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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라고 시작할까?
허투른 감상을 미리 하지 않는 나는 말이나 문장 앞에 이런 기대에 찬 손꼽음의 언어를 잘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제 스스로 나는 나의 금기를 깰까 한다.
드디어, 그 여인 앞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드디어.. 드디어.. 그녀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 여인.. 허균의 누이이자 요절한 조선의 천재시인 난설헌 허초희.
황진이, 신사임당과 함께 조선의 3대 여류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허난설헌은 그렇게 허균의 누이로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었던 적서제도의 모순을 온몸으로 항거한 시대의 풍운아 허균의 누이.
숨이 막힐 듯한 조선의 가부장적 모순 속에서 27살의 부용꽃처럼 지고 만 안타까운 그녀의 삶을 '애련하다'라는
표현 하나로 이끌었던 소설(최문희의 난설헌)에서, 그녀의 삶은 이렇게 요약되었다.
"나에게는 세 가지 한이 있다.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남편의 아내가 된 것"
가슴을 울리는 저릿한 문장이다. 아름답고 총명했던 결혼 이전의 허초희에서, 자신보다 무능하고 방탕했던 남편을 만나
시어머니의 갖은 모욕을 참아가며 건강을 잃었던 난설헌으로서의 삶까지...
그 영민한 초희라는 이름 하나도 어딘가 애련한데, 난초의 청초함과 흰눈의 깨끗함을 뜻하는 난설헌이라는 호는 더욱 애련하다.
이름에서도 삶이 보일까만은, 유난히 그 삶과 이름이 한 몸처럼 저릿한 여인이 바로 난설헌 초희인 듯하다.
그 여인을 만나러 간다. 이른 아침, 여행지에서 만나는 아침의 그 집을 무어라 말할까.
그 집... 숲에서 날아든 새가 집을 깨우고 산벚이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던 그집.
복사꽃이 망울망울 고요에 젖어 있고 노란 황매화가 담장을 넘실거렸던 그 집도 그렇게.. 저릿했었지.
온 고요가 그녀 같았지.
가슴에 차오르는 샘물 같기도 하고 파르르 떨리는 선율 같기도 한 이런 울림.
이건 오래전에나 가능했던 순수한 마음의 결 같다. 하지만 지나간 시대의 여성 앞에 이런 감상이 올 수도 있을까.
아마도 이 여인의 삶 한 귀퉁이, 글귀 한 소절에서 알듯 모를듯 가녀린 동류의식 같은 것이
자꾸만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그날 아침 그녀의 옛집을 찾았을 때.. 모든 아침의 청초함은 비질을 끝낸 마당 같았다.
그 한 귀퉁이에서 사색에 젖은듯 우수에 떨고 있는 복사꽃 한 그루 같았다.
너무도 정갈한 숲속의 고요한 아침. 그 속에 한 여인이 잠든듯 작은 몸을 말아쥔
그런 집이 있었었지.
참 고운 긴장일 것이다. 간단하게 밥을 먹고 싶었던 건 그녀의 뜰에서 더 한가롭게 거닐기 위한 몸의 허기였던 것 같다.
우선 강릉의 맛을 대표한다고(?) 생각되는 초당두부를 맛보기로 하였다.
초당 두부는 허균과 허초희의 아버지인 초당 허엽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난설헌의 생가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기로 하였다.
초당 두부는 소금 대신 바닷물로 간수를 해서 만드는 두부를 일컫는데, 그 최초의 특허를 이 곳에 부사로 있었던 허엽이 내었고
자신의 호를 따 상표등록을 한 셈이다. 옛맛이야 알 수가 없고 두부를 워낙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아무 음식이나 남이 주는 음식을 최고로 잘 먹어주는 평범한 입맛인 나는, 이 집에서 먹었던 아침도 꿀맛처럼 싹싹 다 비웠다.
이렇게 입맛까지 사로잡은 그날의 여정은 지금 생각해도 다시 달려가고픈 '꿈의 하루'였다.
이제 다시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 보자.
지금도 그날 아침의 정취가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다. 어딘지 외로운듯 고즈늑했던 고요부터...
내게 조금의 땅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담담하게 집을 앉히고 조용한 뜰과 산책삼아 걸을 수 있는 둘레를 치리라.
이렇게 고요한 첫인상이 얼마나 있을까. 시선을 사로잡지 않겠다는 듯 나무의 간격이 집의 아늑함을 헤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심어졌으되 질서에 허트러짐이나 교묘한 시각의 트집도 없었다.
내가 너무나도 반한 첫번째 이유가 바로 이 수목의 안정감이었을까. 주위의 솔숲에 어우러지는 곧은 나무들의 간격.
아마도 그런 적절한 거리두기가 아니었을까.
그 집을 기웃거리는 건 나 뿐만 아니었단 듯, 나무들도 그 나무에서 떨어지고 있는 눈꽃들도
봄날의 난설헌처럼 저릿저릿 피고 지고 있었다.
