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광야에서 불 뱀을 만났을 때! (민 21:4-9)
들어가는 이야기
나이트클럽에서 부킹으로 만난 남자들을 특정한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서 바가지를 씌운 여성들이 입건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이 식당은 꽃뱀 여성들을 고용해 터무니없는 가격에 음식을 팔고 있었습니다.
식사의 경우 1만 원 짜리를 3만원에, 한잔에 5천 원 하는 와인을 10배나 비싼 5만원에 팔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 끼 식사대금은 평균 50만원을 훌쩍 넘었고 심지어 100만원, 200만원을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레스토랑이 꽃뱀 여성들을 고용해 지난해 9월 30일부터 12월 30일까지 332명에게 바가지 씌운 금액이 무려 1억 6천만 원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사는 꽃뱀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확인케 해 주는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정도는 애교로 봐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꽃뱀에 물려 패가망신하고 인생을 망친 경우도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본문 속으로
오늘 본문에는 이 꽃뱀보다 훨씬 더 무서운 불 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한 기간을 보통 40년으로 잡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40년 광야생활의 막바지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론의 죽음으로 구세대가 마감되고 신세대는 새로운 각오로 가나안 땅을 향하여 호르산을 출발하게 되는데 첫 출발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1절 이하에 나오는 대로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아랏의 왕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첫 전투에서 승리를 맛보았던 이들은 얼마나 자신감이 충만하였겠습니까?
가나안 땅도 점령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로 희망차게 행군을 시작하였던 이들에게 낙심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에돔 왕이 자기 땅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아서 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먼 길을 우회해야 했던 것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자손으로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과는 형제나라입니다.
형제나라는 자기들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알았는데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그래서 먼 길을 돌아가야 했을 때 이들은 마음이 상하여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이들 신세대도 구세대와 마찬가지로 조금만 어려우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평하고 불만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을 흔히 광야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광야생활을 할 때 얼마나 마음 상하고 힘든 일이 많겠습니까?
모든 일들이 내가 생각하고 내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은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성공적인 직장생활 속에서도 남모르는 고민이 있고, 학교생활을 하는 자녀들에게도 많은 문제들이 있고, 가정을 꾸려가는 주부들에게도 알지 못하는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광야생활 자체가 힘들 듯이 우리의 인생자체가 힘든 하루하루입니다.
나는 직선으로 빨리 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자꾸만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인도하십니다.
나는 하루빨리 이루고 싶은데 하나님은 자꾸만 미루시고 더디게 하십니다.
나는 성공하고 싶은데 내 생각대로 성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바라던 기대가 무너지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크고 작은 일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 여러분,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짜증을 내며 원망하며 불평불만하기가 쉽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마저도 원망하였습니다.
이곳에는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먹을 것이 없어서나 마실 물이 없어서 죽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원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불평하였습니다.
성도여러분, 불평과 불만은 우리의 삶의 갈림길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 멸망의 길로 죽음의 길로 저주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욥과 같이 원망하지 아니하고 범죄하지 아니하면 생명의 길로 축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불 뱀을 보내신 하나님
이렇게 불평하고 불만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해 하나님은 불 뱀을 보내셨습니다.
이 불 뱀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 불평불만하며 원망하며 지은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 불 뱀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먼저, 이 불 뱀에 물린 사람은 큰 고통을 겪으면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불 뱀이라는 단어는 어원상 ‘태우다’는 동사에서 왔는데 이 뱀에 물리면 불에 데는 것 같은 심한 고통을 느끼고 점점 독이 퍼져서 피부가 새까맣게 타면서 서서히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불 뱀은 아무나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200만의 회중 속에는 원망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고 원망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 뱀은 그것을 가리지 않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원망한 사람이니까 내가 물어야겠다.’ 그래서 물고 ‘이 사람은 원망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물지 않아야겠다.’ 그래서 안 물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뱀이 어떻게 그런 생각과 지각을 갖고 있었겠습니까?
만나는 사람 누구나 구분하지 않고 물었습니다.
