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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2 기독교의 진실
▣ 기독교 죄악사
국내의 한 원로목사가 펴낸 자성록(自省錄)<기독교의 죄악사 上,下>는 과거의 기독교도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반성 뿐 아니라 교리 문제까지 지적하며 근본적 수정을 촉구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저자 조찬선(82) 목사는 일본
도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 이화여대, 목원대 교수, 전국 기독교학교 교목회장,
미국연합감리교 목사 등을 지낸 원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그는 "기독교의 죄를 폭로해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혁명적인 개혁을
통해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게 하고자 책을 썼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필자가 곳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라즈니쉬의 기독교 비판내용과 흡사한 부분이 많다. 한 사람은
기독교 내부에서, 한 사람은 기독교 외부에서 서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큰 차이는 존재한다. 조찬선 목사는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라즈니쉬는 기독교
자체를 날조와 왜곡의 역사 위에 세워진 거대한 미신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조찬선 목사의 자성록을 들어 보자.
“ 사실 기독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기독교는 타종교를 무시하고 정복한 대표적인 종교
였다. 예를 들면 천주교가 ‘선교 복음화’라는 미명하에 중남미 대륙으로 들어가서 원주민들에게
범한 침략,약탈,살인, 파괴, 그리고 정복의 죄과는 무엇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가? 또 원주민들
이 쌓아올린 그 찬란했던 잉카(Inca)문명, 타이노(Taino)문명, 아즈텍(Aztec)문명 등을 말살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죄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그곳을 복음화
시켰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하지 않는가? 도대체 그러한 선교는 누구를 위한 선교였을까?
자기들의 영토확장을 위한 선교였을까? 아니면 진실로 원주민을 위한 선교였을까? 어떤
이유의 선교였든지 간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대방을 위한 선교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온 청교도들이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죄악은 무엇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가? 청교도들은 자기들의 신앙의 자유는 존중할 줄 알면서도 타인, 즉
원주민들의 신앙의 자유는 부정하고 개종을 강요하였다. 청교도들이 얼마나 잔인했는가를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의 말이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그는 “자유와 문명과 종교의
축복을 받은 우리들이 서진(西進)하는 찬란한 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숲 속에 사는 야만인들에게 그들의 숲과 강과 땅을 빼앗은 것은 당연지사이다.”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 선교는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주로 타인종,
타문화, 타종교를 폭력으로 정복하거나 말살하고 자기들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인, 강도
행위를 일삼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북중남미 원주민들의 오늘의 운명이 그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즉 원주민들은 사랑을 외치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멸종되어 가고 있다. 총칼과 성경을 들고 온 기독교인들 때문에 망해가고 있다. 만일 기독교
인들이 선교란 이름으로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그들을 말살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지금도
무공해 자연 속에서 태평세월을 노래하며 그들이 쌓아올린 문화와 문명과 신앙 속에서 마음껏
행복과 번영을 누리며 살고 있을 것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그들의 문화나 문명은 서구인들의
문화, 문명처럼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기 때문이다. 겨우 살아남은 그들의 후예들은 지금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마하트마 간디는 말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도 닮지 않고 속엔 야욕만 가득 찬 기독교인들이 복음전파란 미명하에 끊임없이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비극인가?
지금까지의 기독교 선교는 대부분이 불행과 혼란을 가져다주는 종교의 역할을 했을 뿐 사랑과
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건설한 미국 땅에서 원주민
들은 지금도 사회 밑바닥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기독교가 들어간 곳마다 그 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진실로 고통과 박해와
죽음을 뜻하는 종교였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30년 전쟁, 천주교의 개신교 말살작전, 종교 재판소, 기독교의
유대인 차별과 학대, 회교도들과의 충돌 등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전쟁과 충돌이 있었을 뿐
평화는 찾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때문에 인류가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여 왔는가를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극소수의 예외적인 방법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복음전파나 선교사업을 통한 것이 아니었다. 천주교의 교황 체제와 조직적이고도
엄격한 명령 하에서 금력과 무력으로 타민족, 타인종, 타종교, 타영토를 강제로 정복하고 그
위에 천주교를 올려 놓은 것이 바로 천주교의 발전사요, 팽창사라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개신교도 그런 면이 많다.
물론 그 과정에서 천주교가 행한 선행(善行)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단 그 공적과
죄악을 비교할 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그들은 인류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너무나 큰 죄악을 남겼다. 다시 말하면 천주교와 개신교, 즉 기독교의 발전은 주로 타의
희생 위에 이루어졌음을 사실(史實)이 증명하고 있다. 숫자로 나타난 중남미의 실태가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선교라는 미명하에 무력으로 그 세력을 팽창시킨, 호전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침략하였던
기독교는 예수 없는 기독교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또 처형하는 종교였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음을 자각한 기독교는 180도 정책전환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즉 피상적으로라도 평화, 사랑, 희생, 봉사 등을 앞세워 과거의 추했던
모습을 감춰버리고 미소 짓는 가면을 써야 했다. 짙은 화장도 해야 했다. 천하에 없는 선남
선녀로, 또는 천하에 없는 미남미녀로 보이게끔 가장을 해야 했다. 신부와 수녀들의 우아한
옷차림이나 성직자들의 의상은 일종의 고차원적인 화장술이다. 마치 창녀가 숫처녀로 가장한
것처럼 사기극을 벌여야만 했다. 살인강도가 성직자의 가운을 훔쳐 입은 것처럼 어색한
연극을 연출해야만 했다. 전형적인 위선과 기만의 표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과거사를 모르는 대중은 물론 교육 미달의 성직자들까지도 그 가면에 속아
서 기독교를 항시 사랑, 평화, 희생, 봉사의 종교로 착각하고 있다. 착각한 그들에게 기독교의
정체를 알려준 사람이 도리어 이단이요, 적그리스도라고 화를 낼 지경에 이르렀다. 조직적인
세뇌공작과 미소작전이 100%적중한 셈이다. 현상과 본질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본질 자체는 ‘예수의 사랑’이다. 그러나 기독교역사를 보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사랑’의
정신과는 상반된 ‘증오’와 ‘탐욕’이다. 이는 전달과정에서 빚어진 일부 타락한 성직자들 때문
이다. 그러나 이를 일부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 일부가 기독교를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 콜럼버스와 천주교도들의 만행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에게는 악마 그 자체였다. 그를 수 차례 죽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원주민들에게 은혜를 오히려 원수로 갚았다. 콜럼버스를 비롯한 천주
교도들은 다음과 같은 구실로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였다. 원주민들은 잔인하고 욕심이 많고
타락한 영혼이기에 이들을 천주교 신앙으로 무장시켜야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 방법으
로 노예들을 합숙시켜 남자들은 금을 채굴시키려고 광산으로 보냈고, 부녀자들은 땅을 개척하
여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이는 원주민들에게는 가혹한 중노동이었다.
