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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로뎀나무님
주 안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님께서는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대한
개혁주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여 물으셨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그러면서 말이죠. 즉, 님이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대한 개혁주의적인 입장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셨기에 이에 대한 답변을 드리면서, 이왕 이에 대하여서 답변을 드리는 것에서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비롯하여서 교회가 교회력에 의해서 지켜오고 있는 교회절기들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무엇 때문에 이런 것을 교회절기로 지키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그리고 과연 이런 교회절기를 지키는 것이 성경의 관점에서와 개혁교회의 신앙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입장에서 옳은 것인지를, 그리고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서도 함께 아우러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국한해서만이 아니라 (교회)절기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 속에서 설명을 드리는 답변을 하고자 합니다.
이에 따라서 부득불 글이 상당히 길어질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이 글을 쓰는 약간의 수고를 하는 만큼, 님께서도 수고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님이 저의 답변이 길게 된 것에 대해서 그 글을 읽으시고는 님의 생각 속에서 잘 정리하셔서 님이 갖는 견해(생각)의 글로 잘 요약하여 간략히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수고는 님의 몫으로 남겨놓겠습니다. 이는 님에게서도 님 자신이 질문한 것에 대해 님 스스로 답변을 하며 알아가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이제, 먼저 ‘사순절’과 ‘고난주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 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대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지금의 교회는 ‘교회절기’란 것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가 지켜오고 있는 이 교회절기란 것은 구약성경에서 보게 되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절기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선 교회가 지켜오고 있는 것은 구약의 유대인이 유대력(유대달력)에 의해서 절기를 지켜왔듯이 교회력(교회달력)을 갖고서 이것에 의해서 교회가 절기를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음력에 의해서 매년 주기적으로 날과 달과 사계절을 가져왔는데 지금은 양력을 따르고 있듯이, 유대인이 유대력에 의해서 절기를 지켜온 것을 따라서 지금의 교회가 교회력을 가지고서 교회절기를 지키려고 하는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유대인이 지켜온 절기는 크게 ‘3대절기’인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을 비롯해서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유월절-무교절-초실절-맥추절(칠칠절, 오순절)-나팔절(신년절)-속죄일-수장절(장막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절기는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의 실체이신 그리스께서 오셔서 절기와 이때 드려진 제사를 통해서 언약하신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이루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구약성경의 절기를 더 이상 행하여 따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개신교가 지키는 교회 절기는 ‘대강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오순절)-맥추절-추수감사절’의 순서를 따라서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순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시작으로 해서 그분의 구속 사역과 관련하여서 절기를 갖고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맥추절’이나 ‘추수감사절’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도 아무런 연관을 갖지 않음에도 구약성경의 ‘맥추절’과 ‘수장절’을 따와서 함께 섞어 혼합하여서 지키고 있는 참으로 이상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습니다. 본래 교회가 지켜온 교회절기는 ‘맥추절’과 ‘추수감사절’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대강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오순절)’의 순서로 이것을 중심으로해서 ‘OO절 후 몇 번째 주일’하면서 지켜왔었습니다. 그러한 교회력에 의한 교회절기가 이후 본래의 교회력과는 상관없이 ‘맥추절’과 ‘추수감사절’도 추가하여 이를 따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교회력에 의한 교회절기는 사실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성경에서 교회절기로 주시거나 그에 대한 어떤 가르침을 주신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교회가 이것을 만들고 지켜온 일을 한데 따라서 있는 것일 뿐이요, 더욱이 이러한 교회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하여 개혁주의 신앙에 서 온 개혁교회는 반대하며 금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교회를 말하는 개신교가 여전히 지켜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비성경적이요, 사실 개혁주의 신앙에 반하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절기는 전세계적으로 전통 예배를 중시하며 이를 따르는 카톨릭교회와 루터교회, 그리고 성공회가 교회력에 따라 교회 예배를 진행하고 있으며, 여기에 일부 북미의 일부개신교회들도 이를 채택하여서 따르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지금의 교회에서 보게 되듯이 점차 그 수가 확대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면 교회력에 의해서 교회가 지키고 있는 교회 절기의 성격을 보도록 합니다.
