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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새로운 과학이다! -(영국 리처드 레이어드 교수)
런던 정경대(LSE) 교수이자 영국 토니 블레어 정부에서 경제자문을 역임한 리처드 레이어드(Richard Layard.1934-,영국 정경대(LSD), 행복정치경제학자) 교수는 일생을 행복 연구에 바쳤다. 1980년 발표한 그의 논문에 대해 ‘리처드 이스털린(R. Easterlin)'은 “행복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쓴 최소의 논문”이라고 극찬을 받았다.
그는 2000년 초반부터 21세기의 좋은 국가는 국민이 행복한 국가이며, 개인의 행복에 대해 정부가 철저히 책임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또한 행복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 [Happiness:Lessons from A New Science/한글판: 행복의 함정]에서 우리의 목표는 행복이며, 더 나은 사회에서 온전하게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부터 심리학, 신경과학, 사회학, 경제학의 최신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행복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개인, 사회, 국가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종합적으로 날카롭게 분석, 제안한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Jermy Bentham,영국 법학자, 입법론:1748-1832)의 열성 팬인 ‘리처드 레이어드’교수는 소득성장이 행복을 증가시키지는 못하는 이유로 사회적 비교와 습관화를 들고 있으며,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의 원리를 주장했다.
이를테면 딸의 연극을 보러 가기로 약속한 날, 어머니가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치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딸과의 약속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에 대한 배려를 보일 것인가? 당신은 자신이 가지 않을 경우 누가 더 상처를 받을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리인 공리주의적인 해결법이다.
인권을 위해 싸우는 이들은 사람들이 가난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최대 행복의 원리에 반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적응에는 좋은 측면이 훨씬 많으며, 이는 왜 부자들이 소득이 증가해도 별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지 설명해준다. 게다가 소득의 증가로 부자가 얻는 미미한 행복과 가난한 사람이 얻는 큰 행복을 직접 비교할 수 있다. 이 비교는 부의 재분배에 찬성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부의 재분배에 찬성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최대 행복의 원리는 선천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편이다.
또한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경제성장이 필요한 나라는 후진국이라 말하며, 한국인에게 역동적 효율성을 목표로 삼기보다 행복의 추구를 목표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리처드 레이어드’교수는 개인주의를 만연케 하고 신뢰를 떨어뜨린 찰스 다윈(Charles Darwin,생물학자, 종의 기원:1809-1882)의 ‘적자생존’과 ‘보이지 않는 손’에 반기를 들며 공동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정부의 목표는 단연코 행복이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평생 행복 연구에 매진한 ‘행복 황제(Happiness Tsar)'로 불리는 ’리처드 레이어드‘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행복, 새로운 과학, 행복의 함정]에서 개인과 정부가 도덕심을 바탕으로 불행을 거르는 촘촘한 네트워크를 만들고, 모든 인간관계에 소통과 공존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돌려야 우리를 가로막는 ’행복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영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너무 개인적이고 경쟁적이며 공동의 목표가 충분하지 못하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경험을 하면 신체의 화학반응이 개선되고 혈압과 심박 수가 떨어져 건강에 장기적으로 좋은 영향을 준다.
오스카상(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배우 75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수상자가 결정되기 전 그들의 건강은 평균적으로 비슷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오스카상을 받은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평균 4년을 더 오래 살았다. 그들은 상을 받고 고취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취와 불안의 쳇바퀴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금이야말로 한 사람이 아닌 모두의 행복을 고민해야 할 때이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변화를 찾을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지혜라고 말했다. 우리는 가족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한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일은 소득의 수준일 뿐 아니라 삶에서 부가적인 의미를 준다. 실업이 크나큰 재앙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업은 소득을 잃게 할 뿐 아니라 자존감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고 일로 연결된 사회적 관계를 무너뜨려 행복을 감소시킨다. 사람들은 실직하면 소득을 잃어서라기보다는 일 자체를 잃어서 불행하다고 느낀다.
-얼마나 가지면 행복해질까? 행복하지 않으면 소득은 숫자에 불과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인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배, 일본은 6배 이상 증가 했다. 그러나 ‘당신은 얼마나 행복 한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매우 행복하다”는 응답은 그대로였다. 한국도 1960년대에 비해 1인당 국민소득이 250배쯤 불어났지만 정작 우리는 ‘돈 때문에 괴롭다’고 행복과 거리가 멀게 한숨을 쉰다.