세 번째로 이 뱀의 특징은 예기치 않게 물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이 뱀이 나타날지 사람들은 예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불 뱀의 특징은 오늘 이 시대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고통과 아픔이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제가 인생을 그렇게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사는 것이 다 그렇고 그렇다는 것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똑똑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잘 사는 사람이나 조금 못 사는 사람이나 사는 것이 다 비슷하고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모두가 아프고 질병에 시달리고 크고 작은 문제들에 노출됩니다.
고민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없고 스트레스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의 생활을 했을 때 누구나 광야의 환경에 지배를 받아야했듯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도 똑같이 인생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크고 작은 문제들에 노출되면서 고통을 당하다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설교연구모임에서 만나는 한 목사님 사모님이 중한 병을 앓고 참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사님보다 사모님의 안부를 묻게 되는데, 그러면 목사님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예 잘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그 말을 생각해보니 정말 진리입니다.
그 사모님과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도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언제 죽느냐 하는 차이점만 있는 것이고 얼마나 적은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느냐? 하는 차이점만 있을 뿐이지 누가 죽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 뱀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모세가 기도한 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불 뱀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물고 그것에 물린 자가 고통을 당하며 죽어가자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못한 것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모세에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백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모세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한 처방을 내려주시는데,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고 불 뱀에 물린 자가 그것을 쳐다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처방을 내려주신 후에도 그 불 뱀은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당신이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그렇게 요구했지만 하나님은 구리 뱀을 매달아 그것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떠나게 하면 구리 뱀을 만들 이유가 없었습니다.
떠나지 않고 계속 있었기에 구리 뱀을 만들었고 불 뱀에 물린 자는 그것을 바라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방은 없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린 자가 나을 수 있는 처방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 그대로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는 불 뱀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찌르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통 바울을 괴롭힌 육체의 병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육체의 가시가 너무 아파서 이 병이 없어지기를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시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두셨습니다.
그래서 평생 이 가시를 갖고 고통 속에서 살아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과 아픔의 불 뱀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단의 가시가 없어지지 않고 육체의 질병이 우리를 아프게 찌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인생의 아픔과 고통이 다 없어진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구리 뱀을 허락하신 하나님
그러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의미가 무엇이고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축복이 있고 의미가 있고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불 뱀에 물린 자가 나을 수 있는 방법을 허락하셨는데 그것이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고 그것을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 뱀에 물린 자가 낫는다는 것입니다.
구리 뱀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불 뱀에 물린 자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물고 괴롭히고 죽게 만드는 불 뱀이 우굴 거리는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해결책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인생을 벗어나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참으로 뱀이 많았습니다.
저는 뱀을 상당히 무서워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둘둘 말린 물뱀을 고기인줄 알고 잡고 나서 뱀은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때 아이들 가운데 회자되었던 방법이 뱀에 물리면 물린 자리위에 끈으로 감아라. 상처 난 부분을 절개해서 입으로 독을 빨아내라. 심지어는 모래를 먹어라. 는 처방 등이 있었습니다.
앞의 두 가지는 그래도 과학적인 근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왜 모래를 먹으라고 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가 독사에 물린 적이 없었던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잘못했으면 모래 먹다가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이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습니다.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느냐의 여부를 보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방법이지만 그러나 그 방법에 따르는 자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다른 방법을 따르면 그 사람은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문제도 해결책은 우리 하나님께 있는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고 인생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인간이 생각하는 것하고는 많이 차이가 있습니다.
때때로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인간의 눈에 지혜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도 합니다만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결책이 있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선행을 행하고 좋은 일,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들속에서 구원을 받는 것도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불 뱀에 물린 자가 구원을 받은 것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죽음의 사자에게서 구원을 받은 것이나, 나아만이 문둥병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나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그 분의 말씀을 따르는데서 나타난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방법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불 뱀이 두렵지 않은 줄 믿습니다.
치료방법이 없을 때는 늘 두렵고 긴장이 되고 그래서 밖으로 나가기를 주저하였는데 이제는 더 이상 불 뱀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구리 뱀이라는 해결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의 삶에는 평안이 찾아왔고 안정을 누리게 되었고 용기를 갖고 살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자시감이 생겨서 밖에 나가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불 뱀을 만나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불 뱀과 싸워서 불 뱀을 물리치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구리 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찬송가 421장에 보면, ?“내가 예수 믿고서 죄 사함 받아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내가 가는 길 천국길이요 주의 피로 내 죄가 씻겼네.?
