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芝薰, 한국문학총서 3,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1980
"내 詩에 대한 나의 解說"
조지훈 전집 제2권 시의 원리 나남출판사
180쪽~186제22권 시의 가치3 시의비밀
趙芝薰 전집 제2권 <시의 원리> / 나남출판사
180쪽 ~ 186 / 시의 가치 III - 3. 시의 비밀
僧 舞
----詩作過程에 대하여
이제 나는 한편의 詩가 이루어지기까지에는 어떠한 과정을 밟는가 하는데 대해서 拙詩, '僧舞'의 詩作體驗을 말함으로써 詩의 비밀을 토로하겠다.
내가 '僧舞'를 詩化해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기는 열 아홉 때의 일이다.
나는 이 '僧舞'로써 나의 詩世界의 처녀지를 개척하려고 무척 고심하였으나 마침내 이보다 늦게 구상한 '古風衣裳'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難産의 詩를 懷孕하기까지 나는 세 가지의 僧舞를 사랑하였다.
첫번은 韓成俊의 춤, 두번째는 崔承喜의 춤, 세번째는 어떤 이름 모를 僧侶의 춤이 그것이다.
나는 舞踊批評家가 아니므로 그 우열을 논할 수 없으나, 앞의 두 분 춤은 그 해석이 나의 詩心에 큰 파문을 던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僧舞에의 호기심을 일으켜 몇 번의 妓女가 추는 僧舞에까지 이끌려 갔던 것이니 僧舞를 詩化하게 한 최초의 모멘트가 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참 僧舞를 보기는 열 아홉 살 적 가을이다. 그 가을 어느 날 水原 龍珠寺에는 큰 齋가 들어 僧舞 밖에 몇 가지 佛敎傳來의 고전음악이 베풀어 지리라는 소식을 거리에서 듣고 난 나는 그 자리에서 곧 水原으로 내려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밤 나의 정신은 온전한 예술정서에 싸여 僧舞 속에 溶入되고 말았다.
齋가 파한 다음에도 밤 늦게까지 절 뒷마당 감나무 아래서 넋없이 서 있는 나를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詩情을 느낄 땐뜻모를 旋律이 먼저 心琴에 부딪침을 깨닫는다. 이리하여 그 밤의 僧舞의 불가사의한 선율을 안고 서울에 돌아온 나는 이듬해 늦은 봄까지 붓을 들지 못하고 지내 왔었다. 춤을 묘사한 우리 詩歌로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이 아직 없을 때이라 나에게는 오직 우울 밖에 가중되는 것이 없었다.
이와같이, 한 마디의 언어, 한 줄의 구상도 찾지 못한 채 막연한 괴로움에 싸여 있던 내가 僧舞를 비로소 종이 위에 올리게 된 것은 스무 살 되던 해의 첫여름이 일이다. 미술전람회에 갔다가 金殷鎬의 '僧舞圖' 앞에 두 시간을 서 있은 보람으로 나는 비로소 무려 7, 8매의 스케치를 가질 수 있었다. 움직임을 微妙히 靜止態로 포착한 이 한 폭의 동양화에서 리듬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발견이었으나, 이 그림은 아마 妓女의 僧舞를 모델한 성싶어 내가 찾는 인간의 愛慾葛藤 또는 생활고의 종교적 승화 내지 신앙적 표현이 결여되어 그때의 草稿는 겨우 춤의 외면적 樣姿를 형상하는 정도의 산만한 언어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그림을 통해서 내가 잡지 못해 애쓰던 어떤 윤곽을 잡을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이 초고를 몇 날 만지다 그대로 책상 위에 버려둔 채 환상이 가져오는 소위 詩瘦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 僧舞로 인하여 떠오르는 몇개의 詩想을 아낌없이 희생하기까지 하였으나 종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龍珠寺의 춤과 金殷鎬의 그림을 연결시키고도 왜 詩를 형성하지 못했던가? 이는 아직, 춤을 세밀하게 묘사하면 魂의 흐름의 표현이 부족하고 魂의 흐름에 치중하면 춤의 묘사가 죽는, 말하자면 내용과 형식, 정신과 육체, 무용과 회화의 양면성을 초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것을 초극하고 한편 詩를 만들기는 또다시 몇 달이 지난 그해 10월 舊王宮 雅樂部에서 "靈山會相'의 한 가락을 듣고 난 다음 날이었다. 雅樂部를 나서면서 나는 몇개의 플랜을 세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이 詩를 이루는 골자가 되는 것이다.
