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에서 한국의 제갈공명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그는 바로 이순신일 것이다.그가 임진왜란에서 세운 전공은 한국은 물론이요, 일본의 근대해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어찌 한일양국에만 그치리요.. 미국, 영국, 중국, 프랑스, 기타 여러 나라의 해군사관학교의 교본책에는 이순신 장군이 실행했던 전략전술이 수록될 만큼 그는 뛰어난 무장이다.
일본해군을 유일하게 패전시킨 나라는 이 세상에서 두 나라밖에는 없다. 미국이요, 바로 다음은 근세조선이다. 제 이차 세계대전때, 해군의 전력은 미국 다음으로 일본이 막강했다. 혹 영국이 일본 해군을 능가하지 않았냐고 따지겠지만, 영국의 동양함대의 주력함인 레파르드호와 프린스옵 웰즈호가 일본해군의 공격을 받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동남아시아의 제해권을 내주지 않았던가!세계 최강의 해군을 자랑했던 영국도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해군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런 일본해군이 명치유신때 창설되고 난 후부터 이순신을 존경하고 그의 전략전술을 배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그 유명한 세계 명장 제독에 속하는 도고 제독도 이순신을 영국의 넬슨보다도 더 존경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이순신은 위대하다는 말이 질리지 않을 만큼 위대한 사람이다.
특히 그가 보통의 인간을 넘어서 신이 아닌 신으로 평가받은 전투가 있으니 그것은 명랑해전이다.물론 그전에도 그가 이긴 전투도 훌륭하지만, 그것은 매사에 보통 사람들도 기본기만 충실히 했다면,승전보는 울렸을 것이다.
학익진이라는 바다의 전술도 예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고, 또한 각종 화포와 전함도 원칙대로 했다면 이순신 장군만큼 무장했을 것이다. 그런 상태로 일본군과 싸웠다면, 이순신 장군만큼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겠지만, 승리는 거둘 것이다.
그러나, 명랑해전을 비교하면, 어떠한 사람도 이순신만큼 해내지 못할 것이다.
13척의 배에 얼마 되지도 않는 병력을 가지고 어떻게 전투함 (133척)과 기타 여러 수송선과 보급선까지 합쳐 330여척의 대선단을 크게 이길까!
말이 병사이지, 병사중 120여명은 칠천량 해전의 패전으로 크게 사기가 떨어진 병사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라도 피난민들 중에 강제로 징발한 무지렁이 백성들이었다.거기에 임진년에 무장한 화력수준도 아니겠고 무엇하나도 일본군에게 대적할 만큼의 수준은 아니였다 오죽 답답했으면, 조정에선 권율 휘하에서 종군하라는 명령을 내렸을까..!
하지만, 몇시간만에 조선수군은 일본해군을 크게 격파하여 서해진입을 막았고,충청도와 전라도에 있던 일본 주력군들을 남해안으로 철군시켰다.
정말로 이순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렸고, 한산도 해전보다도 더 값진 승리를 거둔 전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이 명랑해전 아니, 이 명랑대첩의 과정을 설명하여 앞서의 평가가 정말로 옳은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1.칠천량 해전이후....
도원수 권율의 기획으로 수륙합동으로 부산을 공격한다는 계획은 조선육군의 형편없는 전력으로는 도움이 안된다는 판단아래 비변사에 의해서 수군 단독의 출병과 소수의 육군의 유격만으로 한다는 선에서 수정되어졌다. 말이 합동공격이지, 실상은 수군단독의 작전인것이다.