광야같은 세상이지만 예수 믿고 죄 사함받은 자의 삶은 고통의 삶이 아니라 천국의 삶으로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3절에 ♪내게 성령 임하고 그 크신 사랑 나의 맘에 가득 채우며 모든 공포 내게서 물리치시니 내 맘 항상 주 안에 있겠네.“♪(찬송가 421장)
모든 공포 내게서 물리치시니-죽음의 공포 질병의 공포를 다 물리치고 항상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성도 여러분, 구원받은 자의 믿음으로 이러한 평안과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불 뱀의 고통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축복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불평하고 불만하고 믿음으로 살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각종 불 뱀이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괴로워하지 마시고 불안해하지 마시고 우리의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예수님을 믿어야 불 뱀의 고통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다 내려놓고, 세상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을 바라볼 때 그 분을 믿을 때 여러분에게 구원이 임하고 평안이 임하고 안정이 임할 것입니다.
구리 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봄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용기를 가지고 승리하는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용남 목사 / 놋 뱀! (민 21:4-9)
일본 나라현에 가면 토다이지(東大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764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1633년
을 비롯하여 여러 번 소실되었다가 1894년에 오늘의 모습으로 완전히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본래의 크기보다는 33% 정도로 축소된 건물이지만 세계에서 제일 큰 목조 건물로 일본 사
람들이 자랑하는 국보입니다.
그런데 이 절 안에는 동으로 만든 불상이 있습니다. 앉아 있는 불상의 높이만 14.98미터에
달하여 건물로 따져도 4층 정도의 높이입니다. 부처의 머리만 5.41미터, 눈의 길이가 1.02미
터, 귀의 길이는 2.54미터입니다. 손바닥의 넓이가 얼마나 큰지 장정 16명이 올라가 설 수
있을 정도로 크다고 합니다.
부처의 자비가 해처럼 온 세상에 비치게 된다는 상징으로 이 절을 만들었고 부처상을 세웠
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평화와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기 위하여 부처에게 기도
한다고 합니다. 수많은 관광객과 아울러 오늘도 이 절에는 이렇게 기원하기 위하여 수를 헤
아릴 수 없는 일본인들이 향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부처상 뒤에 있는 절의 기둥 가운데 하나에 부처의 코구멍 크기의 구멍이 있는 기둥이 있었
습니다. 그 구멍을 잘 통과하는 사람은 운수가 대통한다는 속설이 있어 사람들이 그곳을 통
과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통과했는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습니다. 마침 한 외국인이 그곳을 통과하려고 애를 쓰다 결국은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놋으로 만든 물건이 하나 등장합니다.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길목에 있는 에
돔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땅을 통과하여 가나안에 이를 수 있도록 부
탁하였습니다. 그런데 에돔 왕은 박절하게(기분 나쁘게) 거절하였습니다(민20:14-21). 백성은
할 수 없이 홍해 길로 내려가 에돔 땅을 돌아가야 했습니다(민21:4). 험난하고 더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하는 백성들은 또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공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불뱀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하였습
니다. 얼마나 맹독을 품고 있었는지 물리는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화급한 백성들은 모세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면서 뱀을 물리쳐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본뜬 놋뱀
을 만들어 장대에 매어 달고 그것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
세가 전혀 예기치 못한 일로서 매우 어리석은 방법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봄으
로써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믿고 바라본 자는 다 살
아났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음 속에 숨어 빛나는 '하나님의 지혜'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습
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매우 단순한 방법으로 구원의 길을 제
시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섭리하시고, 진정 당신께 순종하
는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하여 에돔 땅 통과 요청을 하
였습니다. 이에 대해 에돔 왕이 단호히 거절하여 홍해를 향해 나가는 광야의 길로 우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은 '홍해 길'로 사해 남
부에서 '아라바 광야'(수 11:2)로 거쳐 홍해의 동쪽에 위치한 '에시온게벨'(왕상 9:26)에 이
르는 길이었습니다. 그 대부분이 사막지대인 아라바 광야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매우 거칠
고 여행하기 힘든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1세대 역시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가
데스에서 다시 돌이켜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갔었던 적이 있었습니다(민 14:25). 그
길은 가나안에서 점차 멀어질 뿐만 아니라 매우 험한 길을 가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의 마음
은 크게 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이 상했다'는 말은 '마음이 짧아졌다', '안목이 좁아졌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
