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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국(女人國)과 옥저(沃沮) 그리고 단단 대령(單單大嶺)
○ 우리는 발전(發展)된 사회(社會)속에서 문명(文明)혜택(惠澤)을 남김없이 만끽하며, 살고 있다고 봐도 괜찮을 정도(程度)로, 많은 정보(情報)의 홍수(洪水)속에 살고 있다. 인터넷만 열면 다양(多樣)하고 세부적(細部的)인 소식들, 블로그, 카페, 다양한 백과사전(百科辭典)류, 많은 분들이 편집(編輯)하는 위키-백과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정보이다 보니,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판단(判斷)하기 어려울 때가 매우 많다.
○ 조선사(朝鮮史)는, 우리 선대(先代) 삶의 이야기이며, 다양(多樣)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분명(分明)한 것은, “조선(朝鮮)을 처음 건국(建國)한 분이나, 그 후대(後代)의 많은 조선(朝鮮)의 왕조(王朝)들을 건국(建國)시킨 개국시조(開國始祖)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人間)이었다는 사실(事實)이다.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한다거나, 몇 만리(萬里) 땅을 뛰어넘는 축지법(縮地法)을 구사하는 식(式)의 주장(主張)은, 상대방(相對方)을 이해(理解)시켜야 하는 입장(立場)에서 본다면, 방해(妨害)꾼과 다름이 없다.
○ 또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우리의 조상(祖上)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이며, 그 백성(百姓)들의 후예(後裔)가 『오늘날의 “나” 자신(自身)이다』라는 믿음이 곧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라는 믿음으로 인해 “조선사(朝鮮史)”를 나의 역사(歷史)로 보는 것이다. 만약(萬若) 전혀 다른 백인(白人)종족(種族)이 조선왕조(朝鮮王朝)였다거나, 그 백성(百姓)들이었다면, “나의 선조(先祖)는 백인(白人)이었는데, 지금 나는 그럼 무엇인가?”라는 것에 봉착(逢着)하게 될 것이다.
○ 지금 “나”를 부정(不正)하는 역사(歷史)를 연구(硏究)하여, 박사학위(博士學位)를 받으려 하는가? 그렇다면 대학(大學)의 역사학(歷史學)과를 입학(入學)하는 것이 백배(百倍) 옳은 일이며, 시기(時期)를 크게 앞당길 수 있는 일이다.
○ “오늘의 나를 부정(不正)하게 만드는 역사(歷史)!” 그것이 조선사(朝鮮史)일 수는 없는 일이다. 심각(深刻)하게 고려(考慮)해 보아야 할 사항(事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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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 沃 沮 <三 國 志 卷 30 / 魏 書 30 / 烏 丸 鮮 卑 東 夷 傳 第 30>
東 沃 沮 在 高 句 麗 蓋 馬 大 山 之 東, 濱 大 海 而 居. 其 地 形 東 北 狹, 西 南 長, 可 千 里, 北 與 挹 婁, 夫 餘, 南 與 濊 貊 接.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의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에 있는데, 큰 바다에 임하여 산다. 그 땅의 형태는 동쪽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북(北)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餘)에 접(接)하고, 남(南)쪽으로 예맥(濊貊)에 접(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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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가장 중요(重要)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찾아보아야 당시(當時) “옥저(沃沮)”의 위치(位置)를 찾을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먼저 “단단 대령(單單大嶺)”은 무엇인가부터 찾아보자.