결국 원균을 비롯한 수군장수들은 도원수 권율에게 출병의 무모함을 알렸지만, 권율은 듣지않고 출정을 강요했다. 원균은 1-2차례 거제도 근방을 출격하여 다소의 전과는 올렸지만, 조선군 또한 피해를 입고 한산도로 돌아왔다. 부산 출격은 어린아이도 알만큼 무모했지만, 도원수 권율의 독전으로안 갈수도 없었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권율에 의해서 곤장 2-3대를 맞았다. 도원수 벼슬은 조선군을 총 지위하는 사령관의 자리지만, 실질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의 육군을 총괄하는 자리이고 수군을 마음대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입장이 못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수군의 실질 사령관였고, 수륙합동의 작전만 도원수가 이래라 저래라 지위만 간신히 하는 입장이라서 함부로 다루는 자리는 아니였다. 그런 통제사가 도원수에 의해서 모욕을 받았으니갈데까지 가지 않았는가! 결국 조선수군은 부산으로 가는 도중 칠천량에서 일본군에 의해서 격파당하고 조선수군은 전멸한다.(1597.7월)
그 당시 조선 수군의 힘으로 일본군과 팽팽히 맞서던 조선군은 명군의 본격적인
개입도 하기전에 대규모로 총공세를 받아, 전라도와 충청도 서부지역은 유린당하고 전선은 경기도까지 밀리는 상황에 도달했다.
조정에서는 수군의 전멸소식에 크게 당황했고, 어찌 할줄 몰라했다.조정에서 선조임금은 대책을 논의했지만, 신하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만 다물채 가만히 있었다.
수군이 전멸당했는데, 무슨 대책이 있겠는가 ! 아무리 뛰어난 장수가 있다고 해도 병졸 한명도 없이삼국지의 장비나 조운처럼 백만대군속에 들어갈수가 있는가!
임금은 물론이요, 조정대신들도 뚜렷한 대책이 없으니, 선조임금은 “ 대신들은 왜 할말이 없는가? 이대로 있으면 왜적들이 저절로 물러난다 말인가!“ 하고 울분에 찬 목소리만 질러대었다.결국 조정은 이순신을 통제사로 재임명하고 면사권( 죽음을 면하는 권리)을 내렸다.
도원수 휘하에서 권율한테 인간다운 대접도 못 받고 아무 할 일없이 지내고 있다가 패전 비보를 들었고 이어 조정에서 통제사로 재임명한다는 교지를 받는다.
교지에서는 “지난날 그대를 백의종군케 해서 오늘 이런 패전의 욕됨을 입었으니 무슨 할말이 있으리요..........“ 라고 시작하는 내용이 있으니 선조 임금이 솔직히 이순신한테 사과하는 꼴이 되었다.
이순신장군은 그 교지를 받고 전라도 여러 고을을 지나가면 군량미와 군사와 병선을 모았다.당시 전라도는 일본군의 공격을 당해 혼란한 상태이므로 어느 하나 만족할 만한 것을 챙기지 못했다.다만,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 해전 도중 도망쳐 나와 12척의 전선만 온전히 보존하여 이순신 앞으로 인수인계 된게 천만다행이었다.
패잔병 120명과 파손된 12척의 경상우수영 소속의 배와 4마리 말에 실은 무기와 줍다시피 모은 군량미 약간만 간신히 챙긴 이순신은 그것을 토대로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한다.전라도가 일본군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재건할 건만 적군한테 유린당하는혼란한 정국에 이마저 챙긴 것도 감사해야 할 따름이었다.
2. 명랑해전 전야...
차근차근 준비중인데, 청천벽력의 소식이 이순신한테 날아들었다. 조정에서 수군을 철폐하고 남은 병력을 권율 휘하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마음을 잡아가는데, 이런 소식이 날아드니 그 당사자는 어떤 감정이 느꼈을까...!
임진왜란이 발생한 이후부터 조정은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게 지원이야 지원은 하지못했다.수군이 알아서 다 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둔전를 일구었고, 바다에 나아가 수산물과 소금을 채취했고, 모자라면 여러 고을 돌아다니며 징발하기도 했다.둔전에 일각격이 있는 전직관리를 자기 휘하에서 두는 등 많은 노력을 했지만, 조정의 지원없이그는 수군을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면, 18000명까지 올라갔던 병력들이 전염병과 보급의 문제, 탈영등으로 5000명 정도로 줄어든 경우가 있어 그것을 보충하는데 한참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그런 관계로 조정에 원망을 많이 하던 이순신에게 다시 이런 교서가 내려졌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당시 그가 겪은 심정을 읆은 시조가 있으니 그 유명한 [한산도가]였다. 우리는 이 시조를 학창시절에 많이 듣고, 시험에 나오는 단골이라서 외우기도 하면 아무 느낌없이 대하지만, 이 시조는 이순신의 당시의 심정을 잘 나타내주는 문학작품이다. 이순신은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말로 시작하는 장계를 올려 조정의 뜻을 꺾는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손이 뻗치지 않는 장성의 회진포로 수군부대를 옮긴다. 그는 그곳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한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 배 한 척을 합류시켜 13척의 전선으로 새로 수군을 조직했다.