교회는 3년주기에 의한 교회력(Church Year Calendar Series)에 의해서 절기를 지키고 있는데, 그 절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대강절(待降節): 대강절(待降節; Advent)은 '옴',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미리 기대하며 준비하는 성탄절 전의 4주간을 가리킵니다. 한동안 이 말은 성탄절에만 국한되어서 사용되기도 했었으나, 지금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성탄절이 있기까지의 전(前) 4주간의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강절(待降節)은 이 명칭 외에도 또 다른 명칭으로도 불려지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대림절’(待臨節), 또는 그리스도의 강림(오심)을 기다린다는 ‘강림절’(降臨節)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대강절을 지키는 것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며 자신들의 신앙을 돌아보는 일을 하고자 한다고 하는군요.
(2) 성탄절(聖誕節): 사순절이 끝난 그 다음날을 ‘성탄절’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여 자기 백성들 가운데 오신 것의 의미 속에서 지킨다고 하고 있습니다.
(3) 주현절(主顯節): 주현절(主顯節)은 ‘공현절’(公現節,; Epiphany)이라고도 부릅니다. 주현절은 교회의 주이신 예수님의 출현을 축하하는 교회력 절기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동방 박사가 예수님를 찾은 일이나,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준 것처럼 예수님의 탄생이나 어린 시절과 관계된 사건 및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게 된 것과 관련하여서 이를 기념하는 것으로 지킵니다. 주현절은 12일간의 성탄주일을 지키고 난 후의 첫날이기 때문에 1월 6일에 지킵니다. 개신교에서는 교회력에 의한 이때의 기간을 ‘주현절’로, 성공회에서는 ‘공현절’로, 카톨릭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의 명칭으로 각각 부르고 있습니다.
(4) 사순절(四旬節): 사순절(四旬節; Lent)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절을 준비하는 참회 기간으로 갖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니케아회의(A.D. 325)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전까지는 기한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2, 3일 정도로 지켜왔었는데, 지금의 사순절 기간을 정한 것은 니케아회의 때부터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기점으로 역으로 계산하여서 주일을 뺀 40일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금욕하며 참회를 하는 기간을 갖는다는 것으로, 사순절의 첫날이 시작되는 수요일을 이르는 말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참회의 재를 머리에 얹는 의식을 행한다고 해서 붙여진 것임; 또는 성회수요일'[(聖灰水曜日)]이라고도 부름)부터 종려주일(4월 1일)과 부활절(4월 8일) 전야(Easter Eve)까지의 40일간을 참회를 행하는 기간으로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40일을 참회의 기간으로 갖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금식하며 있었던 기간인 40일,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게 되면서 광야에서 가진 40일 금식 기도, 예수님의 부활 후 승천까지의 40일을 고난의 상징적 기간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사순절’과 함께 ‘부활절’ 전에 지키는 ‘고난주간’은 이 사순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활주일이 있게 되는 그 주간에 가져가고 있는 것이니깐요. 교회는 이 사순절과 고난기간을 가지면서 금식하며 참회를 하면서 다양한 예배를 갖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개신교의 행태를 보면, 이 사순절과 고난주간이란 기간을 통하여 성도의 신앙을 각성시키면서 이것을 교회를 부흥시켜 보려는 기간과 최대한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 소위 특별집회로서 부흥집회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5) 부활절(復活節): 부활절(復活節; Easter)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지낸 되었다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성탄절과 함께 부활절을 최대의 절기로 지켜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절’로 말해지고 있는 용어인 영어의 ‘Easter'의 기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절을 말하는 것으로 이 용어가 언제부터 교회에서 사용되면서 불려져 왔는지에 대한 그 기원은 정확히 알지를 못합니다. 전해오는 말로서는, 'Easter'란 용어가 앵글로색슨족이 숭배하는 봄의 여신 '에오스터'(Eostre)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하는군요. 다분히 이교적인 절기의 축제적 분위기의 색체와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네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지고 교회는 자신들의 즐김을 위한 행사와 놀이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으니 하는 말입니다.