후한서(後漢書)를 보면, 그 지세(地勢)에 대해 자세한 방위(方位)까지 설명(說明)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價値)가 있다. 곧 〔동옥저(東沃沮) / 東沃沮, 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卽王儉城也 : 동옥저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군(玄菟郡)에 속했으며, 그 산은 지금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는데, 평양(平壤)은 곧 왕검성(王儉城)이다.〕
➋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하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이란 바로 단단 대령(單單大嶺)」을 말하는 것이다. 고금지명대사전(古今地名大辭典)에서는 : 「단단 대령(單單大嶺) : 嶺爲朝鮮境內大山脈.古稱蓋馬大山,元史稱慈悲嶺(중략). : 단(단)대령(單單大嶺)은, 조선(朝鮮) 경내에 있는 대산맥이며, 옛날에 일컫던 이름이 개마대산(蓋馬大山)이며, 원사(元史)의 자비 령(慈悲嶺)이다.」 【단단 대령(單單大嶺)=단단 대령(單單大領)은 같다.】
➌ 여기서 방위(方位)와 지세(地勢)로 볼 때, 가장 중요(重要)한 핵심적(核心的)인 요소(要素)가 있는데, 바로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라는 것이다. 또
《東 沃 沮 在 高 句 驪 蓋 馬 大 山 之 東.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注〕蓋 馬, 縣 名, 屬 玄 菟 郡, 其 山 在 今 平 壤 城 西, 按 : 蓋 馬 卽 高 驪 二 字 之 土 音(中略), 亦 稱 單 (單) 大 領(中略), 固 在 大 山 之 東 也. : 〔주(注)〕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이며, 현토군(玄菟郡)에 속했다. 그 산【개마대산(蓋馬大山)을 말함】은 지금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안(按) : 개마(蓋馬)는 곧 고려(高驪) 두 자(字)의 사투리(土音)이다. (중략). 또한 부르기를 단단 대령(單單大領)이라 한다. (중략). 【옥저(沃沮)】오로지 대산(大山)의 동쪽에 있다.
후한서(後漢書)는 「송(宋)나라의 선 성 령(宣 城 令) 범 엽(范 曄 : 339~445)이 440년경에 찬(撰)」한 것인데, 지금으로부터 약 1572년 전에 나온 역사서(歷史書)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때의 “평양(平壤)”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과 위의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은 곧 “평양(平壤)의 위치에 따라 맞물려 있게 되는데, 산천(山川)의 지세(地勢)는 변함없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인간(人間)의 욕심(慾心)으로 인해 생겨나는 죄악(罪惡)이랄 수 있다. 개마대산(蓋馬大山)은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다.
➍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에서는, 이것을 오류(誤謬), 또는 「범 엽(范曄)이 후한서(後漢書)를 찬(撰)하면서 지리(地理)상식(常識)의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변명(辨明)에 불과 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當時) “범 엽(范曄)”이 후한서(後漢書)를 찬(撰)한 시기(時期)는 이미 후한(後漢)이 망(亡)하고 난 뒤, 220년이란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범 엽(范曄)”은 후한(後漢)에 대한 많은 참고(參考)서적과 「사승(謝 承)· 설영(薛 瑩)· 사마 표(司 馬 彪)· 유 의경(劉 義 慶)· 화교(華 嶠)· 사침(謝 沈)· 원 산송(袁 山 松) 일곱 사람 및 전한(前漢) 유진(劉 珍) 등의 동 관 기(東 觀 記)와 공연(孔 衍)의 독한상서(讀 漢 尙 書)」등의 수많은 것들을 참고(參考)한 것이며, 범 엽(范曄)은 말하기를, “천하에 부끄러움이 없는 양사(良 史)”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한 분석(分析) 하나 없이 “오직 반도(半島)의 지형지세(地形地勢)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지리(地理)정보(情報)의 무지(無地)에서 나온 오류(誤謬)」란 말은 “난동(亂動)”이다. 감히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➎ 서기 440년경이면, 고구려(高句驪) 장수왕(長壽王) 때의 일이며, 장안 성(長安城)을 쌓은 것이 양원왕(陽原王) 8년 이며,【양원왕 8년에 장안 성(長安城)을 쌓았다. / 八 年, 築 長 安 城】평원왕(平原王) 28년에 도읍을 장안 성(長安城)으로 옮겼다.【平原王<平崗上好王> : 28년 장안 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二 十 八 年, 移 都 長 安 城】고 했기 때문에, 그 이전(以前)의 “평양(平壤)”은 그 서(西)쪽 지방이나 북(北)쪽 지방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서(西)쪽 지방의 “란 주(蘭 州)”와 “천 수(天 水)”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➏ 각설(却說)하고, 「평양(平壤)의 서(西)쪽 지방? 그리고 고구려(高句驪) 경내(境內)의 대산맥(大山脈)? 그리고 장안 성(長安城)과 호경(鎬京)?」 지형지리(地形地理)나 방위(方位)등으로 볼 때, 이곳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대륙(大陸)의 서(西)쪽 지방에서나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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戶 五 千, 無 大 君 王, 世 (世) 邑 落, 各 有 長 帥. 其 言 語 與 句 麗 大 同, 時 (時) 小 異. : 오천(五千)호(戶)이며, 대(大) 군장(君長)은 없고, 세세토록 읍락에, 각각의 장수(長帥)가 있으며, 그 언어(言語)는 구려(句麗)와 크게 같은데, 때때로 조금 다르다.
