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안 발표
← 국민회의파의 네루(왼쪽)와 신임 인도 총독 마운트배튼(가운데) 그리고 무슬림 동맹의 진나가 인도독립에 관해 협의를 하고 있다. 1947년 6월 3일, 영국의 루이스 마운트배튼 인도 총독이 영국령 인도를 힌두교 지역과 무슬림 지역으로 나눠 각각 제헌의회를 세운다는 분리독립안을 발표했다. 힌두교의 국민회의파를 중심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독립일정이 차질을 빚은 것은 무슬림연맹이 분리독립을 요구하면서였다. 영국은 내전과 분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국민회의파도 종교갈등과 이로 인한 살육행위를 마냥 모른 체할 수 만은 없었다. 간디는 “인도를 생체해부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8월 15일, 마침내 인도와 파키스탄 2개 국가가 분리독립됐지만 이 과정에서 또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가 파키스탄으로부터, 이슬람교도가 인도로부터 쫓겨나면서 14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100만명이 살해된 것이다. 분리 후에도 양국은 경계지역인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3차례나 전쟁을 치렀지만 긴장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1924년]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사망
20세기 문학사의 한 축을 이룬 체코 출신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1924년 6월 3일 빈 교외의 킬링 요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41세였다. 프라하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프라하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이즈음 시작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본격적인 습작에 들어갔다.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08년부터는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14년 동안 근무했다. 독일어와 체코어가 함께 사용되던 프라하에서 그는 독일어로 작품을 썼다. 그의 문장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간결하지만 독일어 산문 문학 중 가장 명료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간의 부조리와 인간존재의 불안 등을 날카롭게 통찰해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한 그의 작품들은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았다. 소련 공산당은 `절망과 불안을 조장하는 부르조아 퇴폐 반동 작가`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작품을 오랫동안 금기시했으나 1964년 해금됐다. 그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성(城)`과 미완성 장편소설 `심판(審判)` 등이 있다.
[1964년] 6·3사태 발발
← 5·16군사정변의 주체세력들 1964년 6월 3일 정부가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본격화시키자 학생을 중심으로 격렬한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학생들은 서울대학교 집회에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총리와 이완용의 허수아비 화형식을 가진 뒤 가두시위에 돌입했고, 서울·부산·대구 등까지 저항운동이 확산되었다. 한일회담과 5·16군사정변을 맹렬히 성토하는 가운데 시위대가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청와대까지 이르자 박정희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6월 3일 계엄군의 진주로 시위가 무력진압된 후 7월 29일 계엄령이 해제되기까지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이 구속되었다.
[1950년] 안나푸르나 최초 등정 1950년 6월 3일 프랑스 등반대가 안나푸르나 제1봉의 최초 등정에 성공했다. 안나푸르나는 네팔 중북부의 히말라야 산맥의 일부로 칼리간다크 강 유역과 마르시안디 강 유역 사이에 능선을 이루고 있다. 4개의 주요 봉우리들 가운데 서쪽 끝에는 안나푸르나 제1봉(8,091m)이, 동쪽 끝에는 제2봉(7,937m)이 자리잡고 있는데, 제1봉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가운데 하나이다. 1950년 6월 3일 프랑스 등반대의 모리스 에르조와 루이 라슈날이 정상에 도달함으로써 안나푸르나 제1봉 등정에 처음 성공했다. 한국에서는 영남대학교 산악회가 처음으로 안나푸르나 제2봉 등정에 성공했으며, 1984년 겨울에는 한국의 김영자가 여성산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안나푸르나 제1봉 등정에 성공했다.
