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맘 다이어리 [single's diary]
16화
"밥 꼭꼭 챙겨먹고 삼촌 말 잘 듣고."
"알았다구!"
나는 건성건성 대답하는 아들놈의 머리에 꿀밤을 먹인 뒤,
다시 넘어 가지도 않는 밥을 떠 먹었다.
은택이는 아침에 '귀남인 걱정마' 라는 문자 한통만을 남겨 놓은 채
어제 그렇게 들어간 뒤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엄마 빨리 와야돼!"
"알았어."
내 성의없는 대답에 입술을 삐죽거리는 귀남이.
몇분후.. 벌써 밥을 다 먹은 건지 물을 한컵 마시며 내게 말한다.
"엄마 앞으로 늦게 다니지 마."
"......"
"삼촌이 걱정하잖아. 어제 밖에서 3시간 동안이나 기다렸다구."
"알았어, 앞으론 안 그럴게."
쯧쯧, 혀까지 차며 나를 무시하는 아들녀석.
그렇게 싱숭생숭 한 마음으로 출장준비를 하는 나였다.
-
"아, 이 똥차!"
자동차 클락션을 때리며 온갖 짜증을 부리고 있는 홍지운.
회사에서 급히 지급한 차라 내가 봐도 심히 똥차 이긴 해도..
굴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는데
저 녀석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운전하는 내내 짜증이란 짜증은 다 부리고 있다.
"클락션 좀 그만 울릴 수 없어? 무진장 시끄럽거든?"
"댁이 운전 하실래?"
홍지운의 치사한 발언에 나는 입을 꾸욱 다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계속된 홍지운의 과격한 운전덕에
나는 난생처음으로 '멀미'라는 것을 경험했다.
윽, 정말 속이 미식거린다.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듯한 불쾌한 무언가를 억지로 삼켜내며
가까스로 대구에 도착했다.
"왜 얼굴이 새하얘?"
지금 막 주차를 시키고 나온 홍지운의 뻔뻔한 물음을
고이 씹어주고 서류 이것저것을 챙겨서 회사로 들어섰다.
서울 본사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지만, 훨씬 깔끔한 내부.
기분좋게 들어서려는데...
순간 번뜩하고 뇌 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
'아버지가 대구로 내려가셨댔지...'
내가 집을 나가고 약 한달후... 아버지가 고향인 대구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5년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아버지..
"안 들어가?"
깊은 생각에 잠길 때쯤 나를 보채는 홍지운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이야- 누나 진짜 말 잘하던데?"
"운전이나 해."
"저는 이런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아? 네?"
생각보다 말이 안통하는 손님들 덕분에 나는 그곳에서
열변을 토했고 홍지운은 그때의 내말투를 그대로 따라하며
나를 놀리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 꽤 높으신 분들 같은데 너무 몰아 세운거 아닌가?"
"운전이나 하라고 했다."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 홍지운을 뭐하러 나에게 딸려 보내버린건지...
아.. 귀찮다.
나는 일이 그런대로 잘 됐다는 문자를 부장님에게 남긴 후.
"내려줘."
홍지운을 향해 말했다.
황당하다는 얼굴로 내게 되묻는 홍지운.
"여기서? 호텔까지 가려면 오래 걸리는데?"
"그냥 내려줘."
홍지운은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더니 갓길에 차를 세운다.
나는 긴장감에 한숨을 푸욱 내쉬며 차에서 내렸고
내가 내리자마자 홍지운 역시 미련없이 직진을 해서 사라진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쯤이었다.
어릴 적 단 두번 온 게 전부였던 할머니의 집.
아버지가 정말 그곳에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곳을 향해 가고있다.
"후우-"
가파른 길.
낡은 빨간지붕 집 세개... 그리고 파란 대문에서 왼쪽...이었던가?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향한 곳엔
정말 옛날 모습 그대로인.. 이 근방에서 가장 넓은 마당을 가진 집 한채가 보인다.
그리고 그 집 앞에 붙어있는
'강석우'라는 이름 석자.. 그리웠던 아버지의 이름에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겨우 마음을 진정 시키고 까치발을 들어 집안을 살폈다.
아마도 아버지는 계시지 않는 듯 했다.
그래.. 이렇게 살고 계신 곳만 알아도 괜찮아.. 나중에.. 아주 나중에라도 와 볼 수 있잖아.
"괜찮아...."
차마 아버지의 얼굴을 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오늘은 이만 뒤돌아 서려는데...