漢 初, 燕 亡 人 衛 滿 王 朝 鮮, 時 沃 沮 皆 屬 焉 。 漢 武 帝 元 封 二 年 , 伐 朝 鮮 , 殺 滿 孫 右 渠 , 分 其 地 為 四 郡 , 以 沃 沮 城 為 玄 菟 郡 。: 한(漢)나라 초에, 연(燕)나라의 망명(亡命)인 위만【衛滿 : 또는 위만(魏滿)】이 조선(朝鮮)왕(王)이었을 때, 옥저(沃沮) 모두 속하게 되었다.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조선(朝鮮)을 정벌하고, 위만(衛滿)의 손자(孫子)인 우거(右渠)을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사군을 두었는데, 옥저(沃沮)성(城)은 현토군(玄菟郡)이 되었다. 後 為 夷 貊 所 侵, 徙 郡 句 麗 西 北 , 今 所 謂 玄 菟 故 府 是 也 。 沃 沮 還 屬 樂 浪。: 뒤에 이 맥(夷貊)이 침입하자, 고을을 구려(句麗) 서북(西北)으로 옮겼는데, 지금 현토(玄菟)에 있는 옛 마을(府)이 이것이다. 옥저(沃沮)는 낙랑(樂浪)에 복귀하여 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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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夫餘)” 편에서도 설명(說明)했듯이, “현토군(玄菟郡)”은 「천산(天山)과 하(河) 상류(上流)사이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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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以 土 地 廣 遠 , 在 單 (單) 大 領 之 東 , 分 置 東 部 都 尉 , 治 不 耐 城 , 別 主 領 東 七 縣 , 時 沃 沮 亦 皆 為 縣 。: 한(漢)의 토지(土地)가 넓고 멀어, 단단 대령(單單大嶺)의 동쪽을, 나누어 동부(東部)도위(都尉)를 설치하고, 불내성에서 다스렸는데, 주령【단단 대령(單單大嶺)】동쪽을 나누어 7 현을 두었는데, 이때 옥저(沃沮) 역시 모두 현(縣)이 되었다.
漢 (光 )〔建〕 武 六 年 , 省 邊 郡 , 都 尉 由 此 罷 。 其 後 皆 以 其 縣 中 渠 帥 為 縣 侯 , 不 耐 、 華 麗 、 沃 沮 諸 縣 皆 為 侯 國 。: 한(漢) 건무(建武) 6년에, 변방(邊方)의 군(郡)을 살펴보고는, 도위(都尉)를 파(罷)하였다. 그 뒤에 그 현(縣)에 있던 거수(渠帥)들을 모두 현후(縣侯)로 하였는데, 불내(不耐). 화려(華麗). 옥저(沃沮)의 여러 현(縣)은 모두 후국(侯國)이 되었다.
夷 狄 更 相 攻 伐 , 唯 不 耐 濊 侯 至 今 猶 置 功 曹 、 主 簿 諸 曹 , 皆 濊 民 作 之 。 沃 沮 諸 邑 落 渠 帥 , 皆 自 稱 三 老 , 則 故 縣 國 之 制 也. : 이적(夷狄)들이 서로 공격하고 쳤는데, 오직 불내(不耐)의 예후(濊侯)는 공조(公曹), 주부(主簿)등의 여러 관아(曹)를 두었는데, 모두 예(濊)의 백성들이 만든 것이다. 옥저(沃沮)의 여러 읍락의 거수(渠帥)들은, 스스로 모두 삼노(三老)라 불렀는데, 즉 옛날 현국(縣國)의 제도이다.