[1853년] 피트리 Sir (William Matthew) Flinders Petrie 출생 1853년 6월 3일 태어남 / 1942년 7월 28일 죽음
"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이집트 왕 호루타에 대한 비밀이 공개되었다. 겹겹이 싸인 수지와 헝겊들이 벗겨지자, 장려한 부적들이 그 먼 과거에 놓여졌던 그대로 줄줄이 드러났다. 그의 이름과 직위가 새겨진 금반지, 정교하게 상감한 황금새들, 양각한 황금상들, 섬세하게 만들어진 작은 청금석 조상들, 청금석·녹주석·홍옥수를 다듬어 만든 부적들, 이 모든 과거의 보물들이 우리의 눈을 황홀케 했다." - 플린더스 피트리 경
피트리는 이집트 연구로 유명한 영국의 고고학자이다. 어려서부터 고고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20세를 전후해 스톤헨지를 비롯한 영국의 여러 유적지들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1877년에는 고대 계량법 복원에 관한 저서 <귀납적 도량형학 Inductive Metrology>을 발표했다. 1880년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의 측량과 발굴을 시작으로 이후 40여 년 동안 중동 지방의 고고학적 탐사에 전념했다. 나일 강의 델타 지역에서 타니스 신전과 그리스 식민도시 나우크라티스를 발굴했으며, 고대 문화유물의 순서연대결정법을 창안했다. 토기 파편으로 편년을 세울 수 있다는 그의 가설은 당시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고고학의 기본 방법들 중 하나가 되었다. 1892~1933년 런던대학 유니버시티 칼리지 에드워즈좌(座) 이집트학 교수로 재직했고, 1894년에는 이집트 연구기금을 설립했다. 교수직에서 은퇴한 뒤에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발굴작업을 계속했다. 주요 저서로 <고고학의 방법과 목적 Methods and Aims in Archeology>(1904)·<고고학에 바친 70년 Seventy Years on Archeology>(1931) 등이 있다.
[1921년] 소설가 유주현[柳周鉉] 출생
1921. 6. 3 경기 여주~1982. 5. 26 서울. 1960년대에 역사소설로 한국문단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작가이다. 아버지 기하(基夏)와 어머니 기이곡(其理谷) 사이에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5년 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동안 방랑하다가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1943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문과를 수료했다. 이듬해 귀국해서는 조점봉(趙點鳳)과 결혼하고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해방 후에는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댔으나 모두 실패해 어려운 생활을 했다. 1949년 박연희와 〈백민〉 편집동인으로, 1950년 곽하신과 국방부 기관지인 〈국방 國防〉의 편집인으로 참여했다. 6·25전쟁중에는 피난지 대구에서 공군문인단에 참가하고 기관지 〈창공 蒼空〉의 편집간사로 활동했으며, 1952년 〈신태양〉 편집에 참여한 뒤로 1973년까지 20년간 이 잡지에 관여했다. 1970년 한국도서잡지 윤리위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문인협회 이사, 1974년 한국소설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고, 1975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교수로 취임했다. 1978년부터 척추골절로 고생하다가 1982년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에 있는 선산에 묻혔다. 중앙일보사에서 유주현문학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1948년 단편 〈번요(煩擾)의 거리〉가 〈백민〉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단편 〈군상 群像〉(백민, 1950. 2)·〈패배자〉(문예, 1953. 6)·〈인생은 서러워〉(새벽, 1956. 1)·〈패륜아〉(사상계, 1956. 9)·〈장씨일가〉(사상계, 1959. 5) 등을 발표했다. 초기에 발표한 이 작품들은 대부분 강한 사회의식을 가지고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를 다룬 것들이었다. 특히 〈패륜아〉는 애욕으로 얽힌 한 가정을 그린 문제작이고, 〈장씨일가〉는 좌절과 실의에 빠진 한 일가를 그린 작품이다. 1960년 이후에는 주로 역사소설을 써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했는데,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조선총독부〉(신동아, 1964. 9~1967. 6)에서는 다른 사람이 한번도 다루지 않았던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민족수난을 사실적으로 잘 그려냈다. 이어 발표한 〈대원군〉(조선일보, 1965. 7. 16~1967. 8. 13)은 역사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 뒤에도 〈대한제국〉(신동아, 1968. 4~1970. 5)·〈통곡〉(동아일보, 1969. 8. 1~1972. 3. 19)·〈우수의 성〉(중앙일보, 1972. 4. 1~12. 29) 등의 역사소설을 발표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인간의 영혼과 본질성, 내재적 존엄성 등을 주제로 한 단편을 발표했는데, 〈죽음이 보이는 안경〉(한국문학, 1977. 11)·〈소복 입은 묵시〉(문학사상, 1978. 10)·〈이제 어디로〉(한국문학, 1978. 11) 등이 그것이다. 소설집으로 〈자매계보〉(1953)·〈태양의 유산〉(1958)·〈대원군〉(1967)·〈조선총독부〉(1967)·〈대한제국〉(1970)·〈파천무〉(1976) 외에도 30여 권이 있으며, 전집으로 〈유주현전집〉(1968)·〈유주현대표작선집〉(1978)·〈유주현역사소설군대전집〉(1983) 등이 있다. 1958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8년 한국출판문화상, 1976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등을 받았다.
