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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나타날 영광
로마서 8:18-25
믿음이란 기다림입니다. 약속을 믿고 기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그 영광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오늘을 사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현재의 어떤 복을 누리는 것보다 장차 받을 영광을 믿고 기다립니다. 현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소망에 의해 현재를 사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성도가 믿고 기다리는 소망은 장차 나타날 영광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의 소망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없다면 현재를 사는 것도 의미가 없는 삶이 됩니다.
로마서 8장은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어떤 학자는 로마서 8장을 성경 중에 성경이라고 합니다. 매우 중요한 구원의 진리가 담겨진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는 믿음입니다. 18절에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생각건대’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확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논리적으로 따지고 보면 장차 나타날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비교 할 수 없는 무한한 영광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 말씀입니다. ‘현재의 고난’이란 로마인들로부터 끊임없는 핍박과 로마 당국의 박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현재 고난을 당해도 견디며 이겨 낼 수가 있었던 것은 장차 나타날 영광을 소망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모든 성도들이 바라는 소망이요 믿음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는 믿음이 없다면 구원받을 수 없는 허상된 믿음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는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성도들이 당하는 환난과 핍박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일시적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잠깐이지만 장차 나타날 영광은 영원합니다. 잠깐의 고난을 이기면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영원히 누릴 영광을 바라볼 때 현재의 고난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난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믿고 바란다면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참을 수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복음 전하다 잡혀 돌아 맞아 죽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5).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보았을 때 돌에 맞는 것이 하나도 아프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돌에 맞는 아픔도 참을 수가 있었던 것은 무한한 영광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을 본 스데반 집사님은 오히려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오묘한 진리를 사람보다 피조물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피조물이 고대하고 바라고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고 바라는 것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19절에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과 함께 피조물도 회복이 된다는 것을 피조물이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피조물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창3:18). 인간이 구원을 받으면 피조물까지도 원래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것을 피조물은 바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에덴동산의 모든 피조물들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연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요즘 전에 없었던 ‘미세먼지’라는 신종단어가 생겼습니다. ‘미세먼지’나 ‘황사’가 왜 생겼습니까? ‘미세 먼지’와 ‘황사’가 발생하는 것은 피조물의 저주받은 증거입니다. 그래서 인간들보다도 피조물이 장차 나타날 영광을 더욱 바라고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대하는 바’란 말씀은 ‘학수고대’란 의미로 피조물들이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날을 얼마나 간절히 열망하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지만 피조물은 이 진리를 알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굽니까?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4절에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라는 말씀에서 육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5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란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영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7).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8). 이상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영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난다’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부활하여 영광의 몸을 입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주님 오시는 날에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예쁜 사람을 보고 ‘천사처럼 예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예뻐도 천사만큼은 예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천사가 예뻐도 하나님의 심부름 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못나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광 중에 나타날 때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받들어 섬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로부터 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어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눅16:22). 우리가 죽으면 천사의 받들림을 받아 영혼이 천국으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날에도 부활한 우리를 천사의 받들림을 받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천사는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을 받들어 섬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은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입니다(15).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는 자입니다(16). 하나님의 아들들은 상속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도 동참하며 무한한 영광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묘한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인 성도들보다 사탄 마귀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영광을 받아 누리지 못하도록 하려고 환란과 핍박으로 괴롭히는 것입니다.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아들들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우는 사자처럼 성도를 시험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필연적으로 고난당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봄이 되면 유채가 아름다운 꽃을 피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줍니다. 유채 씨를 가을에 뿌리면 싹이 나고 자라다가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얼어 죽습니다. 그러나 따뜻한 봄이 되면 뿌리에서 새싹이 나고 장다리가 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추위에 얼지 않으면 유채는 장다리가 나지 않고 꽃이 피는 대신 입이 싱싱합니다. 싱싱한 잎은 맛있는 나물반찬이 될 뿐입니다. 얼어 죽어야 아름다운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어야 영광이 있다는 진리를 자연을 통해서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에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영광된 몸으로 하늘로 올리워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도 없었을 것이며 천국에서의 영광도 누릴 수가 없게 되셨을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20)는 말씀이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한다는 것은 피조물이 저주를 받아 본래의 창조의 목적대로 제 구실을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피조물까지도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날에 피조물도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21).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이르는 것을 바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피조물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21).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은 장차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자유’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하여 영생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손상된 모습을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어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날에 피조물들도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사막이 꽃이 피어 향내를 내며,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65:25). 그래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피조물이 기다리고 바라는 것은 우리가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23절에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조물들이 나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양자 될 것을 탄식하며 기다린다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26).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아 신분상 그의 양자가 될 것을 피조물과 성령이 기다린다는 말씀입니다.
피조물이 이제까지 우리와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인 나와 여러분도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다려야 합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해도 참고 견디며 기다려야 합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은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사람들이 병들어 고생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불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듦이 불행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믿음의 사람은 ‘병들지 않았을 때 듣지 못한 것을 병들므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병들지 않으면 부르지 못하는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병들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병들지 않으면 볼 수 없었던 성경말씀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병들지 않을 때 깨닫지 못했던 말씀을 병들므로 깨달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같은 노래지만 병든 사람이 부르는 것과 병들지 않은 사람이 부르는 것은 다릅니다. 병들지 않은 사람이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병든 사람은 느끼는 것입니다.
병들지 않을 때 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고 알았고 찾았기 때문에 병들므로 행복을 더 많이 느끼는 것입니다. 병듦의 의미를 느껴야 합니다. 병들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던 것을 병들므로 믿을 수가 있게 되었고, 믿지 못할 기적을 체험하게 되고, 바라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들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을 병들므로 많이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어떤 고난도 참고 이겨냅시다. 조금만 참으면 무한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영광을 누립시다. 손양원 목사님은 고난 중에 주님 고대가를 많이 불렀습니다. 우리도 주님 오시기를 고대하고 기다립시다.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영광을 영원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