"안 들어가고 뭐하고 있노?"
"......."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나는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
"집에 왔으믄 들어올 일이제, 뭐하러 도둑 괭이 마냥 집밖에서 어슬렁 거리노?"
아버지는 어느새 밥 한상을 차려 오셨다.
5년 사이에 부쩍 늙어 버리신 아버지.
어설프게 서울말을 하려 노력 하시던 예전과는 달리 이젠 정말 대놓고 대구 사람이 다 되셨다.
너무도 달라진 모습에 나는 겨우 눈물을 참아내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왜, 잘못한 일이 있어가.. 그래서 못들어 온기가?"
"......"
"그런데 와 혼자고? 은택이 녀석은 어디다 두고?"
은택이..?
아버지는 아직도 내가 은도, 은택이와 같이 다니는 줄 아시는가?
갑작스러운 은택이에 대한 질문에 나는 눈물이 그렁한 채로 얼굴을 들어
'은택이는 왜요?' 라고 물었고.
"왜기는... 매정한 딸내미는 연락 한번을 안했어도
은택이 그 녀석이 애 사진도 보내주고.. 꼬박꼬박 안부전화도 하고.."
"은택이가요?"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가시나, 울기는... 눈물 닦고 밥이나 쳐무라."
"아버지.."
"그리고 죽기 전에 손자녀석 얼굴 한번 보여주거라."
"네..."
나는 끝끝내 '죄송해요, 사랑해요.' 라는 말을 해주지 못한 채
바쁜 일이 있다는 핑계로 집 밖을 나섰다.
대문까지 나와서 조심히 가라며 손을 흔드시는 아버지.
나 역시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지만.
옆 골목을 돌자마자.. 눈물이 쏟아져 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이..
"하........"
나는 행여나 아버지에게 우는 소리가 들릴까 입을 손으로 막고
벽에 기대 쭈그리고 앉아, 추하게 울어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이 집엔 발도 들이지 말라고.. 나쁜자식이라고 욕하고 때리셨다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미어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렇게 만나려고 이제껏 아버지를 찾아 뵈지 못한 걸까.
은택이가 내 대신 자식 역할을 해야 할만큼...
"아...빠...."
단 한번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러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나는 못나고 무뚝뚝한 딸이었다.
죄송한 마음에 무릎에 얼굴을 묻고 아이마냥 울어버렸다.
"하아, 정말... 이번엔 무슨 일이야?"
그렇게 한참뒤, 내 머리위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들었을 때는
담배를 한까치 문 홍지운이 불을 붙이려다 말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긴 뭐하..러 따라왔어?"
내가 울먹이며 더듬더듬 묻자, 홍지운은 앞주머니를 뒤적거리며
하얀색 종이 한장을 꺼낸다.
"따라온 거 아니야.. 나도 그냥 가려고 했거든? 그런데..."
"........"
"이거봐."
홍지운은 내 무릎위에 종이 한장을 놓더니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는 이깟 종이가 뭐냐는 눈빛으로 홍지운을 쳐다봤다.
"뒤집어."
짧은 대답.
나는 대충 종이를 뒤집었다. 그러자..
"하...."
어이없는 실소가 터져버렸다.
"오해할까봐서 말해두는 건데.. 그거 나 아니야."
내 기대를 져버리는 홍지운의 한마디.
그래.. 아닌거 알아. 그래도 홍지운 너 이길 바랬는데...
나는 젖은 눈을 꿈뻑이며 다시 한번 사진을 쳐다봤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그가 아니길 바라며...
그러나 이런 나의 기대를 또 한번 깨버리는 야속한 목소리.
"개은도인가 뭔가.. 그 사람 같은데?"
싱글맘 다이어리 [single's diary]
17화
"바로 저긴데, 정말 안 가볼거야?"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더니
길 왼쪽에 있는 사진관을 가리킨다.
나는 못본척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사람 일지도 모른다고."
"....."
나는 퉁퉁 부은 눈을 반쯤 뜨고 사진관쪽을 바라봤다.
홍지운이 가져온 사진과 크기만 다른 사진이
보란 듯 가장 한가운데에 걸려져 있었다.
"주인한테 프린트까지 해달래서 가지고 온건데.. 쓸데 없는 짓 했나보다, 내가."
홍지운은 화난 듯 세게 차 핸들을 돌린다.
고물차라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흔들린다.
"어!"
그 바람에 내 몸이 앞으로 쏠리자 홍지운이 한팔로 나를 잡으며 말한다.