[1905년] 국어학자 방종현[方鍾鉉] 출생
1905. 6. 3 평북 정주~1952. 11. 18 서울. 호는 일사(一蓑). 1926년 3월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일본 구마모토[熊本] 중학에서 수학한 뒤 1934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 및 문학과를 졸업했다. 동(同)대학 대학원에 입학해서 1938년 9월까지 국어학을 연구했는데, 이 기간중 1936년 11월부터 1938년 7월까지는 동경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연구했고 1938년 8월부터는 조선일보사 안에 있는 조광사에서 향토문화연구소 일을 맡아 1943년까지 계속했다. 1940년 9월에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을 창설해 해방될 때까지 민족문화연구에 주력했으며, 해방된 1945년 10월에는 새로 출발한 경성대학 예과 교수를 거쳐 1946년 10월 국립 서울대학교 창립과 동시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6·25전쟁중이던 1950년 10월에는 수복과 더불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관리책임자로 취임해 학원의 재건에 힘썼고, 1951년 12월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으로 재직하다가 1952년 11월 18일 화농성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조선어학회 도서부 간사(3대), 한글학회 이사, 진단학회 위원, 서지학회 회장, 우리어문학회 위원, 한국산악회 학술조사 위원, 조선일보사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48년에 나온 〈훈민정음통사 訓民正音通史〉를 비롯한 국어학사 관계의 저술에서는 훈민정음 이전의 향가·이두 등의 자료까지 다루고 있으며, 훈민정음에 대해서는 그 기원·명칭·발달을 논의하고 훈민정음 이본(吏本)에 대한 고증을 하는 등 훈민정음의 모든 부분을 포괄해 연구했다. 국어사 관계자료의 정리와 해석에 있어서의 업적은 〈계림유사 鷄林類事〉·〈훈몽자회 訓蒙字會〉에 대한 연구와 〈고어재료사전 古語材料辭典〉의 편찬이다. 〈훈몽자회고(考)〉·〈계림유사연구〉는 각각 〈동방학지〉 1권과 2권에 실린 유고인데, 〈훈몽자회고〉는 국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훈몽자회〉 저작의 경로 및 내용을 밝히고 최초로 저자에 대한 고증을 했으며, 판본의 비교 검토를 통해 최고본을 밝혀내는 성과를 보인 논문이다. 〈계림유사연구〉는 〈계림유사〉의 판본에 대한 서지학적 해제(解題)와 더불어 고대국어연구의 전제조건으로 한자음·고어·방언의 지식을 강조하고 그에 의거한 주해를 보인 것으로 방법론적인 면에서나 실제자료의 해석에 있어서나 오늘날에도 이 방면의 연구에 많은 암시를 주는 업적이다. 〈고어재료사전〉은 15세기 이후의 한글 문헌에 나오는 고어를 망라하여 정리한 것으로 각 항목의 용례에 성조(聲調)를 표시했는데, 이것은 국어사 연구에 있어서 성조의 중요성을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사실로 그의 안목과 성실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많은 국어사 자료들이 일본인들에게 넘어가던 시기에 국어사 자료들을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했고, 그의 저작의 많은 양을 차지하는 해제작업은 오늘날에도 귀중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1903년] 독립운동가 이강훈[李康勳] 출생 1903. 6. 3 강원 철원~. 1910~17년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920년 4월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실에서 1년간 있었다. 1921~24년 북간도연길도립사범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25년 북만주에 있는 항일운동단체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했다가 그해 10월 체포되어 8명의 부원과 함께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6~32년에 신민부 산하의 각급 학교에서 교무(敎務)를 담당했고, 1932년 겨울 만주를 탈출하여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33년 3월 중국을 방문한 일본사절 등을 폭살(爆殺)하려던 '육삼정의거'(六三亭義擧)에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8·15해방 후 출옥했다. 1946년부터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에서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간부로 활동하다가 1960년 귀국했다. 5·16군사정변 때 혁신계 정당 간부로 활동하다가 투옥되어 1963년에 석방되었다. 1969~83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실무자 및 독립운동유공자 공적심사위원, 1988~92년 광복회 회장 등을 지냈다.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저서로 〈해외독립운동사〉·〈항일독립운동사〉·〈독립운동대사전〉·〈무장독립운동사〉·〈대한민국임시정부사〉 등이 있다.