새로 합류한 장수들과 모여 군사회의를 하면 앞으로 다가올 적군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배설이 탈영하여 그나마 사기를 잃은 병사들에게 더욱더 사기가 떨어져 그에게 또 어려움이 닥쳤다. 그리하여 그는 장수들과 병사들을 많이 다독거렸지만, 어느 정도 효과는 있겠지만, 임진년의 사기 충천한 부대로 변화시키는 것은 힘들었다.
좀 다행인 것은 와스자카가 이끄는 일본수군이 칠천량 해전이후 급속하게 서해로 진격하지 않는채 남해안에서 육군에게 보급품을 날려주고, 육지 전투로 참가해서 다소의 시간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모든 전력을 전라도로 집중하였다. 남원성에 있던 조명연합군은 유리한 지역인 산성 방어를 버리고 평지에 있는 남원성을 선택하여 결국 일본군의 공격으로 사흘만에 무너져 전라도는 일본군에게 유린당한다. 이 남원성 전투를 참가한 일본 수군은 곧 남하하여 바다로 돌아와 북진하는 일본군과 연합작전을 하기 위해 서해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육군은 남원에서 북진하여 전주를 점령하고 두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전라도로 남하하여 전라도를 유린하였고, 다른 부대는 충청도 서부로 진격하여 경기도 근처까지 육박하였다.
일본수군은 보급품과 새로 보급할 병사들을 싣고 바다로 나아갔다. 이들의 목적은 남해안을 돌아 서해안으로 들어가 육지의 부대에게 병사와 보급품을 전해주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때 육군도 같이 육로로 서울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본군의 공격에 조선은 서울을 수비하기 위해서 한강으로 병력을 배치하여 결전을 준비했고, 명나라 부대도 천천히 남하해 들어갔지만,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수군은 본격적으로 서진해 들어오는 일본수군을 맞서 싸우기 위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결전의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라우수영 쪽 즉 진도 울돌목를 결전의 장소로 삼고 만반의 준비를 한다. 오늘날 진도와 해남을 잇는 진도대교의 아래의 바다 길이 울돌목이다. 밀물과 썰물이 교체되는 곳으로써 바다 속에 있는 암초가 있어 물결이 부딪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심하게 소용돌이치는 것이다. 또한 간격이 좁기 때문에 남해안의 많은 물이 서해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반대로 역행하는 과정에서 급조류가 생겼다. 이런 관계로 그 울돌목이라는 해협으로 배가 통과하는 것이 힘들다.또, 배가 통과하는 해협의 간격도 좁아 대규모의 적들이 한꺼번에 들어오지 못하여 적은 수의
조선수군으로 방어하는 것이 안성맞춤이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수군은 이 곳을 결전의 장소로 삼은 것 같다.
이런 지형 외에도 이 해협으로 조선군은 적군이 눈치채지 않게 수중철쇄를 설치한다.즉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을 물 속에 잠기게 숨겨 놓은 것이다.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게 중간 수중높이에 위치한 있었다.
과연 조선군은 이런 철쇄를 설치하여 어떤 효과를 보는 것인지...?
이 울돌목을 결전의 장소로 결정한 조선수군은 이 곳으로 일본군을 유인하는 작전을 실시했다.그 과정에서 일본수군 선봉대와 1-2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일본군은 조선군을 쫓아 울돌목으로 서서히 서쪽으로 전진해 들어갔다.
3.명랑해전.....