성은 하나님의 크신 경륜과 그들을 향하신 뜻을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고
통을 인하여 근시안이 되었습니다. 지리적 조건이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무시하고 소망과 믿음이 짧아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을 들어내는
큰 잘못입니다. 바로 눈앞에 시련이 있어도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하며
순종하는 성도가 지혜로운 것입니다. 환경과 조건을 이유로 마음이 옹색해진 이스라엘은 불
평과 원망으로 인하여 결국은 더 큰 실패의 고통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상하여 있으니 순종할 리가 없고 감사가 나올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더욱
큰 것은 보지 못하고 당장 보이는 것에만 집착해 있었습니다. 눈앞의 현실이 자기들에게 유
리하다고 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다가 그렇지 못할 때에 마음이 상하고 불평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의 태도입니다. 그러한 신앙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도 생활 가운데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일수록 당장 보이는 것으로
인하여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해야 그것인 건강하고 바른 믿
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고생하는 것이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을 나
오게 한 모세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이러한 백성의 원망은 여정 가운
데서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불평이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죽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멸시하는 죄악이었습니다. 성도는
어려움을 당할 때 진실한 신앙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 자체를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
성의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박한 식물을 인해서도 원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박한'이라 단어는 '악한
', 또는 '무시할 만한'이란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만나'를 멸시한 백성들의 완악함
을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비뚤어져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몹시 지겨
워하였습니다. 단순히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나아가서는 그 '만
나'가 없어지고 끊어지기를 바라는 감정적 반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육의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을 거스르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롬
8:6).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큰 희생을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불뱀이라 함은 뱀에서 불이 나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긴 모양이 붉은 색을 띠어 불처럼
보였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뱀의 맹독성 때문에 물린 사람들이 불덩이처럼 열이 오르게 되
어 생명을 잃게 되는 현상 때문에 붇쳐진 이름이라 생각합니다. 뱀에 물려 고통을 당하거나
생명을 잃으면서 그제야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우매함을
깨달은 백성들이 모세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며 살길을 찾았습니다.
백성을 위해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불뱀의 형상을 만들
어 장대 위에 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장대'에 해당하는 '네쓰'라는 히브리 말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의미의 '여
호와 닛시'(출 17:15)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대'는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세운 기(旗 렘 50:2, 사 11:2)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 표식은 바로 '불뱀의 형상으로 만들
어진 놋뱀'이었고, 그 정보는 '그것을 보면 살리라'는 것입니다. 즉 치명적인 독을 가진 불
뱀을 놋뱀으로 극복한 하나의 승리의 소식, 즉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독뱀에 물려 소망이 없이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 그냥 놋뱀을 바라봄으로써 얻는 구원이 선
포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는 그들에게 구원은 값없이 주어졌습니
다. 그들의 어떤 공로나 그들의 어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들이 하늘 높이 들린 놋뱀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었
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무런 조건 없이 바라만 보면 해결된 것입니다. 단순하면서
도 전적인 신뢰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생사가 달린 죽음 앞에서 살 길이 어디 있는 지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구리로 만든 뱀을 처다 보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의 길이
있다는 말은 믿음이 없이는 결코 받아 드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유일한 구원
의 길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리
뱀을 처다 본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놋뱀을 처다 본 사람은 누구든지 다 구원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은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래서 로마서 4장 5절에서는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
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 대로입니다.
