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87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유곡과의 대화’]
유곡幽谷과의 대화
당신이 그토록
유장한 성상星霜을 버틴 게 무엇이오?
당신의 검고 억센 갈비뼈,
즉 그 오묘한 바윗덩이들은 지겹도록 응고되어
이젠 한도 눈물도 없는
당신의 신비한 침묵이요?
마침내 화석으로 남기로 한, 내키지 않는
당신의 자존심이요?
그래요
그럴 것이요
당신의 공허한 눈길은 아직도 그곳에
머물러 있소
당신의 고향 고생대古生代 말이오
이 억 팔천 년 전 석탄기에 비로소 우주를 본,
그 때
방주方舟의 날개를 가진
거대한 잠자리의 순박한 그 눈깔을
당신은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요
그렇소
나는 한줄기 바람 같은 점이외다
보잘것없는 시간 속
백년도 못 꿈틀거리는, 당신이 쥬라기, 혹은
백악기에 눈살을 찌푸렸던, 공룡의 등짝에
부침했던 쇠파리 비슷한
포유류로 분류되는 인간일 뿐이외다
이제
당신의 허리를 돌아 굽이쳐 내리는
저 탁류를 보며, 비로소 유현한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며
안타까운 참회에 대하여 뇌까리고 있소이다
당신의 등허리에 이고 있는 무성한 수목과 넝쿨은
모두가 처녀림處女林이요?
나 또한 천애天涯에 홀로 서기 전,
머리에 이고 있던 것은
푸르뎅뎅한 동정童貞의 덤불이었소
당신이 홍적세洪績世에 보았던 거대한 빙하와
포유류들은, 놀랍게도 꽃잎 마냥
가냘픈 나의 심장에 투영되어
콸콸콸 흐르고 있소
오늘 유장한 당신의 모습에서, 당신이 꿈길에서
찰나간 보았던
그 영웅전설이 내게도 못내 그립소
당신은 외롭지 않소?
나는 마음이 아파서 못 견디겠소
당신은 저 유구한 물결을 붙잡고 싶지 않소?
나는 당신에게 한 호흡 콧김 같은 존재로서
이 곳에 섰지만
이제 건방진 지족知足이나 들먹이면서,
남들이 허허롭다고 지껄이는
그 운수雲水행각이나 떠날 참이오
유곡이여! 그렇지 않소?
모든 것이 그러하지 않소?
*일요일 새벽, 洪川계곡에 들어가 암벽과 탁류를 보며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유곡幽谷과의 대화〉는 수억 년의 지질학적 시간(거시적 시공간)과 인간의 찰나와 같은 삶(미시적 존재)이 만나 나누는 명상적이고 존재론적인 문답을 담은 뛰어난 비평적 가치의 작품입니다.
홍천 계곡의 웅장한 암벽과 탁류라는 현실적 공간에서 출발하여, 지구 역사의 아득한 태고사로 시상을 확장해 나가는 전개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시에 대한 주요 비평적 요소를 세 가지 핵심 축으로 나누어 분석해 드립니다.
1. 시적 화자의 시선과 구성 : 거대 시공간과 찰나적 존재의 대비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프레임은 ‘지질학적 대시간(Geological Time)’과 ‘찰나적 인간 존재’ 사이의 아득한 격차입니다.
⚫유곡(幽谷)의 시간 : 고생대 석탄기(약 1억 8천만 년 전 주석 언급, 실제론 약 3억 년 전)부터 쥬라기, 백악기, 홍적세로 이어지는 유장한 성상(星霜)의 세월입니다. 계곡의 바위와 암벽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지각 변동과 역사를 몸으로 견뎌낸 ‘화석화된 자존심’이자 침묵의 증언자로 형상화됩니다.
⚫화자의 시간 : 백년도 채 살지 못하며, 지질학적 시간 속에서는 공룡 등짝에 부침했던 ‘쇠파리’ 같은 존재, 혹은 거대한 유곡에 비하면 ‘한 줄기 바람’이자 ‘한 호흡 콧김’에 불과한 포유류 인간입니다.
화자는 이러한 극명한 대비를 통해 인간의 자만과 오만을 겸허히 내려놓고, 대자연의 수수께끼 같은 침묵 앞에 깊은 경외감과 참회를 드러냅니다.
2. 주요 상징과 이미지 분석
① 태고의 원초성 : ‘거대한 잠자리의 순박한 눈깔’과 ‘처녀림’
시인은 석탄기의 거대 잠자리(메가네우라 등 태고의 생물)를 언급하며, 어떠한 문명적 오염도 없었던 우주의 순수한 원초성을 환기합니다. 유곡이 이고 있는 ‘처녀림’과 화자가 과거에 이고 있던 ‘동정(童貞)의 덤불’을 매개로, 화자는 비록 존재의 크기는 다를지언정 자연의 원초적 순수성과 자신의 내면이 연결되어 있음을 감각합니다.
② 감정의 교감 : ‘가냘픈 심장에 투영된 빙하’
지질학적 대역사와 거대한 자연(빙하, 포유류, 탁류)은 화자의 ‘가냘픈 심장’ 속으로 들어와 ‘콸콸콸’ 흐릅니다. 이 대목에서 시적 변용이 일어납니다. 단순한 객관적 관조에 머물던 자연이 화자의 내면적 감정과 동화되며, 태고의 외로움과 서정성이 화자의 아픔으로 전이되는 순간입니다.
3. 주제의식 및 문학적 의의 : 존재론적 고독과 ‘운수(雲水)행각’
시의 후반부에 이르러 화자는 유곡을 향해 물어봅니다. “당신은 외롭지 않소? 나는 마음이 아파서 못 견디겠소.”
유곡이 견뎌온 유장한 침묵의 본질은 결국 깊은 ‘존재론적 고독’이었습니다. 화자는 유곡의 외로움을 읽어냄으로써, 영원해 보이는 자연조차도 거대한 우주 속에서는 외로운 존재임을 간파합니다.
마지막에 화자가 말하는 ‘지족(知足)’과 ‘운수(雲水)행각’은 중요한 시적 결류를 이룹니다.
인간 존재의 보잘것없음을 깨달은 후 찾아오는 겸손한 만족(지족)
구름이 흐르고 물이 흐르듯 정처 없이 삶을 유랑하고 내면을 탐구하겠다는 자유와 해탈의 의지(운수행각)
💡 총 평
〈유곡과의 대화〉는 자칫 관념적으로 흐르기 쉬운 대자연과의 교감을 지질학적 명칭(석탄기, 쥬라기, 백악기, 홍적세)과 선명한 감각적 시어(탁류, 콸콸콸, 쇠파리)를 통해 매우 역동적이고 실체적으로 구현해낸 작품입니다.
자연을 단순히 감상이나 예찬의 대상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해 고독을 공유하는 ‘대화의 주체’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기홍 시인 특유의 깊은 철학적 통찰과 서정적 울림이 돋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