"지금 안가면 영영 안가는걸로 해."
"......"
"그리고 다시는..."
"....."
"내 얼굴 보면서 그 사람 떠올리지마."
-
끝끝내 그 사진관을 가지 않았다.
첫째로 그 아이가 아닐거고.
둘째로 만약 그 아이가 맞다고 해도 다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박을 할 호텔에 도착할 즈음, 내 무릎에 놓여있던 사진을 구겨
창밖으로 던져 버리는 홍지운 놈.
순간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화를 내버리면 상황만 더 이상해 질 것 같아, 꾸욱 참고 억지로 창가쪽에 시선을 뒀다.
"나는 503호, 누나는 504호."
홍지운은 간만에 나를 '누나'라고 칭하며 씨익 웃는다.
"나 4자 들어가는거 싫어. 불길하잖아. 방 바꿔."
....
"야 방 바꾸자고!!"
내 말이 들리긴 하는거지....?
못들은 척 먼저 호텔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홍지운.
그런데..
회사에서 이렇게 좋은 호텔을 예약해줬었던가?
거의 여인숙수준의 호텔인걸로 아는데...
나는 외부부터 삐까뻔쩍한 호텔을 보며 고개를 갸웃 거렸고
그런 나를 홍지운이 끌고 들어 와버렸다.
"Check in 부탁드립니다."
나는 예쁘장하게 생긴 호텔직원에게 체크인을 부탁했고..
옆에 있는 줄 알았던 홍지운은
팔짱을 낀채 혼자 호텔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야!! 너 그렇게 들어가버리면 어떡해!!"
쪽팔리지만 고급스러워 뵈는 호텔안에서 나는 소리를 질러댈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스무살짜리 꼬맹이라 호텔 체크인하는 것도 모르는가.
문 앞에서 열려라 참깨. 막 이러는거 아니야?
"야! 먼저 가버리면 어떡해!!"
나는 이미 엘리베이터 안에 타있는 홍지운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닫힘버튼을 누른다.
"억!!!"
덕분에 급히 뛰어가, 가까스로 엘리베이터에 오른 나는
홍지운을 한참동안 째려봤다.
"야, 너 열쇠도 안 받았잖아!"
내 말에 홍지운은 배시시 웃으며 요상하게 생긴 카드 하나를 꺼낸다.
"이 카드만 있으면 어떤 방에든 들어갈 수 있거든."
"......."
"야밤에 누나 방에도 들어갈 수 있단 말이지."
나는 음흉하게 웃는 홍지운의 등을 툭- 소리가 나게 때렸다.
"니가 이 호텔 주인이라도 돼?"
"......."
"별 미친 놈을 다 봤네."
내 입이 더 험해지기 전에 다행히도 엘리베이터는 5층에 도착했다.
홍지운이 내 앞방이라.. 심히 거슬리긴 했지만
그래도 비싼 호텔 와보니 좋긴 좋구나.
들뜬 마음으로 호텔 문을 여려는데..
홍지운이 먼저 아까 그 자랑하던 카드로 자신의 방문을 벌컥 열어버렸다.
...내가 먼저 들어가버려고 했건만...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
나는 보고야 말았다.
홍지운의 삐까뻔쩍... 말그대로 영화속에서나 나올법한 스위트한 룸을!
나는 내 방문은 열어보지도 않고
추하게 홍지운의 룸 문에 매달려 한참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기서.. 잔다고?"
우리 회사가 미쳤나보다. 돈이 남아돌아 어쩌줄을 모르는 시츄에이션이군, 이건...
"문앞에서 비켜줄래?"
홍지운은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나를 매정하게 떨쳐내고
룸안으로 들어가버린다.
내 방도 저러겠지?
나는 내심 기대하며 조심히 문을 열었다.
"켁....."
방문을 열자마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깔끔하긴 했지만... 홍지운의 방에 비하면 영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사람 기대치는 다 끌어올려 놓고.. 이게 무슨.
나는 분한 마음에 가방을 대충 바닥에 던져버리고
신경질 적으로 신발을 벗었다.
"아, 정말 생각 할수록 어이가 없네."
홍지운이 무슨 빽이 있긴 있는가보다.
나는 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가만히 침대에 누웠다.
"하아..."
어느새 해가 졌다.
시간을 보니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은택이 녀석.. 이쯤되면 전화 한번 할만도 하건만
정말.. 너무하네.
