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상에 살아남은 아나로그들
엇그제 화장실등 하나가 수명을 다하고 떠나셨다. 또 꼼지락거려야할 꺼리가 생겼다. 남자들은 바깥 힘든 일은 잘하면서 집에 오면 형광등 하나 교체하는 것도 싫어한다는 것이 우리네 안방마님들의 통상적인 불평이다. 나야 뭐 지금은 밥벌이도 못하니 알아서 기어야할 판이다.
평소 발걸음 아끼지 않는 편이라 서너군데 조명가게를 이용해 보았고, 그중 한군데를 골라 거래했다.
그런데 요즘처럼 더운 날씨에 제법 떨어진 가계까지 걸어 오가고 그깟땜에 또 손옷빨래를 하게 생겼다. 궁하면 통한다고, 문득 인터넷 구매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명등을 사와도 내가 교체해야 할일이다.
휴대폰을 통하여 구매를 시도하니 어라! 구매가가 배송비를 포함해도 시중의 절반 가격이다. 나는 돈 굳었지만 집까지 배달을 해주니 이래서 자영업자들의 삶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마치고 오니 택배가 왔고, 그걸 바꾸려니 땀이 흘러 그런지 전원 스위치를 내렸는데도 손이 찌릿거렸다.
나의 유일한 냉방기구인 부채를 들고 마루에 나앉았다. 열대야에서 이어지는 태양의 위력이 열린 창문에 열기를 뿜어 넣는다.
34도, 어쩔려고 이토록 덥다냐? 이러다 여름 못넘기는건 아니겠지. 잘쓰지 않는 소형선풍기를 살펴보니 고개가 시원찮다. 에이! 이참에 따로 하나 장만할까?
휴대전화상으론 제대로 정보를 알아볼 수 없어 컴퓨터를 켜고 해당 사이트를 방문했다. 대부분 중국 제품이다. 까짓껏 가지고 국산 타령은 하기 싫었다.
나는 평소 인터넷 구매를 할땐 좋아하는 품질(사양)을 찜하고, 구매자 후기와 판매수량을 살펴본다. 그런데 요즘은 후기가 거의 사라졌다.
존재하지 아니하는 최선을 포기하고, 차선을 선택하니 로그인이 앞을 막는다. 그게 뭐더라? 외우지 못하니 책상머리 적어둔 종이를 가져다 입력을 시작했다.
그런데 자꾸만 에러가 났다. 맞는데? 안경을 고쳐쓰고 다시 입력, 이거야! 포기하라는 것인가?
늙으면 죽어야 하나? 바보같이...로그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해당 판매처 사이트의 것을 입력하지 않고, 개인 블로그의 것을 가져다 입력해대고 앉았다. 고생끝에 마련한게 선풍기 하나 2만원대, 어린이 장난감 수준이다.
세상은 디지털 세대로 바뀐지 오래다. 그러나 아나로그 세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그때의 향수를 그리며,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당 사이트에 나의 인터넷 주소를 입력하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만들며, 보안문자를 입력하고, 휴대폰 인증숫자를 재입력하여 승인받는...참 감당하기 싶지않은 절차이다.
온라인 거래는 당연하고, 관공서의 행정업무, 길거리 영업행위도 상승하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무인시스템으로 전환해 가고 있다.
IT기술이 발달할수록 노인들이 설땅은 좁아진단다. 그런 과정에서도 노인들을 대상으로한 사기피해가 늘어난다. 주의할 점은 낮선 전화나 모르는 메일을 받지말고, 같은 아이디나 비밀번호를 여러곳에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산업 일선에서 벗어난 베이비부머 세대에게도 인공지능, 로봇, 양자컴퓨터, 핵융합이란 용어들이 무언의 압력을 가한다.
그러한 업무를 해내란 것이 아니라, 세상은 어차피 그러한 곳으로 흘러가니 동화되지 않으면 패배함의 경고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은 우리의 현실 세계에 엿보이는 것이지만, 양자컴퓨터와 핵융합 기술은 그것이 현실화되면 우리들의 생활에 천지개벽이 일어날 분야이다.
과학문명이 발달한다고 우리들에게 무조건 좋은 것만이 아니다. 그러한 문명의 개발은 누군가의 노력과 재화가 뒷바침 되어야 가능하고, 그 다음은 그 댓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문명의 수혜자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을 수 없다. 자동차와 휴대전화...문명의 이기속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가난해지는 이유이다.
몇십년전 회사의 업무 전산화 계획이 수립되었다. 나는 당연히 업무의 정확성과 효율성은 물론 인력과 비용문제를 따지고 들었다.
추세야 따르는 것이 맞는데, 개발책임자는 개발이 되면 인력이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줄어들기는 커녕 개발이 완료되니 운영인력의 충원을 요구했다.
그 개발책임자 나랑 다른 근무지부터 알고 지냈고, 전산개발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차가 있으니 다툼도 잤았다.
2000년 들며 Y2K니 뭐니하는 겪어보지 않은 두려움이 있었고, 그래서 낮에는 싸우고 밤에는 술친구로...참좋은 친구였는데 오래전에 자신을 포기하고 저동네로 먼저갔다.
어제 저녁 열대야로 잠이 깨어 피곤하여 잠자리에 일찍 누웠었다.
휴대폰의 감미로운 음악 프로그램에서 오드리 햅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문득 단발머리에 눈망울 초랑초랑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외국녀는 별로지만 소피아 로렌, 엘리자베스 테일러보다 그녀가 더 좋았다.
그녀는 2차대전을 겪으며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풀뿌리를 캐어먹다시피 하다보니 후에 거식증이 걸렸다고도 하였다. 기억나는 영화중 하나는 '로마의 휴일'이다. 참으로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더우기 그녀가 좋았던 것은 바쁜 가운데서도 유니세프 대사를 맡아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보살폈다는 점이다. 예쁜사람이 좋은 일을하니 사람들로부터 더 사랑받는 법이다.
잠도 오지않고 오랬만에 옛날 음악을 실컷 들었다. 4차산업이 어떻고, 인공지능과 빅데이트에 의한 성과를 강조한다해도 가끔은 아나로그시대의 여유로움이 생각날 것만 같다.
또한 우리에게 남은 시간 험악해진 지구환경과 바뀌는 문명속에서 버텨내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는 없다.
텔레비젼 화면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신세대 어이돌의 화려함보다 대장암이라는 불치의 병으로 운명을 달리한 오드리 햅번의 생기넘치면서도 고전적인 모습이 이 밤에 생각나듯 우리세대는 마음 한구석을 비워두고 살아가기를 바랄 것이다. 한밤의 음악은 템포가 느린 것이 더 감미롭게 느껴지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