[1989년]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Khomeini, Ayatollah, 1900~1989) 사망
지난 1979년 회교혁명이후 신정체제를 굳혀온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루훌라 호메이니옹이 1989년 6월 3일 테헤란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02년 수도 테헤란 남쪽 오아시스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6세 때 이미 코란을 암송할 정도였고 19세때 시아파 중심지인 콤시에서 성직자가 되었다. 1963년 팔레비 국왕에게 공개적으로 죽음을 경고하는 투쟁을 벌이다 추방되었으나, 1978년 7월 계엄령속에 시민 수천명이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검은 금요일’ 이후 혁명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팔레비 독재왕정을 무너뜨리고 최고권자에 오른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도덕적 회교 원리주의국가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해왔으나 이란 - 이라크전 때문에 대부분의 집권기간을 전쟁속에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그의 삶을 뒤로하고 오늘날 세계는 그를 회교정신을 부흥시킨 탁월한 종교-정치적 지도자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의 기존질서를 위협한 인물로서 엇갈린 평가를 하고 있다.
[1973년] 소련 초음속항공기(TU144) 파리에 추락 소련의 최신형 TU144 초음속 항공기가 1973년 6월 3일 파리교외 르브르제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항공쇼에서 시험비행중 귀빈석 스탠드를 저공비행으로 통과한 직후 공중폭발, 인근 주거지역에 추락하여 소련승무원 6명 전원을 포함한 8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고지점인 구생빌르 마을에는 가옥 15채가 파괴됐고 1백여채가 기체파편의 낙하로 부분파손을 입었다. 에어 쇼의 마지막날인 이날 소련항공계의 자랑인 TU144기를 구경나온 30만명의 관중들은 귀빈석 위를 저공비행한 후 구름속으로 수직상승 하자마자 곧 폭음,화염과 함께 산산조각난 기체의 파편들이 떨어지는 극적인 추락현장을 목격했다. 이날 공중폭발한 초음속항공기 TU144는 영불합작 의 콩코드기의 유일한 경쟁자이였고 외형도 콩코드와 흡사했다. TU144기는 1968년에 처녀비행을 했고, 1970년 5월 21일 일반에 첫선을 보였다.
[1969년] 호남 정유공장 준공 1966년 락희화학공업사(주)와 미국의 칼텍스석유회사(주)간의 합작투자계약에 따라 1967년 5월 호남정유(주)로 설립되었다. 1969년 6월 일일 원유 처리능력 6만 배럴 규모의 여수공장을 준공한 이래 계속된 생산시설 확장으로 2002년 현재 일일 원유 처리능력 65만 배럴 규모의 정제시설과 세계 최대의 중질유 분해시설을 갖추게 되었으며, 또한 파라자일렌 105만t을 포함한 연산 200만t 규모의 방향족 생산시설 및 연산 18만t 규모의 폴리프로필렌 생산시설을 완공하여 석유제품을 비롯한 석유화학 공업원료 등을 생산·공급하고 있다. 1996년 상호를 LG칼텍스정유(주)로 변경하고 1997년 LG정유유통(주)을 흡수합병, 1998년에는 LG정유판매(주)를, 1999년 호유해운(주)을 합병하였다.