뱀은 여느 짐승과는 달리 이방 세계에서 이방신들의 능력에 의한 풍부와 치유의 상징이었습
니다. 이집트에서는 사람을 영원으로 인도하는 인도자로 상징하였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그
것을 처다 봄으로 죽음에서 살게 하신 것은 뱀 숭배를 인정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놋뱀을 사용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는 이스라엘의 우매함을 없애기 위하여 히스기야가 종교 개혁
을 하면서 열왕기 하 18장 4절에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
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
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느후스단이란 말은 그들이 신성시 하고 무슨 능력이
라도 있는 것처럼 섬기는 놋뱀이 단순한 놋 조각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놋뱀
이 아니라 그것을 처다 보면 죽음에서 벗어나게 됨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그 능력입
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장엄한 놋 주조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냥
놋 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놋뱀을 쳐다봄으로써 산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뢰해야 구원
받을 수 있음을 상징한 것입니다. '바라보다'가 '하나님을 바라보다'는 뜻으로 쓰일 때는 '
여호와께만 눈을 고정시키고 유일한 도움이신 여호와의 뜻을 따라 살아가다'란 의미를 포함
하고 있습니다(시 34:5; 사 51:1; 22:11). 본문 역시 온전한 믿음과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놋뱀
을 달아 놓은 장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불뱀에게 물린 상처와 모든 증상이 말끔히 낫게 되
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쳐다보는'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통해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요 3:16).
어느 목사님의 경험담입니다. 어느 날 한전에서 어떤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검침하러 온 줄
알았는데 두 달 분 전기세를 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과태료까지 붙은 청구서를 제시하였습니
다. 분명 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영수증을 보여 달
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냈다고 하여도 영수증을 보여 달라고 막무가내였습니다. 직원은 과
태료까지 포함된 고지서를 놓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영수증을 찾아보았더니 마침 있었습니
다. 그래서 영수증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말하기를 '목사는 안 믿고 영수증만 믿
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막무가내였던 사람이 영수증을 보더니 기가 꺾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기가 살아
분명히 낸 것을 왜 이중으로 내라고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조금 전 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당당하던 사람이 영수증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영수증이 그렇게 센 힘을 가졌으리
라 생각지 못했다고 합니다.
놋뱀과 십자가 (민21:4~9)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수기 21:4-9)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 간의 노예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애굽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애굽을 떠나는 날부터 원망을 시작했고 결국은 그 원망 때문에 다치고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행을 겪게 되었습니다.
1. 저들이 왜 원망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길이 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4절을 보면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을 애굽에서 살았던 탓으로 여행을 해본 일도 없었고 애굽이외의 나라를 가본 적도 없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횡단하며 겪은 일들은 어렵고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갈 길은 멀고 기후는 나쁘고 길도 없었습니다. 이정표도 없고 방향도 잘 모릅니다. 제멋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가라면 떠나고 서라면 멈춰야 합니다. 거기다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오합지졸입니다. 왜 불평이 안 일어났겠습니까?
그러나 더 문제는 4절 끝의 "마음이 상하니라"였습니다. 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길이 험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험했던 것입니다. 마음이 편하면 몸도 편하고 길도 편하고 하는 일도 편합니다. 그리고 결과도 편합니다.
어떤 주인이 두 종을 불러 각각 집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집 지을 대지, 건축비를 똑같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은 주인이 살집이라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지었습니다. 자재도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쓰고 건축비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2년쯤 지난 후 걸작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평소 마음이 편치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평소 주인이 하는 일도 마땅치 않았고 자신이 종이라는 것도 싫었습니다. 늘 불평스럽고 짜증스런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이 집을 지으라고 하자 그는 속으로 주인이 살 별장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는 집 한 채면 됐지 돈푼이나 있다고 별채까지 짓는다며 불평했습니다.
건축자재도 제일 싼 것으로, 건축비용도 3분의 2는 제주머니에 챙기고 3분의 1만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한마디로 형편없는 졸작이 된 것입니다. 건축이 끝나자 주인이 두 종을 불렀습니다.
"집 짓느라 수고들이 많았다. 그동안 너희들이 나를 위해 충성을 다 한 보답으로 집을 한 채씩 선물로 주고자 한다. 너희들이 지은 집은 너희들이 살집이다. 선물로 받아주기 바란다"라며 한 채씩 선물로 주었다는 이 이야기는 이미 우리가 알고 들은 이야기입니다. 누가 기뻐했고 누가 후회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불평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하고 원망이 들끓었던 것입니다.
둘째, 먹고 마시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민수기 20:2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마시는 물 때문에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고 다투었다고 했고, 21:5을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20:5을 보면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며 원망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를 향한 그들의 불평과 원망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다는 점입니다.
