산서원(伊山書院), 서악서원(西岳書院)의 원규에는 대체로 생원과 진사를 우선 받아들였다. 그 다음 초시 입격자를 입학시켰으며, 초시 미입격자라도 향학심과 조행이 있는 자로서 입재를 원하면 유사가 유림들에게 승인을 받아 허락하도록 하였다. 무릉서원(武陵書院)의 경우에는 장유와 귀천을 막론하고 지학자(志學者)는 모두 입학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소수서원과 서악서원과 같은 곳에서는 그 고을 수령의 자제는 서원에 체류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관권개입을 금하였다.
학생의 정원은 처음에는 별다른 규제가 없었으나, 서원남설이 사회문제화된 1710년(숙종 36)에 원생수를 확정하였다. 원생은 사액서원에 20인, 문묘종사유현서원(文廟從祀儒賢書院)에 30인, 미사액서원에 15인으로 정액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규칙도 신분제가 문란하게 되고 서원이 남설되자 동시에 와해되었다.
1683년에는 이미 서원에서도 향교를 모방하여 서재생(西齋生)을 모집하고 예납(禮納)이라 하여 미포를 징수하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서원의 증가와 더불어 모집원생은 늘고 세월이 갈수록 그 수는 증가일로에 이르러, 드디어는 서원이 양정의 도피처로 화하였다. 이에 따라 원생 중에는 상민들도 다수 액외원생(額外院生)으로 처신하였다.
2. 서원의 교육내용
서원의 교육내용은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 관학에서의 교육이 과거와 법령 규제에 얽매인 것과 비교할 때, 서원교육은 사학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이 존중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이황이 이산원규(伊山院規)에서 제시한 교재의 범위와 학습의 순서가 정형이 되었다. 사서오경으로 본원(本原)을 삼고, 소학, 가례(家禮)를 문호(門戶)로 삼는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청계서원(淸溪書院)의 원규에는 독서의 순서를,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춘추의 차례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서원의 일반적인 교육과정이라고 하겠다. 위의 사서오경 외에도, 여러 가지 경사자집(經史子集) 속에서 서원의 성격에 따라 선별하여 교육하였다.
그리고 성리학과 도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과거에 응시하는 데 필요한 사장학적(詞章學的)인 유학도 그 교육과정 속에 포함시키는 서원도 있었다. 그러나 불학(佛學)과 서학(西學) 등 이른바 이단에 관계되는 서책이나, 음사(淫邪)와 벽사(辟邪)에 관련되는 내용은 철저히 금하였다.
3. 서원의 교육방법
원생에 대한 교육은 원규에 의한 규제와 원생 자신의 자율적인 실천과 학습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원규에서는 수학규칙(受學規則), 거재규칙(居齋規則), 교수실천요강, 독서법 등 유자로서 지켜야 할 준칙이 실려 있다.
예컨대 독서는 다독과 기송만을 일삼지 말고 정독과 사색에 힘쓸 것과 지와 행이 반드시 일치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원생 각자에게 선악양적(善惡兩籍)과 같은 일종의 생활기록부를 만들어, 경우에 따라서 출재(黜齋)를 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원생 스스로 입지(立志), 검신(檢身), 존심(存心)을 위한 존양궁리(存養窮理)를 중요시하였다.
서원의 전통적인 교수방법으로는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를 문답하는 강(講)이 있다. 강은 대개 순강(旬講)· 망강(望講)· 월강(月講) 등으로 나뉜다. 또한 그 방법에 따라 암송낭독인 배강(背講)과 임문낭독(臨文朗讀)인 면강(面講)으로 분류된다. 낭독 뒤의 질의응답은 단순한 암송위주의 학습법을 극복하는 단계이다. 강을 받는 데는 강의(講義)라고 하는 일정한 절차를 두어, 학습에 대한 진지성과 예의를 갖추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도기제도(到記制度)를 도입하여 원생의 출석여부를 확인하고, 학령의 준칙에 따라 고과평정(考課評定)과 독서지침을 제시하였다. 강의평가는 대통(大通)· 통(通)· 약통(略通)· 조통(粗通)· 불(不)의 5단계, 또는 통(通)· 약(略)· 조(粗)· 불의 4단계 평가척도로 하였다. 이때 대통은 구두(句讀)에 밝고 설명에 막힘이 없어서 책의 취지를 두루 알 수 있는 가장 높은 학습수준을 갖춘 자에게 부여하였다. 가장 낮은 단계인 불은 낙제를 의미하였다.