[1965년] 미국 제미니4호 발사. 애드화이트 소령 미국 최초로 21분간 우주유영 미국의 2인용 유인위성 ‘제미니4호(Gemini 4)’가 1965년 6월 3일 발사돼 우주비행사 에드워드 화이트 소령이 미국 최초로 21분간의 우주유영에 성공했다. 소련의 레오노프 소령보다 3개월 늦은 것이었다. 화이트는 우주선과 함께 시속 2만9천Km로 지구를 선회했다. 당시 우주의 아름다운 광경에 매료된 화이트는 우주선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에 "내 일생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후 화이트는 1967년 1월 26일 아폴로1호 발사시험에 참가했다 화재사고로 사망했다.
[1963년] 로마 교황 요한23세 서거
카톨릭의 교황 요한 23세가 오랫동안 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81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881년 12월 25일 태어나 1953년 베네치아 대주교를 거쳐 1958년 10월 9일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261대 로마법왕으로 5년 재임하는 동안 세계평화를 위해서 그가 남긴 업적은 크다. 그는 국가와 정치와 종교의 차이를 초월해 모든 인간의 평화를 위해서 힘썼다. 그는 교황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평민적인 냄새를 풍기는 사람으로서 교황으로 당선된지 몇 달만에 전 교황 비오12세가 19년 동안에 한 것보다 많은 공개석상에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1962년 10월 11일에 카톨릭교공의회를 열었다. 이것은 2천년의 카톨릭교 사상 21번째의 공의회이며 근 백년 동안에 처음으로 열리는 회합이었다. 비(非) 카톨릭신자들에게도 유명했던 교황은 평화와 종교단결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로 세계 지도자들과 종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며, 교회의 현대화를 위해 상당한 영항력을 행사했다. 요한23세의 뒤를 이어 밀라노의 대주교인 바티스타 몬티니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바오로6세가 됐으며 6월 30일 바티칸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다.
[1959년] 싱가포르, 영연방자치국 독립선언
1959년 6월 3일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은 싱가포르가 새 헌법의 공포와 함께 영국의 자치령이 됨으로써 140년간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났다. 140년 전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조호르 영주에게 불과 얼마되지 않는 비용 만을 지불하고 싱가포르를 사들였다. 당시에는 무인도로 가치가 없던 때였다. 이후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로 자유·중계 무역항이 되었으며, 말레이반도를 비롯하여 인근 여러 나라와 유럽 무역의 중심이 되었다. 1921년에는 영국군의 군사기지가 설치되어 군사·경제적으로 영국 식민지배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잠시 일본군에 점령당하기도 했으나, 종전 후 다시 영국 식민지가 됐다. 그후 反식민지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 결국 이날 영연방 자치국으로 독립했다.
[1948년]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마산천문대 개소식, 200인치 망원경 설치
미국 캘리포니아주 팔로마산의 해발고도 1,706m에 있는 팔로마산천문대(Palomar Observatory)는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있는 사립대학인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이 소유·운영하며, 대학의 교수진과 학생들의 과학 연구 프로그램그램의 지원에 사용된다. 1920년대 중반에 이웃인 100인치 망원경을 갖춘 윌슨산 천문대에서 보다 진보된 천문학 연구를 위해서는 더 좋은 기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자, 1928년 록펠러 재단의 하나인 국제교육이사회에서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200인치 헤일망원경을 기증하기로 했고, 천문학 관측에 필요한 최적의 대기조건을 갖추기 위해 여러 장소에서 테스트가 이루어진 결과 1934년에 팔로마산이 선정되었다. 주요기구로는 지름 5m의 헤일망원경, 1.2m의 오스친 망원경, 46cm의 슈미트카메라, 그리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워싱턴의 카네기연구소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는 지름 1.5m의 반사망원경이 있다. 또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은 상호동의에 의해 헤일망원경을 코넬대학교의 천문학자와 제트추진력연구소 실험실 학자들과 함께 사용한다. 공사기간 20년이 걸려 1948년에 완성된 지름 5m의 헤일망원경(Hale Telescope)은 항성(恒星)의 스펙트럼과 외부 은하의 연구 등에 이용되며, 오스친 망원경과 슈미트카메라는 초신성(超新星) 관측 및 은하계 내의 성운 연구에 이용된다. 특히 슈미트카메라를 이용하여 1950년대에 제작한 사진성도(寫眞星圖) 《국립지리학회:팔로마천문대천성도 National Geographic Society:Palomar Observatory Sky Survey》는 잘 알려져 있다. 소재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북동쪽 65㎞ 지점인 팔로마산에 있다.