(6) 성령강림절(오순절; 五旬節); 성령강림절(性靈降臨節)은 ‘오순절’(Pentecoste, 五旬節)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이 용어는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는 헬라어로 '제50'의 뜻을 가진 말로, 원래는 유대인들이 보리 농사의 수확을 끝내고, 보리로 만든 두 개의 빵을 바치는 절기의 날을 말하는 것인데, 유월절(逾越節)의 이튿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해당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으며, 또한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 계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후 승천하셨는데 , 그리스도께서는 이후 10일 후,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부활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그의 제자들이 모인 곳에 성령(聖靈)으로 (降臨)하시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여 전파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나가신 것을 기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강림하심과 이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하며 교회의 4대 축제일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7) 이 성령강림절 후 24번째 주일이 지나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절기 외에 성령강림절후 성탄절 사이에 ‘맥추절’과 ‘추수감사절’을 더하여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교회절기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개혁주일도 중요하게 여기며 이들 절기를 지키는 것과 같은 성격에서 매년 지키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교회력에 의한 교회절기를 설명 드리면서 이 교회절기 속에 있는 ‘사순절’과 같이 가지며 지켜나가고 있는 ‘고난주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2. 교회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가지며 지켜가는 것은 옳은가?에 대하여
그러면 이제, 그렇다면 님의 질문에서 보는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교회가 교회력에 의해서 교회절기로 가지며 지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켜오고 있으며, 그래서 2009년인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절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기독교신문을 보니 부활절에 설교를 누가 맡을 것인가라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사순절이란 절기를 지키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입니다. 사순절이란 절기는 없습니다. 사순절만 아니라 교회가 교회력에 따라서 지키고 있는 모든 절기가 그렇습니다. 이는 말이죠. 교회가 교회력에 집어 넣고서 지켜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성령강림하심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품으신 영원한 작정을 그 모든 것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그 구속 사역을 유대인의 유대력과 그에 따른 절기를 지키게 한 것처럼 교회력으로 삼고 여기에 따라서 교회절기로 지킬 것을 명하시고 또한 남기신 일이 결코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과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교회력에 의해서 교회절기로 삼고 지켜오고 있는 각종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러니까 단지 성경과는 무관하게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관하여서 만들어낸 신약 교회적 형태로서의 종교적 절기일 뿐인 것입니다. 사순절(을 비롯하여서 오늘날 교회가 지키고 있는 각종 모든 절기)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경대로 반드시 되어질 일’로서의 고난 받으심과 이로 인해서 있는 일을 알게 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예언된 성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만이 남으며, 복음으로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되어 갑니다. 그런 까닭에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모형으로 주신 모든 구약적 절기와 제사들은 그것의 존재의 성취로 더 이상 행하여지지 않고 이것의 ‘원형’ 곧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만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데,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히 이루신 지난 일에 불과한 것을 붙들고 여기에 고난과 참회의 의미를 두는 기간을 갖는 것은 얼마나 비성경적인, 곧 복음에서 떠난 것인지요!.
과연 그런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을 제가 지금까지 써서 올리고 또한 답변드렸던 글을 종합하고 여기에 설명을 더하여 드리는 것에서 하고자 합니다. 이 글을 통해서 올바른 이해를 가져나갈 수 있는 것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째, 초대 교회에서는 ‘주일’이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갖는 유일한 ‘날’의 개념이었으며, 구약의 절기와 같은 절기 예배는 없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에 주의 날에 예배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공적 예배가 없었습니다. 성도들은 이른 아침과 저녁에 교회 모임을 가졌습니다. 주의 날에 예배와 아울러 주의 만찬(성찬)에 대한 절기적 기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절기들은 없었습니다.