1597. 9월 7일에 전라남도 해남의 어란진 앞바다에 일본군 수백척의 선단이 모여들었다. 그 곳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일본군은 9월 16일 이른 아침에 戰船 133척이 선발로 울돌목으로 전진해 왔다. 우수영에서 정찰병한테 일본군의 진격소식을 듣고 이순신 장군은 수군 선단을 울돌목 즉 명랑해협으로 이동시켰다.
(전멸 당했다고 생각한 조선수군이 8월부터 출몰하자,) 일본수군은 전에 정찰함대가 1-2차례 패배를 당하면서도, 조선수군이 소규모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거에 격파할 생각으로 울돌목으로 들어와 조선수군으로 진격했다. 유인작전은 성공한 셈이다.
대규모로 들어오는 일본군의 선단에 조선수군은 기가 죽었다. 당시 조선수군은 그들 특유의 학익진 형태의 모습을 띠지 않은채 일직선으로 서 있었다.
(* 당시 조선군은 수십척의 협선과 100척의 어선이 있었지만, 전투를 할 수준은 아니였고 실질 전투선단은 13척의 판옥선뿐이다. ) 울돌목의 험한 지형과 적은 선단의 숫자로 인해서 학익진을 띄지 못한 것이다.
조용히 기다리던 조선수군은 서서히 들어오는 일본군의 선단을 보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엄청난 숫자의 일본 전선에 기가 질린 것이다. 때맞쳐 일본쪽으로 밀물이 들어오기까지 하여 조류도 일본쪽의 편이었다.
12척의 배가 움직이지 않은 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대장선만 앞으로 나아가 대포를 쏘면 공격하기 시작했다. 선봉에 서서 나아가니 조선군 선단들도 앞으로 나아가
싸우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 장수 안위가 지위하는 선단은 일본군의 기세에 머뭇거리면 도망갈 조짐이 보이자, 이순신 장군은 ‘도망가면 내가 먼저 죽일 테니, 이래나 저래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니 나아가 싸워라‘ 라는 말을 하자, 그때서야 안위는 죽는 것을 각오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싸우는 도중에 한번도 해전에서 쓰지 못한 화포를 일본군이 쏘아대자, 조선군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화포는 일본군이 남만에서 즉 포르투칼이나 에스파냐한테 수입한 대포인 것 같다. 일본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한참 지난 에도시대에 들어서야 간신히 자체 생산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 당시 사용한 대포는 수입한 대포가 아닌지....
이렇게 술렁거리는 조선군에게 이순신은 다독거리며 계속 전투를 치루었다.
이런 이순신의 활약으로 조선군은 진정되었고, 전투에 집중했다. 일본군은 전투를 치루지 얼마 안되어 조선군이 미리 설치해 놓은 수중 철쇄에 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체, 선단 선단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배머리가 뒤쪽의 배후미에 부딪쳐 여지없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철쇄에 걸려 나아가지 못하고 뒷도 못가는 상황에 처하자, 조선수군은 기다렸다는 식으로 이제까지 밀리기만 했던 기세를 일시에 역전이 되어 각종 화기와 화살을 쏘며 일본군을 공격했다.
전투가 오전 11경에 시작되었는데, 두시간이 지나 오후 1시경이 되자 물이 잠시 멈추었고, 곧 썰물이 되면서 거꾸어 바닷물이 반대방향으로 들어가니 일본군은 자연의 힘으로 떠내려갔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조선군 선단은 추격하며 일본선단을 공격했다.
그런 과정에서 조선군은 화살에 막고 죽은 적장 구루시마를 건져내 목을 베어 선단에 걸어 놓으니 그나마 저항하던 일본군의 기세는 완전히 수그러졌다.
당시 일본군의 배는 밑부분은 날카롭게 뾰족하게 나 있어 수중철쇄에 쉽게 걸렸고, 조선군의 전선즉 판옥선은 밑부분이 평평하여 걸리지 않해서 이동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2시간의 시간이 전투의 분수령이 된 이 해전은 조선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결국 끝이 나고 말았다.
133척의 배 중에서 31척의 배가 수장되었고, 90척의 배가 크게 파손된 상태고, 전사자는 적게는3500명에서 6000명, 아니면 많게는 8000-10000명이 바다에서 물고기의 밥이 되고 말았다.