노예 부부가 함께 거하면 아기의 출산으로 노동력이 저하될 것을 우려하여 서로 만나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들의 식사는 잡초였다. 그들은 동물로 취급되었는데, 아이가 태어나 산모의
영양부족으로 젖이 나오지 않아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콜럼버스 일행은 복음전파보다는
원주민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살인강도집단으로 변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원주민들
의 종교와 문화를 파괴하고 원주민 말살작전을 전개하였다. 또 살아남은 원주민들 가운데
건장한 사람들을 생포하여 노예로 팔아 돈을 챙겼다. 이러한 콜럼버스에게 신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일에 「성자」라는 칭호를 주자고 교황에게 청원서를 보냈다니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하고 아이러니한가?
원주민들에게 있어서 백인천주교인이란, 곧 악마, 살인자, 약탈자, 배신자, 강간자라는 뜻밖에
다른 의미는 없었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십자가는 살인마 집단의 상징으로 보였을
것이다. 천주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을 잡아 압제하고 고문하고, 약탈, 강간,
방화, 살인 등을 자행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선교요, 복음화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같은 것은
없었다.
천주교는 대개 이러한 방법으로 세계 복음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1,500년도 초기에 유럽에서 온 천주교인들은 남미 페루 지방 일대에서 840~1,350만의 원주민
을 학살하였다. 그것은 그 지방인구의 94%였다. 또 그들은 16세기 중에 중남미에서
6,000~8,000만의 원주민을 학살하였고 그 학살은 계속되었다.
기독교 침략자들은 가는 데마다 교회를 짓고 성경을 들고 기도하면서 선교하였다. 자기들의
침략 행위를 개척과 발전이라는 미명과 기독교 선교라는 명목으로 자화자찬하면서 약 350년
동안에 유럽의 네 배가 넘는 광대한 땅과 자원을 빼앗고, 1억 2천만의 원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북중남미를 정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책임 있는 사람이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사죄한 적이 없다.
그렇게 무자비한 침략행위에 성직자들이나 교회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협조하였는가
반성해야 한다. 더 많은 땅을 빼앗기 위하여 죄 없는 원주민을 학살하고 돌아온 살인마들을
축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 문화와 종교 말살을 선두 지휘하고 잉카나 마야문명의
자료를 불태워 버린 행위나 강제 개종시켜 온 신부들이나 목사들의 죄를 누가 물을 것인가?
침략자들이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그들의 죄를 인류 전체에게 속죄하여야 한다. 특히 자기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우수한 인종이지만 원주민들은 무식한 야만인이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은 대우를
받은 것은 당연하였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또 무식한 야만인에게 복음을
전달하여 천주교에 귀의할 수 있게 하여 주었으며, 선진 서구 문명을 소개하여 주었다는
변명을 지금도 계속하는 비인도적인 인간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양심 유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의 출정을 역설했던 성 버나드의 설교를 소개한다. "그리스도의
전투사로서 이교도들과 싸우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싸우기 바란다.
악인을 처형하는 것은 살인이 아니고 악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악한 일을 하는 자들에 대해
주님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에 종군하였던 프랑스의 한 성직자가 쓴 수기(授記)의 일부도 소개한다.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 등에는 사람의 머리나 팔, 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
병사나 기사들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성전이나 회랑은 물론이요, 말 탄 기사가
잡은 고삐까지 피로 물들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모독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졌
던 이 장소가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찬양할
만하다.”
이것이 사랑과 자비와 희생정신으로 충만한 복음을 전파하는 성직자의 수기이다.
교황이 십자군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패하고 말았는데
그렇다면 이는 알라신과 여호와 신의 대결에서 알라신이 승리한 것을 뜻하지 않는가?
즉 회교의 신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신보다 적어도 그 당시는 더 강했거나 유능했다는
증명이 된다.
또 만일 교황들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거짓말을
선포하였다면 그들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뿐만 아니라 200년 동안이나 수많은 살인극을
연출하였으니 그 죄악이야말로 천지창조이래 최대 최악의 잔인한 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황들도 전범재판에 출두하여야 된다는 말도 나옴 직하다.
그리고 교황무류설(교황무오설)은 자동적으로 무효화될 것이다.
▷ 청교도들의 죄악
앞에서 언급한 천주교도들이 중남미 지역에서 원주민을 살상했다면 북미대륙에서는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교라는 미명하에 역시 1억여명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였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지금 사회의
최하층민으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결국 천주교도나 개신교도나 잔인한 침략, 약탈자 근성에
있어서는 피차 일반인 셈이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듯이 청교도들 역시
처음에 북미 대륙에 정착하여 어려웠던 당시 원주민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그들의
세력이 커지자 도리어 원주민들을 무차별 살상하는 악마로 돌변하였으니 그 점에서도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사교로 생각했던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원주민을 단순히
이단으로 취급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나 영혼조차도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성직자들이 그것을 강조하였으며 그런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지침이
그들의 신념이 되었으니 그들의 원주민들에 대한 태도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중남미 지역
에서의 천주교들과 같이 북미지역 청교도들도 그러한 철저한 종교적인 독선을 유일 절대적
인 것으로 북미대륙에 정착시켰다. 기수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성직자들이었다.
여기서도 종교가 권력과 결탁해서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약 300년 동안 최소한 1억이상의 원주민들과 또
원주민들의 식량의 근원이었던 야생들소 6,000만 마리를 무차별 학살하였다고 한다. 결국
청교도들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나라를 빼앗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강탈하였다.
토지를 만인의 소유로 믿었던 에덴의 아메리카에 기독교 침략자들이 들어오자 낙원은 살인이
자행되는 지옥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쓸모 없는 지역을 수용소로 설정하여 살아남은 원주민을 수용해 버렸다.
현재 백인의 평균수명은 76~78세에 달하고 있는데, 원주민의 평균수명은 아직도 40세 중반
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일인가?
기독교인들은 총칼로 빼앗은 땅을 개척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의 공급을 위하여 약 300년
동안에 아프리카에서 1,200~1,500만 명의 흑인들을 잡아와 주로 남북아메리카와 서인도지방
등에 팔아 버렸다. 노예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치부(致富)에 열중한
것이다.
이들이 학살한 원주민들은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보다 몇 십배가 되는 엄청난 숫자인데 양심적인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아무도 인정하지도 않고 문제삼지도 않는다. 히틀러나
스탈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국가 원수들까지 찾아가서 추모하고 학살자들을 비난
하며 재판까지 하면서, 왜 북중남미에서 희생당한 원주민들을 위해서는 찾아가는 사람도 없고
학살자를 비난하는 사람도 없으며 그들의 한에 맺힌 억울한 영혼을 달래주는 추모행사도 없는
가? 전지전능하신 우주의 심판자는 왜 아직까지 이 사건을 심판하지 않는 것일까?
