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Elle
청춘, 그리고 봄. 이 얼마나 파릇파릇한 단어인가?
비록 1 더하기 1은 창문이라는 말에 한껏 같잖다는 썩소를 휘날리고서 학생들의 독창성과 창의성 부재를
운운하고 각기각종 비리와 촌지가 난무하는 이 나라 교육 현실에서도 일곱번 넘어졌으나 다시 한번 일어
서리라는 꽃말의 잡초같은 이들이 있었으니.. 장차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힐 송담고등학교 학생이란 이름
하에 대학 가기 전까지는 항상 시험기간이라는 미친 소리에도 당당히 가운데 손가락을 쳐들며 '지랄 쌈싸
먹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라고 피식 웃어줄 수 있는 청춘들이 바로 그들이다.
3월이라 하지만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겉돌고 새까만 교복마이를 싸매면서 다 죽어가는 얼굴로 미기적미
기적.. 꼴에 지 다리만한 야구 빠다를 어깨에 걸친 남정네는 무섭다기보다 한 번 걸리면 성가셔서 피한다
는 똥폭탄 학생주임이 틀림 없다. 추워죽겠는데 개학 첫날부터 끌려나온 선도부 학생들은 차마 그런 학주
에게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였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뒤에서 씨부렁씨부렁 거리는 게 고작일 뿐, 선도부의
실질적인 핵심 리더 영민이야말로 본교의 질서와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사명감을 가슴 굳게 새긴 채 두 눈
을 빛내었다. 솔까말 그놈은 언제 오나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온 바로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으며 뭐 그리 고독한 아웃싸이더라고 갖은 똥폼은 혼자 다 잡는 그놈 좀 골려줘볼까 하는 심상으
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나름 오랜만의 재회를 학수고대하는 것이었다.
"아아, 개학 첫날부터 이렇게 나대는 학교는 우리학교밖에 없을꺼야!"
수빈이 두툼하게 맨 목도리 사이로 고개를 푹 파묻으며 한 말이다. 방금 등교하는 친구 하나와 인사를 나누
느라 '뭐?' 하고 반문하는 영민의 말에 쌜쭉허니 학주만 노려보는 꼴은 원망과 분노, 절정에 치닫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여름에도 솜이불 덮고 자는 아이다. 유난히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라 찬바
람이 조금만 스쳐도 못 견뎌하는 아이가 영하 5。인 날씨에 밖에서 손들고 서 있다는 건 정말이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게 복장 좀 똑바로 안 하면 어디가 덧나니? 영민은 안타깝다는 얼굴로 친구의 어깨를
토닥이며 손목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이제 막 여덟시였다. 앞으로 십 분만 더 있으면 가차없이 교문을 닫아
버릴 기세의 학주를 보는데 슬쩍 웃음이 나왔다. 그래.. 너도 고등학교의 혹독함을 뼈저리게 느껴봐야 하지
않겠어?
"환영한다.. 윤수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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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로 설립 28주년 되는 송담고등학교는 그다지 긴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는 아니지만 요 근방 사는 학생
들의 전형적인 진학코스다. 송담초, 송담중, 송담고. 따라서 한 집안에 윗세대와 아랫세대끼리 선후배 관계
인 경우가 많은데, 대게는 그 지역을 떠나지 않는지라 일요일이면 후덕한 아저씨들끼리 친목다짐이라는 명
목상 조기 축구를 뛰며 학교 운동장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뭐 거기까지는 봐 줄 수 있다. 뻑하면 동창들 단
합대회다 뭐다 해서 노래방 기계까지 들고와 걸걸한 트로트 몇 곡씩 땡겨주시는 까닭에 -다시 한번 반복하
지만 학교 운동장에서- 아침 댓절부터 꼴깝들 떤다고 아파트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언제는 베란다를
통해 까치머리 팬티바람인 아저씨가 작작 좀 하라며 소리지른 적도 있었다.
수완도 같은 이유로 송담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딱히 부모님들이 그 학교 졸업생이라 그런 건 아니었다. 아
버지는 서울의 명문고등학교 출신이시고 어머니도 여고 나오셨다. 그냥 초등학생 때 이사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보내주시는 데에만 따랐을 뿐.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진로 계획에 시큰둥했고 새 학교 첫날이라는 것
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8시 10분까지 맞아?"
"엉."
"양호하네. 병준이 놈은 등교가 7시 반이라던데.. 참.. 그 새끼도 불쌍하지.."
"동진고?"
"어, 너도 알다시피 그 학교는 아줌마들 치맛바람이 장난 아니잖어."
우진이는 늘 그렇듯 핸드폰이 뜨끈뜨끈하게 달궈지도록 문자질을 해대며 신나게 떠들었다. 두 손을 주머
니에 콕 찔러넣은 수완은 고개만 까딱까딱. 별로 관심 없다는 뜻이다. 버스는 왜 안 오냐-, 그는 생각했다.