이상과 같은 강학활동 이외에 서원의 제향기능(祭享機能)도 그 교육적 의미가 높다. 서원에서 행하는 춘추향사(春秋享祀)는 엄격한 의례절차를 통하여 원생들에게 바람직한 인간상인 선현(先賢)을 제시하는 의미가 있다. 또한 춘추향사에 참례할 자격은 까다로운 인선절차를 거쳐 청금록(靑衿錄)에 기재되어야 가능했기에 그 사회교육적 기능이 컸다. 향사시의 출입· 승강 등 절차와 제반 제례의식 등 유자들이 평소 지녀야 할 기본적인 법도와 몸가짐[敬身]을 익히게 하였다.
4. 서원의 교육시설 및 재정
서원시설 중에서 교육활동을 보조하는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가 장서제도(藏書制度)이다. 책의 보급과 열람이 어려웠던 시대에 있어서 장서의 기능은 커다란 문화적인 기여를 하였다. 서원에서 서책을 간행하려고 할 때는 당회(堂會)를 거쳐 의정(議定)하고 곧 간역소(刊役所)를 열었다. 간역소에 딸린 전답에서 여러 해 적립한 간비(刊費)와 향내 각 문중의 출연으로 그 경비를 충당하였다.
그 밖에 사액서원에 대해서는 국왕이 서적을 하사하는 것이 관례이었다. 또한 국가에서 서적을 간행, 반포할 경우라든가 국가의 장서에 여유가 있을 경우에는 별도로 서적의 하사가 있었다. 이와 함께 관찰사 또는 지방관의 조처에 의하여 서적이 지급되기도 하였다.
서원장서의 관리에 대해서는 각 서원의 원규에 기입하여 세심한 주의를 하였다. 이산원규에는 서적을 원외로 반출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소수서원의 원규에는 읍재(邑宰)의 자제가 서책을 대출하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 서악원규에는 5일마다 서책을 점검하도록 하여 서책이 망실되지 않도록 조처하고 있다. 현재 서원에 남아 있는 판종은 고활자본· 목판본· 필사본· 석판본 및 현대 활자본의 5종으로 대별되며, 다수 보관문서들이 미정리의 상태로 남아 있어서 이에 대한 정리작업이 절실히 요청된다.
한편 서원의 교육활동을 위한 중요한 재원의 하나는 서원전(書院田)이었다. '속대전'에 의하면 사액서원에는 각각 3결을 지급하였다. 그 밖에 서원은 유지들이 기증하는 원입전(願入田), 면역을 위하여 납상하는 면역전(免役田), 자체에서 사들이는 매득전, 관찰사 또는 지방관에 의한 공전의 급속 등 여러 가지의 형식을 통하여 광대한 농장을 소유, 학전(學田)으로 이용하였다. 현물경제로는 관찰사 또는 지방관에 의하여 어물과 식염 등이 막대하게 지급되어 교육활동을 위한 필요잡비를 충당하였다.
서원의 현황
현존하는 서원에 대한 실태는 아직까지 파악되어 있지 않는 실정이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1920년대 당시의 전국 취락에 대한 실태를 파악하던 중 저명한 동족부락 안에 그때까지 존속하고 있던 서원의 현황을 조사한 보고서 '조선 취락 후편(朝鮮 聚落 後篇)'이 있으나 몇 사례에 불과하고 그나마 자료로서도 불충분하다. 또 광복과 6·25전쟁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우리 나라의 향촌사회가 크게 변모한 데 따라 서원에도 변화가 있었을 터이므로 오늘날의 실상과 크게 부합되지 않는다.
광복 이후는 서원문고 파악을 위한 조사가 일부 진행된 외에 아직까지도 서원자체를 대상으로 한 일괄적인 조사는 없었던 것 같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남은 47개의 서원은, 현재 북한에 소재하여 근황을 알 수 없는 11개 소와 6·25전쟁으로 소실된 채 방치되어 있는 강원도 김화의 충렬서원과 철원의 포충사 2개 소를 제외한 34개 소가 존속하고 있다. 이들도 물론 광복 뒤의 토지개혁으로 위토를 상실, 경제적인 타격을 받았다.
또한 전쟁의 피해로 건물이 일부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지만 제향인물의 후손이나 문화부의 지원을 받아 건물을 중건, 신축하여 옛날의 면모를 되찾아가고 있다. 이들 서원은 전래의 서원문고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향교와 함께 아직도 지방유림들의 시회(詩會)나 강회(講會)가 열리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기는 하나 경제적인 뒷받침이 적어 평소에는 빈 건물로 남아 있다.