國 小 , 迫 于 大 國 之 間 , 遂 臣 屬 句 麗 。 句 麗 復 置 其 中 大 人 為 使 者 , 使 相 主 領 , 又 使 大 加 統 責 其 租 稅 , 貊 布 、 魚 、鹽 、 海 中 食 物 , 千 里 擔 負 致 之 , 又 送 其 美 女 以 為 婢 妾 ,遇 之 如 奴 僕 。 나라가 작아, 큰 나라 사이에 있어 궁색(窮色)하여, 신하로 구려(句麗)에 속하게 되었다. 구려(句麗)는 다시 그 중의 대인(大人)들을 사자(使者)로 삼았는데, 사(使)는 주인이란 것이다. 또한 사자(使者)는 대가(大加)들이 책임을 지고 조세(租稅)를 받도록 하였는데, 맥 포(貊包). 물고기. 소금. 해중의 먹을 거리등인데, 천리(千里)를 메어 짊어지고 가서 바쳤다. 또한 그 아름다운 여인(美女)들을 보내어 비첩(婢妾)으로 삼았는데, 이는 노복(奴僕)과 같다.
其 土 地 肥 美 , 背 山 向 海 , 宜 五 穀 , 善 田 種 。 人 性 質 直 彊 勇 , 少 牛 馬 , 便 持 矛 步 戰 。 食 飲 居 處 , 衣 服 禮 節, 有 似 句 麗 。: 그 토지(土地)는 기름지고 아름다운데, 산(山)을 등지고 바다(해?)를 향해 있으며, 오곡(五穀)은 마땅하며, 밭농사가 좋다. 사람들의 성질은 곧고, 강하며, 용감하며, 소와 말이 작고, 창과 보(步)전(戰)을 잘한다. 음식(飮食)과 사는 곳, 의복(衣服)과 예절(禮節)은, 구려(句麗)와 같다. 〔一〕
〔一〕 魏 略 曰 : 其 嫁 娶 之 法 , 女 年 十 歲 , 已 相 設 許 。 婿 家 迎 之 , 長 養 以 為 婦 。 至 成 人 , 更 還 女 家 。 女 家 責 錢 , 錢 畢 , 乃 復 還 婿 。 : 위략(魏略)에서 이르기를 : 그 시집가고 장가드는 법은, 여자는 십 세가 되면, 이미 서로 허락을 한다. 사위집에서 이를 맞아, 클 때까지 양육(養育)하여 부인으로 삼는다. 성인(成人)이 되면, 다시 여자 집으로 돌아오는데, 여자 집에서 돈을 요구하는데, 돈을 주고 끝마치면, 이내 다시 사위 에게 돌아온다.
其 葬 作 大 木 槨 , 長 十 餘 丈 , 開 一 頭 作 戶 。 新 死 者 皆 假 埋 之 , 才 使 覆 形 , 皮 肉 盡 , 乃 取 骨 置 槨 中 。: 장사를 지낼 때는 큰 나무로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 장(丈)이나 되고, 그 윗부분이 문을 하나 만든다. 새로 죽은 자는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태만 덮어 놓고, 피부와 살이 썩으면 이내 뼈를 취하여 곽 안에 둔다.
舉 家 皆 共 一 槨 , 刻 木 如 生 形 , 隨 死 者 為 數 。 又 有 瓦 ( ), 置 米 其 中 , 編 縣 之 於 槨 戶 邊 。: 집안 모두가 하나의 곽(槨)에 공동으로 들어가는데, 나무를 살아있는 형상처럼 깎는다. 죽은 자의 수와 같다. 또한 기와 ( )의 솥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 쌀을 넣고, 곽의 창문 한쪽에 걸어 놓아둔다.
毌 丘 儉 討 句 麗 , 句 麗 王 宮 奔 沃 沮 , 遂 進 師 擊 之 。沃 沮 邑 落 皆 破 之 , 斬 獲 首 虜 三 千 餘 級 , 宮 奔 北 沃 沮 。 : 관구검(毌丘儉)이 구려(句麗)를 칠 때에, 구려(句麗)왕(王) 궁(宮)이 옥저(沃沮)로 도주하였는데, 진격하여 이를 쳤다. 옥저(沃沮)의 읍락(邑落) 모두가 패배하여, 포로와 3천여 급(級)의 머리가 베어졌다. 궁(宮)이 북옥저(北沃沮)로 달아났다.