▷ 종교 재판
종교재판소 중에서도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 스페인의 종교재판소였다. 종교재판소
에서의 처형 결과 2,000만명이었던 스페인 인구가 200년 후에는 600만 명으로 감소되었다고
하니 종교재판소의 횡포가 가히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87년 11월 10일자「재림뉴스」(p2)는 천주교의 종교재판과 개신교 박해를 통해서 순교당한
신도 수를 약 5,000만 명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개신교) 개혁자들도 이러한 악행을 범하였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뱅은
춤췄다고 투옥하고, 설교를 들을 때 웃었다고 투옥했으며, 부모를 구타한 소녀는 목잘라 처형
하고, 귀신 쫓는 마법사도 사형시켰다. 이와같이 그가 종교법원에서 막강한 권세를 과시하던 4년 동안 그는 76명을 추방하거나 투옥하고 54명을 처형하였다. 유명한 사건으로 스페인의
학자 세르베투스는 니케아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 교리와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된 ‘기독론’
과 ‘유아세례’ 교리가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며, 칼뱅의 저서『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가 칼뱅에 의해 제네바 근교에서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칼뱅은 세르베투스가
산 채로 서서 참혹하게 불타 죽기까지 다섯 시간 정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칼에 의해
일순간에 죽는 것도 아니고, 이글 이글 서서히 타는 불에 죽는 처참한 광경을 상상해 볼 때,
신앙의 잔악성은 그 어느 전쟁의 잔악성보다 수백 배 더하다고 보아야 하고 보복적 수단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칼뱅의 살인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정통을 내세우기만 하면 살인을 해도
되는가? 정통은 살인 금지의 제5계명보다 더 크고 중요한가? 칼뱅은 그 자신이 절대시하던
성경을 무시하고 ‘이단’이란 죄목으로 수없는 살인을 감행하였으니 결과적으로 그 자신이
성경의 절대성을 무시한 게 아닌가?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칼뱅은 정통이고 세르베투스는 이단인가? 살인자가 정통인가?
이단인가? 결과를 보면 살인자가 기독교인을 죽인 것이 아닌가?
나와 다른 교리나 성경해석 등의 신앙체계를 가진 자는 모두 ‘이단’이라는 칼뱅식의 배타성과
독선의 결과로 오늘날 전 세계 개신교의 교파 수는 25,500개나 된다. 이 많은 교파가 ‘나는
정통, 너는 이단’이란 논리 하에서 서로가 대립, 배척, 반목하면서 이단과는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도 같이 드릴 수 없다고 거부하여 분열을 계속해 왔다. 기독교가 이와 같이 인류의 화합은
고사하고 기독교인들 자신들끼리도 끼리끼리 흩어지고 갈기갈기 쪼개져서 인류사회를 분열,
대립시키는 집단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은, 분열과 대립의
사회악을 조장할 뿐이다.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독선과 배타성이 없어지지 않는 한, 지구촌은
지금의 북아일랜드처럼 교파 전쟁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
칼뱅은 개혁이란 업적은 남겼으나 동시에 교파분열이라는 씨를 뿌리고 배타적인 독선의
인습을 세운 과오를 범했다.
▷ 마녀 사냥
앞에서 라즈니쉬의 말을 빌어 얘기한 적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거기에 약간만 추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마녀로 찍힌 여성들의 재산은 고문관들의 상금으로 주어졌다. 마녀 사냥은
고문관들에게는 손쉽게 재산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인간의 붉은 피가 금화, 은화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녀로 찍힌 여인들은 화형당하거나 아니면 냄비구이(뜨거운 냄비
속에 넣고 찜 쪄 죽이는 형벌)이라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였다.
16세기 독일 농촌지역에서 마녀 처형은 사나이들의 호색적인 구경거리였다. 마을의 넓은
광장에는 수많은 음식점들이 줄을 이어 장이 섰고, 토산품집에서는 돗자리가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완전 나체인 마녀들은 스트리퍼보다도 매혹적인 존재들이었다. 마녀 사냥이야말로
악마적인 행위 바로 그것이었다.
▷ 종교전쟁으로 인한 인류 살상
서구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이 거의 모두 기독교로 인한 종교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십자군 전쟁, 청교도전쟁, 100년 전쟁, 위그노 전쟁, 30년 전쟁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에
일어난 아일랜드 사태, 중동전쟁 등 끝없는 유혈 종교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여호와의 말씀인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고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세계의 모든 전쟁이 왜 하나님을 믿는 나라에서 일어났는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백성인 성민(聖民)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 난민을 무차별 학살하는 걸 보면 여호와를
닮아서 그러는 것 같다. 하나님을 내세워 하나님 백성, 성민(聖民) 운운하며 잔악한 전쟁을
성전으로 미화시키는 악랄한 행위는 어디에 비할 수가 없다.
▷ 고대 올림픽의 중단
올림픽이란 올림프스 산에서 제우스신을 제사지내는 하나의 제전행사(祭典行事)였다. 그러
므로 여호와신을 믿는 기독교도들은 이단이라고 몰아붙여 올림픽행사를 중지시키게 된 것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로마국교로 정한 것이 391년이며, 그후 39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명으로
찬란했던 고대 올림픽이 단 번에 중단되어 버린 것이다.
▣ 기독교의 논리
▷ 삼단논법
1) Bible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 진리의 말씀이다.
2) Bible에는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쓰여 있다.
3)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진리이다.
기독교의 삼단논법은 위와 같다. 1)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면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진리가 되어 버린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맨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신학자들이나 일부 양심적인 성직자들은 Bible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고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필자는 그것을 증명하는 많은 내용들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도 성직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을 숨기고 거짓을
가르치고 있으며, 순진한 신도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성직자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성서가 편찬된 과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을 대부분의 기독교도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독교 신자들의 믿음은 거짓과 기만에 바탕을 둔 믿음인
것이다.
▷ 순환오류 - 성경으로 성경을 증명하는 기독교인들
질문자 : 넌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기독교인 : 그럼, 당연하지.
질문자 :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네가 하나님을 보기라도 했니?
기독교인 :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건 성경이 증명하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쓰여진
것이니까.
질문자 :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쓰여진 것인지 어떻게 알아?
기독교인 : 디모데 후서 3장 16절을 보면 말야, 성경은 모두 신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것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어.
질문자 : 디모데 후서 3장 16절에 쓰여진 그 말이 신의 계시를 받아 쓰여진 것인지는 어떻게
알지?
기독교인 : 성경에 쓰여진 말은 모두 신의 계시를 받아 쓰여진 것이라구. 그러니까 믿어야지.
질문자 : 신의 계시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아냐구?
기독교인 : 넌 정말 의심이 많은 아이로구나. 그렇게 덮어놓고 의심만 하지 말고 기도부터 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하나님이 너에게 믿음을 주실 꺼야.
