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변화하는 베트남과 문화 2
지역 간 연대, 의례로 말미암다 - 베트남 수호신 의례와 축제 2
최호림 | 한국동남아연구소 전임연구위원, 덕성여대 겸임교수
레멋과 ‘13짜이’의 연대의례
‘해마다 3월 23일이면, 사람들은 니하(Nhi Ha, 홍하의 옛 이름)를 건너 고향을 찾아오네. ‘경관’(京館)과 ‘구관’(舊館)이 손에 손잡고, 서호(西湖)의 물고기들도 구름을 타고 오는 듯 뛰어오르고 춤추네.’ 하노이 쟈럼(Gia Lam) 현의 레멋(Le Mat) 마을에는 매년 음력 3월 23일, 이같이 노래를 부르는 의례 행렬과 함께 성대한 ‘레멋 축제’가 열린다. 마을의 수호신 사당 ‘딩(Dinh) 레멋’에는 ‘호앙 장사’(Chang chai Hoang)를 성황으로 모시고, 그의 업적을 상징하는 몇 가지 현판이 남아 있다. 마을 수호신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하루는 리타이똥(李太宗, 1072~1127)의 공주가 궁녀들과 용선을 타고 강에 놀이를 나갔다. 배가 어느 곡류를 지날 때 갑자기 크고 사나운 파도가 용선을 덮쳐 공주와 많은 시녀들이 목숨을 잃었다. 수행 신하들이 강변 둑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레멋의 호앙 씨 집안의 한 농부가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와 즉시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는 용감하고 총명하게 그 기괴한 물결을 이기고 공주의 시신을 건져냈다. 왕은 그를 궁으로 불러 칭찬하고 상으로 금은보화를 내리고 관직에 봉했다. 그러나 호앙 장사는 조정이 내린 상을 거절하는 대신에 사람들을 모아 ‘낑도’(京都) 교외의 황무지를 개간해 마을을 만들고 농사를 짓도록 토지를 하사할 것을 요청했다. 왕은 이를 허락했고, 호앙 씨는 가난한 친척들과 이웃들을 모아, 홍하를 건너 탕롱 성 서부에 야생의 초목이 무성하게 덮힌 늪과 습지에 들어갔다. 호앙 장사는 이 황무지를 개간해 13개 농업 촌락(13 trai)을 만들어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 나라를 번성시켰다.
많은 사람들에게 레멋 마을과 ‘13짜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하노이 역사를 다룬 여러 서적에서도 이와 관련한 전설을 접할 수 있었다. 주민들이 전해주는 전설의 근간과 그것이 전하는 역사적인 의미는 놀라울 만큼 일치했다. 이같이 ‘지방의 역사’를 근거로 레멋과 13짜이는 호앙 씨 수호신의례를 공동으로 수행하는 연대 마을이 되었다. 매년 13짜이의 후손들, 즉 ‘경관’인 하노이의 해당 마을 주민들이 ‘구관’인 레멋의 의례와 축제에 참여한다. 레멋은 곧 13짜이의 원적이자 고향이고, 13짜이는 하노이의 전통마을의 근원이자 시조에 해당한다. 13짜이에는 리에우쟈이(Lieu Giai), 쟝보(Giang Vo), 투레(Thu Le), 반푹(Van Phuc), 꽁비(Cong Vi), 흐우띠엡(Huu Tiep), 꽁옌(Cong Yen), 응옥하(Ngoc Ha), 쑤언비엔(Xuan Bien), 빙푹(Vinh Phuc), 응옥카인(Ngoc Khanh), 낌마(Kim Ma), 그리고 지난 호에서 살펴본 다이옌(Dai Yen)이 포함된다.