"강재희, 차라리 은도를 못 잊었다고 그래, 이은도가 보고 싶어 죽겠다고."
"은도도 아니고 은도랑 닮은 사람한테 그러면...."
"나 정말 비참하잖아."
귓가에 아른거리는 은택이의 저음.
정말 개은도 따위, 정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데...
어째서 은택이는...
머리가 복잡해져온다.
나는 차라리 잠이 들어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 침대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너무 피곤했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사진 속 그 아이의 웃는 모습이 너무 분하고 슬퍼서...
너무 그리......
"아악!!!!!!!"
나는 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
"4900원입니다."
"여기요..."
투박한 손으로 100원을 거슬러 주는 기사 아저씨.
나는 100원짜리 동전을 손에 꼭 쥐고....
결국엔 사진관 앞까지 와버렸다.
차라리 문이라도 닫혀있길 바랬건만, 환하게 불이켜져 있는 사진관.
...이래서 은택이가 내 마음을 의심 했겠지.
은택이의 얼굴만 떠올리면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못된 강재희는 결국..
'딸랑'
하고 유난히 크게 울리는 종소리.
"어서오세요~"
인상 좋게 생긴 아저씨가 내 팔을 이끌고 쇼파에 앉혔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신거 보니까 급하게 여권사진이 필요하시구나?"
나에게 묻지도 않고 어딘가에서 카메라를 꺼내오시는 아저씨.
성격이 급하신 듯 하다.
"저기.. 그..그게 아니라..."
당황한 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쇼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한참을 우물쭈물 하고 있자
책상위에 카메라를 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리시는 아저씨.
"혹시..... 영정사진이 필요하신거...?"
라는 쓸데없는 망발까지 들어야만 했다.
급 기분이 나빠진 내가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아뇨, 저기 밖에 있는 사진..."
"아......."
밖에 있는 사진이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는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피식 웃는 아저씨.
"아가씨도 저 남자한테 반했구나?
요즘 여고생,여대생 골고루 찾아와서는 저 남자 누구냐고 물어대는데.. 죽겠어~"
"......."
"그런데 포기해~ 저 친구 애인 있어~"
"....네?"
"웬 예쁘장한 여자랑 같이 왔었거든. 애인이지, 뭐겠어~"
순간...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 온 세상이 하얘짐을 느꼈다.
주책스럽게도 눈물이 나올 뻔했다.
정말.. 내 자신이 너무 싫어질만큼, 가슴이 아파온다.
"곧 있으면 미국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여권사진 찍으러 왔었는데
하도 잘생겼길래 프로필사진 한장 찍어놨지~"
".....미국....이요?"
잘못들었길 바라며 한번 더 물었건만, 원망스럽게도 고개를 끄덕이시는 아저씨.
"하아, 이은도.....은도...이은도...."
나는 평생 다시 부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은도의 이름을 부르며
처음보는 아저씨의 앞에서 울어 버리고 말았다.
싱글맘 다이어리 [single's diary]
18화
그래도, 적어도...
난 니가 어딘가에서.. 나와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을 줄 착각하며 살고 있었던거야.
그래서..
언젠가 한번 만난다면
실컷 욕도 해주고.. 원망도 하고.. 보란듯이 뻥 차버릴 수도 있을거란. 그런.......
"아가씨 갑자기 왜 울어? 응?"
우는 내 모습에 당황하던 아저씨는 옆에 있던 티슈 여러장을 뽑아 내 손에 쥐어주신다.
나는 그 티슈로 눈물을 닦으며 벌떡 일어섰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앞으로 가족사진 찍을 일 있으면 꼭 이리로 올게요."
"응...응."
어리둥절한 얼굴로 문까지 열어주시는 아저씨.
밖으로 나가니 밤바람이 찼다.
그러나 나는 당당히 걸었다.
나도 모르게 한번씩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긴 했지만
5년이 지나도 이런식으로 사람을 괴롭혀 버리는 개은도에게 지기 싫어서
이를 악 물고 당당하게 걸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렇지도...
그깟 놈은 미국이 아니라 달나라에 산다고 해도 상관없으니까.
"하- 여기 왔을 줄 알았어."
"....."
"왜 그러고 있어!!"
갑자기 나에게 소리를 지르는 누군가.
그리고 눈 앞에 보이는 누군가의 까만 신발.
뛰어온건지 숨이 거칠었다.
"안 일어나?"
"......."
당당하게 걷기로 해놓고...
어느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 된채로 쭈그려 앉아있었나보다.