조선군은 이순신이 지위하는 대장선의 사상자가 5명을 추론하여 대략 70명 안팎으로 사상자가 남겨나 생각이 든다. 이순신 장군이 지위한 이전 전투보다도 더 많은 사상자가 남겼지만, 그것은 그때와 지금하고 비교하면 비교대상이 안된다.
당시 조선군 선단 뒤에 민간 선박 즉 어선 100척이 강제로 징발되어 뒷에 배치되어 조선군의 허장허세에 이용되어 조선 민초에게도 명랑해전에 참여했다고 본다. 자의든 타의든 ....진도와 해남의 양쪽 해안가에 위치한 조선 민초들은 피난을 어디 가야 할지 몰라 이렇게 죽치고 있었고, 조선수군이 일본수군과 교전하는 장면을 보면서 얼마나 속 태웠는지,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아니 얼마나 울부짖는 지가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 이들에게 조선수군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유일한 관군이었다. 이들 조선수군이 졌다면, 승리에 도취된 일본군은 상륙하여 축제의 도가니를 열어 조선인들의 재물을 빼앗고, 살인하고, 강간하고, 포로로 끌고 갔을 것이다. 남에게 결정되어지는 자신들의 목숨과 운명에 자신들을 맡기면 조선 피난민들은 싸우는 장면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4. 명랑해전 그 후...
조선 수군은 전투에 승리한 후에 본진으로 돌아온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에 승리했다고 장계로 올리고 그 증거로 소금에 절인 적군 목 수십 개를 함께 보냈다. 그 날 저녁에 그는 난중일기로 이 날의 전투의 승리를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즉 천행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겸손의 표현으로 밖에 안보인다. 물론 겉으로는 기적이라고 보이지만, 천재 이순신이 전략전술이 돋보인 훌륭한 전투라 생각된다.
조선 수군이 보유한 화력과 조선술도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요소다.올돌목이라는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수중철쇄를 사용한 이순신 장군의 전략전술 이에 말로 명랑해전이라는 큰 승리 즉 대첩을 이루어냈다고 생각한다.
이 전투는 이순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중국의 제갈공명(삼국지 소설로 표현된..)만큼 뛰어난 전략전술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명랑해전의 여파로 조선수군은 비록 해상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지만, 적군의 서해의 진입을 끝까지 막았고, 일본 수군의 해상활동을 크게 약화시켰다.
무엇보다도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있던 일본군이 북진하여 조명연합군과 한판의 대결을 벌일 태세였지만, 명랑해전의 패전이 전해지면서, 임진년의 보급의 악몽이 떠오르며 남해안으로 서둘러 철수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명랑해전 이후 4-5일 후였다. ( 이미 이전에 일본군 5000명과 1만의 중국군과 소수의 조선군이 충청도 직산에서 충돌하여 전투를 벌인 경우가 있다. 또한 남해안으로 퇴각할 때, 일본군은 여유롭게 내려갔고,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이들의 약탈대상이 되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명군은 이들을 추격하지 않았고, 조선군만 다소 약한 군세를 감안하여 소수의 병력으로 복병과 기습작전을 실행하여 많은 전과를 세웠지만, 역부족이다.)
이렇게 명랑해전은 한산도 해전처럼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은 중요한 전투였다.
첫댓글난중일기에서는 수중철책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고 난중일기에서의 전투묘사도 수중철책을 사용했다고 보기에는 힘든 면이 있죠,...물론 다른 기록들-행장기류-에서는 그런 기록이 보이긴 하지만 그런 기록들이 난중일기보다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수중철책이 사용했는지 의심해봐야 되지 않을까요.
첫댓글 난중일기에서는 수중철책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고 난중일기에서의 전투묘사도 수중철책을 사용했다고 보기에는 힘든 면이 있죠,...물론 다른 기록들-행장기류-에서는 그런 기록이 보이긴 하지만 그런 기록들이 난중일기보다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수중철책이 사용했는지 의심해봐야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