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씨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인 최씨는 역사상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전통있는 명문거족으로 오랜 역사의 흐름과 체험 속에서 많은 특성을 남겼으며, 역사상 선현들이 이룩해 놓은 찬란한 업적에서 더듬어 볼 수 있는 최씨 특유의 기재·강기신념·절조등으로「최고집」 혹은 최씨 앉은 자리 풀도 안난다.」등 많은 애칭을 낳기도 하였다.
모든 최씨의 원조는 신라건국의 모체가 된 사로국(斯盧國)(서라벌) 사량부(沙梁部)의 돌산(突山)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신라건국설화에는 소벌도리가 하늘에서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다고 전하며 다음같은 기록이 보인다. 기원전 44년 어느날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가 양산 나정(蘿井) 옆을 지나다가 말 울음소리를 듣고 숲속으로 달려가보니 말은 달아나 보이지 않고 큰 알만 놓여 있었다.이상히 여긴 소벌공(蘇伐公)이 그 알을 깨어 보니 그 속에 아이가 들어 있는지라 집으로 데려와 길렀다. 나이10세가 되자 기골이 장대하고 숙성하여 비범한 재질을 보이므로 소벌도리(蘇伐都利)가 특별히 교육시켰다.
전한(前漢) 효선제 오봉 원년 4월(기원전57년)에 진한(辰韓) 6部(6촌)에서 공동추대하여 임금으로 즉위시키니 나이는 13세요 명칭은 거서간, 국호는 서라벌이었다.당시 태어난 알이 박만 했다 하여 성(姓)을 박(朴)으로 삼으니 이가 바로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였다.혁거세(赫居世)는 즉위 후 자신을 추대한 공로에 따라 육부촌장에게 성씨를 하사했는데, 알천양산촌장 알평에게는 이씨, 돌산고허촌장 소벌도리에게는 최씨, 무산대수촌장 구례마에게는 손씨, 취산지지촌장 지백호에게는 정씨,금산가리촌장 기타에게는 배씨, 명활산고야촌장 호진에게는 설씨의 성을 내려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위의 6부 촌장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최(崔)자의 뜻》崔는 높을 山과 사람 人,흙 土를 두 개 포갠 圭자로 형성된 문자이며 이 규(圭)자는 천자에게 받은 땅을 다스린다는 뜻과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내리던 신표의 뜻으로 위로는 뫼 山,아래로는 사람 人, 흙 土를 두 개 합친 최(崔)자는 하늘아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인신 최고의 신분표시였다. 삼국사기에 유리왕 9년(32)에 6촌의 이름을 6部로 고치고 17관등을 설치한 것을 두고 일부에선
이때를 6촌장 득성(得姓)시기로 보지만 이것은 종래 사로(斯盧) 6촌을 행정구역인 6部로 개편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신라의 중앙관제가 공식적으로 만들어 지고 지방제도가 지역적인 행정구역으로 개편되는 시기로서 이미 박혁거세 즉위 초에 사성받았던 6부촌장들의 성(姓)은 변함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또 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정씨(鄭氏)의 조상도 되며 진주 소씨(蘇氏) 시조도 소벌도리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세계(世系)를 구체적으로 밝힐 만한 문헌은 없고 다만 다음같은 두 가지 說이 있다. 최(崔)씨의 원류》요(堯)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蘇城:현재 길림성)의 하백에 봉해 졌으며 기원전 2266년경 소성(蘇城)이 단군조선에 영속됨에 따라 기씨에서 소씨(蘇氏)로 성을 고쳤으며 이 소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 중의 한 사람인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蘇伐都利)이며, 이 소벌도리의 25세손이 진주 소씨 중시조인 소경(蘇慶)이라고 하는 說과,
풍이(風夷)의 후손인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風州)의 배곡(倍谷)에 도읍을 정하고 전 국토에 부소나무(蘇:무궁화)를 심어 소(蘇)를 姓으로 삼고 이름을 소복해(蘇復解)라 하였고 그후 소복해의 61세손 소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의 하백에 봉해졌으며 소풍(蘇豊)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은 신유(申有) 진기(陳岐)등과 함께 진한(辰韓)을 세웠다는 說이 있는데, 이 소백손의 29세손 소경(蘇慶)은 신라 진지왕 2년(577)에 출생하여 처음 이름을 알천이라 하였고 진덕왕 때(702~737) 상대등 벼슬을 지냈다.