나중에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초대 교회와 멀어졌을 때, 그들은 주의 날에 있었던 많은 절기들을 폐지하려고 했습니다. 1520년에 루터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어야 할 것인데"하고 애석해 했습니다. 칼빈이 1536년에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라는 것을 개혁의 초기부터 강조하였습니다. Farel과 Vinet도 어떤 인간적인 제도를 인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오직 주의 날만을 존중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개혁에 있어서도, 1574년에 개최된 총회는 "성도들은 오직 주의 날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총회는 성탄절 전 주의 날에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설교하고, 부활절 주일 설교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해서 설교하고, 오순절 주일에는 성령 부으심과 관련하여 설교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기들은 주의 날보다 더 위대한 절기로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총회적인 결정은 시민 정부에 의해서 올바르게 인정되지 않았고, 모든 지방에서 동일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들은 몇 몇 절기들을 유지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1578년 총회에서는 "사람들이 절기의 날에 놀고 지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정부에 의해서 유지되어온 이 절기의 날에 설교가 행해져야 한다고 결정되었습니다. 이 결정은 (비록 마지못해서) 정해진 두 성탄절과 부활절과 오순절과 일부 지방에서의 신년의 날과 승천절과 언급되지 아니한 때때로의 일부 다른 절기들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 이외에 특별한 기독교인의 절기들을 지키는 것에 대항하여 많은 교회적인 저항들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둘째, 그렇다면 구약의 절기는 폐지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네 교회는 대부분 교회력에 의한 교회절기와 함께 여러 절기를 두고서 절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대림절을 거쳐 성탄절, 주현절과 사순절 및 고난주간을을 거쳐 부활절, 성령강림절, 곧 오순절을 거쳐 대림절에 이르는 과정에서 맥추절과 추수감사절이 그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오늘날 교회가 절기의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지키는 절기가 있습니다. 맥추절이 그것이며, 심지어는 추수감사절도 구약의 절기를 배경으로 하고서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서 보는 대로 구약의 절기는 이것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시고 또한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서 절기가 가지고 있는 원리를 온전히 드러내시는 일을 하셨을 때 폐지가 되었습니다. 이는 다음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골로새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20-23). 이를 히브리서와 연관해서 보면 더욱 확실하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히 8:5),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히 8:13).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은 구약에서의 모든 절기와 이와 관련한 제사, 그리고 성전(성막)은 율법 하에서 주어진 것으로서 율법의 기능과 역할 속에서 존재하였던 것이었었는데, 이제 율법의 수여자요 또한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나은 법으로 계시기에 첫 번째 주어진 율법에 더 이상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어서 성전의 무너짐과 함께 그에 따르는 절기와 제사도 당연히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삼대 절기로 일컬어지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은 신약 교회에서는 지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절기 속에서나 지킬 수 있었던 맥추절을 신약의 교회에서도 지키다니요!. 추수감사절을 구약의 수장절이라 말하며 구약의 감사절에 빗대어 그 타당성을 찾으려고 하다니요!.
추수감사절은 구약의 절기적 배경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시작에 있어서 교회적 절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인들이 교회당을 짓고 학교를 짓고 집을 짓고 또 농사를 짓고 하면서 그 수확한 것을 가지고 원주민들과 친밀한 사귐 속에서 하루를 즐겁게 지내고자 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그것이 점차 국가적인 성격을 띠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은 다 기독교인들이요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주체가 교회였기 때문에 교회적 절기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추수감사절인 것이지, 온 세계의 공교회의 절기의 성격을 띠는 보편적인 절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받아들여서 교회가 교회적 절기로 지켜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추석이 있습니다. 추석은 민족적인 절기입니다. 이 추석을 기독교인으로서 가져나가는 것이 곧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다른 나라의 모든 교회에 감사절로 적용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우리나라 교회가 교회적 절기로 굳이 적용하여 나가야 까닭이 없습니다. 