위의 대화는 흔히 볼 수 있는 기독교인과의 대화의 전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의
한 구절로 성경 전체를 증명하는 것이다. 글 내용의 증명을 그 글 안에서 찾는다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이것은 순환논리(논리의 오류)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라면 어떤 책이라
도 신의 계시를 받은 책으로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는가? 성경이 수 없이 많은
수정과 편집으로 이루어진 책이라는 것을 모르는, 참으로 우매한 믿음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 기독교와 조상숭배
19세기의 탁월한 인문주의자이며 사회과학자이며 철학자인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그의 주저 『사회학원리』(Principle of Sociology)에서 “모든 종교의 뿌리는 조상숭배
이다(Ancerster worship is the root of every religion)라는 보편가설을 정립하였다. 결국 모든
신은 귀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귀신은 조상신이다. 모든 신은 그 궁극적 분석에
있어서 한 특정한 역사적 개인의 귀신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Every god is, and must be, in
ultimate analysis, the ghost of a particular human being.) 유대인들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
곧 야훼도 알고 보면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다윗의 하나
님이다. 결국 그 계보를 따져 올라가면 야훼도 궁극적으로 어떤 조상신의 전화형태인 것이다.
야훼는 결국 유대인들의 조상신일 뿐이다. 개별적 조상의 숭배(indivisual cult)이든, 민족전체의
조상의 숭배(national cult)이든 그것은 사실 조상숭배라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그것은 일신이나
다신의 이원에 의하여 갈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구약』의 구석구석을 뒤져보면, 개별적
조상숭배의 제식이 무수히 찾아진다. 죽은 조상, 그리고 죽은 왕이나 영웅에 대한 제사가 곳곳
에 그려져 있다. 테라핌(Teraphim,家神像), 죽은 자에게 음식을 바치는 것, 조상의 무덤에 대한
존중, 곡(哭,mourning)의 습관, 레비레이트율법(Levirate Law), 네크로만시(Necromancy,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말하게 함, 강령술에 의한 占) 등등의 무수한 사례들이 지적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조상숭배의 습관들이 카발라(the Kabbalah)나 탈무드ㆍ미드라쉬 문헌(Talmudic
and Midrashic literature) 그리고 그들의 일상적 시나고그의 리터지(Litergy) 속에 잘 보존되어
있다.
왜 신약성서의 첫 구절이 예수의 족보로부터 시작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임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예수 또한 조상신의 확고한 대열에 끼어야만
그 신위(神位)의 권위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가 가장 처음에 부닥친 사건은 바로 이 땅의 조상숭배
와의 마찰이었다. 조상숭배, 즉 제사의 불인(不認)이 기독교신앙의 마크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이야기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들추어내는
우행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교(=기독교)는 결국 예수에 대한 제사요 예배이다. 우리 제례는
예수가 아닌 자기 조상에 대한 제사요 예배이다. 영어로 “ancestor worship"이라 할 때
”worship"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라. 조상의 제사는 곧 조상의 예배다. 기독교는 개별화된
조상들의 예배를 예수 한 사람의 예배로 대치시키라는 명령이다. 예수도 물론 역사적으로
갈릴리에 존재했던 한 사람의 죽은 영혼이다. 그는 죽어 승천했고 신화(神化)되었다. 기독교는
예수에 대한 신종추원(愼終追遠) 인 것이다. 예수의 신종은 “십자가”이며, 그에 대한 추원은
“하늘나라”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신종추원과 조상에 대한 신종추원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첫째 조상에
대한 신종추원은 그 신종추원의 단위가 가족으로 고립된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그 신종추원
의 단위가 교회라는 단위로 확대된다. 둘째로, 조상에 대한 신종추원은 제사장(priest)그룹이
분화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가족의 성원이 목사가 되고 신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식의
과정도 가정적 삶에서 자연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다. 제사에 있어서는 가정적 삶과 종교적 삶이
유리되지 않는다. 가정이 곧 종교이다.
우리는 첫 번째의 차이에서 기독교의 보편주의적 성향에 대한, 조상숭배의 가족주의적 편협
성의 위험을 도출해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차이에서 우리는 기독교가 인간을 일상적
삶에서 유리시키고, 인간을 종교적 질곡 속으로 빠뜨리게 되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지적을 할 수가 있다. 물론 제사에 있어서도 삶과 종교의 과도한 밀착이 인간을 목조르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득실의 문제를 떠나 모든 종교가 알고보면 조상숭배에
불과할 뿐이라는 대명제의 근본적 의미를 물을 필요가 있다. ‥‥‥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의 저자이며, 영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프레이져경(Sir
James George Frazer)의 종교의 정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명쾌하게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다.
종교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그것은 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인간의
삶과 대자연의 진로를 지배하고 방향짓고 있다고 믿어지는 힘과의 화해며 달램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종교의 원초적 출발은 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인간에게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어떤 힘과의 화해인 것이다. 즉 한 인간이 신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으로부터
행위하게 되면 우리는 그를 종교적이라 부르고,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으로부터 행위
하게 되면 우리는 그를 도덕적이 부르는 것이다. 종교의 모든 출발은 신9조상신)에 대한
두려움(Fear)이다. 두려움의 관계는 수직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나 환생, 그리고 고대사회
의 토테미즘(Totemism), 우상숭배(Idology), 배뱅이굿에서 보여지는 샤머니즘의 강령술 등이
모두 조상숭배라고 하고 인류의 보편적 종교현상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 지성인들이 바라본 기독교
▷ 토인비 : “나는 신의 본질에 대해서 유태의 개념(구약의 하나님)을 믿지 않을뿐더러 그다지
존경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신의 전능함을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해 악마도 신이 만든 것이라고 보고 있어, 그러면서도
신은 자기가 만든 악마의 행위에는 책임이 없다는 거야“
“동물은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용케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 이 교의를,
나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주와 그 배후에 더 높은 존재가 있다고 믿습니다. ‥‥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높은 존재에
대한 동부 아시아나 인도적인 견해입니다.”
▷ 간디 :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 왜 당신들이 믿는 신은 이웃사랑을 가르치는데 당신들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그 나라 백성을 괴롭히는가?”
▷ 아인쉬타인 : “나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열정적인 자유 사상가가 되었고, 국가는 고의로 젊은이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 이 태도는 근본적으로 내 일생을 통해 지속되었다.”
“ 나는 그의 창조물인 인간을 상벌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 김용옥 : “성령의 광기 속에 은총의 강림을 외치며 연보돈과 십일조를 강요하고, 장대한
성전이나 지으려 하고, 목사의 직위마저 세습시키려고 하는 오늘의 우리나라 교계의 작태는
바로 공자가 목격한 소인유(小人儒)의 세계였던 것이다.”
“오늘 우리 20세기를 회고해볼 때, 우리 20세기의 최대의 죄악은 바로 악마와 천사라고 하는
얄팍한 기독교적 사유 속에서 세상을 보았던 윤리적 이원성(二元性)이다. 나는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 그래서 죄는 너의 것이다. 이 사회의 죄악은 모두 너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나는 그
죄악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너를 저주하노라! 그 저주를 받지 않으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과연 우리 민족은 구원을 얻었는가? 20세기 기독교선교사의 결론은
무엇인가? 거대한 교회건물, 기도원에까지 수천만원짜리 코트를 입고 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어리석은 여인들! 그것이 우리 20세기 기독교선교사, 순교사의 총결론이었던가?”