일찍이 소경(蘇慶)은 후손이 없어 걱정하였는데 어느날 꿈에 나타난 소벌도리의 계시(진주 도사곡으로 이사하면 9저를 얻을 것이라 함)에따라 신라 태종 무열왕 7년(660) 3월에 지금의 진주 상대동으로 이거하고 이름을 경(慶)으로 개명하였다 한다.이후 과연 9대에 걸쳐 9명의장군이 배출되었고 후에 후손들이 소벌도리를 원조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삼아 소경(蘇慶)을 중시조로 모셨으며 이로서 진주 소씨의 문호가 열렸다.중시조 소경(蘇慶)은 관직이 각우에 이르렀고 나라에 큰공을 세웠으며 태종무열왕 3년(656)에는 왕이 그의 조상인 소벌도리를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국사(國史)에 의하면 기원전 200년을 전후하여 삼한(三韓:마한.변한.진한)에는 국읍(國邑)옆에 천군(天君)이 제사를 받드는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이 있었다.이 소도(蘇塗)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다 방울과 북을 걸어 신성지역임을 표시하였고 천군(天君)이 제사장으로 농경예식과 종교의례를 주관하였다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소백손(蘇伯孫)이 진한(辰韓)을 세우기 훨씬 이전부터 그 조상들은 이미 천군의 직위를 갖고 별읍(蘇稻)에 머물면서 別邑의 명칭을 소(蘇)라 쓰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진주 소씨의 경우 중시조 소경(蘇慶)이 소벌도리의 25세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위 두 설중 어느 說을 취하더라도, 기원전 2392년 소풍(蘇豊)이 소성(蘇城)의 하백에 봉해진 사실과 기원전 2266년 단군조선에 예속된 사실등은 일맥상통한다.또한 이 소풍(蘇豊)의 69세손은 진한을 일으킨 소백손(蘇伯孫)이며 그의 29세손이 소경(蘇慶)이고 소경은 소벌도리로부터 25세손이니 진한(辰韓)을 일으킨 소백손(蘇伯孫)의 증손자가 바로 최씨의 득성조 소벌도리(蘇伐都利)인 것이다.
소벌도리에 이르러 새로이 최성(崔姓)을 득성(得姓)하였으나 그 후손들 중 일부는 종래 천군의 지위로서 기존의 소씨(蘇氏)를 유지하였을것이고 점차 대 군장세력에게 그 직위가 예속되어 감에 따라 일부 후손들은 새로운 성씨(崔氏)로 개명,사용했던것으로 추측된다.이는 경주 최씨 시조 최치원(崔致遠)이 소벌도리의 24세손이라는 사실에서 그 흐름을 엿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시조는 소벌도리의 24세손이며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을 주축으로 하여 선대 및 후대에서 분파되었다고 보면 정확 하다. 「경주최씨상계세보」의 기록으로는 소벌도리 24세손 최치원의 윗대 에서 분파된 본관으로 개성·동주(철원)·전주(군옥파)가 있고최치원의 후대에서는 함양·청주·영흥·충주·용강·수원·부안(扶安) ·강릉·강화·화순·통천·양천·원주·해주·진주·탐진·전주(순작, 균)가 분파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를 원조로 하여 소벌도리와 최치원을 잇는 같은 후예임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
이렇게 신라시대에 웅기한 최씨는 신라에서 최치원·최승우·최언위등 세 사람이 똑같이 당 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그 명성을 날림으로써 1대3최라 불리웠으며 특히 문창후 최치원과 같은 대 문장가는 우리 나라는 물론 동양의 어느 역사 속에서도 그 유래를 찾 아보기 힘든 명현으로 그가 남긴 도학과 문장은 동양최고의 지성이 고 한문학의 조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고려 때 와서는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고려사를 보면 수많은 최씨들이 역사를 수놓았으며 서기 1196년 (명종 26)∼1258년(고종 45)까지 60여 년 간 군벌정치로 한때 최씨왕국을방불케 했다. 충절의 명장 최영은 수많은 국내외 침입과 반란이 있을 때마다 격퇴, 평정하여 고려의 시련을 극복하고 나라에 공헌했으며,죽음에 임했어도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은 우리 민족의 얼이 요, 최씨의 특성이다. 그외 고려 때 문신 최유청·최윤의·최유엄·최재·최항·최충 등이 유명했으며 무신으로는 최충헌이 있다.