서원의 운영은 지방유림들로 구성된 유사와 장의에게 맡겨져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후손의 재정적 보조에 의존하고 있다. 또 명칭상 서원과 사로 구별되고 있으나 강당과 사묘를 가진 구조나 규모, 그리고 그 성격에 별다른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 서원은 현재 지방사회에 있어서 전통문화보존의 중심체로서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전통적 서원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운영방식과 고압적인 대외자세를 탈피하지 못하여 소수의 노년층을 제외한 일반대중에게는 관광의 대상으로서만 인식되고 있을 뿐 현실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을 주고 있다.
한편, 흥선 대원군이 하야한 뒤 훼철된 서원이 상당수 재건된 것으로 보이며, 그 뒤로도 일제가 지주층의 환심을 사고 통치에 협조를 얻기 위하여 조상숭배를 조장하였던 배경하에 중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토지개혁과 전쟁의 피해로 상당수가 퇴락되거나 소실되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에 현저해진 현상이기는 하지만, 주로 문중이 중심이 되어 개축 혹은 신축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서원은 대개 후손이 주동하여 건립과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관계로 본래의 서원기능은 거의 없다. 다만 후손들 손에 의하여 춘추의 제향을 지내거나, 조상유적지 순례소로 활용되어서 오히려 족적 결합의 공고화나 대외적인 가문위세 과시에 적극적인 구실을 하고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서원의 장서와 보존상태에 대해서는 상기 34개소의 서원에 대한 이춘희(李春熙)의 조사보고가 있다. 이에 의하면 문고의 보존이 양호한 곳은 경상도로, 그 가운데 도산서원은 907종 4,338책, 소수서원은 141종 563책, 옥산서원은 866종 4,111책, 병산서원은 1,071종 3,039책을 소장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밖의 서원들의 보유책 수는 훨씬 떨어져 100책 이상을 소유한 서원이 경기도 3, 충청도 2, 경상도 7, 전라도 1처로 합계 13개소이며, 500책 이상은 상기 4개 서원 외에 봉화의 삼계서원(三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불과하다.
그나마 현재 서적의 열람이나 이용은 거의 불가능하고, 주로 종손이나 유사 중의 서원관계 후손의 집에 분산되어 보존되는 실정에 있어 서적보존과 관리에 체계적인 대책이 요망된다.
▶️ 院(집 원)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좌부변(阝=阜; 언덕)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둘러싼 담장의 뜻을 갖는 完(완)으로 이루어졌다. 주위에 담을 두른 저택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院자는 '집'이나 '정원', '관아'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院자는 阜(阝; 언덕 부)자와 完(완전할 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完자는 집을 온전하게 잘 지었다는 의미에서 '완벽하다'라는 뜻이 있다. 院자는 이렇게 완벽하게 지어진 집을 뜻하는 完자에 阜자를 더한 것으로 담벼락이 있는 잘 지어진 큰 집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院자는 잘 지어진 집(完)과 담장(阜)을 함께 표현한 글자이다. 지금은 주로 규모가 큰 건물을 뜻할 때 쓰인다. 그래서 院(원)은 ①집 ②담, 담장(-牆) ③절, 사원(寺院) ④마을 ⑤뜰, 정원(庭園) ⑥관아(官衙), 관서(官署) ⑦기루(妓樓: 창기(娼妓)를 두고 영업하는 집)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堂(집 당), 宅(댁 댁, 집 택, 터질 탁), 宇(집 우), 宙(집 주), 室(집 실), 家(집 가, 여자 고), 宮(집 궁), 屋(집 옥, 휘장 악), 戶(집 호/지게 호), 舍(집 사/버릴 사, 벌여놓을 석), 軒(집 헌), 邸(집 저), 閣(집 각), 館(집 관) 등이다. 용례로는 원院 자가 붙은 기관 시설의 장을 원장(院長), 감화원 소년원 같은 원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 또는 조선 왕조때 서원에 속해 있던 유생을 원생(院生), 병든 사람을 진찰 치료 및 예방하기 위하여 설비를 갖추어 놓은 곳을 병원(病院), 학교 설치 기준의 여러 조건을 갖추지 않는 사립 교육기관을 학원(學院), 병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특별한 시설을 한 집을 의원(醫院), 소송 사건을 심판하는 국가기관을 법원(法院), 조선 중엽부터 보급된 유생 사학 기관을 서원(書院), 바둑을 즐겨 두는 사람이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모이는 곳을 기원(棋院), 절이나 암자 또는 성당 교회당 수도원 등의 종교적 건물의 총칭을 사원(寺院), 입원했던 환자가 병원에서 물러 나옴을 퇴원(退院), 병을 고치려고 병원에 들어가 한동안 머묾을 입원(入院), 깨끗하고 조용한 집이라는 뜻으로 절간 따위를 이르는 말을 정원(淨院), 서울 각 관아를 통틀어 일컫던 말을 부부원청(府部院廳) 등에 쓰인다.