그런 나를 일으키는 건...
"오지말기로 했었잖아!!"
홍지운이었다. 화가 잔뜩 난 홍지운...
"니가 뭔데 이래!!!"
나는 그런 홍지운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러자 피식, 차갑게 웃더니..나를 놓고 주머니 안에서 담배 한까치를 꺼내문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어쩔래?"
나는 홍지운을 스쳐 쭉- 걸어가버렸다.
하필 이럴때 개은도와 똑같은 얼굴로 나타나버리는게
너무나 소름끼치고 무서웠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팔목을 잡아버리는 홍지운.
한참동안 내 팔목만 잡은채로 아무말도 하지 않더니.. 어렵게 입을 뗀다.
"한번만..."
"........"
"안아보면 안되나?"
홍지운의 말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 했다.
개은도가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마냥 친구인줄만 알았던 은도가.. 어느날 뜬금없이 내게 했던 말.
'한번만 안아보면 안돼?'
'뭐?'
'내가 지금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어... 안아보면 답이 나올것 같아.'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당최 모르겠거든."
은도와 똑같은 말로.. 똑같은 얼굴로 사람 맘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 홍지운.
나는 도리 도리 고개를 저었다.
"싫어."
하고.
하지만 애초에 내 의사와는 상관없었던 듯..
나를 끌어당겨 안아 버리는 홍지운.
"......."
안된다고.. 뿌리쳐야 하는데.
왜 이렇게 눈물부터 나와 버리는 건지...
오히려 홍지운이 먼저 나를 떼어냈다.
그렇게 홍지운과 나는 마주 본채로 한참을 서 있다가
불편해진 내가 먼저 자리를 뜨려하자 홍지운이 말했다.
"내가 그렇게 그 사람 닮았다면..."
"......."
"아주 잠깐은 날 이용해도 돼."
-
AM 09:00
원망스럽게도 아침이 오기는 오는구나.
'어제 아무일도 없었어요' 하듯이 침대 맡에는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제는 정말 무슨 정신으로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
정말 뜬금없는 홍지운의 말에 도망치듯 호텔로 돌아왔고...
그 다음엔.. 정신없이 잠이 들었지.
"하- 이제 어떡하냐..."
홍지운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집에는 가야겠다는 생각에 짐을 싸고 세수와 양치를 하고
아침까지 시켜먹었다.
이제 홍지운과 함께 서울로 올라갈 일만 남았는데.. 제길, 그게 제일 어려운 거구나.
하지만 나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들녀석 때문에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눌렀다. 집에는 가야지.....그래....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흠.흠!"
헛기침도 해보고 되지도 않는 열쇠로 들어가려고 발악도 해봤지만
꿈쩍도 않는 문.
그렇게 한참을 문 하나를 두고 쇼를 하고 있을때
'철컥'
비싼 방이라 그런가.. 유난히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이제서야 잠에서 깬듯한 홍지운.
부담스럽게 흰가운만 걸친채로 눈을 비비며 서있다.
"벌써 일어나서 준비 다한거야?"
"어..응..."
"나는 이제 일어났는데...들어와서 기다릴래?"
"아.. 나는..."
"안 잡아 먹어."
또 내 의사는 무시하고 자신의 룸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홍지운.
쥬스 한병을 거지 동냥하듯 던져주고는 욕실로 향한다.
할 일이 없는 나는, 쇼파에 앉아 어제부터 확인하지 못한 핸드폰을 열었다.
문자 한통이 와있었다.
대출이 필요하지 않으시냐는...
"후우, 신은택...정말.."
끝까지 연락 한번을 안하네.
나는 신경질적으로 폰을 닫아 버리고 쥬스를 마셨다.
"누나!"
그런데 갑자기 소름끼치는 '누나'소리와 함께
웃통을 벗고 욕실에서 나오는 홍지운.
덕분에 나는 마시고 있던 쥬스를 뿜어버렸다.
"야 너 옷 안입어?"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뿜어버린 쥬스만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홍지운.
"댁이 내 옷 깔고 앉아있거든?"
"응?"
"나와봐."
부담스러운 반누드로 내게 다가오더니 힘껏 일으킨다.
정말 내 엉덩이 밑에는 꽤 비싸보이는 옷이 깔려 있었다.
홍지운이 가장 위에 있던 하늘색 셔츠부터 집으며 내게 말했다.
"어제 내가 했던말. 생각해봤어?"
"응?"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자 표정이 굳어버리는 홍지운.