北 沃 沮 一 名 置 溝 婁 , 去 南 沃 沮 八 百 餘 里 , 其 俗 南 北 皆 同 ,與 挹 婁 接 。 挹 婁 喜 乘 船 寇 鈔 , 北 沃 沮 畏 之 , 夏 月 恆 在 山 巖 深 穴 中 為 守 備 , 冬 月 冰 凍 , 船 道 不 通 , 乃 下 居 村 落 。: 북옥저(北沃沮)는 일명 치 구루(置溝婁)인데, 남옥저(南沃沮)에서 8백 여리를 가며, 그 풍속은 남북(南北)이 모두 같다. 읍루(挹婁)에 접(接)해 있다. 읍루(挹婁)는 배들 타고 노략질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데, 북옥저(北沃沮)는 이를 두려워하여, 여름에는 산속 바위 깊은 동굴 속에서 있으면서 수비하고, 겨울에 추워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에 내려와 촌락에서 산다.
王 頎 別 遣 追 討 宮 , 盡 其 東 界 。 問 其 耆 老 「 海 東 復 有 人 不」? : 왕기(王頎)에게 별도로 궁(宮)을 치라고 보냈는데, 그 나라 동쪽에 다하였다. 늙은 노인에게 물었다. 「바다 동쪽에는 또 사람이 없는가?」
耆 老 言 國 人 嘗 乘 船 捕 魚 , 遭 風 見 吹 數 十 日 , 東 得 一 島 , 上 有 人 , 言 語 不 相 曉 , 其 俗 常 以 七 月 取 童 女 沈 海 。 : 늙은 노인이 말하기를 나라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데, 풍랑을 만나 수십(數十)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나의 섬이 있어서, 그 위에 사람이 있는데, 동틀 무렵까지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는데, 그 풍속에 항상 칠월에 어린 여자아이(童女)를 바다에 받친다.
又 言 有 一 國 亦 在 海 中 , 純 女 無 男 。 又 說 得 一 布 衣 , 從 海 中 浮 出 , 其 身 如 中(國)人 衣 , 其 兩 袖 長 三 丈 。 : 또 말하길 한 나라가 역시 바다가운데에 있는데,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 또 설명하기를 바다에서 떠다니는 베로 만든 옷 하나를 얻었는데, 그 모양은 중국인(中國人)의 옷과 같고, 그 양 소매의 길이는 삼장이나 되었다.
又 得 一 破 船 , 隨 波 出 在 海 岸 邊 , 有 一 人 項 中 復 有 面 , 生 得 之 ,與 語 不 相 通 , 不 食 而 死 。 : 또 부서진 배를 하나 얻어, 파도가 밀려와 해안가에 닿았는데,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에 얼굴이 또 있어. 살아 있었지만, 말이 사로 통하지 앉자,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
其 域 皆 在 沃 沮 東 大 海 中 。: 이 지역은 모두 옥저(沃沮)동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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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위 기록에서 말하는 「해(海)」는 현재의 “바다”를 뜻하는 것일까? 이것을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의 주장대로 보면, 현(現) “동해바다”가 된다. 그러나 이 주장(主張)이 조작(造作)되고, 창작(創作) 역사소설(歷史小說)인 것은, 바로 “평양(平壤) 서(西)쪽에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➋ 원전(原典)의 말에 따르면, 「해(海)」는 바다일 수 없는 “내륙(內陸)해(海)」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통전(通典)이나 북사(北史)등의 후한(後漢)이후(以後)의 원전(原典)에는,
대륙(大陸)의 서(西)쪽 지방인 “하서회랑(河西回廊)으로부터 소 륵(疏勒)에 이르는 광활한 땅”에는 「주위가 천리(千里)나 되는 해(海 : 바다)와 수백(數百)리가 되는 해(海 : 바다)등 크고 작은 함수(鹹水)호와 담수(淡水)호가 있었다.」고 말하며, 신 강성(新疆省) 내에도 많은 내륙(內陸)해(海)가 있었다고 전하며, 지도에도 표기되어 있다. 또한 그 서북(西北)쪽 지방에는 “자이산 호. 발하슈 호. 이식쿨 호. 아랄 해. 카스피 해, 흑해(黑海) 등이 지금까지도 그 명맥(命脈)을 이어가고 있다.
