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7세기 향랑사건
이 책은 17세기 실제로 있었던 향랑사건을 통해
당시 양인 즉 서민들의 가족풍습이나 사회적 현상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많은 역사서와 문학작품을 통해
향랑사건은 한 열녀에 관한 이야기로 전하고 있는데
역사에 전하는 향랑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다.
"조선 숙종 28년(1702) 경상도 선산부 상형곡(현 경북 구미시 형곡동)에서
향랑이란 한 여인의 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양인 박자신의 딸이었던 그녀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의 슬하에서 자라났다. 17세에 같은 마을에
사는 임천순의 아들 칠봉에게 출가했는데, 그는 나이 14세로 그녀를 마치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향랑은 수년을 같이 살다가 부득이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친정 부모가 용납하지 않아 숙부에게 몸을 의탁했고, 숙
부도 얼마 후 개가하도록 종용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시댁을 찾아
갔으나, 남편의 횡포는 여전하고 이번엔 시아버지마저 개가하기를 권유했다.
결국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그녀는 낙동강의 지류인 오태강으로 가서
나무하는 한 소녀를 만나 자신의 기구한 인생사를 낱낱이 말하고 <산유화>란
노래를 지어 부른 뒤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만다." (p.18)
이 사건 이후 향랑은 열녀로 추천된다.
1. 열녀의 비밀
예전에 읽은 김탁환의 소설 "열녀문의 비밀"을 통해
우리 나라 열녀들에는 아픈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녀가 낫다는 것은 곧 집안의 자랑이요, 고을의 영광이다.
실제로 열녀를 배출한 가문에는 세금을 감면 또는 면제해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럼 열녀란 누구를 열녀라고 하는가?
열녀는 남편을 잃고 개가를 하지 않고, 절의를 지켜야 했다.
특히 열녀로 추천되기 위해서는 자결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자결을 하도록 압박을 한 집안도 있다고 한다.
열녀를 강제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생명보다 가문이 중요한다고 생각한 당시 어리석은 일부 양반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들이다.
2. 17세기 시대적 상황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주자학이 전래되고,
경국대전에서도 중국의 주자가례를 본따 생활규범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오래된 생활규범과 너무나 다른 것이다.
보통 고려시대까지 결혼을 하면 남자가 여자집에 눌러 사는 남귀여가 즉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다 큰 후에야 본가로 돌아가곤 하였다.
그런데 주자가례에는 이것을 큰 웃음거리로 여기고
여자가 남자 집에서 살아야 하는 친영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풍습이 하루 아침에 변할 수 있는가?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그냥 예전처럼 처가살이가 일반적인 풍습이었다고 한다.
특히 양인에게는...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양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극심한 당파싸움에 휩싸이고,
이에 따라 벼슬도 세습되는 문벌정치가 이루어지면서 가문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가문을 중시하다보니, 친영 등 주자학에 의한 생활규범이 자리잡게 된다.
그러면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지위는 더욱 낮아지게 된다.
처음에는 양반들만이 그런 주자가례를 지켰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 모든 사람들이 주자가례를 따르게 되었다.
그런 주자가례의 영향으로 오늘날에도 재혼이나, 이혼 등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한 것이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재혼이나 이혼은 일반적인 사회현상이었으며,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고려시대의 왕비 중에는 재혼한 경우가 여럿 있었다고 한다.
....
그럼 향랑이 살던 17세기 말은 어떠했는가?
그런 주자가례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시기였다.
지은이는 끼인세대라고 표현하였다.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듯이 향랑은 양인이니,
그런 주자가례를 꼭 지키지 말아도 된다고 하지만,
향랑은 주자가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그녀가 살던 선산이란 마을도 한몫을 하게 된다.
3. 절의의 고향, 선산
경상도 선산. 익숙하지 않은 동네이다.
선산은 조선시대 명칭이고 오늘날은 경북 구미시 일부라고 한다.
선산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교의 고을이요, 절의의 고을이라고 한다.
선산은 길재, 김종직 등 충절을 지킨 이들이 많이 태어난 곳으로,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선산을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충절은 사람 뿐만 아니라, 소나 개도 충절을 지켰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 의로운 소나 개의 이야기가 <의우도>, <의구도>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충절의 고을, 유교의 고을 선산이 바로 향랑이 살던 고을이다.
17세기 주자가례가 전파되고 있을 즈음,
선산은 그 어떤 고을보다 먼저 주자가례가 자리를 잡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래서 향랑은 더욱 개가하기를 싫어했을 것이라는 지은이의 생각이다.
친가에서도 받아주질 않고,
시댁에서도 받아주질 않고,
숙부집에서도 받아주질 않고,
개가하여 더러운 여자라 손가락질 받지는 더더욱 싫고..
그래서 그녀는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지은이는 향랑이 남편에 대한 절의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인 손가락질을 피하려니 갈 곳이 없어서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4. 향랑사건의 논란거리
향랑을 이야기한 여러 소설이나 문헌을 보면,
향랑이 그저 유순한 시골여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계모의 구박을 받은 것만이 아니고,
당차게 계모의 구박에 반항하고, 대꾸를 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의 외도, 남편의 주색잡기에도 꿀먹은 벙어리처럼 받아준 것이 아니고,
할 소리를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녀가 살 당시만 해도 앞서 이야기했듯이 끼인세대로서
가정에서의 여자의 지위가 18세기보다는 낮지 않았다는 점이다.
향랑은 처음에는 남편이 어려서 그럴 거라 생각하고
버릇을 고쳐 놓으려고 노력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남편의 버릇은 점점 포악해져 폭력을 일삼기도 했으며, 바람도 피게 되었다.
시부모들도 더이상의 아들의 폭력을 볼 수 없어
향랑을 친정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친정에서 향랑을 받아주지 않아 향랑은 외숙부집에서 살았지만,
처음 몇달은 편히 지냈지만, 외숙부도 향랑에게 개가할 것을 종용하였다.
결국 향랑은 다시 시댁으로 갔지만, 시부모도 개가하라고 한다.
결국 향랑은 죽음을 선택한다.
후에 이 사연을 들은 이 고을의 부사는 그녀를 열녀로 추천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반대한 이도 있었다고 한다.
열녀는 죽은 남편에 대해 절개를 지키며 자결한 자에게 내려지는 칭호인데,
향랑은 남편과 이혼한 후 개가하지 않고 자결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랑이 자결한 이유가 남편한테 절의를 지킨 것이 아니라
당시 늘어난 여자들의 이혼과 재혼을 죄악시하는 풍토 때문에
갈 곳이 없어서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란이 있었지만, 당시 선산 부사 조부상은 계속된 추천을 하여
결국 향랑은 열녀로 선정되게 되었고,
오늘날도 구미시에 향랑묘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책제목 : 향랑, 선유화로 지다
지은이 : 정창권
펴낸곳 : 풀빛
펴낸날 : 2004 년 5 월 27 일
독서기간: 2007.6.04 - 2007.6.05
페이지: 234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