▶️ 長(길 장/어른 장)은 ❶상형문자로 仧(장),兏(장)은 동자(同字), 长(장)은 약자(略字)이다. 長(장)은 머리털이 긴 노인이 단장을 짚고 서 있는 모양으로, 나중에 노인이 전(轉)하여 나이가 위인 사람으로 관리(官吏)의 長(장), 또한 성장하다, 길게 자라다, 길다 따위의 뜻에 쓰였다. ❷상형문자로 長자는 '길다'나 '어른'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長자는 머리칼이 긴 노인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본래의 의미는 '길다'였다. 長자는 백발이 휘날리는 노인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후에 '어른', '우두머리'라는 뜻도 파생되었다. 長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상용한자에서는 관련된 글자가 없다. 張(베풀 장)자나 帳(휘장 장)자에 長자가 쓰이기는 했지만, 長자가 부수로 지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長(장)은 (1)어떤 조직체(組織體)나 또는 부서 단위의 우두머리(책임자) (2)긴 기다란의 뜻을 나타내는 말 (3)오랜의 뜻을 나타내는 말 (4)길이 (5)늘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길다 ②낫다 ③나아가다 ④자라다 ⑤맏 ⑥어른 ⑦길이 ⑧우두머리 ⑨처음 ⑩늘 ⑪항상(恒常),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오랠 구(久),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어릴 유(幼), 짧을 단(短), 늙을 노/로(老)이다. 용례로는 좋은 점을 장점(長點), 긴 것과 짧은 것을 장단(長短), 목숨이 긺을 장수(長壽), 맏 아들을 장남(長男), 한 관청의 으뜸 벼슬을 장관(長官), 오랜 기간을 장기(長期), 장편으로 된 노래를 장가(長歌), 길게 내는 소리를 장음(長音), 어른과 어린이를 장유(長幼), 나이가 많고 덕이 많은 사람의 존칭을 장로(長老), 통나무를 길쭉하게 잘라서 쪼갠 땔나무를 장작(長斫), 오랫동안 깊이 생각함을 장고(長考), 아주 능한 재주를 장기(長技), 생물이 자라서 점점 커짐을 성장(成長), 모임을 대표하는 사람을 회장(會長), 집안의 어른을 가장(家長), 도와서 자라나게 한다는 조장(助長), 시간이나 물건의 길이 따위를 처음에 정한 것보다 늘이어 길게 함을 연장(延長), 위에 서서 집단이나 단체를 지배 통솔하는 사람을 수장(首長), 특별히 뛰어난 장점을 특장(特長), 오륜의 하나로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순서와 질서가 있음을 이르는 말을 장유유서(長幼有序), 길다란 목에 까마귀 부리 같이 뾰족한 입이라는 뜻으로 관상에서 목이 길고 입이 뾰족한 상을 이르는 말을 장경오훼(長頸烏喙), 오래 서서 분부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권문세가에 빌붙어 이익을 얻고자하는 사람을 조롱해 이르는 말을 장립대명(長立待命), 긴 눈과 날아다니는 귀라는 뜻으로 옛일이나 먼 곳의 일을 앉은 채로 보고들을 수 있는 눈이나 귀 곧 서적을 이름 또는 사물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널리 정보를 모아 잘 알고 있음을 이르는 말을 장목비이(長目飛耳), 길고 짧음은 상대적 관계에서 비교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장단상교(長短相較), 멀리 불어 가는 대풍을 타고 끝없는 바다 저쪽으로 배를 달린다는 뜻으로 대업을 이룬다는 말을 장풍파랑(長風波浪),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출 수 있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조건이 좋은 사람이 유리함을 일컫는 말을 장수선무(長袖善舞), 날이 새도 창을 가리고 불을 켜놓은 채 며칠이고 계속하는 술자리를 일컫는 말을 장야지음(長夜之飮), 길고도 긴 봄날을 일컫는 말을 장장춘일(長長春日), 사업의 오랜 계속을 도모하는 계획을 일컫는 말을 장구지계(長久之計), 길게 뻗친 숲의 깊은 곳을 일컫는 말을 장림심처(長林深處), 오랫동안 살아 죽지 아니함을 일컫는 말을 장생불사(長生不死), 늘 길거리에 모여 있으면서 뜬 벌이를 하는 막벌이꾼을 일컫는 말을 장석친구(長席親舊),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함을 