➌ 위(魏)나라가 어디에 도읍(都邑)을 하고, 그 강역(疆域)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도 문제(問題)로 떠오르는데, 『대륙(大陸)의 옛 학자(學者)들은 동이전(東夷傳)의 옥저(沃沮)편을 인용(引用)하여, 저 먼 서(西)쪽 지방에 대한 정보(情報)를 얻으려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➍ 산해 경(山海經)의 「대 황 서경(大荒西經)이나 해외서경(海外西經)」의 방향은 정서(正西)으로부터 좌우(左右) 45도 방향이므로 「서남(西南). 정서(正西). 서북(西北)」정도로 볼 수 있는데, 당시(當時)로서는, 너무 먼 곳이며, 해외(海外)란 말은 천자(天子)의 통치(統治)가 미치지 않는 곳, 즉 천자(天子)의 위세(威勢)가 안 먹히는 곳이다.
➎ 이렇게 멀고 먼 서쪽의 상황(狀況)정보(情報)를 옥저(沃沮)의 ‘기 노(耆老)’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기록(記錄)으로 보면 간단한 문제(問題)다. 그곳 가까이에 “옥저(沃沮)”가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나, 대륙(大陸)의 많은 원전(原典)에서 옥저(沃沮)편을 인용(引用)하고 있다는 것을 어찌 설명(說明)할 수 있겠는가!
산해 경(山海經)을 보자,
<大 荒 西 經> : 大 荒 之 中, 有 山 名 曰 大 荒 之 山, 日 月 所 入 1. 有 人 焉 三 面, 是 顓 頊 之 子, 三 面 一 臂 2, 三 面 之 人 不 死 3, 是 謂 大 荒 之 野. : 대 황 서경 : 대 황(大荒)의 가운데에 대 황(大荒)산이란 이름을 산이 있는데, 해와 달이 이곳에 들어온다. 세 얼굴을 가진 사람이 있으며, 이는 전 욱(顓頊)의 아들이며, 얼굴은 셋이며, 팔은 하나인데, 얼굴이 셋인 사람은 죽지 않는다. 이를 말하면 대 황(大荒)의 들이다.
1 珂 案 : 此 大 荒 之 山 , 蓋 日 月 所 入 山 之 六 也 。: 원가(袁珂) : 대 황(大荒)산은 해와 달이 들어가는(지는) 산은 여섯 곳이다.
2 郭 璞 云 : 「 無 左 臂 也 」 郝 懿 行 云 : 「 說 文(十 四) 云 : 『 孓 , 無 左 臂 也 』 即 此 」 : 곽박(郭璞) : 「왼팔이 없다」 학의행(郝懿行)이 말하기를 : 「설문 14에서 이르기를 : 『혈(孑)은 왼 팔이 없다.』 곧 이것이다.」
3 郭 璞 云 : 言 人 頭 三 邊 各 有 面 也。玄 菟 太 守 王 頎 至 沃 沮 國, 問 其 耆 老, 云 『復 有 一 破 船, 隨 波 出 在 海 岸 邊, 上 有 一 人, 頂 中 復 有 面 , 與 語 不 解, 了 不 食 而 死』. 此 是 兩 面 人 也. 呂 氏 春 秋 曰 『一 臂 三 面 之 鄉』 也 。: 곽박(郭璞)이 말하기를 : 사람의 머리 세 곳에 각각의 얼굴이 있다. 현토(玄菟)태수(太守) “왕기(王頎)”가 “옥저(沃沮)”에 이르러, 그곳의 나이 많은 노인에게 물어보니, 말하기를, 『배 한 척이 부서져 파도에 밀려 해안 가에 왔는데, 배위에 한 사람이, 정수리 가운데에 또 얼굴이 있었는데,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먹지 못하고 마침내 죽었다. 』 이 사람은 두 얼굴을 가졌다. 여 씨 춘추(呂氏春秋)에서, 『팔 하나에 세 얼굴을 가진 곳이다.』라 하였다. 珂 案 : 郭 說 本 三 國 志 魏 志 東 夷 傳 , 所 引 呂 氏 春 秋 求 人 篇 文 , 云 「 禹 西 至 三 面 一 臂 之 鄉 」 。 