“기독교는 교리에 문제가 있다. 그 교리가 저급하게 유치하고 모순투성이며 독선적이며
배타적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런 유치성과 모순성, 배타성 때문에, 그러한 허약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신․구약(新․舊約) 만 근이 『대장경(大藏經)』한 근에 미칠 수 없고, 『대장경』만 근이 『중용(中庸)』한 근에 미칠 수 없다.“
“예수의 경우는 不同한 기자들이 예수에 대한 不同한 기록을 남겨 놓았지만, 라오쯔(老子)의
경우는 동일한 기자가 不同한 기록을 같이 남겨 놓았다.“
▷ 슈바이처 : “예수는 머지않아 초자연적인 하나님 나라가 곧 출현하리라고 전했지만,
이 나라는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는 오류를 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스토아 철학과 노자의 도덕경 사상을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고, 이들을 진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종교단체(기독교)는 개인이 자신의 사색을 통해 신념을 얻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단체들이 미리 준비해둔 신념을 자기 것으로 만들도록 하고 있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사적 진리를 긍정하기는 커녕, 역사의 진리와 어긋날 때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거나 은폐하면서 그것을 얼버무리고 있다.
현대 기독교는 그 정신적 또는 윤리적 본질상 일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 볼테르 :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기독교를 공포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기독교는
틀림없이 신성하다. 악행과 넌센스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1,7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 톨스토이 : “기독교인들은 야만적인 최면술과 기만 속에 있으면서, 자기들이야말로 진실한
종교의 파악자라고 자만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교회의 기만적인 최면술에 사로잡힌 결과, 자기들에게 주입된 사이비종교를 진실하고 유일한
종교로 생각하고, 그밖에는 어떤 종교도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무지몽매한
대다수의 민중”
“대다수를 점하는 일반 대중은 자기들에게 작용하는 이 최면술적 암시와 싸울 힘도, 가능성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이 현재 생활하고 있듯이 인간의 지고지순한 행복 – 인생의
진지한 종교적 각성 -을 결여한 채 헛되게 살다 헛되게 죽는다.”
▷ 루소 : “구원받기 위해서 신을 믿어야 한다. 이 그릇된 교리는 잔인한 불관용의 원리이다.”
“만약 지상에 단 하나의 종교가 있어서,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고통만 있다면,
그런 종교의 신은 가장 부정(不正)한, 또 가장 잔인한 폭군일 것이네.”
“나는 스위스에서 아들에게 종교(기독교)를 가르치지 않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 까닭은
이 조잡한 가르침에 만족해 버리고 이성에 깃들 나이에 이르렀을 때 보다 나은 가르침을
경멸하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소르본느에서 메시아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결부되어 있음은 대낮에 해를 보듯이
명백하네. 그러나 암스테르담의 유대교 율법교사들 사이에서는 같은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와
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는 것 또한 명백하네.”
▷ 존 스튜어트 밀 : “지옥을 만들어 내는 존재를 생각해 보라. 인류의 대다수가 끔찍스러운
영겁의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미리 분명히 알면서, 따라서 그렇게 할 의도를 가지고
서 인류를 창조한 존재를 생각해 보라 ‥‥ 도덕적 선악을 조금이라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내 아버지만큼 분하게 여기면서 바라보게 될 시대가 가까워 오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 니체 : 기독교는 피정복자와 피압박자의 본능이 전면에 나타난다, 기독교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무리들은 최하층의 저급계층의 사람들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 불리는 권력자
에 대한 감동이 늘 생생하게 살아난다. 여기서는 육신이 경멸되고 위생은 육신을 위하는 것이
라 하여 경멸되며 거부당한다. 교회는 청결을 거부하는 것이다. 무어인들을 추방한 후 기독교
인들이 취한 최초의 조치는 코르도바에만 270 개소나 있었던 공중 목욕탕을 폐쇄한 일이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금욕주의의 탈을 쓴 잔인성 이것이 기독교적인 것이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자에 대한 증오심, 복수심 , 암울하고 선동적인 생각들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내에서의 갈등 그 또한 기독교적인 것이다. 정신 , 긍지 , 용기 , 자유에 대한 증오 , 정신적인
사상가에 대한 증오가 기독교적인 것이다. 관능에 대한 증오, 육체에 대한 경멸 , 즐거움과
관능 일반에 대한 증오가 기독교적인 것이다. 기독교는 야만적인 개념과 가치로 중무장하고
필요하다면 주위의 민족을 야만인이라 단정하고 정복하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선동한다.
첫 자식을 재물로 바치는 것 , 성찬식에서 피를 마시는 것, 이성과 지혜에 대한 경멸, 육체적,
비육체적인 것을 막론하고 온갖 종류의 고문 등등 이러한 것들이 기독교적인 것이다. 아직
유럽은 불교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 불교는 문명의 종말과 피곤함 때문에 생긴
종교이지만 , 기독교는 문명의 맹아도 아직 보지 못했다. 기독교는 필요하다면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다. [반그리스도 중에서]
“ 나는 기독교의 똑바른 역사를 말하겠다. 기독교란 말부터가 하나의 오해다. 근본적으로
기독교인은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리고 복음도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그 순간 이래로 복음(福音)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은 벌써 그가 몸소
생활한 바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것이야말로 나쁜 소식, 즉 화음(禍音,Dysangelium)이었다.“
예수의 이런 복음을 화음으로 바꾼 장본인은 바울이다. 니체에 의하면, 바울은 증오의 화신
이요 환각의 천재다. 예수는 신과 인간의 간격을 제거하고 신인 합일의 내면적 생을 자신의
복음으로서 최후까지 실천하였는데, 바울은 십자가 위의 희생이란 관념을 삽입함으로써 신과
인간의 간격을 넓히고 그 중간에다가 원죄, 심판, 부활 그리고 신앙에 의한 구원 등등의 여러
가지 환상을 개입시켰다. 이리하여 바울은 생의 의미를 사후로, 피안으로, 배후세계로 옮겨
놓았다. 예수에게서 보는 바와 같은 현실의 내면적 생의 긍정 대신에, 피안을 신앙하는 자학의
체계가 등장한다. 생의 중심이 생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피안의 무(無) 속에 놓이게 된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에 의하면 바울은 "최초의 기독교도" 혹은 "기독교의 발명자"가 된 것이다.
▷ 쇼펜하우어 : 인도의 「우파니샤드」를 읽고 나서 한 말
“아 이렇게 내 마음에 붙어 있던 유대인의 미신을 깨끗이 씻어 줄 수 있는가!”