"뭐.. 사귀자 그딴 말 아니야."
"......."
"정말 그 사람 미워질때는..
내 뺨이라도 시원하게 때리라고 해준말이야."
홍지운은 그 말이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지 피식 웃었다.
나 역시 힘없이 웃으며 '됐다, 관둬라'로 응수했다.
그러나 끝끝내 홍지운은
애써 내 마음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양,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 보고 싶을때는."
"......."
"아쉬운대로 내 얼굴이라도 실컷 봐."
"........"
"언제든 부르기만 하면 갈테니까."
-
집으로 가는 차안.
홍지운과 나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 도착했어."
그리고 홍지운의 목소리에 깨어났을 때는
이미 집 앞까지 도착한 상태였다.
이제 마치.. 홍지운이 내 기사같다.
"내가 많이 잤구나."
"침이나 닦아."
나는 얼른 손으로 입가를 닦았고
홍지운은 인상을 찌푸리며 얼른 가라고 재촉했다.
아깐... 그 느끼한 말을 잘도 해대더니
이 녀석의 속을 가늠할 수가 없다.
나는 잘가라는 인사도 한마디 해주지 않고..
홍지운 역시 인사말 한마디 없이 차를 돌린다.
"후아."
그리고 난 한숨을 돌리고 집으로 들어가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 정말.. 무겁단 말이에요!!"
"짐들어 주러 왔다면서."
"그건 그냥.......그냥...."
"안에 계란있어. 조심히 들어. 어어.... 조심히!!"
너무도 익숙한 음성에 뒤를 돌아보니
무거워 보이는 짐을 들고 낑낑거리며 계단을 오르고 있는
소염인가 수염인가... 하는 여자와
두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피식 피식 웃으며 계단을 오르고 있는 은택이가 보였다.
"나는 도도한 여자가 좋아, 나한테 너무 잘해주지마."
결국엔 짐을 뺏어들며 서서히 내쪽으로 다가오는 은택이.
다행히 아직 나는 못 본 것 같길래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 마냥
비상구 안으로 숨어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강재희씨 좋아하는 거에요?"
고개를 푹 수그리며 묻는 여자.
갑자기 내 이름이 나와 흠칫 놀라며 나는 그쪽 대화에 더 귀를 기울였다.
뭐라고 대답할까....?
한참을 엘리베이터 버튼만 누르며 기다리던 은택이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여자를 향해 싱긋 웃으며...
"걔랑 나보단, 댁이랑 나랑 잘될 확률이 더 높을걸?"
....
.....
...
꽤 충격적인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싱글맘 다이어리 [single's diary]
19화
이런맘을 가진다는 자체가 정말 우습고 뻔뻔하지만..
왜 이렇게 서운한걸까?
왜 난...
은택이도 다른 여자와 사귈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까?
너무도 당연하게만 생각해왔다.
은택이가 내 옆에 있다는건.
"엄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는 건 아들 녀석이었다.
"잘 있었어? 엄마 보고 싶었지?"
"응!! 엄청!!"
나는 귀남이의 번쩍 안고서 거실로 향했다.
부엌에서는..
"어, 누구 왔나본데요?"
내가 온줄도 모르고 다정히 요리만 하던
은택이와 거슬리는 여자 하나가 스파게티를 만드는 중이었다.
"어, 진우 엄마 오셨구나! 식사 아직 안 하셨죠?"
살갑게 물어오는 여자.
그러나 정작 은택이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요리에 열중할 뿐이었다.
"은택씨, 그건 그렇게 썰면 안되죠! 어슷썰기 몰라요?"
저런...
은택이의 손을 꼭 잡고.. 다분히 사적감정이 가득한 포즈로
칼질을 시작한 은택이와 여자.
"엄마, 삼촌이랑 소영이 누나랑 결혼 했으면 좋겠지?"
"응?"
"그러면 삼촌이랑 소영이 누나랑 옆집에 살고
엄마랑 나랑 여기 살고!! 넷이서 맨날맨날 맛있는 것도 먹고......."
나는 방정맞은 아들녀석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그러나 이미 들은 모양인지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어버린 여자.
이럴 때.. 은택이가 쓸데없는 소리하지말라고
귀남이에게 소리라도 질러줬으면 좋겠건만.
나와 잠깐 눈이 마주쳤던 은택이는
억지로 시선을 피하기만 할뿐이었다.
SIDE STORY
"푸른 언덕에~ 베낭을 메고!"