[1946년] 이승만,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시사하는 ‘정읍 발언’ 연설
1946년 6월 3일 이승만 박사가 전북 정읍에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해방정국에서 국제정세에 가장 밝았던 현실주의 정치가 이승만은 이미 북한의 소비에트 권력체제가 현실적으로 깊숙이 진전되어 있다고 판단. 아무 뚜렷한 전망도 없는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위에 더이상 남한의 정권수립을 무작정 맡겨둘 수 없다고 보고 이같은 연설을 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정읍발언’의 배경이다. 이승만의 연설은 미국정부와 국내 중도적 온건파 등을 당황하게 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민족단합을 통한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원했고, 미국은 소련과 합의한 `모스크바 의정서`에 따라 미소협조에 기초해 한반도에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성사시켜 남북을 통틀어 조선임시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진행해 왔기 때문이었다.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운동도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이러한 정책을 맹렬히 공격했다. 소련의 침략적 팽창주의의 본질을 모르는 유화주의자들이 한반도정책을 오도하고 있으며 미국의 구상대로 일을 추진하다가는 결국 남한마저 소련에 의해 공산화될 것이라고 정읍발언에서 경고한 것이다.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불가피론은 도쿄에 자리잡고 있는 태평양지역연합군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조야를 상대로 설득전을 폈다. 그의 설득전은 시의적절했다. 미국은 마침내 1947년 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소련에 대한 종전의 유화정책을 버리고 소련의 팽창주의정책과 세계적화전략에 과감히 맞설 것임을 다짐했다.
[1946년] 이범석 장군 및 광복군 5백여명 귀국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은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을 도와 중대장으로 참가하여 활약했다. 이후 소련으로 진출해 1922~25년 소련 합동민족군 연해주 지역 지휘관으로 소련의 혁명전쟁에 참가했으나 소련의 대일정책에 불만을 품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고려혁명군 결사대를 조직했다. 1933년 뤄양[洛陽] 군관학교 한국인 장교대장을, 1936년 중국 제3로군 사령관 등을 지냈다. 1941년 한국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을 겸임했으며, 중국 주재 미사령부와 합동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27일 광복군을 거느리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비행기로 여의도까지 왔으나 미군의 거부로 중국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1946년 6월 광복군 간부들과 함께 귀국했다. 미군정이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자 12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고 단장이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1950년 주중대사, 1952년 자유당 부당수 및 내무부장관 등을 지냈다. 1952, 1956년 2번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1960년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었고, 1963년 '국민의 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냈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저서로 〈우등불〉·〈방랑의 정열〉·〈민족과 청년〉 등이 있다.
[1902년] 산돌 손양원 목사 출생
1902 경남 함안~1950 전남 여수. 호는 산돌. 1908년 그리스도교도가 되었고, 1917년 선교사 F. J. L. 매크레이에게 세례를 받았다. 1923년 도쿄[東京] 스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 1925년 경상남도 성경학원을 졸업했다. 부산의 나병원 전도사로 부임한 후 울산 방어진교회·남창교회(南倉敎會), 양산의 원동교회(院洞敎會) 등을 개척·설립하여 1934년까지 시무했다. 1938년 평양장로신학교를 졸업했고, 이듬해 7월부터 여수 애양원(愛養院)에서 시무했다. 1946년 경남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1950년 9월 13일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여수·순천 10.19사건 당시 아들을 처형하여 죽인 범인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아 전도사로 키워낸 그의 일대기를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으로 안용준 목사가 저술했고, 영국에서는 〈씨앗은 죽어서〉로 번역·출판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홍형린 장로의 기획으로 1966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저서로는 〈산돌 손양원 목사 설교집〉이 있다.