사실 조금도 자신이 갈 학교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가면 지난 3년간 먹어온 급식과는 색
다른 식단이 나올 것이다. 송담중학교 급식은 다 괜찮은데 김치가 이상하다. 막걸리에 푹 담궈서 절이는
것도 아니고 시큼하면서도 뭔가 괴상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인 즉,
[입학식날 기대하셈. 이 누님이 몸소 교문 앞에서 대기 타고 있을랑게 훗.]
정신연령은 한참 어린 주제에 꿋꿋이 누나 행세를 하는 우리의 영자 때문에. 수완은 며칠 전 문자를 곱씹
으며 지 잘난 맛에 사는 누나를 골려줄 궁리만 했다. 아, 진짜.. 생각만 해도 행복해..
"야, 야. 벌써 8시야."
"그러게. 어쩌지?"
"이왕 늦은 거 저기서 깁밥 사먹고 가자."
"..그럴까?"
꼬드기기 쉬운 놈. 수완은 피식 웃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몇 분째 교문 앞에 서 있을 영민의
모습이 떠올라서 안 웃을래야 안 웃을 수가 없다. 백날 기다려 봐라.. 내가 니 손에 잡히나.
-
"........."
"영민아, 뭐해??"
혜주가 물어왔다. 수빈이는 여드름을 짜느라 손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었고 미옥이 손에는 오늘도 어김없
이 단어장이 들려 있었다. 영민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뭐가 그리 분한지 꽁한 얼굴로 앉아 두 손을 불끈
쥐고 있었다. 심심해 죽을 지경인 혜주가 다시 한번 두드리자 '으아아아아!!! 된장된장된장된장!!!!!!!'을 소
리친다. 그덕에 아주 잠시나마 급우들의 시선을 받았지만 말이다.
"엄지. 또 뭐야? 왜 그러는데?"
수빈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평소같았으면 그놈의 엄지소리 좀 그만하라고 쏘아붙였을테지
만 그런 거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옆에서 이상하게 쳐다보든 말든 아랫입술을 달짝거리기만 하
더니 혼자 뭐라뭐라 중얼거린다.
"...안 왔어."
"뭐?"
"안 왔다구. 그 자식이 끝끝내 안 왔다구. 일부로 안 온 게 분명하다구. 나한테 당하기 싫어서 내뺀거라구!!"
"........."
"아, 정말! 문자를 보내지 말 걸 그랬어. 갑자기 확 덮쳐서 면박 주는 건데.."
"뭐라는 거야?"
"몰라."
수빈이와 미옥이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쓸데없는 오지랖 100만
평, 궁금한 게 있으면 몸이 근질거려서 참지 못하는 혜주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다시 한번 물어왔다.
"누구?"
"...있어. 동생."
정확히 36분까지는 기다렸다. 10분 땡! 하자 예상했던 대로 학주는 교문을 철커덩- 잠궈버렸고 교문에 매달
려 제발 좀 들어가게 해달라고 절규하는 아이들 무리 속에서 수완을 찾아봤지만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그놈이 눈치채고 안 온 것이다. 된장. 절대 단정한 복장으로 올 아이가 아닌 걸 알기에 딱 잡아다가 마음껏
트집 잡고 학주한테 넘길라 그랬더니..
"어이, 친구들. 이제 시시한 얘기 그만하고 나가자."
"어? 왜?"
"방금 방송 못 들었어? 입학식 한다고 운동장 나오래잖아."
"아씨.. 추운데 왜 또 밖에서 해. 그냥 방송조회 하면 안 되나?"
매번 이런 식이지.. 한번도 져 준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도 놀러간 데서 자전거가 한대 뿐인 걸 갖고 실랑
이 벌이다가 가위바위보로 이겨서 지 혼자 실컷 타고. 집에 가는 길에 계단 나오니까 그걸 또 누가 들고 갈
것인가 티격태격거리는 도중에 혼자 그 잘난 다리로 휑하니 가버리고. 중학교에서 보낸 마지막 축제는 참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바로 댄싱퀸' 코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지막지하게 끌고와 무대 한가운데 덩
그라니 남겨두고 내려가는데.. 그걸 안 출 수도 없고 진짜.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때마침 고모들도 놀러오
신 마당에 게다리춤이 왠 말이냐구요. 걸핏하면 새벽에 전화해놓고 그냥 끊질 않나.. 심심하면 문자로 인간
이 느낄 수 있는 최고치의 분노에 이를만큼 약올리질 않나. 그 밖의 등등등. 와.. 생각할수록 열받네! 하지만
일단은 릴렉스. 그렇다!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이다! 오늘만 날이냐? 내가 송담고등학교 선도부
의 이름을 걸고 너의 그 몸에 베여있는 껄렁함과 불량스러움을 기필코 개선해 주겠어. 하지만 자꾸 시무룩
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도.. 얼굴은 보여줘야 될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