이 추수감사절은 구약적 절기의 배경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모형론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기독교인으로서 추수감사절을 행하여 나간 것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에게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점차 국가적인, 그러니까 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 아니든 다 지키는 민족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추석은 처음부터 기독교와는 상관없는 민족적인 절기로 지켜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 아니든 추석을 다 지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면, 미국의 추수감사절이든 우리나라의 추석이든 그것이 교회 절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설사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정신과 그 문화 속에서 가져 나간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서 결코 교회 절기로 적용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탄절, 부활절 등의 각종 교회절기는 구약의 절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초림과 부활을 기념하여서 교회 절기로 삼고 지킵니다. 그러나 이 또한 근거가 없습니다. 앞에서 거론하였듯이 교회사에서 그 부당성을 말하며 얼마나 없애려고 노력을 했던 것인가요?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유일한 절기는 ‘주의 날’을 의미하는 주일입니다. 성경에는 ‘매주일’이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 한번 나오고 ‘주의 날’도 한번 언급이 됩니다(계 2:10). 여기서 ‘매주일’은, 초대 교회는 주의 죽으심과 부활의 기념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을 가졌는데, 그것은 초대 교회 초기에는 ‘날마다’ 되어졌으며(행 2:46), 그래서 ‘주 안에서 모이기를 힘쓰는’ 그들만의 ‘구별된 한 날’의 개념으로서의 날을 갖고서 날마다 모임으로 그 날을 ‘주의 날’로 가져갔으는데, 이방 지역에 교회가 세워져 나가는 과정에서 차츰 일정한 날을 정하고서 주의 날을 갖고서 하나님을 예배하였으며, 이는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의 날과의 연관 속에서 매주일에 행하여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부활의 날을 의식한 가운데서 이 날을 주의 날로 삼고서 이를 매주일에 가져나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배에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유일한 것으로 오직 ‘성만찬’으로 말하였습니다(고전 11:23-26)
그렇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리고 이와 필연적으로 관련을 갖는 초림과 부활의 기념을 매주일에 갖습니다. 그러니까 매주일에 성탄의 기념도 있고 죽음의 기념도 부활의 기념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이것을 설교하고 지킵니다. 설사 따로이 성탄절을 갖고 부활절을 가져도 매주일에 이미 이를 기념하고 있는데 무슨 따로이 또 성탄절을 갖고 부활절을 가져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무엇보다도 이 절기의 등장이 아무런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한데다가 교회사 속에서 그 부당함을 지적하며 많은 저항으로 이를 폐지하려고 했던 것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부활을 들이대고서 자의적으로 만들어서 지키는 것은 지극히 인본주의적 발상입니다.
셋째, ‘매주일’에 다른 많은 절기들이 함께 있어야 할 이유가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주의 날을 매주 갖습니다. 그런 매주일에 다른 많은 절기들이 함께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매주일 드리는 예배는 히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함께 성경의 특별한 부분을 가르치고 토론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지금 성경연구를 위해서 주중에도 기독교인 모임을 가집니다. 나는 그 모임들도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날의 모임은 주의 날로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의 날은 공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의 한몸으로 일제히 연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한몸인 그 생명체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것입니다. 성만찬은 그 실질적인 삶을 누려가는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교회들이 갖가지 의미를 가진 특별한 기념일을 만들어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주님께로부터 받은 유일한 것은 주의 만찬을 뜻한 성만찬입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이 주의 만찬 속에는 그리스도의 전체 사역이 포괄적으로 요약되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의 목적,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심,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이 주의 만찬 속에 개관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성만찬 또한 ‘절기’의 개념이나 그러한 성격에서 교회가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섬기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주의 만찬을 행하며 그리스도를 기억함 속에 있는 것은 절기를 지키는 것에서 의식법(儀式法)으로 갖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와 살에 의한 그리스도의 몸이 그를 믿음을 따르는 자에게 지닌 ‘새언약’에서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만찬을 행하는 것에서가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 곧 대강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고난주간-부활절-성령강림절(오순절)-맥추절-추수감사절의 온갖 종류의 특별한 날을 기념할 것을 명령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한국 교회는 절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서 잘못된 절기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개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개신교[개혁파 교회 ; 개혁교회]임을 자부하는데 이런 것에서 개혁교회의 모습을 띠어 가지 않으면 도대체 어떤 것에서 개혁교회임을 자부하여 나가려고 하시겠습니까? 특히 장로교회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이며, 복음과 신학 사상에서 근본주의에 서 있는 개혁주의자임을 목소리 높여 강력하게 주장하면서도 이 잘못된 교회절기에 대해서는 개혁주의자 임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습니다.