注 文 「 頂 中 復 有 面 」 句 , 宋 本 、 明 藏 本 、 毛 扆 本 、 吳 任 臣 本 、 畢 沅 校 本 、 百 子 全 書 本 , 頂 均 作 項 , 三 國 志 魏 志 東 夷 傳 亦 作 項 , 作 項 是 也 , 頂 字 訛 。: 원가(袁珂) : 곽박(郭璞)이 설명(說明)은 본래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이다. 여 씨 춘추(呂氏春秋) 구인(救人)편의 글에 : 전하기를 「우(禹)임금의 서쪽에 이르는 곳에 세 얼굴과 한 팔을 가진 자들의 고을(고향)이다.」주(注)의 글(文)에서 「정수리 가운데에 또 얼굴이 있다.」는 글귀는, 송본(宋本). 명(明)장본(藏本). 모의(毛 扆)의 본(本). 오임 신 본(本). 필원(畢沅)의 교본(校本). 백자전서 본(本)등에서는, 정(頂) 자로 같이하고 있으나,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은 항(項)으로 되어 있으며, 항(項)이며, 정(頂)자는 그릇된 것이다.
<海外西經> : 女 子 國 1 在 巫 咸 北 ,兩 女 子 居 ,水 2 周 之 3 。一 曰 居 一 門 中 4. : 여자국은 무함(巫咸)의 북쪽에 있고, 물 주변의 양쪽에서 사는데, 한마디로 하나의 문중(門中)에서 산다.
1 珂 案 : 淮 南 子 墬 形 篇 有 女 子 民 。大 荒 西 經 云 : 有 女 子 之 國 。 三 國 志 魏 志 東 夷 傳 云 :( 沃 沮 ) 耆 老 言 : 有 一 國 亦 在 海 中 , 純 女 無 男 。 後 漢 書 東 夷 傳 云 : 或 傳 其 國 有 神 井 , 窺 之 輒 生 子 。即 此 類 也 。: 원가(袁珂) : 회남자(淮南子) 지형 훈(墬形訓)편에도 여자(女子)민(民)이 있다. 대 황 서경(大荒西經)에서 이르기를 : 여자 국(女子國)이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서 이르기를 : (옥저(沃沮))의 노인들이 말하기를 : 바다 가운데 한 나라가 있는데, 남자는 없고, 여지만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서 이르기를 : 혹 전하는 바로는 그 나라 안에 ‘신정(神井)’이 있는데, 엿보면 문득(번번이)자식이 태어난다고 하였다. 즉 이 종류이다.
3 郭 璞 云 : 「 有 黃 池 , 婦 人 入 浴 ,出 即 懷 妊 矣 。 若 生 男 子 , 三 歲 輒 死 。 周 猶 繞 也 。 離 騷 曰: 水 周 於 堂 下 也 」 珂 案 : 御 覽 三 九 五 引 外 國 圖 云 : 「 方 丘 之 上 , 暑 溼 生 男 子 , 三 年 而 死 。 有 黃 水 , 婦 人 入 浴 , 出 則 乳 矣 。 去 九 嶷 二 萬 四 千 里」 蓋 本 郭 注 為 說 也 。: 곽박(郭璞)은 : 「황지(黃池)가 있는데, 부인(婦人)이 이곳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나오면 곧 회임(懷妊)을 한다. 만일 남자가 태어나면, 세 살에 번번이 죽는다. 두루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소(離騷)의 말에 다르면 : 물 주변은 집의 아래에 있다. 원가(袁珂) : 태평어람(太平御覽)395 외국(外國)도에서 말하기를 : 「방구(方丘)위에서, 여름 축축할 때 남자가 태어났는데, 세 살 때 죽었다. 황수(黃水)가 있는데, 부인(婦人)이 들어가 물로 몸을 씻으면, 적이 나온다. 구의(九 嶷)는 24천리를 간다.」곽박(郭璞)의 주(注)에서 해설하고 있다.