출애굽기 17:2을 보면 "백성이 모세와 다투었다"고 했고,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7:7을 보면 "그 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20:13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라고 했고, 21:5을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간 광야생활을 했지만 단 한 명도 목말라 죽거나 배고파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고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그것말고 정력에 좋은 것들, 스테미너 식, 군것질할 것들이 없다며 원망한 것입니다. 식도락도 혐오식품을 찾아다니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것 먹으러 태국, 필리핀, 중국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데 끼면 안됩니다.
환경연구전문가인 유미호 씨가 쓴 글에 의하면 잘못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아이들의 경우 정신이 산만해지고 욕구불만이 쌓이고 성급하고 폭력적이고 발육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일회용품 그릇은 대개 멜라민 용기인데 거기서 독성물질이 나오고 화학조미료나 패스트 푸드등도 건강을 해친다고 합니다. 실험 결과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먹인 닭들이 보통 옥수수를 먹인 닭들보다 2배 이상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굶어서 생기는 병보다 너무 잘 먹어서 생기는 병이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하나님이 주신 식물에 실증을 느끼고 원망하다가 결국 그들의 영혼까지 병들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유미호씨는 다음과 같이 글을 끝맺었습니다. "을 먹을 땐 입안에서 적어도 30번씩 씹어보자. 꼭꼭 씹으며 이 먹거리가 어디서 왔을까, 내 입으로 들어간 먹거리들이 결국 어디로 갈까, 나는 이 음식을 먹을 만하게 정성껏 살았는가, 천천히 공손하게 먹자"고 했습니다.
나쁜 것은 먹지 맙시다. 감사하며 먹읍시다.
셋째,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0:12을 보면 "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고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지도자였던 모세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문제였습니다. 모세에게 대들고 모세에게 덤비고 원망하고 시비를 건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14을 보면 "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했습니다. 그 뜻은 "나는 나다"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3을 보면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라는 뜻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시편 136:2을 보면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고 3절에서는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비교할 신이 없으신 하나님, 오직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구원도 무너지고 기도도 무너지고 축복도 무너져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신앙이 무너지는 바람에 다 무너진 것입니다.
2.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고 했습니다. 원망, 불신, 배신의 결과는 저주, 재앙, 죽음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결과는 같습니다. 감사하면 살고 원망하면 죽습니다. 믿으면 되고 안 믿으면 안됩니다.
3.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위기를 수습했는가 입니다.
7-9을 보면 백성들이 원망하므로 범죄했다며 기도해 살길을 열어 달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 참담한 상황을 놓고 하나님께 회개와 용서의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사건이 중요합니다.
9절을 보면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 즉 살더라"고 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놋으로 만든 뱀은 아무런 힘도 신통력도 치유능력도 없는 무생명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이었기 때문에 쳐다본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14-15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셨다는 점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바라보라 그러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바라보는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그대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슨 소리, 뱀독이 퍼져 가는데 구리뱀 바라보면 산다고? 허튼 소리, 병원에 가야 할지. 독을 빼야 살지, 응급처치를 해야 살지"라며 그 날 거기서 놋뱀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죽었습니다. 십자가 믿고 구원받는 것도 같습니다.
"2천년 전에 죽은 예수를 믿어야 산다니 허튼 소리야 그건 말도 안 된다. 현대의학이나 과학이 있는데 무슨 미신 같은 소리야"라며 믿지 않으면 누구라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그대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단순사고라야 성립됩니다.
놋뱀을 몇 분 이상 바라보아야 하느냐? 어떤 쪽에서 바라보아야 하느냐? 각도는 어느 정도라야 하느냐? 바라보는 눈의 크기는 어느 정도라야 하느냐? 바라볼 때 곁에 누가 있어야 하느냐 등을 생각하고 따지면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그 말씀을 믿고 십자가 바라보고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장대에 매단 놋뱀을 바라보는데 뭐가 필요합니까? 과학도 철학도 문학도 예술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죽기 일보 전에, 독이 퍼지기 전에, 숨이 끊기기 전에 빨리 바라보아야 합니다. 회의를 할 필요도 없고, 다수결로 결의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여기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따지고 사색하고 연구하고 미루지 마십시오.지금 여기가 중요합니다.
출처: 여호와닛시♥ 글쓴이: 주님의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