[1963년] 시인 오상순(吳相淳, 공초) 사망
1894. 8. 9 서울~1963. 6. 3 서울. 1920년대 〈폐허〉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인생의 허무를 주로 노래했다. 본관은 해주. 호는 공초(空超)·선운(禪雲). 성해(星海)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목재상을 운영하던 아버지 태연(泰兗)의 4남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나 효제국민학교를 거쳐 1906년 경신학교를 졸업했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8년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귀국한 뒤로 한동안 전도사로 교회일을 맡아보았는데, 이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성서와 철학책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김억·남궁벽·황석우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21년 종교를 그리스도교에서 불교로 바꾸고 조선중앙불교학교·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학교를 그만둔 뒤로는 8·15해방 때까지 방랑생활을 했다. 그의 방랑벽과 담배를 하루에 20갑 넘게 피우던 습관은 한국문단에 널리 알려져 있다. 1945년 서울로 돌아와 역경원 등을 전전하다 조계사에서 지냈으며, 1963년에 죽은 뒤 유해는 수유리에 안장되었고, 시 〈방랑의 마음〉 첫머리를 새긴 시비가 세워졌다. 1920년 〈페허〉 창간호에 평론 〈시대고와 그 희생〉을 발표해 '폐허'는 그것을 극복해서 낙원을 찾는 긍정적 의미가 있다며 '폐허'의 옹호와 허무의 극복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에 발표한 시 〈허무혼의 선언〉·〈아시아의 밤〉·〈타는 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이론에 맞도록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폐허〉 제2호에 〈힘의 숭배〉·〈힘의 동경〉·〈힘의 비애〉 등의 시 17편과 평론 〈종교와 예술〉을 발표한 데 이어, 1935년 대표시 〈방랑의 마음〉(조선문단, 1935. 2)을 발표했다. 그의 시에는 '허무·폐허·태고·원천' 등의 생경한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며, 허무적·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해방 후 시 〈항아리〉·〈해바라기〉를 발표해 민족적 염원과 정서를 노래하기도 했다. 유고시집으로 〈공초 오상순 시선〉(1963)·〈방랑의 마음〉(1977) 등이 있고, 1955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1961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그밖에 2005년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국 대 우즈베키스탄 경기 2005년 이미나 선수, LPGA투어 HSBC 여자월드 매치플레이챔피언십에서 준우승 2001년 영화배우 앤서니 퀸 사망
2000년 지중해서 기원전 7~6C사이에 조성된 고대 이집트 도시 '메노우티프'와 '헤라클레이온' 발견 1998년 독일 고속열차 탈선으로 100명 사망 1995년 세계최초 컴퓨터 ‘에니악’을 개발한 프레스터 에커트 사망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 리우회담 개최 1991년 정원식 총리 폭행사건 1978년 방글라데시 대통령 라만 당선 1975년 도피성이민 우려있는 명사 84명 출국규제 1972년 서독 폴란드 수교 1971년 김종필 제11대 국무총리 취임 1964년 학생시위 격화-계엄령 선포 1962년 프랑스 여객기 파리공항 추락 1백30여명 사망 1961년 미국, 소련 비엔나에서 회담 1957년 미국 중동조약기구(METO)에 가입 1957년 흐루시초프, 신스탈린파 말렌코프, 몰로토프 등 숙청 1955년 프랑스 보호령 튀니지에 자치권 부여 협정 조인 1955년 미국-이스라엘 원자력쌍무협정에 조인 1949년 국회, 전국무위원 인책사임안 가결 1948년 파라과이 쿠데타 발생 1947년 군정청, 산하 기구를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 1943년 알제리에서 드골지휘하에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 결성 1936년 총독부 발행 조선민력에 음력이 폐지됨. 양력 발행을 결정 1936년 이디오피아 황제 영국에 망명 1929년 스위스의 세균학자 아르버 출생 - 1978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 1929년 칠레.페루 국경분쟁 해결, 미국중재 1917년 알바니아 독립 선언 1916년 미국, 국가방위법 제정 1915년 파리서 제1회 연합국전쟁경제회의개최, 경제적공동체제수립 결정 1911년 사찰령 공포 1899년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사망 1895년 청, 일본에 대만과 팽호도 할양 1894년 동학난 진압위해 청에 파병 요청. 이홍장 파병 1875년 가극 작곡가 조르주 비제 사망 1786년 추사 김정희 출생 1657년 영국의 생리학자 하비 사망 1116년 송나라의 대성악 고려에 전래
첫댓글 구름님,6월도 건강하고 행복한 날들 이어가세요..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