▷ 라즈니쉬 : “이제 기독교 신학자들조차도, 기독교 복음서가 사도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복음서에 서술된 산들은 실제 지명과 같지 않다. 강들과
호수들도 역시 실제지명과 같지 않다. 모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보지도 못한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 조찬선 : “만일 과거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예수의 그 위대한 희생정신과 참다운 사랑을
알고 실천하였더라면 기독교는 그러한 살인적인 종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또 잔인한 종교
집단으로 타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가 또다시 그러한 과오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국의 토인비의 저서가 지적한 것과 같이 기독교는 국가와 경쟁하게 되고
인류사회의 암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 버트란트 러셀 : “우리가 기독교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 다 악한 사람이 된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지켜온 사람들이 대개 매우 악했습니다. ..... 저는 많은 교회로 조직된
기독교도의 종교가 세계의 도덕적 진보의 으뜸가는 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신중히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는 수많은 윤리적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오늘날의 기독교도들은 약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기독교의 덕분이 아니다. 이는 여러
세대를 겪어온 자유사상가들의 덕택이며, 이들은 르네상스로부터 오늘날까지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수많은 그들의 전통적 신념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도
가, 기독교가 얼마나 온유하며 이성적인가를 보이려고 하면서도 그 온유함과 이성적인 것이
당시의 모든 정통 기독교도들에게 박해를 받던 사람들의 덕분임을 무시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오늘날에는 아무도 이 세계가 기원전 4004년에 창조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를 의심한다는 것은 엄청난 죄악으로 간주되었다.
기독교 교리가 차차 부드러워진 것은 줄기찬 저항을 받았기 때문이며, 오직 자유사상가들이
취한 공격의 결과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 기독교인들이 지키지 않는 Bible의 말씀들
+ 여러분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로마16:16][고린전16:20]
+ 여자는 천사들 때문에 남자의 권세 아래 있다는 표로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합니다.
[고린전11:10]
+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고린전 14:35]
이러한 말씀들은 그 시대의 관습일 뿐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경 말씀대로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교리에 합당하거나 신앙심을 부추기는 데 유리하거나 그 시대의 윤리 도덕과 어긋나지
않으면 지켜야 할 성경 말씀이고, 그렇지 않으면 지킬 필요 없는 성경 말씀, 즉 그 시대의
관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곧 성경말씀보다 현대의 관습, 윤리, 도덕이 더 중요하다
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러려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져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거짓말을 하지나 말았어야지 ‥‥‥
+ 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고기를 먹는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그 밖의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로마 14:21]
Bible에서 술을 대한 거부감은 주로 바울에게서 나타난다.
그러나 여호와신이나 예수가 직접 술을 금지한 적은 없다.
+ 그 돈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사서 먹으며 즐겨라. 소, 양, 포도주, 술, 무엇이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서 너희 하나님 야훼를 모시고 너희와 너희 온 집안이 먹으며 즐겨라. [신명14:26]
+ 네 몫의 음식을 먹으며 즐기고 술을 마시며 기뻐하여라.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본래부터
좋게 보아 주시는 일이다[전도서 9:7]
+ 이제는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을 위해서나 자주 앓는 그대의 병을 위해 서 포도주를 좀
마시도록 하시오[디모전5:23]
술을 권하는 구절도 제법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정하고 술, 담배를 못하게 하니까 가르쳐준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비단 술,
담배뿐 아니라 성경말씀은 무시하고(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런 구절이 있는 줄도 모르고”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교회에서 성경말씀과는 다르게 가르치는데도 그대로 따르는 일은
허다하다.
+ 뇌물은 요술 방망이 같아 어디에 쓰든 안 되는 일이 없다 [잠언17:18]
+ 선물은 앞길을 여는 물건, 높은 사람에게로 인도해 준다 [잠언18:16]
+ 은밀히 안기는 선물은 화를 가라앉히고 몰래 바치는 뇌물은 거센 분노를 사그라뜨린다
[잠언21:14]
기독교인들이 잠언에 있는 이런 말씀들은 잘 지키고 있을까? 안 지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적어 보았다.
그런데 조찬선 목사는 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까?
“기독교인의 수가 아무리 증가하고 많아져도 사회정화나 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평판
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 예로 과거에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던 정당이나
정권,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의 국가 통치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부패하였
다는 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한국의 기독교를 믿는 정치인들은 바이블에 있는 일점일획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들을 너무도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과 과부들에게는 나처럼 그대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전 7:7~31]
욕정을 참을 수 없거든 결혼하라고 했는데 일반신도들은 그럴 수 있다고 보지만 적어도
성직자들은 Bible의 말씀대로라면 바울처럼 독신으로 살아 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 성직자가 결혼을 한다면 욕정을 참지 못함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 되지 않는가?
그런데 바울이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하는 얘길 들어보면 예수가 “여기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나의 재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급박한 재림’을 예언했
다고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긴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가 여기에도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참을 수 있다면 결혼하지 말고 주님의 일에 신경을 더 쓸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아마도 오늘날의 성직자들이 결혼을 한 것은 이제 얼마 안 남았
다고 결혼도 되도록 하지 말라고 해 놓고선 몇천 년을 끌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얼마나 더
기다려야할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 아닌지 묻고 싶다.
+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마태 6:1~7]
예수는 분명 선행을 할 때 아무도 모르게 하라 했건만 교회는 헌금자 명단을 발표하는가 하면
불우이웃 돕기라도 할라치면 무슨 교회 얼마라고 꼭 밝혀서 기부하는데 모두 예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기도는 남이 보는 길거리나 회당(교회)에서 하지 말고 혼자 몰래
하라고 했건만 역시 지키지 않는다. 하긴 이걸 지켰다간 오늘날 교회란 교회는 다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며 길게 하지 말라 했건만 좀 높으신 양반일수
록 어찌 그리 기도를 중언부언 길게 하는지 ‥‥‥
+그 사람이 "선생님, 그 모든 것(계명)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
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마가 10:20~30]
+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마태 19:23~29]
+ 자캐오(돈 많은 세관장)는 일어서서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누가 19:8~9]
+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누가 12:33
예수는 부자가 천국가기는 정말 어렵다고 누누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는 부자가 없는가? 오히려 기독교인들 중에 더 부자가 많은 것 같은데 그들은 천국가기를
포기한 것일까? 만약 예수가 그 부자 청년에게 말한 것처럼 목사가 신도에게 얘기하면
울상을 짓고 떠나 갈 것이다. 그나마 하던 십일조도 안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십일조정도로는
부자를 면할 방법이 없으니 ‥‥그리고 가지고 있는 재산을 팔아 분명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말하고 있다. 성전 건축하는데 쓰라고 한 적이 있는가? 그런데 비싼 도심
한가운데 수 없이 서 있는 오늘날 교회의 그 호화스럽고 웅장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수가 와서 본다면 뭐라고 할 것 같은가?