일컥는 말을 장와불기(長臥不起), 먼 장래의 계책이라는 말을 장원지계(長遠之計), 긴 줄로 해를 붙들어 맨다는 뜻으로 시간의 흐름을 매어 멈추게 하려는 것 즉 불가능한 일을 이르는 말을 장승계일(長繩繫日), 장자의 일만 개의 등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부자가 신불에게 일만 개의 등을 올리는 반면에 가난한 여인은 단 하나의 등을 바치지만 그 참뜻만 있으면 가난한 여인의 한 등이 장자의 만등에 못지 않다는 말을 장자만등(長者萬燈), 부자는 3대까지 가기 어렵다는 말 곧 아버지가 고생해서 재산을 만들고 그것을 보고 자란 아들인 2대는 그것을 잘 지키지만 3대인 손자는 생활이 사치하여 마침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룩한 가산을 탕진하는 예가 많음을 이르는 말을 장자삼대(長者三代), 긴 베개와 큰 이불이라는 뜻으로 긴 베개와 큰 이불은 함께 누워자기에 편하므로 형제 간에 우애가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장침대금(長枕大衾) 등에 쓰인다.
▶️ 望(바랄 망/보름 망)은 ❶상형문자이나 형성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盳(망)과 통자(通字)이다. 기지개를 켠 사람 위에 강조한 눈의 모양을 본떠 멀리 바라보다의 뜻을 나타낸다. 또는 (형성문자) 臣(신; 내려다 보는 일)과 壬(정; 사람이 바로 서다, 바로 자라는 일)로 이루어진 글자 망(臣+壬)은 높은 곳에서 훨씬 먼 곳을 바로 바라보는 일, 朢(망)은 달이 해와 멀리 마주 보는 만월(滿月) 때, 望(망)은 같은 글자이나 발음을 똑똑히 나타내는 亡(망)을 글자의 부분으로 삼은 것이다. 나중에 朢(망)은 만월, 望(망)은 바라보는 일이라고 나누어 생각하였다. ❷상형문자로 望자는 '바라다'나 '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望자는 亡(망할 망)자와 月(달 월)자, 壬(천간 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서는 人(사람 인)자에 目(눈 목)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바라보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본래의 의미는 '망보다'나 '엿보다'였다. 후에 의미가 확대되면서 '바라다'나 '기대하다', '바라보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글자도 크게 바뀌었는데, 금문에서는 人자가 壬자가 되었고 月자와 亡자가 더해졌다. 여기서 亡자는 발음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望(망)은 (1)상대편의 동태를 미리 알기 위해 먼빛으로 동정(動靜)을 살피는 일 (2)명망(名望) (3)천망(薦望) (4)망(朢). 지구(地球)가 태양(太陽)과 달의 사이에 들어 셋이 거의 일직선 상에 있을 때의 달의 모양. 이때에 달 반구(지구 쪽을 향한) 전체가 햇빛으로 환하게 비침. 만월(滿月). 망월(望月) (5)음력(陰曆) 보름을 이르는 말. 망일(望)日) 등의 뜻으로 ①바라다, 기다리다 ②기대(期待)하다, 희망(希望)하다 ③그리워하다 ④바라보다 ⑤망(望)보다, 엿보다 ⑥원망(怨望)하다, 책망(責望)하다 ⑦보름, 음력(陰曆) 매월 15일 ⑧전망(展望), 풍경(風景) ⑨풍채(風采: 드러나 보이는 사람의 겉모양) ⑩명성(名聲), 명예(名譽) ⑪희망(希望), 소원(所願) ⑫부끄러워하는 모양 ⑬제사(祭祀)의 이름 ⑭천망(薦望: 벼슬아치를 윗자리에 천거하던 일)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바랄 기(冀), 바랄 희(希), 원할 원(愿), 원할 원(願)이다. 용례로는 주위의 동정을 살피려고 세운 높은 대를 망루(望樓), 바라던 것 이상의 것을 망외(望外), 멀리 바라봄을 망견(望見), 고향을 그리고 생각함을 망향(望鄕), 달을 바라봄을 망월(望月), 멀리서 그 대상이 있는 쪽을 향하여 절함을 망배(望拜), 한 가지 소망을 이루고 나서 다시 그 밖의 것을 바란다는 말을 망촉(望蜀), 쉰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마흔 하나를 일컫는 말을 망오(望五), 예순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쉰 한 살을 일컫는 말을 망륙(望六), 