"강재희 너 자꾸 촌스럽게 굴래?"
한껏 들떠 노래를 부르는 내게 면박을 주는 은도.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너무 좋다'를 연발하며 자리에 엉덩이를 붙여놓지 못했다.
생에 처음인 기차여행..
그것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은도, 은택이...
그리고 얼마전 은택이의 여자친구가 된 진희까지 넷이서!
이러니 들뜨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재희야, 우리 바다가면 소라 껍데기 같은거 주워다가 목걸이 같은거 만들까?"
"오, 그거 좋다!"
순진하기 짝이없는 진희의 말에 나는 대충 장단을 맞춰 주었다.
"바다 간다고 소라껍데기가 있을 것 같냐, 얘도 참 골때려."
진희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으며 과자 한봉지를 뜯는 은택이.
"아 왜 때려! 너땜에 자꾸 아이큐 떨어지잖아."
"누가 들으면 너 머리 되게 좋은 줄 알겠다, 떨어질 것도 없잖아!"
씩씩거리는 진희는 안중에도 없는 듯 과자를 오물거리며
의자에 몸을 기대는 은택이.
은도 역시 잠을 자려하기에, 나와 진희는 동시에 남자 둘을 일으켰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진희.
"신은택, 너는 무드도 없어? 어떻게 잠을 자냐?"
"얘가 왜이래.. 나 끈적거리는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끈적댄다며 진희의 손을 세게 떼내어버리는 못-된 신은택.
매몰차게 거절당한 진희 덕분에 나는 부담을 가득안고 은도에게 말했다.
"이은도, 잠만 자지말고 나랑 놀아줘."
"응, 뭐하고 놀까?"
은도는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씽긋 웃는다.
역시.. 신은택보다 훨씬 낫구나, 니가!!
나는 진희의 부러운 눈빛을 한몸에 받으며 은도에게 뭐라고 할참에
은도가 먼저 말해버린다.
"가위바위보 해서 내가 이기면 니가 나한테 뽀뽀하고
니가 이기면 내가 너한테 뽀뽀해주는거."
"응?"
갈수록 음흉해지는 은도는 방긋방긋 웃으며 두손으로 내 얼굴을 감싼다.
그리고 입술을 쭈욱 내밀며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저기.. 애들도 있는데...
"악!!!!!"
그때 갑자기 '악'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부여잡는 은도.
"신은택!!!"
은택이가 아직 트지도 않은 음료수 캔을 은도의 머리에 맞춰 버리는 바람에
멈춰진 부담스러운 스킨쉽.
"나이스!"
나는 기분좋게 은택이를 향해 웃어줬으나..
은택이는 옆에 예쁜 여자친구를 두고도 뭐라 그리 불만인건지
무표정한 얼굴로 잠만 잘 뿐이었다.
-
"진희야, 더 깊이 들어가면 위험할건데...."
남자 둘은 바다까지 와서는 짠 물이 닿는 건 질색이라며
파라솔 아래에 앉아 간간히 지나가는 비키니 차림의 여성들을 힐끔 거리고
나와 진희는 즐겁게 물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진희야 이제 그만 들어가! 위험해!"
"야! 여기까지 밖에 안 오는 데 뭐가 위험해. 너도 이리와봐~"
이봐. 너 지금 머리만 둥둥 떠있거든?
나는 쟤가 1년에 한사람씩은 꼭 잡아간다는 물귀신은 아닐까..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그러다 빠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진희가 저러다 정말 빠져버릴까 진희쪽을 향해 슬금슬금 걸었다.
어느새 턱 밑에서 바닷물이 출렁였다.
"야 정말 나가자.. 위험해!"
"겁쟁이. 발 안닿으면 수영해서 나가면 되잖아."
"......."
겁쟁이라는 말에 자극을 받은 나는
자진해서 더 깊은 곳을 향해 걸어갔다.
"좋아, 한번 해보자는 거지?"
그렇게 우리는 위험한 싸움을 계속했다.
"야! 너희 이리로 안나와?"
멀리서 들려오는 은택이의 음성에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
"악!!!!"
그때였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버둥대는 진희.
나는 깜짝놀라 진희를 한손으로 진희를 잡았다.
그런데....
"........"
내가 잘 못 느낀건 아니겠지?
나를 세게 밀어내버리는 진희.
덕분에 더 멀리까지 밀려나버린 나는 버둥거리며 짠 바닷물을 다 마시는 수 밖에 없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수영이라도 하려고 팔과 다리를 뻗었다.