역사 배워야 비로소 마을 사람 될 수 있어
13짜이의 주민에게는 레멋이 ‘근원 고향’(que goc)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어왔다. 특히 해당 마을에서 4대 넘게 거주해온 ‘원주민’은 마을의 ‘근원 고향’에 대해 상세히 안다. 마을 원로들의 설명에 따르면 13짜이는 하나의 고유명사였고, ‘호앙 레’의 전설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공동체 정신의 유산”이었다. 유적관리위원회 위원들은 이주민들도 공동의례에 참여하여 이러한 ‘역사’를 배움으로써 비로소 ‘마을 사람’(nguoi lang)이 되는 것이며, ‘마을의 정신’(tinh lang)을 익히게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전설’에 관한 이러한 해석방식은 일정 부분 사실성의 후광을 지니기도 한다. 사학계의 연구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13짜이의 역사는 베트남 역사학과 민속학 분야의 주요 연구 주제였으며, 특히 ‘하노이학’ 분야에서는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은 주로 13짜이가 11세기 리(Ly) 조나 이후 쩐(Tran) 조의 탕롱 성에 속했었다는 주장과, 17~18세기 레(Le)-응우웬(Nguyen) 조에 이르러 형성되었다는 주장 사이에 벌어진다. 최근에는 특히 각 마을의 수호신 사당이 대부분 18세기 이후에 건축된 점을 들어 후자의 주장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학문적인 가설일 뿐 마을 주민들의 역사인식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었다. 마을의 의례나 공식적인 행사를 주도하는 사람들로서는 ‘역사’로 기정사실이 된 ‘전설’을 얼마나 아는지가 ‘마을의 공동체성’(cong dong lang) 혹은 ‘마을 정신’(tinh lang)을 공유하는 중요한 척도로 작용했다.
도이머이 이후 하노이 각 전통마을의 고유한 수호신의례가 활성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같이 여러 마을의 기원이나 역사와 관련한 유대를 기초로 하는 연대의례도 구성되었다. 이러한 연대의례와 축제에서 전설의 내용은 상징적으로 재현된다. 13짜이와 레멋의 대표인 ‘쯔엉짜이’(truong trai)들은 매년 레멋의 공동의례를 주최하는 집행위원이 되고, 다른 13짜이의 연대의례에서 각 마을의 대표자로 참여한다. 각 마을 고유의 수호신의례에 13짜이 대표들을 초대하고, 다른 마을 의례에 사절단을 만들어 참여한다. 규모가 큰 행사에는 순례의식, 가마 들기, 제물 올리기 등의 절차를 수행하기 위해 공동제사단을 구성한다. 레멋 축제에서는 6개 마을의 ‘헌향대’가 순서에 따라 헌향 의식을 수행하고, 의례의 마지막 순서인 ‘제물 나누기’(thu loc)는 13짜이의 대표들이 직접 수행한다.
‘하인흐엉’(hanh huong, 行香)은 각 마을의 성소를 순례하는 의식인데, 13개 마을의 의례단이 대부분 공동으로 참여해 연대를 과시한다. 순례 행사는 대개 개별 마을의 의례에 비해 프로그램도 다양하고 참가자의 규모도 커진다. 레멋에는 ‘뱀춤’이 재현되었고, 응옥카인의 순례의례에서는 이마에 뿔이 하나 난 기린 모양의 전설의 동물을 가장한 민속춤(mua lan) 행사가 벌어졌고, 낌마와 꽁비의 행사 때는 ‘용춤’(mua rong)을 추며 마을의 화복을 기원한다.
형제마을 뜨와 다이옌의 연대의례로 표현
남딩(Nam Dinh) 성, 남하(Nam Ha) 현의 뜨(Giap Tu)는 다이옌의 자매 마을이다. 두 마을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면 두 마을의 관계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리 조의 어느 해에 뜨 사람들이 식량을 실어 험난한 뱃길을 따라 성에 도착해 세금을 바치고 돌아가는 길에 수심이 얕은 지역을 지나다가 배가 좌초할 위기에 빠졌다. 사람들이 위기에서 탈출하려고 궁리하던 중, 강 한쪽 다이옌이라는 마을의 작은 연못과 암자를 발견한다. 암자에서 향을 피우고 제를 올렸더니, 잉어 할아버지가 홀연히 나타나 뱃머리를 들어 구해주었다. 홍 강을 따라 남하에 무사히 도착하자 뱃머리에 있는 돛대의 머리가 백학으로 변해 날아갔다. 암자에 모신 신성이 뜨 사람들의 순수한 신앙과 애국심에 감명해 이들이 무사히 귀향해 생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 일이 전해지자 마을 사람들은 이 사실을 귀히 여겨 백학과 같이 긴 다리를 가진 향대에 향을 피우고 제를 올렸다. 그날 이후 잉어가 남하의 강가에 떠올라 백학을 모시는 모습이 여러 번 사람들의 눈에 띄었고, 학은 계속 마을 어귀를 떠돌며 살다가 어느 날인가 사라져버렸다. 그날이 바로 뜨의 의례가 열리는 음력 2월 8일이다. 후대에 전설을 전해 들은 많은 현학과 원로들이 비로소 백학은 돌아가신 옥화공주의 화신이고, 잉어는 공주를 모시는 신하이자 수호신으로 알게 되었다.