“돈이 얼마나 있으면 행복해질까?” ‘리처드 레이어드’는 [행복, 뉴 과학]에서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으면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크지 않다고 한다. 소득에 대한 만족은 ‘사회적 비교’와 ‘습관화’에 의해 좌우되며, 결국 다른 사람의 소득 증가가 자신의 행복을 감소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메커니즘은 경제성장이 행복에 미치는 힘을 약화시킨다. 이는 자칫 왜곡된 동기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모두가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효율적이라 할 수 있는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소득을 늘리기 위해 더 많이 일하게 된다. ‘리처드 레이어드’ 교수는 이것을 ‘사회적 공해’를 조장하는 일이라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205 결국 우리가 버는 돈은 우리의 여가를 희생해서 버는 것으로, 우리의 인생은 일을 더 하고 돈을 더 버는 것으로, 돈은 우리의 여가를 희생해서 버는 것으로, 우리의 인생은 일을 더 하고 돈을 더 버는 방식으로 철저히 왜곡되고 있다.
따라서 행복의 비밀 중 하나는 당신보다 더 성공한 사람과 비교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찾아내는 것이다. 생활수준이란 알코올이나 마약과 유사하다. 일단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하면 거기서 생겨난 행복을 유지하고자 더 많은 더 많은 것을 가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쳇바퀴, 바로 ‘쾌락’의 쳇바퀴 속에 있는 것이다. 행복을 유지하려면 다람쥐가 계속 쳇바퀴 돌리듯 바퀴를 돌려야 한다. 결국 우리는 원하는 만큼 가져도 더 행복해지지 않게 된다.
-일상의 가치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서-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익숙해지고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은 자동차나 APT 같은 물질적인 소유물이다. 기업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점점 더 많은 돈을 써서 중독을 채우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도 빛바래지 않은 소중한 경험이다.
‘리차드 레이어드’ 교수는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7가지 요소로 ‘가족관계, 재정, 일, 공동체와 친구, 건강, 개인의 자유, 개인의 가치관’을 꼽고
이를 ‘행복의 빅 세븐’이라고 불렀다.
특히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일에서 얻는 보장이나 안정 등의 중요성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만약 물질적인 소유물에 대해 익숙해질 것을 미리 예상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물건을 사는 데 과도하게 돈을 써버릴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습관화 과정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며, 그 결과 우리 인생은 다른 취미나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는 삶에서 점점 멀어진다.
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하지만 일에 대한 만족도 중요하다. 한 연구 조사에 따르면 영국에서 가장 판에 박힌 일을 하는 공무원들이 동맥경화에 걸릴 확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삶의 질을 연구하던 초기에는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으로 기대와 목표를 낮추는 것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이론은 틀렸다고 본다. 목표를 세우지 않고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여기서 행복의 비밀은 당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범위로 목표를 잡되 너무 높이 잡지 않는 것이다. 달성할 수 없는 목표는 우울증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지루함도 우울증의 원인이긴 마찬가지다.
-이긴 사람도 진 사람도 평화롭지 않은 세상 행복한 경쟁은 가능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따라잡고 싶은 욕구에 강하게 내몰린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지위를 원하며, 최소한 타인의 존경이라도 원한다. 이러한 욕구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이는 사회적 지위를 향한 경주로 이어지며 결국 자신이 이겼을 때 누군가는 반드시 질 수밖에 없는 자멸적 성격을 띤다. 이러한 생존 경쟁의 폐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리처드 레이어드’교수는 많은 사람은 살아남으려면 이기적이 돼야 하고 1등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찰스 다윈’의 사상과 모든 사람이 완전한 이기적이 되더라도 자연스럽게 가장 좋은 상황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애덤스미스(Adam Smith,1723-1790.영국정치경제학자 국부론,‘보이지 않는 손’ 저자)’의 이론에 도전한다.
‘리차드 레이어드’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사람들이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어떻게 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친절한 삶이나 협동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며, 사회적 지위의 양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보건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 반의 모든 친구가 친절하고 잘 도와준다.”라고 대답한 아이들의 백분율이 스위스 81%, 스웨덴 77%인데 반해 영국은 43%, 미국은 54%에 그쳤다.