조선 때 와서 명신 최명길, 양명학의 대가 최석정, 학자 최수성, 문신 최응현·최항·최만리·최익현,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신문학 운동과 국학의 개척자 최남선, 항일투사 최재형, 동학의 제2교주 최시형 등 많은 최씨들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국가에 공헌했다. 한 씨족의 가문을 가늠하는데는 흔히 문과 급제자 수를 따지고 명문의 척도를 정치적 세력의 성장과 관련시키는 관료적인 조선사회에서 당시 과거제도가 권세가의 농락을 받은 일이 많아 견식과 인격을 겸비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최씨들에게는 벼슬이 그다지 증요시 되지 않았으므로신라와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최씨가 조선 때 와서 의외로 벼슬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경주시 교동에 자리한 「최부자집」은 12대 만석과 10대 진사로 유명하여 문공부가 1969년에 「신라의 집」으로 선정하고 길이 보존하기로 했다. 마지막 만석군 최준은 이씨 조선 청백리 정무공 최진립의 11세손으 로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100억원(현재기준)을 보내어 해방후 임시정부가 환국하자 백범 김구 선생께 제일 먼저 만나보고 싶어한 분이 최준이라고 하였으며, 이등박문을 제외한 역대 조선 총독들이 모두 경주 최준의 집을 방문하여 당시 문교부장(현 문교장관)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최준은 특히 폭넓은 교우 관계를 유지하면서 육영사업에 전 재산을 다 투자하였는데 그 예로 현 영남대학교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하고동아일보 창간 발기인과 경성 방적 보성전문(현 고려대학)도서관 건립 등이 있다. 한 가정에서 400여년간 부를 누린 것은 자랑이 아닐수 없으며 지금도 국내외 인사들이 종종 경주 최부자 집을 방문하고 있다.
조선 때 명종·선조·인조임금은 "선현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 이학시조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이나 적서를 막론하고 비록 먼 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대대로 군역에 동원하지 마라"고 전교 하였으며, 정종은 "태강(서원을 도퇴시킴. 즉 파면)의 예에 넣지 말고 범하는 수령은 처벌하라"고 전교 하였다. 이렇게 신라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가지 국난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최씨들이 등장하여 나라에 공헌하였으며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던 항일투사와 의병 및 근대사회 발전에 공헌한 많은 최씨들이 거룩한 발자취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명문인 최씨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참조 --명종 1545(병오)-1567(정묘) - 선조 1568(무진)-1608(무신) - 인조 1623(계해)-1649(기축) - 정종 1399(기묘)-1400(경진)--
최치원(崔致遠)의 윗 대에서 개성,삭녕,동주(철원),전주(최군옥) 등으로 나눠지고 경주 최씨 2세조인 최승로(崔承老)의 후손에서 함양,청주,충주,영흥,용강,수원,부안,강릉,강화,화순,통천,양천,원주 등으로 분관(分貫)이 되었으며 지손에서 해주,진주,탐진,전주(최 균)등으로 분관했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고증된 바는 없다. 최씨는 경주 최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해주 최씨,우봉 최씨 등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전주 최씨와 동주 최씨도 상당한 세력을 떨쳤다.
최씨는 조선시대보다 신라와 고려에서 세력을 떨친 성씨이며 그 밖에도 김씨에서 최씨로 사성받은 수성 최씨와 중국에서 귀화한 충주 최씨가 있다.최씨는 문헌에는 326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125본만 전하며 이마저도 자세한 것은 수 십 본에 불과하다.최씨는 김,이,박씨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1985년 국세조사에서 191만 3322명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