+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셨다. 또 한 사람은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자격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누가 9:59~62]
+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 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누가6:35]
+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5:46]
이상의 내용을 간추려 본다면 “가정의 안일과 행복은 작은 것이니 큰 것인 하나님의 복음
전파에 주력하라. 재물은 모여질수록 심성을 강팍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한 욕심을 갖게 되는
근원이 되나니 재물은 갖기 위해서 힘쓰지 말라. 재물은 너희의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라. 부자는 결코 천국에 갈수 없음을 명심하라 이러한 모든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일지니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것이나 이것을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은 자인 것이니 이들은 구원의 날에
모두 가라지가 되어 불 속에 태워지게 될 것임을 명심하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진정 이러한 것인데 자신의 가족과 일신을 돌보지 않고 이웃을 자신의 가족
처럼 돌보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예수의 이 같은 가르침은 적어도 기독교 내에서
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 순종하기 위해서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무주택자여야만 할 것인데 과연 그런가? 오고 가는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불쌍한 사람들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적선한 적이 있는가? 재산증식을 위하여 부동산을
사거나 주식을 사두지 않았는가? 집 주위에 교회가 있음에도 교회버스를 타고 “내 교회”를
찾아다니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의 가르침 한마디 한마디가 목회자의 설교 100번보다도
더 중하고 고귀하다는 사실을 뼛속깊이 새기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혹 당신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으면서도 정작 예수의 가르침을 행하기 어렵다는 구실을 내세워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으면서 일요일날 집회에만 가면 “주여! 주여!”하면서
예수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는 이미 2000년 전에 말대(末代)를 맞이하고 있는 현대에서는 그의 가르침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질 것임을 알았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나의 말하는 것은 왜 행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6장 46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 오직 내 가르침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장 21절)
“그 때에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할 것이며 내 말을 행치 않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장 23절)
예수의 추상같은 이 호령에 대하여 무엇이라 할 것인가?
예수의 가르침은 묵살하면서 최후의 심판 때에 부활의 자녀가 되어 휴거된다는 과대망상에
젖어 있지는 않는가? 노아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때 살아남은 사람이 몇이나
되었는가? 당신은 그 중의 한 사람으로 끼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 너희
에게 첫날에도 성회요 제 칠일에도 성회가 되리니 이 두 날 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인의
식물만 너희가 갖출 것이니라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지니라 ‥‥‥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출애굽12:14~24]
+ 기름기는 모두 야훼께 바쳐야 한다. 너희는 어디에 살든지 대대로 영원히 이 규정을 지켜야
한다. 기름기나 피는 결코 먹지 말라.[레위3:17]
+ 대대로 너희 모든 남자는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내 계약이 영원한
계약으로서 너희 몸에 새겨질 것이다.[창세12~13]
상기의 말씀들은 여호와신이 영원히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들이다. 영원히 지켜야 한다는
것은 예수가 폐할 수 없음을 뜻한다. 기독교의 교리대로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그 자신이
‘영원히’ 지키라고 해 놓고선 ‘폐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앞에서 언급했듯
이 율법을 폐한다는 얘기도 했지만 또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도 하였음을 볼 때 서로 모순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율법 중에 폐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까지, 즉 영원히 지켜야 할 율법도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도 모순이다.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폐한
율법은 모세가 기록한 의식법이고, 반면에 예수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 율법은
도덕법(십계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예수가 “율법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고 모세의
의식법만을 폐한다”고 명백하게 밝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도 어디까지나 사람의
주장일 뿐인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지키라고 한 율법은 오늘날은 물론이고 미래에도 지켜야 할 것인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율법을 폐했다는 핑계만 대고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만약 모세의 의식법만을 폐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안식일’은 십계명 중에서
제4계명이기 때문에 영원히 지켜져야 할 것이다. 여호와신 역시 아래와 같이 ‘영원한 계약’이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대대로
지킬 영원한 계약으로 삼아야 한다. [출애굽31:15~16]
민수기 15:35절에서는 실제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나무를 한 사람을 여호와신은 사형을
시키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토요일(안식일)에 쉬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요
일(主日)에 쉬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왜 안 지키느냐고 물으면 구약은 옛날 계약으로 예수에 의해 폐기 처분되었
으므로 안 지켜도 된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십일조’도 옛날 계약이니까 폐기 처분되어야 마땅
할 것이다. 더군다나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안식일)으로서 영원히 지켜야 한다고 여호와신이
말씀하신 것은 무시하고 십계명에 들지도 않는 ‘십일조’만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도 시커먼
속셈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가?
▣ 십일조에 대하여
‘십일조’(十一租)란 ‘십분의 일에 해당되는 세금’이다.
모세 율법시대에 이 ‘십일조’를 받고 살던 제사장들과 레위족들은 성전봉사는 물론 그 밖에
국민교육을 책임지고 또 국가의 행정 사무를 담당하며 사법,재판 등과 의료 사업까지 담당하는
국가 공무원의 역할을 하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왕도 십일조를 받은 것이다(신 17:8~13)
그러므로 십일조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국민이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의 일종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와 같은 이유와 목적으로 모두 십일조를 바쳐야만 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국민으로서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그 위에
또 신도로서 교회에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교회라는 기관은 재정 없이
는 운영, 유지할 수 없다. 선교, 봉사, 교육, 건물유지, 성직자의 생계비 등을 위해서 재정은
필수적이다. 그렇다고 하여 만일 어떤 성직자가 십일조를 신앙생활의 필수조건으로 주장한다면
이는 일종의 공갈이며 강요이다.
예수께서 ‘율법은 폐지되었다’고 하였으니 (히 7:17~19, 갈 3:10~11)유대교인들이 아닌 기독교
인들은 지금 모세의 옛 언약, 즉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예수의 새로운 복음의 언약 아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율법 600여 개의 금지령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에는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그런데 기독교는 율법의 조항들은 다 무시하고
지키지 않으면서 모세 율법 중에서도 왜 하필이면 십일조 하나만을 끄집어내어 그것만은 필수
라고 강조하며 엄수하라고 하는가? 그 폐지된 율법 중에서도 오직 십일조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도 ‘중이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모시고 모세의 뒤를 따라가는 형국이다.
이것은 오늘 한국 교회의 잘못된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기독교인들이 십일조를 옹호하면서 인용하는 예수의 말씀이 있다.
+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리라[마태 23:23(한글개역판)] [이와 거의 같은 내용 : 누가 11:42]
그러나 그들은 마태복음 23장 23절만 인용하고 그 뒤의 24절은 쏙 빼 버린다.
공동번역판으로 23장 23~24절의 내용을 보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
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하지 않겠느냐? 이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자, 어떠한가? 십일조만 잘 지키고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율법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위선자들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 뒤에 정의와 자비와 신의
등을 “낙타”로 비유하고 십일조는 “하루살이”로 비유하고 있다. 예수도 ‘이웃사랑’등의 정의와
자비와 신의가 낙타 정도의 크기라면 ‘십일조’는 하루살이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직자들은 하루살이가 낙타보다도 훨씬 크다고 가르치
고 있다. 십일조는 물론이고 Bible에는 전혀 없는 감사헌금, 생일헌금, 건축헌금 등 그 종류가
세금보다 많다는 각종 헌금들을 거둬들이고 있는 것이다.