난설헌의 생가 안채 마당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모란 한 그루였다.
마당의 담아래 귀퉁이마다 흐드러진 꽃밭 다 두고, 무엇을 기다리는 치맛자락 거기 서 있듯 우두망찰 서 있는
한 그루 모란.
참 오래 기다려본 이의 눈동자처럼 이 여인의 기다림도 어딘지 해묵은 듯했다.
모란의 가지 하나 꽂아놓고 긴 기다림에 들어가본 적 있는 사람은 알리라. 저 삭정 가지 보면 애닯도록 화려한 모란꽃
함부로 지나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금쯤이면 저 집 마당의 모란도 흐드러졌겠다.
얼마나 오고싶었을까. 시집간 초희가 치맛자락 서성이며 친정 찾은 것처럼 어릿어릿 서 있는 모란.
담과 담이 마주하니 그 사이에 골목 같은 마당이 생겨 있다.
하늘을 열어둔 방 같기도 하다.
집 공간에 이런 곳 하나 두어도 어떨까. 마당인듯 골목인듯.. 숨어 피는 꽃 한 그루 심어 두고 싶다.
옥죄인 듯한 삶의 옴팡진 구석일 수도 있으리라. 숨어있기조차 거북하면
이렇게 뒤꼍으로 탈출하기도 하라고 쓸쓸한 뒷마당 문이 열려 있을까.
시대의 모순을 알고도 어딘가에 열린 공간 하나쯤은 마련하느라, 여식에게 글을 가르쳤던 아비의 깊은 혜안처럼...
돌아본 안채에도 수상하게 고요한 모란이 꼭 와서 안기었다.
나는 수목과 화초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이런 뜰을 좋아한다.
난설헌 초희도 그러했을까. 이렇게 뜨락에 무슨 꽃이 그녀를 도우며 감수성과 들여다보는 눈을 주었을까.
뒷뜰은 꽃동산이었다. 초희를 닮은 아담한 크기의 꽃과 나무들.
복사꽃이 참으로 고왔었지.
연산홍이 무성한가 하면 원추리도 푸릇함끼리 동산을 이루어 피어 있었다.
화단을 관리하는 이의 눈썰미마저 이 집의 숨은 조력자 같았다.
모란이 지고 나면 핀다는 작약도 참으로 무성하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꽃봉오리 터질 듯 부풀었으리라.
바르게 세워 놓은 독을 보는 것보다 빈 독을 차렴하게 엎어놓으니, 꽃들이 함부로 날아들지 않을 것이다.
크고 붉은 명자꽃과 황매화가 울타리를 매혹으로 물들이고 있었지.
찬란하게 터뜨리는 참 슬픈 꽃의 열망 같은 이 빛깔들.
모퉁이마저 정갈했던 집.. 사락사락 걷기에 너무도 고요히 스미던 봄의 정령들.
가을날에 다시 오고싶은 내 마음속의 집이 되었다.
뜰 구경을 끝내니 그녀의 삶이 다시금 내게로 걸어오는 듯하다.
'그녀의 시는 깨끗하고 장하며 높고 고와서, 명망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진신사부가 모두 칭찬한다.'
허균이 그녀의 글을 요약하여 펴낸 <허난설헌집>은 그렇게하여 세상에 그녀를 드러내었다.
조선의 적서차별은 엄격한 신분제도와 봉건적 사회제도에서 서얼 출신은 호형호부 금지와 과거응시 자격마저 박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허균은 적자 출신으로서, 체제의 모순에 근원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스승으로는 서얼 출신의 손곡 이달이 있었으며, 친구들 또한 서얼출신이 많았다.
그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차별과 천민이면서도 높은 재능을 지닌 이들에게 누구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컸었던 그는,
조선사회라는 신분의 모순과 백성들의 황폐한 삶, 당쟁 등에 대한 그의 비판이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낳게 하였으니,
시대의 역행이 때로는 비운의 혁명가라는 스타를 만들기도 하는 것을 새삼 절감한다.
세상이 아직 그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여 세상에 빛을 보는 사람이 있음이니,
후대의 사람으로서 이것은 그저 먹먹한 아름다움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것이리니.
허난설헌과 허균은 화담 서경덕과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던 아버지 허엽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으며 성장했다.
어린시절부터 훌륭한 문장가로서의 소질을 발휘했던 이들 남매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학문을 하지 못하던 사회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오빠 허봉을 통해서 고문(古文)을 익힐 수 있었으며, 영남학파의 거두 유성룡에게 글을 배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 남매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스승은 서얼 출신의 손곡 이달이었다.