그러나 점점 물살이 거세져 더욱 멀리 밀려날 뿐이었다.
"은택아, 살려줘!!!"
그런데 나보다 더 오버스럽게 몸을 버둥거리며 안타깝게
은택이의 이름을 불러대는 진희.
나는 점점 몸에 힘이 빠져가는 것을 느꼈다.
이러다 죽겠구나...라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은도야...."
나는 힘없이 은도의 이름을 부르며 얼른 나를 이 지옥같은 곳에서 구해주길 기다렸다.
자면 안되는데... 자면 지는건데...
그러나 숨이 막히며 잠이 들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강재희!!"
"재희야!!"
찢어질 듯한 고함을 지르며 다가오는 은택이 그리고 은도.
"눈 감지마!!"
먼저 온 은택이가 나를 안는다.
거친 은택이의 숨이 귀에 닿았다.
"하아, 3초안에 눈 안뜨면 죽여버린다."
"......"
"강재희, 제발...."
차가운 바닷물 안에서도 한없이 따뜻하기만 한 은택이의 온도를 느끼며
나는 마음을 놓았다.
모래밭에 나를 앉힌 은택이는... 몇번이고 나를 끌어안았다.
"나 괜...찮아.."
"누가 괜찮으래!!"
"뭐?"
그때 뒤이어 진희를 안고 나오는 은도.
바닷물인지 눈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두눈이 시뻘개진 진희가
은도를 뿌리치고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짝'
은택이의 뺨을 때린다.
"나쁜새끼.. 내가 앞에 있었어.. 강재희보다!!!"
"......"
"그런데 둘다 강재희한테 갔어!! 나는 보지도 않고!!"
"......."
"이은도는 그렇다치지만 적어도 넌 날 먼저 구해야 했어. 알아?? 이 나쁜 새끼야!!!"
진희는 온몸을 떨며 은택이를 노려봤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말없이 진희를 보던 은택이는
특유의 차가운 저음으로 말했다.
"그래서 이런 유치한 장난 친거야?"
"뭐?"
"그렇게 시험해보고 싶었냐고."
"......."
아무말없이 은택이를 노려보는 진희.
악에받친 듯 소리를 지르더니, 털썩 주저 앉아 울어버린다.
그러는 동안 은도가 내 옆으로 와서
젖은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겨준다.
"쟤가 너 가지고 시험했나봐."
"......"
"그냥 바다에서 죽게 놔둘걸 그랬다."
뻔히 다 들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은도.
진희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상관없다는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택택이 너 왜 자꾸 남의 여자친구한테 찝적대?"
눈치없이 분위기도 모르고 은택이를 향해 말하는 은도.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장난스러운 느낌이 아니었다.
"기분 나쁘게 니가 구하고.... 또 안기는 왜 안아?"
은도는 은택이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내 앞에 쭈그려 앉아 업히라고 한다.
"으쌰, 왜 이렇게 무거워졌냐? 우리 솜털... 바닷물에 너무 뿔어버린거 아니야?"
솜털이라니.. 나는 속없이 웃어버렸다.
"아무리 생사가 달린 문제라도 아무 남자 품에나 안기고 그러는거 아니야."
또또...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하는 은도.
은택이는 피식 웃으며 울고 있는 진희를 일으킨다.
"이거 놔!!"
단단히 화가난 듯한 진희.
끝끝내 은택이의 손을 뿌리쳐버린다.
그러자 은택이도 한숨을 쉬더니 돌아서버린다.
"니 친구들한텐 내가 차인걸로 해."
라는 말과 함께.
이 모든일이 나 때문인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다.
그렇게 의기소침해져 있는데 갑자기 말을 거는 은도.
"재희야."
"응?"
"은택이한테 잘해줘, 생명의 은인이니까."
"안그래도 잘해주잖아."
"니가 잘 안해주는게 잘 해주는 걸껄?"
"뭐?"
얘는 대체.. 어느나라 사람이길래 매번 이렇게 못 알아 먹을 말만 하는거야.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은도는 손으로 내 엉덩이를 탕탕. 때린다.
"와, 이 꼴통!! 정말 몰라? 은택이는 얼마나 갑갑할까?"
"왜?"
"아니야. 그냥 너는 은택이는 쳐다봐주지도 말고 나만 보면돼. 알았지?"
나는 끝까지 그 말에 대답해 주지 못하고
쓸쓸해 보이는 은택이의 뒷모습만 계속 쳐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