오늘날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 공감이 없다는 것이다. 교육의 목표는 청소년들이 더 건전한 태도와 더 튼튼하고 도덕적인 특성을 기르도록 하는 것이다.
청소년 문화 전체의 가치를 바꿔야 한다.
‘리처드 레이어드’ 교수는 지금보다 경쟁과 순위에 덜 집착하는 합리적 균형을 강조한다. 물론 인간의 삶에서 어떤 부분들은 투쟁과 경쟁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삶의 더 많은, 그리고 더 나은 부분들이 제로섬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친화적 관계에서 이뤄진다.
우리는 합리적 균형을 통해 행복의 총 합계를 늘릴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순위를 만들지는 사회적 선택의 문제이다.
-이기주의자에게 행복은 오지 않는다!
개인주의는 ‘자아실현’이라는 이상을 전파했다. 하지만 자아실현이라는 복음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는 성취에 동반되는 불안감 때문에 더 행복해지지 못한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개개인 모두가 공헌할 수 있는 공동선의 개념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편을 선호한다.
사회적 연결은 개인적 정체성을 결정하고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다.
계몽주의 사상에 따르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최고의 선은 공동선이며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느끼는 일종의 동료의식이 행복감을 고취시키고 고립감을 없애준다.
‘리처드 레이어드’교수는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를 가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사회구성원들이 자신의 권리만큼이나 책임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사회는 제대로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기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느껴야 하는가?” 이것은 매우 타당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행복한 사회는 두 가지를 바탕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다른 사람에 대한 가장 높은 수준의 공감과 둘째. 공정성에 대한 강한 도덕적 원칙이다. 우리의 공감 수준을 높이지 않는 한, 사람들은 더 풍요로워져도 행복을 늘리는 데 실패할 것이다. 질투와 시기의 감정은 암과 같아서 우리가 획득한 부(富)마저도 갉아먹는다. 만약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즐길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성공을 함께 즐김으로써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제 덜 물질주의적이고 내면적인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타인을 위해 더 큰 헌신을 요구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정부의 목표는 국민의 행복이다!
개인들이 아무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한들 사회가 불안하고 경기가 나빠서 실업자가 늘어가고 범죄가 기승을 부린다면 진정 행복해지기 어렵다. 실용주의자인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효율적으로 일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안정성과 지역사회의 가치보다 경쟁적인 투쟁에 대해 더 힘쓰고 있지 않는가? 정치의 목표는 세상을 좀 더 행복하고 호의적인 곳으로 만드는 것이지 마치 군대 유격훈련장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우리는 유례없이 부유해짐에 따라 이러한 추가적인 부에서 어느 정도를 생활수준의 향상에 쓸 것인지, 또 어느 정도를 고용 안정과 노인 복지, 지역사회를 위해서 쓸 것인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1930년대 경제학이 행동주의에 사로잡힌 이후 이러한 변질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꽤 슬픈 이야기다.
19세기 후반 대부분의 영국 경제학자는 경제학이 행복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개인의 행복이 체온처럼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개인의 행복이 체온처럼 측정할 수 있는 법칙이며 자신의 행복을 타인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개인이 더 부유해질수록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이 더 증가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했다.
한 번은 저자인 ‘리처드 레이어드’교수가 런던에 있는 교육과학부를 방문했을 때 나는 현관 안쪽 홀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는 “앞서 가라(Getting ahead)"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이 정말 교육의 목표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친절한 사람이나 협동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며,
사회적 지위의 양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순위 매기기에 신경 쓰는 것을 정말로 원하지 않으며, 성과급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좋은 사회와 좋은 행위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제르미 벤담’은 “가장 좋은 사회한 시민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 사회이며, 가장 좋은 국가 정책이란 국민에게 행복을 만들어주는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덴마크와 네들란드, 영국 같은 다른 유럽국가에서는 실업자가 열심히 일자리를 찾아야만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일자리를 찾는 데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는 “복지에서 노동으로의 정책”으로, 당근과 채찍을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국가에서 실업률이 훨씬 더 낮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덴마크에서 사람들은 실업 첫해가 끝날 때까지 일자리를 제의받을 권리가 있다.