중세 교회에 이르러 연중 많은 날들이 여러 성자들을 기념하고 섬기는 날로 정해짐으로 교회 절기들이 미신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교회력에 의한 각종 절기들도 그 중에 한 절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 이런 폐습을 본 종교개혁자들은 교회 절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이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교회와 차별성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성탄절을 지키는데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성탄절에도 여전히 매주 설교해 오던 본문을 그대로 이어서 설교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각 나라의 개혁교회가 가진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성탄절이나 부활절 등의 이름으로 절기를 특별하게 기념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 있어서 부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경륜 하에 주어졌던 모든 의식법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폐지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새것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신약 시대의 교회는 구약 시대에 의식법으로 주어졌던 성막(성전)과 제사와 관련하였던 절기법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습니다.
이제 신약 시대의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더 나은 법을 좇아서 삽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해서 신약 시대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누리게 된 '주의 날', 곧 주일을 유일한 절기로 지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교회가 성탄절을 교회 절기로 지키는 것은, 또한 이와 함께 부활절, 성령강림절을 교회 절기로 지켜 나가고 있는데, 비록 그것이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성육신(incarnation) 사건과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의 심판을 충족시켜 드리고 생명에 이르는 의를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제공하였으며, 이를 한 사람 한 사람 믿는 자들에게 적용해 나가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충만케 해 나가시는 일을 하시는 성자 하나님,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를 기념하고 그 의미를 깊이 새기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이것을 들어서 신약 시대의 교회에 구약 교회에 주어졌던 것과 같은 또 다른 의식법을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닌 교회 스스로가 단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는 것을 근거로 교회 절기를 지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만들어서 지키는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이는 구약 시대에 한정하고 있는 절기의 유산물을 여전히 잇는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사실 성경의 계시에 따르는 신학적 이해에 있어서 지지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시대와 모든 교회에 주어진 새로운 유산물을 계승받고 있습니다. 이 유산물은 한정된 것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부터 누리면서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교회는 주일 이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은혜를 기념할만한 것을 갖고 있지를 않습니다. 교회는 매 주의 날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청종하는 것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념합니다. 또한 교회는 매 주의 날에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례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념하는 기쁨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매 주의 날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념하면서 또 다른 특정한 날을 갖고서 특정하게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념하려고 하다니요!.
그럼에도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는 개혁교회조차도 청교도 신앙의 유산인 추수감사절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구속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며섭리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감사절'로 지키는 추수감사절을 배격하면서도(지금은 이것조차 하지 않지만), 성탄절과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은 단지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념하는 이유를 들어서 교회 절기로 의식화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리스도의 구속에만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부활절, 성령강림절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연관 속에서 주일에 교회 절기로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절을 지키는 것에서도 이교적인 축제 절기의 분위기를 떨쳐버리지 못하거니와 성탄절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지를 못합니다. 성탄절은 이교도의 풍속을 좇아서 주일이 아닌 12월 25일에 교회 절기로 갖고 있습니다. 만일 성탄절을 지켜야 한다면 12월 25일이 아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명의 연합체를 이루는 날인 주일에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설사 그렇게 해서 성탄절을 지킬지라도, 정말 성탄절을 지켜야 하겠기에 성탄절을 지킬지라도....., 그럴지라도 제대로 된 교회라면 결국은 그 교회 절기에 순전함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매 주일에 하는 것과 아무런 다를 것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선포하고 그 안에 성도들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주일’과 이런 저런 명칭에 의해서 ‘교회절기’를 가져나가야 하겠습니까? 설사 그럴지라도 결국은 (성탄절은 예외로 현재 주일이 아닌 12월 25일에 지키고 있지만)‘부활주일’이니, ‘성령강림주일’이니 라며 결국은 ‘주일’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가져나갈 것인데 말입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교회마다 매년 교회력에 의해서 각종 교회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부활절 앞에 남겨놓은 한 주간은 ‘고난주간’이라 하여서 교회가 여기에 관련된 여러 교회적 행사를 가지며 부산을 떨 것입니다. 연극을 통해서 이든 또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이든 예수께서 행하신 떡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성찬식과 세족식을 행하고,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달리는 광경을 재현하는 일을 할 것이며, 이때 금요일은 하루를 금식하는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몸을 정갈하게 지키려고 하는 등......그리고 마침내 부활절의 주일에는 아름답게 그림을 넣고 장식하며 예쁘게 만든 계란을 몇 개씩 선물로 받고 그 기쁨에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주님이 죽음을 깨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한다는 그 계란을 자신들의 입에 넣겠지요.