신분제도의 모순과 유교사회의 행동규범을 비판했던 손곡 이달의 사상을 고스란히 체득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했으리라.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손곡 이달은 서얼로 태어났기에 벼슬길에 나갈 수가 없었으며
떠돌이 생활로 틀에 박히지 않은 당시풍의 글을 썼다. 허난설헌은 자유분방한 성격과 당나라 시의 영향 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성으로서 체험할 수 없는 사회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키우게 되었다.
낭만시의 진수인 <채련곡>은 여성으로서의 섬세한 감수성과 넘치는 사랑을 담고 있다.
채련곡(采連曲)
가을 호수 맑고 푸른 물 구슬 같아
연꽃 핀 깊은 곳에 목란배 매었지
임을 만나 물 건너 연밥 따 던지고는
행여 누가 보았을까 한나절 부끄러워
이렇게 영롱한 보석의 문장. 먹물 바래도록 설레었노라 말을 거는 듯하다.
허난설헌은 손곡 이달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서자 신분의 최순치와 안타까운 사랑의 감정도 갖지만,
김성립과 혼인한다.시어머니에게 설움 받았으며, 남편과 불화했고, 사랑스럽던 어린 두 자녀마저 일찍 잃어야 했던 한의 세월을 살았다.
그 오롯한 아픔을 시로 승화한 허난설헌의 생애야말로 예술가적인 에너지의 분출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가슴속에 쌓인 것을 터뜨리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지만, 예술의 영혼 만큼 가치로운 것은 없으리라.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던 소설가 최문희는 자연스럽게 허난설헌을 떠올렸다고 한다.
2009년부터 강릉 생가를 찾아보고, 학계의 허난설헌 연구, 중종실록, 허균의 저서 등으로 자료를 만들고
1년2개월에 걸쳐 원고지 2500장의 소설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76세라는 만감이 교차하는 늦깎이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 노작가의 집념이 아닐 수 없다.
그 작품을 읽고 강릉여행을 꿈꾸게 되었고 그 속에 살다간 난설헌의 삶이 가슴을 오랫동안 저릿거렸지만
여행이 차일피일 미루어지면서 난설헌의 애련함은 그저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듯했다.
이곳에 와서 어린시절의 한설헌을 만나니, 스물일곱 한송이 부용꽃처럼 지던 초희의 마지막 걸음이 떠오른다.
삼월 초아흐레..그러니까 내가 여행했을 그무렵과 비슷한 시기에..
참으로 꽃잎은 지고 있었지.
허씨 5문장과 강릉
강원도 강릉 양천 허씨의 명문가에서 아버지 초당 허엽과 김씨 부인 사이의 세 자녀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 교산 허균은 첫째 한씨 부인에게서 태어난
악록 허성과 함께 '허씨 5문장'으로 불렸다.
이들 허씨 5문장은 우리 문학사에서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이들에게 강릉은 고향이자, 문학의 터전이며 안식처였다.
개혁가이자 자유인이었던 허균이 관직에서 멀어지거나
어머니가 그리울 때 찾아온 땅이자,
조선시대 최고 여류시인이었던 허난설헌에게 문학적 향기를 불어 넣어 주었던 곳도 역시 강릉이다.
강원도 강릉 초당동에는 허씨 5문장을 기리기 위해
'허씨 5문장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그녀처럼 거니는 듯한 강릉솔이 그녀가 나고자란 집을 거닐고 있다.
집을 나오면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이 이렇게 세워져 있다.
모든 건물들을 솔이 가득 메워주는 이 특징이 참으로 든든하다.
나의 집은 강릉 땅 돌 쌓인 갯가로
문 앞의 강물에 비단 옷을 빨았어요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 놓고
짝지어 나는 원앙새만 부럽게 보았어요
-허난설헌의 죽지사 3-
글귀마다 그녀의 애잔함이 묻어나온다. 비를 맞은 한 떨기 꽃이 이럴까.
청초하면서도 가슴을 흔드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허난설헌의 고향집에 와서 그녀의 시절을 바라보았던 아침.
나에게 그녀의 영혼 어딘가가 와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가서 분발하여 문장과 마음결을 다듬으라는 고운 전언이라도 와서 살면 좋겠다고 간절히 간절히.
그녀의 애잔함을 흉내내지 못한 오늘날의 눈매들이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기보단, 사임당을 그려놓은 듯한 흔한 동상 하나 세워놓았지만
그 불편함을 대신 메워주는 그녀의 집 주위로 든든한 솔밭길이
옛 시선 그대로 우리를 안온케 해 주었다.
참 애잔한 사람 하나 여기에 살았노라고 그렇게 높고 푸르렀던 솔숲이 고마웠다.
그녀가 떠났던 삼월 초아흐레..그러니까 내가 여행했을 그무렵에 참으로 꽃잎은 지고 있었지만,
솔숲은 그대로이듯 그렇게 굽어살피고 있었다.
첫댓글 나도 가고파라~님이 계신 그곳.
내도 좀 델꼬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