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 창업보육센터로 옷을 갈아입은 옛 제주대병원의 모습이 멀리 보인다. 원도심권인 이 일대는 제주대병원이 아라동으로 떠나면서 상권이 쇠락하는 등 진통을 겪어왔다. 사진=진선희기자
오래된 도시에 숨은 콘텐츠… 젊은 예술가 는다 왓집 등 이야기 있는 원도심 둥지 틀고 아이디어 넘친 행사 삼도2동 병목골엔 빈점포 임대한 후 체험공방 등 속속 입주
동네 사람들의 머리모양을 손질하던 미용실 벽면엔 화사한 빛깔의 그릇이 내려앉았다. 허기진 배를 채우던 식당에는 자연을 담은 듯한 도자기들이 손님처럼 자리를 채우고 있다. 단란주점이던 실내엔 동심어린 그림이 걸렸다.
제주시 관덕로 6길. 문닫은 상점에 예술가들이 찾아들었다. 그릇을 굽고 한지조명을 빚고 그림책을 좋아하고 퍼포먼스를 펼치는 이들이 가게 하나씩 얻어 공간을 만들었다. 그릇이야기 최작, 쿰자살롱, 가마앤조이(Gama & Joy), 그림책갤러리 제라진, 조습마씨, 자작나무숲, 아트 세닉이 그런 이름들이다. 예술공간 오이도 공연장 등을 갖추고 일찍이 관덕로 6길에 둥지를 틀었다.
이야기가 있는 원도심의 가치를 담은 여러 작업을 펼치고 있는 왓집.
그 길은 병목골로 불렸다. 제주목사와 판관이 있던 시절부터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병마수군절제사를 겸했던 제주목사가 머물던 병영과 옛 제주대병원 자리에 있었던 판관 집무실인 이아에 이르는 길이다. 지금은 도심 골목길 정도로 여기지만 조선시대엔 벼슬아치들이 지나다니던 큰길이었다.
병목골은 최근 문화의 거리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제주대병원이 제주시 아라동으로 이전한 이후 인근 상가들이 하나둘 떠나버려 밤 9시 이후면 컴컴해졌던 도심에 예술로 다시 불을 밝히려 한다. 그곳만이 아니다. 최근 1~2년동안 제주시 원도심으로 발길을 돌리는 젊은 작가, 기획자들이 늘고 있다.
왓집이 만든 '칠성통 지도'.
▶제주대병원 이전하자 급격히 쇠락=제주시가 시로 승격한 해는 1955년. 당시 제주시엔 제주도 전체 인구인 28만8800여명의 20%가 넘는 5만9662명이 살았다. 10년 뒤인 1965년에 이르면 이른바 원도심권에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일도동이 1만4464명에 달했고 삼도동은 1만2644명, 용담동 1만934명, 건입동 9156명, 이도동 9090명으로 제주시 전체 인구의 66.8%가 5개 동에 모여있었다. 대규모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머잖아 인구 이동이 이루어진다. 1980년대 이후엔 연동과 이도1동이 새로운 인구 밀집 지역으로 떠오른다.
1978년 연동·노형지구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래 '구제주'는 신제주와 대비되며 낡고 후진 동네처럼 여겨졌다. 상권은 시들해져갔다. 제주대병원은 한가닥 희망이었다. 하루 평균 1000명이 넘는 환자들이 병원을 드나들며 주변 음식점, 여관, 편의점, 약국 등 상권이 유지됐다. 2009년 3월 제주대병원이 아라동으로 신축 이전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병목골 끄트머리에 버티고 섰던 병원 건물에서 온기가 빠져나가면서 상가엔 이내 찬 바람이 불었다.
옛 제주대병원 앞 빈점포에 입주한 '가마앤조이'.
▶제주종합문화예술센터 조성 추진=삼도2동 주민들은 병원을 옮기더라도 그 자리에 제주대 도심 캠퍼스를 두는 등 빈 건물로 남겨선 안된다고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비어있는 제주대 병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란 문제는 도심재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일인 듯 했고 그만큼 여러 논의가 이루어졌다. 결국 지난해부터 제주대 창업보육센터로 활용되고 있지만 원도심의 얼굴을 바꾸는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이런 가운데 제주시가 올해부터 병원이 옮겨간 이후 잇따라 폐업한 빈점포를 예술가들에게 무료로 빌려주는 문화예술거점사업을 펼치고 있다. 첫 공모를 통해 7곳을 지원 대상으로 뽑았고 지난달엔 2차 입주 예술인 4명(팀)을 선정했다. 내년에는 예술인들이 입주가능한 빈점포를 10곳 더 늘린다.
제주도는 옛 제주대병원을 문화체육관광부의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 대상에 올려 빠르면 내년부터 병원 3~4층을 공연장, 전시실, 창작공간 등을 갖춘 '제주종합문화예술센터'(가칭)로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엔 국비와 도비를 합쳐 50억원이 넘게 쓰인다.
원도심에 예술가들이 깃든 일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난 문인과 미술인들이 칠성로의 여관, 다방에 지친 몸을 풀고 전쟁이 드리운 상처를 예술로 달랬다. 제주 예술인들도 그 일대의 다방, 극장, 주점 등에서 문학을 말하고 전시와 공연을 열었다.
빈점포 입주 업체인 '그릇이야기 최작' 내부.
▶제주방언 같은 원도심의 가치=제주영화문화예술센터로 변모한 옛 코리아극장과 이웃한 복합문화공간 '왓집'을 운영하는 문주현·윤선희·김정희씨는 이야기가 있는 빈공간을 찾아다녔고 지금 그 자리를 택했다. 지자체 지원없이 혼자 힘으로 왓집을 꾸려온 30대의 '젊은 그들'은 마을이야기 아카이빙, 문화콘텐츠 발굴, 소규모 브랜드숍 운영, 마을지도 제작 등 기획자이자 작가로 원도심을 기반으로 '문화로 배부를 수 있는 일'을 궁리하고 있다. 원도심에서 영화를 보고 밥을 먹으며 학창 시절을 보낸 추억이 있는 그들은 칠성로 일대 볼거리, 먹을거리, 놀거리 등을 담은 지도를 제작해 무료로 배포해왔다. '칠성통지도'는 세번째 버전을 준비중이다. 제주방언을 녹여낸 왓집의 여러 디자인 상품처럼 그들은 오래된 도시에 경쟁력있는 콘텐츠가 숨어 있다는 걸 안다.
기억의 공간으로 회귀한 이들은 또 있다. 대동호텔 비아아트 갤러리, 제주시 원도심 옛 길 탐방을 이어오고 있는 제주국제문화교류협회가 대표적 사례다. 성장기에 누볐던 원도심의 기억을 안고 있는 이들은 원도심이 원도심다울 때 제주섬이 지닌 가치가 빛을 발한다고 본다. 도서출판 각, 제주전통문화연구소, 미예랑소극장, 아트스페이스C, 쓰리프레임(3 Frame) 등 원도심에 터잡은 사람들은 더 있다. 관덕로, 칠성로, 중앙로에 흩어진 여러 공간들은 우리곁으로 돌아온 동백다방이고 소라다방이다.
그 공간에 윤기를 더하는 일은 과제로 남겨졌다. 옛 제주대병원 앞 빈점포에 입주한 예술가들은 개관 초기 '반짝 관심'을 지속할 방안을 고민중이었다. 흔히 문화의 거리로 부르지만 그걸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