이러한 ‘사순절’과 여기의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은 이 절기를 갖는 것을 통해서 이것을 모처럼의 기회로 최대한 이용하여서 성도들이 그 즐김에 있는 한갓 오락과 유흥에 지나지 않으며, 이 즐김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육체의 욕망으로 갖는 인간의 축제의 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쉽게 보게되는 가령 ‘발렌타이데이’이니 뭐니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지요. 비록 그런 성도가 다는 아닌 일부일지라도 교회가 그런 여건과 환경을 조장하고 허락하고 있는 한에는 교회의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과 ‘성탄절’, 왜 이렇게 절기로 가져나가야 합니까? 이 모두를 정말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교회가 꼭 절기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며 묻고 싶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과 부활과 성령강림을 기념하려는 당신의 생각이 옳다고 봅니다.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담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삼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부활한 50일째 되는 날에 성령님께서 세상에 강림하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행하셨고 행하시는 구속의 은혜 안에서 기념하는 날을 갖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의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총체인 교회로서 말입니다. 주일!, 당신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고자 하는 성탄, 부활, 성령강림의 기념이 다 이 안에 있습니다. 그 주일이 당신에게 어떤 날이었습니까?." 당신의 주일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주일에 대한 당신의 신앙이 일상적으로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를 이루고서 사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고, 그래서 주일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있으며 그래서 당신의 삶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면, 일년에 어느 한 날을 특정한 날로 삼고서 지키고자 하는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쁘시게 하며 성도들과 즐거운 교제를 하기 위해서 온갖 행위를 가질지라도 단지 '그 날'을 주인 삼아서 종으로 사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에게서 교회 절기는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 아니라 사실은 슬픔과 고통의 날입니다. 그 날을 잘 섬기기 위해서 종으로서 온갖 행위를 할 터이니 말입니다.
님의 질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올해도 교회들은 ‘사순절’ 속에서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이하고 있는데, 이 종에게서 벗어난 자유한 자의 삶을 우리의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절기에 매여 있다니요? 정말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고 영원한 절기를 가질 수 있기를 또한 기대한다면 그런 절기의 날을 가지는 것에서가 우리가 도무지 생명을 볼 수 없는 이 죄악된 세상에서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주로 섬겨가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온갖 교회절기를 통해서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교회의 신앙을 매주일에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태에서 보았으면 하는 기대에서 하는 말입니다. 하도 오랫동안 교회 절기가 전통 있게 이어져 내려오다 보니, 그래서 누구나 의례히 교회 절기로 지키는 것이 당연시 여기고 이것이 성도들이 갖는 신앙인 것처럼 알고 있다 보니 도무지 이 의식의 변화를 쉽게 기대할 수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교회가 개혁교회로 분명하게 나가고자 한다면 이를 말해야 하고 또한 기대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3.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에 대하여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교회가 절기 속에 가지며 지키는 것은 참으로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려는 것 자체가, 곧 사순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이를 좇는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생각의 발상이요 이는 하나님의 일과는 무관한 사람의 일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가져나가는 것에서 과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려는 진정한 마음은 있기나 하는가 할 때 이 또한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는 과거 교회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가져오는 것을 기독교 문화적인 성격에서 가져왔을 뿐이며, 그래서 이것을 축제와 연결시켜 사순절이 오기 전 3일에서 1주일 동안 행해지는 축제로 가지면서 사순절에는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게 해 놓고 그 전의 축제에는 마음껏 먹고 가장행렬을 하며 즐기는 놀이의 행사를 가진 것에서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동일합니다. 가령 하루를 금식한다고 해서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하는 것이 되지도 않지만, 금식 전에는 금식할 것이기 때문에 음식을 마음껏 먹지 못하므로 그전에 마음껏 먹어두고, 금식 후에는 또 금식하는 동안에 음식을 마음껏 먹지 못했으므로 배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또 마음껏 먹고 즐기는 것에 무슨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기도 하지만, 교회가 사순절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게 하며 여기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에 대하여서는, 그 비성경적인 그릇됨을 말해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앞서의 설명에서 성경의 가르침이나, 또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의 견해(곧, 개혁주의자들의 입장) 그 어디에서도 교회가 절기 속에 있어야 할 것을 말하지도 않으며, 그럼에도 교회가 절기를 지키는 행위에 있는 것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금하였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반(反)’하는 것으로 얼마나 불신앙인 것인지요!.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갖고 지키는 것에서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습니까? 이는 참으로 무지한 것이며, 어리석은 짓입니다.