먼저, 초고에 있는 서두의 무대묘사를 뒤로 미루고 직접적으로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을 그릴 것,
그 다음, 무대를 약간 보이고 다시 이어서 휘도는 춤의 曲折로 들어 갈 것,
그 다음, 움직이는 듯 정지하는 찰나의 명상의 정서를 그릴 것, 관능의 샘솟는 노출을 淨化시킬 것,
그 다음, 悠長한 吹打에 따르는 의상의 선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춤과 음악이 그친 뒤 교교한 달빛과 동터 오는 빛으로써 끝막을 것.
이 것이 그때의 플랜이었으니 이 플랜으로 나는 사흘 동안 推敲에 推敲를 거듭하여 스무 줄로 된 한 편의 詩를 겨우 만들게 되었다.추고하는 중에도 가장 괴로왔던 것은 長鼓의 미묘한 움직임이었다.나는 마침내 여덟줄이나 되는 묘사를 지워버리고 나서 단 두 줄로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라 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나는 全篇15행의 다음과 같은 詩 하나를 이루었던 것이다.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臺에 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이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곳 거룩한 合掌인냥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三更인데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오래 앓던 작품을 완성하였을 때의 즐거움은 컸다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처음 의도에 비해서 너무나 모자라는 자신의 技法에 서글픈 생각이 그에 못지 않게 컸던 것도 사실이다. 어떻든 구상한지 열 한 달, 집필한 지 일곱 달만에 겨우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로써 나의 '僧舞'의 비밀은 끝났다. 써 놓고 보니 이름 모를 僧侶의 춤과 金殷鎬의 그림과 같으면서도 다른 또 하나의 僧舞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춤은 내가 춘 僧舞에 지나지 않는다. 춤추는 僧侶는 남성이더랬는데 나는 尼僧으로, 그림의 여성은 장삼 입은 俗女였으나 나는 생활과 예술이 둘 아닌, 상징으로서의 어떤 脫俗한 여인을 꿈꾸었던 것이다. 무대도 나중에는 현실 아닌 환상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것이 곧 이 僧舞는 나의 춤이 되는 까닭이 된다. 그때 어떤 선배는 나의 詩에서 언어의 省略을 충고하였으나, 悠長한 선을 표현함에 짧고 가벼운 언어만으로서는 도저히 뜻할 수없어 오히려 리듬을 위해서는 부질 없는 듯한 말까지 넣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한 諧調를 이루는 빈틈없는 敷衍은 생략보다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여기서 절실히 느꼈다.
詩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 아래 시의 본질에 대한 나의 견해를 전개함으로써 나의 詩觀이요, 일종의 세계관인 시의 원리를 대략 세 갈래에 나누어 차례로 얘기하고 이로써 나의 詩話를 끝내게 외었다. 詩를 짓고 읽고 맛보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즐거운 일임에 틀림 없으나 시를 해설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성가신 일이다. 비록 설명하는 이가 괴롭더라도 이런 얘기가 詩공부에 도움이 된다면, 그 괴로움도 변할 수 있지만 이와 같은 詩論이란 것은 시창작에는 별 도움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나는, 詩란 무엇인가, 詩는 어떻게 감수 되는가, 詩는 무엇으로 표현 되는가에 대해서 지껄인 나의 얘기를 조리 잊어버리길 권하지 않을 수 없다. 詩를 짓는 동안에 스스로 체득할 이 본질이 나의 얘기때문에 더 방황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애기의 생명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남녀의 性은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알아야 비로소 애기를 낳을 수 있다면 이미 인류는 멸종되었을 것이다. 詩 짓는 법을 몰라도 詩와 연애만 한다면 詩의 참뜻을 알 것이요, 詩 짓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詩와 결혼한다면 불구가 아닌 담에는 절로 詩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낳기까지는 괴로움이 있다. 詩를 낳은 다음에는 즐거움이 있다. 이 괴로움이 두렵고 즐거움만 탐내는 부당한 욕심이 앞서거든 그것을 잊어버릴 때까지 詩를 마음 속으로만 그리워 하는 것이 좋다. 詩神이 있다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