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비에서 우연히 영화 '보더'를 봤다. 그 영화를 끝까지 보는 데는 약간의 인내가 필요했다. 여주가 못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람과 짐승의 중간 단계처럼 보였는데 영화에서는 지구상에 몇 안 남은 소수 종족으로 설정돼 있었다. 그녀는 인간의 악을 냄새 맡을 수 있는 특수능력 때문에 국경지대에 배치된 수색요원으로 일한다. 그녀는 흉칙한 외모로 인하여 공무 외에는 인간 집단에서 거의 소외된 생활을 하는데, 문제는 그녀 스스로 별 불행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한 남자가 나타났다. 둘은 한눈에 서로가 같은 종족임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보통의 남녀처럼 서로에게 끌리게 된다. 나는 그때부터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더이상 저들의 사랑놀음이 진전되기 전에 티비를 끄고 잠자리에 들어야 되나 아니면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기대하며 끝까지 지켜봐야 하나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감독이 두 사람의 키스씬을 어떻게 처리하려나, 하는 문제가 관심 아닌 관심이 되어버렸다. 묘사는 리얼했고 디테일은 극한적이었다. 그러나 상상만큼은 추하거나 끔찍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스웨덴의 대자연이 나의 곤두선 신경을 구출해주었다. 물론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인간의 표면적인 추함과 내면에 존재하는 추함을 대비시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외모가 추한 사람들끼리 어떻게 사랑이 가능한가에 쏠려 있었다. 성적 매력이라곤 눈을 씼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사랑이 가능할까? 나의 이 질문이 모든 남녀의 사랑을 성적 문제(sexuality)로만 파악하려는 속된 시각에서만 비롯된 것일까?
신은 어쩌면 인간의 눈에 콩깍지라는 걸 씌워서 외모의 불평등에서 비롯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끼리끼리 사랑도 하고 연애도 하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신이 주신 콩깍지가 곧 벗겨져버리거나 인간이 스스로 거부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십여 년 전에 노인들의 사랑을 다룬 '죽어도 좋아'란 영화가 있었다. 당시 '노인들의 성'을 적나라하게 다뤘다는 점에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작품이다. 비평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끝에 나는 이 영화를 끝내 외면해버렸다. 이제 지금 내 나이가 그 당시 그 할아버지의 나이와 불과 서너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사랑의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되는 나이인가? 타인이 보면 노추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랑은 진정성과 절실함의 문제이다.
콩깍지 이전에 자신의 실체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사랑이 가능하다. 자신의 추함을, 자신의 늙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의 추함도, 상대방의 늙음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인생 제반사가 다 그렇듯이 겸허함에서 모든 것은 시작된다. 오만함은 사랑의 가장 치명적 독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