진정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된 바가 되는 것’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가지고서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재현하며 이를 통해서 경험해 보려는 것에서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받으신 이 고난은 누가 함께 받아보고자 해서 받을 수 있는 고난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받으실 수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우리도 받아보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그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죄덩어리인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배척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갔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 오심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겠죠.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고로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으로부터 그들도 함께 미움을 받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입니다. 옛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받았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말하여 드러낼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복음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대하는 반응은 어리석은 말로 듣고 미련한 말로 듣고 배척을 합니다. 이들이 배척하는 것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를 배척하기에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도 함께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그래서 배척을 받게 작정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면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자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대한 언급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꾼으로서 교회를 위해서 겪는 복음 전파의 사역과 관련해서 이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있게 한 그 은혜로운 일은 온 세상에로 전파되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돕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알리려고 바울을 보내셨으며, 이에 따라서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를 전할 기회를 갖고자 했으며, 그래서 귀를 기울이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겪게 되는 고난이 따랐습니다. 이는 말이죠. 그가 그리스도인이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로서 그리스도가 받은 영광을 그도 받게 될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마신 잔을 그도 마셔야 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입은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바라는 자는 또한 그분의 고난에도 함께 동참할 것이라는 데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과 같은 고난이 따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생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이면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그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한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기 마련입니다. 이는 필연성과 당위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당연히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우리의 믿음이 있지를 않고 우리의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서, 그래서 자기를 위하여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이 그에게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고난주간 같은 것을 만들고 그 행사에 참여하여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서 등에 져보고 심지어는 나무에 묶여 보기도 하고, 못에 박혀 보기도 한다고 해서 고난에 참여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 육체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몸에는 그리스도에게 침 뱉고 멸시하고 조롱하며 욕하였던 것이 돌덩이가 되어 날아오는, 그래서 그리스도를 배척하였던 자들에게서 맞은 상처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몸에 지니고 있는 이 흔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동일한 것입니다.
진정, 그러니까 참으로, 정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인 자신의 정체성을 주께서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통해서 늘 확인하시고 그 믿음을 확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순절이란 이런 특정한 기간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느껴보고 체험해 보고자 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을 말하여 여러분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온 세상에 믿는 자들의 생명의 주가 되심이 선포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그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님이여,
님은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궁금해 알며 이를 알고자 질문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이 얼마나 충족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인지를 알 수는 없으나, 이 답변을 통해서 님에게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고민하며 올바르게 그 믿음에 잘 서나가실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2절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권면의 말을 한 것은, 허다한 증인들이 있거니와,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워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또한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의 영광에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땅엣 것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의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 믿음에
견고히 잘 서나가실 수 있기를
주께 구합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몰랐던것들로인하여 궁굼함에있었는데 이렇게자세히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하시길
많이 바쁘실텐데 이렇게 귀한 시간을 할애해 주시고 자세히 답변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순전한 복음의 열정이 하나님 나라의 밀알이 되어서 온 땅에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고 그 분의 영광만을 목적으로 하는 순전하고 올바른 교회들이 세워져 가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갈4:9~11] .....~ 감사,,,,,@#$호
바쁜 중에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시네요. 이천우 목사님 화이팅! / 포커스님도 샬롬~
길고긴 설명 감사합니다
이 땅의 교회들이 너무 변질되고
세속화되어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에는
너무 부족하지만
목사님 같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자' 삼은 이들
사용하여 예수그리스도생명의
본질,원형,어떠함을 확장시켜
나가실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