그 시점에서 국가는 실업자가 일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보장한다.
하지만 실업자는 제의받은 일자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실업자의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즉 일자리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지만 제공받은 일자리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의무도 있다.
‘리처드 레이어드’교수 역시 ‘벤담’의 사상을 이어 받아 “행복은 정부의 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복은 국가 정책의 목표가 돼야 하고, 국민 행복의 증대는 GNP(Gross National Product)의 증가처럼 면밀하게 측정되고 분석돼야 한다.
혹자는 만약 정부가 사람들의 내면적 삶의 질에 관심을 둔다면 사람들의 삶에 점점 더 간섭하게 된다고 주장하지만 국민의 행복을 걱정하는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짓밟지 않는다.
각국 정부는 GDP(Gross Domestic Product,국내총생산)이나 GNP(국민총생산) 소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는 모든 사람의 소득을 똑같이 계산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행복, 새로운 과학]의 저자인 ‘리처드 레이어드’교수는 국가의 종합된 구매력이 행복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주장한다.
최근 들어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총리는 GWB(General Well-Being)를
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스티글리 위원회를 통해 국민 행복도를 조사하고 있다. 미국은 행복을 측정하기 위해 ‘다니엘 카너만’연구팀이 개발한 ‘일산재구성법’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공공 정책의 초점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공공 정책의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공공성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분배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공공 정책은 행복을 증가시키는 것보다 더 쉽게 고통을 없앨 수 있다. 왜냐하면 고통의 원인이 행복의 원인보다 더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이어드’는 고통을 없애는 데 더 중점을 두는 게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노력한다면 결국 우리는 더 행복해질 것이다!
지난 150년간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다. 그렇지만 가족이 해체되고 범죄율이 증가하고 도덕적 가치관이 붕괴된 것은 고작 50년 동안 일어난 일이다. 범죄율과 가족 해체의 증가 그리고 자살율 상승 뒤에 숨은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1959년 영국인의 56%가 ‘그렇다’다고 대답했으나 1998년에 그 수치가 30%로 하락했다. 신뢰도의 변화는 엄청난 변화이며 왜 행복감이 상승하지 않는지를 알려주는 증거가 된다.
‘리처드 레이어드’교수는 안전함을 느끼고 친구를 사귈지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공동체의 질 즉, ‘사회적 자본’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위협과 부담감을 덜 느끼고 과학이 가져다준 빈곤의 종말을 즐길 수 있는 더 나은 사회란 어떤 것일까? 우리가 더 행복한 삶의 방식이라는 목표를 세운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인간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넓은 목표를 가질 때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을 수용할 줄 알아야 행복해진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동정심이 행복의 비밀이며, 최대 행복의 원리는 근본적으로 이상의 표현이다.
한 사례로 영국의 신도시 중 하나인 이스트레이크 주택단지 1층에 사는
주민 가운데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의 비율이 꽤나 높았다.
그들은 다양한 사람이 건물 앞에 돌아다니는 탓에 불안감을 평상시 느꼈던 것이다. 연구의 일환으로 도시개발계획 설계자들은 이 주택단지로 통하는 대부분의 길을 차단했다. 이제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은 이웃 사람뿐이었다. 그러자 1층 주민의 정신질환비율이 4분의 1로 감소했다.
아무도 혼자서 전체 인류를 책임질 수는 없다.
과학의 발달 덕분에 물질적인 절대빈곤은 서구 사회에서 사라졌으나 이제 어떤 것으로 인간의 행복을 더 발전시킬 수 있을지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행복을 원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 안에서 현재와 미래의 행복을 늘리기 위해 행동한다.
현재, ‘리처드 레이어드’는 웰링턴대학 학장 ‘앤서니 셀던’, 영파운데이션 소장 ‘제프 멀건’과 함께 ‘행복 운동(Ation for Happiness)'을 창설해 전 세계에 전개해 나가고 있다. ‘행복 운동’의 목표는 행복을 증진시키고 고통을 줄이는 것으로, 100여 개국의 회원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으로 건강한 관계를 맺고 가치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실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노력한다면 결국 우리는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리처드 레이어드’교수는 그러한 진보가 가능하다고 확실히 믿는다.
-감사합시다
(한국행복&감사리더십센타 원장 배광석 엮음. 2020. 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