여든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일흔 한 살을 일컫는 말을 망팔(望八), 아흔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여든 한 살을 일컫는 말을 망구(望九), 백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아흔 한 살을 일컫는 말을 망백(望百), 멀리 바라봄 또는 앞날을 내다봄을 전망(展望), 앞일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바람을 희망(希望),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낙심함을 실망(失望),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체념함을 절망(絶望), 바라는 바나 기대하는 바를 소망(所望), 남이 한 일을 억울하게 또는 못마땅하게 여겨 탓함을 원망(怨望), 원하고 바람 또는 그 원하는 바를 원망(願望), 널리 바라봄 또는 바라다 보이는 경치를 조망(眺望), 부러워함을 선망(羨望),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간절히 바람을 갈망(渴望), 가능성 있는 희망을 가망(可望), 잘 되기를 바라고 기대함을 촉망(屬望), 크게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는 희망을 야망(野望), 열렬하게 바람을 열망(熱望), 허물을 들어 꾸짖음을 책망(責望), 어떠한 일이나 대상을 절실하게 여겨 원하거나 바라는 것을 요망(要望), 구름을 바라보며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타향에서 고향에 계신 부모를 생각함을 일컫는 말을 망운지정(望雲之情), 넓은 바다를 보고 탄식한다는 뜻으로 남의 원대함에 감탄하고 나의 미흡함을 부끄러워 함을 이르는 말을 망양지탄(望洋之歎), 구름을 바라보며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타향에서 고향에 계신 부모를 생각함을 일컫는 말을 망운지회(望雲之懷),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에 의지하고서 기다린다는 뜻으로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르는 말을 의문지망(倚門之望), 수레 덮개를 서로 바라본다는 뜻으로 앞뒤의 차가 서로 잇달아 왕래가 그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관개상망(冠蓋相望) 등에 쓰인다.
▶️ 圈(우리 권/술잔 권)은 형성문자로 가축을 가두어 기르는 울의 뜻인 큰입구 몸(囗; 에워싼 모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먹여 '기르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卷(권)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圈(권)은 ①우리(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곳), 감방 ②술잔(-盞), 바리때(승려의 밥그릇) ③동그라미 ④나라 ⑤경계, 울타리, 칸막이(둘러싸인 공간의 사이를 가로질러 막음) ⑥(한정된 일정한)구역(區域)이나 범위(範圍) ⑦(우리에 가두어 기르는)가축(家畜)이나 짐승 ⑧가두다, 감금하다(監禁--) ⑨비치적거리다(몸을 한쪽으로 약간 비틀거리거나 가볍게 절룩거리며 계속 걷다)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牢(우리 뢰/뇌, 깎을 루/누), 뒤져 빼앗을 로/노), 獄(옥 옥) 등이다. 용례로는 어떤 특정한 범위 안의 지역이나 영역을 권역(圈域), 글이 잘 된 곳이나 중요한 곳 또는 글을 맺는 끝에 찍는 고리 모양의 둥근 점 따위 또는 한자 옆에 찍어서 사성의 구별을 나타내는 둥근 점을 권점(圈點), 권점을 하는 방법으로 적당한 사람을 관리로 뽑음을 권선(圈選), 얼마를 한도로 한 일정한 범위의 테두리나 둘레를 권자(圈子), 올가미나 올무나 덫 따위의 통틀어 일컬음 또는 남을 속이는 수단을 권투(圈套), 어떤 한계나 범위의 밖을 권외(圈外), 짐승을 가두어 두는 우리를 권뢰(圈牢), 일정하게 금을 그은 구역이나 범위의 안을 권내(圈內), 상업상의 세력 범위를 상권(商圈), 여당에 속하는 정치가의 범위를 여권(與圈), 야당에 속하는 정치가의 범위를 야권(野圈)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