4 郝 懿 行 云 : 「 居 一 門 中 , 蓋 謂 女 國 所 居 同 一 聚 落 也 」 珂 案 : 郝 說 非 也 。 所 謂 「 居 一 門 中 」 者 , 亦 圖 象 如 此 , 猶 「 兩 女 子 居 , 水 周 之 」 之 為 另 一 圖 象 然 。: 학의행(郝懿行)의 말에 따르면 : 「하나의 문중(門中)에서 산다는 것은, 여국(女國)이 같은 하나의 취락(聚落)에서 사는 것이다.」 원가(袁珂)안(案) : 학의행(郝懿行)의 설(說)은 아니다. 소위(所謂) 「한 문중에 산다.」란 것은, 또 그림에서 이것이 같다는 것이며, 오히려 「양 여자들이 사는 곳은 물가이며」하나의 그림은 당연한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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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제(問題)에 대해서는.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등을 떠나서, 조선사(朝鮮史)를 공부하고 연구(硏究)하며, 애정(愛情)을 갖고 있다면 꼭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問題)다. 『옥저(沃沮)는 평양(平壤)의 서쪽에 있으며, 옥저(沃沮)의 서쪽에 개마대산(蓋馬大山)=단단 대령(單單大嶺)이 있고, 이 큰 산맥(山脈)은 또 원(元)나라와 고려(高麗)의 경계(境界)였다』는 사실(事實)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세(地勢)와 현(現)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에 대한 정보(情報)를 얻는 옥저(沃沮)등을 연계(連繫)시킬 수 있는,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반도(半島). 북방삼성(北方三省). 중원(中原)대륙(大陸)>등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란 것을 알아 둘 필요(必要)가 있다.
더하여, 『총령(蔥嶺)의 물중에서, 동(東)쪽의 물은 하(河)의 근원(根源)이며, 동(東)쪽으로 흐르고, 서(西)쪽의 물은 서(西)쪽으로 흘러, 바다(海)로 들어간다.』는 옛 고전(古典)의 말을 이해한다면,
총령(蔥嶺)의 서쪽에 있었다는 여국(女國) 또는 여인국(女人國)등에 관한 정보(情報)를 기존사학(旣存史學)에서 중원(中原) 대륙(大陸)에 있었다는 왕조(王朝)에서, 옥저(沃沮)를 통해 습득(習得)했다는 것은, 의미심장(意味深長)한 일인 것이다.
『서역(西域)이니, 서토(西土)』 니 하는 말 역시, 『총령(蔥嶺)을 분수령(分水嶺)으로 한다.』는 사실(事實)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말은 현(現) ‘신 강성(新疆省)’지방을 ‘서역(西域)’이라 했다는 말은 후대(後代) 사가(史家)들의 붓장난에 의한 결과(結果)일 뿐, 역사적(歷史的)인 사실은 아니다.
대륙조선(大陸朝鮮)이든, 반도조선(半島朝鮮)이든, 중아조선(中亞朝鮮)이든 간에,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수억(數億)년, 수천(數千)만년 전, 수백(數百)만년 전에 이미 형성(形成)되었다는 것을 인식(認識)하고, 조선(朝鮮)의 지리적(地理的) 환경(環境)에 대한 연구(硏究)검토(檢討)가 필요한 것이다.
경향신문(京鄕新聞) 보도에 다르면, 『명성황후(明成皇后)는 그 당시(當時)에 시해(弑害)되지 않고, 생존했다는 과거의 비밀(秘密)문건(文件)이 발견(發見)되었는데, 그 진위(眞僞)여부(與否)는 더 많은 연구(硏究)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글을 보았는데,
<1895년 10월8일 새벽>이라면 이제 겨우 117년 전의 이야기다. 도대체 “조선사(朝鮮史)”의 미스-테리는 어디까지며, 언제까지 장막(帳幕)속에 드리워져 있을 것인지, 참으로 애석(哀惜)한 일이다.
2013년 07월 01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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