1990년에 <청년>(Thanh Nien)이라는 잡지에 두 마을의 관계와 옥화공주 설화와 관련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당시의 베트남 국립사학원에서 찾은 여러 자료를 근거로 전설의 주요 내용이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확인을 위해 두 마을의 원로들이 서로 방문했고, 두 마을 사당에서 같은 내용의 대구 현판이 발견되었다. 노인들은 ‘비로소 마을의 어머니를 찾았다’라면서 감격했고, 서로 부둥켜안고 잃었던 형제자매를 다시 찾은 것처럼 눈물을 쏟았다. 이후 두 마을의 원로들은 당시의 기록과 관련한 족보를 찾아 두 마을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에 착수했다. 1994년 뜨의 공동 사당(Den Giap Tu)의 유적 공인을 추진하면서 비로소 두 마을의 의례 교환과 공동의례의 조직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후 두 마을의 상징적인 자매 관계는 매년 공동의례와 의례 교환을 통해서 표현된다.
매년 음력 2월 8일 새벽 뜨의 연대의례에 참석하기 위해 50여 명의 다이옌 사람들은 버스에 오른다. 유적관리위원회와 ‘헌향대’의 성원들이 주축이 되고, 일부 청년들이 순례 행사에서 깃발을 들고 제례 용품을 운반하기 위해 참가한다. 뜨의 시장에 도착하면 자매 마을의 촌장을 비롯한 지도자들과 원로들이 손님을 맞이하고, 잠시 인사가 오간 뒤 이 날의 본 행사를 알리는 순례의식이 시작된다. 도시 지역인 다이옌의 행사와 달리, 화려하게 꾸민 가마에 수호신상을 모시고, 그 뒤에 형형색색의 만장과 깃발이 이어지고, 악대를 동원하는 등 더욱 전통적이다. 수호신 사당에서 이어진 제례의식은 약 한 달 뒤인 음력 3월 14일 다이옌에서 치른 의식과 동일한 순서로 진행된다. 두 마을은 연대의례를 통해 전통을 복원하고, 서로 상대의 의례에 인력과 물자 면에서 유사한 지원을 주고받으면서, 의례적인 등가교환을 통해 유대를 강화하고 있었다.
두 마을 간의 의례교환이 연례적인 행사가 된 이후부터는 주민들 간의 비공식 교류도 활발해지고 있다. 마을 지도자나 원주민 원로 집안의 결혼식에 자매 마을의 주민들을 초대한다. 장례식에도 어김없이 지매 마을 원로회 성원들에게 부고를 보내고, 장례식 참가단이 조직된다. 이러한 비공식적인 친교와 의례교환에 열성을 갖는 사람들은 대부분 원주민 지도자들이거나 의례 조직의 성원들이었다.
마을의 역사적 사실이 상상의 공동체 구성
이러한 의례 과정에서 수호신의 업적을 재현함으로써 역사가 된 허구에 근거를 둔 ‘상상의 공동체’가 상징적으로 구성되고 재생산되었음을 표현한다. 또 전통촌락 간의 연대의례는 지방 민간의 연대와 전통촌락 ‘랑’(lang)의 결합을 의미한다. 즉 사회주의 국가의 공식적인 지방행정단위의 경계를 넘어서는 ‘전통 마을의 연대’를 구성한다. 이런 점에서 마을 간 의례교환은 ‘창조된 전통’으로서 새로운 형태의 지방 간 연대의 가능성을 품는다.
출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너울> 2008년 7월호 vol 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