▣ 안식일에 대하여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주일(일요일, 첫째날)과 안식일(토요일, 일곱째날)을 같은 날로 믿거나
안식일은 구약시대에 히브리인들이 지켰던 성일이었고 예수 이후에는,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주일(일요일)로 바뀌어졌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안식일이 제7일, 토요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Bible[창세2:1~3,
출20:10]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토요일 준수가 율법을 받은 해인
BC 2514년부터 AD 1893년까지 3,383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의 108개
언어가 “토요일”을 “안식일”(새벗스Sabbath)로 칭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안식일에 대해 무려 126번이나 언급되어 있고 ‘영원히’ 지켜야 하며 지키지 않는
자를 죽이라고 여호와신이 직접 명령하기까지 하였다. 신약성경에서도 안식일에 대해 61번이나
언급이 되어 있다. 예수도 예외 없이 안식일(토요일)을 지키고 있으며[누가4:16,요15:10], 예수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마12:8,누가6:5,마가2:28]이라 하였고, 사도행전[13:14, 27, 42, 44, 15:21,
16:13 17:2, 18:4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도 바울과 다른 사도들도 안식일(제7일, 토요일)에
종교적인 집회를 하였다는 기록이 84군데나 있다. 그렇지만 예수가 안식일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꾸라고 한 적도 없고, 성경가운데 단 한 곳도 ‘일요일’을 지키라고 한 곳은 없다.
예수 사후, 그의 무덤에서조차도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있음[누가23:56]을 알 수 있다. “주일
중 첫날” 즉 일요일에 관한 내용이 신약에 9개가 있는데 이들을 모두 검토해 본 결과 하나님
이 백성의 예배일을 바꿀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단서는 추호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왜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을 지킬까?
1893년 9월에 출간된 ‘캐톨릭 미러’(Catholic Mirror)라는 책을 보면 천주교회가 안식일을
변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천주교 저술가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문: 어느 날이 안식일인가?
답: 토요일이 안식일이다.
문: 그러면 왜 우리는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는가?
답: 라오디게아 종교회의(AD 336)에서 천주교회가 예배일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꾸었기
때문에 우리는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준수한다.
상기의 기록을 보면 안식일은 예수에 의해 바뀐 것이 아니라 후세 사람에 의해서 변경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주교에서 출판한 다음의 기록을 보자(Our Sunday Visitor, June 11, 1950)
"개신교도들은 저들의 모든 공적인 교서들 가운데서 저들의 신앙은 성경, 오직 성경에 기초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저들 신조의 한 부분으로 어떠한 전통도 거부한다. ‥‥‥ 신약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께서 예배일을 토요일예서 일요일로 변경시켰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모든 개신교도들은 일요일을 준수하는 문제에 있어서 전통을 따르고 있다.“
즉 천주교회에서 안식일 변경을 자신들이 했다고 떳떳하게 주장하는 이유는 교회의 힘과 권위
의 증거로 삼으려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가 천주교의 이 변경을 그대로 따라하자
모든 것을 “성경대로” 한다더니 왜 우리가 변경한 것을 그대로 따라하느냐고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의 아래와 같은 문답을
통해보면 다른 기독교인들이 왜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문: 안식일(토요일)에 내가 쉴 것 같으면 내 사업이 망하게 될 것이요, 안식일에 직장을 나가지
않을 것 같으면 직장에서 해고당할 터인데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답: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8:36)
문: 주님이시여, 내 가족들까지도 나와 뜻을 같이 하지 않는데 가정 불화를 일부러 만들어야
합니까?
답: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 10:37~38]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누가 14:33]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제7일 안식일(토요일)을 지키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저들의 생활을 성경의 이론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저들 생활의 이론에
맞추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성경 말씀대로 지키지 않고 그들의 교리나 생활에
맞춰 성경말씀을 끼워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율법이 폐지되었다거나[에베2:15,
로10:4,히7:18~19] 안식일을 가벼이 여기는 Bible의 구절[골2:16]만을 인용하며 의기양양한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Bible의 모순과 오류에서 밝혔듯이 예수는 오히려 “율법의 일점일획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지키라고 한 말씀[마5:17~19, 누가 16:17]
을 아는가? 모르는가? 아마 알아도 모른 척하고 싶을 것이다.
▣ 십계명의 변조
십계명[출애굽 20:3~17] | 변조된 십계명(천주교) |
1.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3절] | 1.하나이신 천주를 만유 위에 공경하여 높이고 |
2.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4~6절] | 둘째 계명 삭제 |
3.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7절] | 2.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헛맹세를 하지 말고 |
4.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8~11절] | 3. 주일을 지키고 (‘안식일’을 ‘주일’로 변조함) |
5.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12절] | 4.부모를 효도하여 공경하고 |
6.살인하지 못한다.[13절] | 5.사람을 죽이지 말고 |
7.간음하지 못한다.[14절] | 6. 사음을 행치 말고 |
8.도둑질하지 못한다.[15절] | 7. 도적질을 말고 |
9.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16절] | 8.망령된 증참을 말고 |
10.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17절] | 9.남의 아내를 원치말고 10. 남의 재물을 탐치 말라 (열번째 계명을 둘로 나눔) |
기독교인들은 유일신 개념을 강조하기 위해 십계명조차 변조하고 있다. 십계명의 제1계명을
히브리어 원어대로 번역하자면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이다.
이 말은 다른 신도 존재함을 인정한 것이다. 이 제1계명을 천주교에서는 “하나이신 천주를
흠숭하라”로, 개신교에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유일신 개념을 더 강조하기 위해, 천주교에서는 원문에도 없는 ‘하나’를 집어 넣었고,
개신교에서는 ‘내 앞에서’라는 말 대신에 ‘나 외에’라고 낱말을 바꿔 놓은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애교로 봐 줄 수 있다. 그러나 위 도표에서처럼 천주교의 십계명 변조는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 천주교의 교황권 교리는 무소불위의 칼이다. 하나님 말씀도, 예수의
말씀도 그들에겐 안중에 없다. 그들 교리에 맞지 않으면 대담하게도 그 말씀조차 무시해 버리
거나 변조하거나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 기독교는 혼합종교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서양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소한 초대기독교에 한정해서 말하는
기독교는 그 본질에 있어서 아시아의 종교이다. 예수탄생의 동방박사 내방, 경배설화도 기독교
의 내원이 서방에서 온 것이 아니라, 동방(The East)에서 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마태 2:1-12]. 나는 이 동방이 중국까지는 올 수 없다 해도 영지주의의 발생지인 페르시아
문명권을 뜻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기독교는 어디까지나 혼합종교이다.
그 종교의 탄생을 가능케 한 많은 물줄기가 있다. 유대이즘과 헬레니즘의 여러 철학과 종교의
갈래들, 그리고 조로아스터적인 페르시아 문명권의 계기들이 혼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치 못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혼합종교이다.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오기 전까지 이집트
종교의 영향권에 있었고, 바빌론에 끌려갔던 기간 동안 슈메르신화, 바빌로니아 신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 후 페르시아에 의한 풀려날 때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고 로마로부터 국교로 인정받은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미트라 종교의 많은 요소들이
기독교의 요소로 채택, 혼합되었고, 이러한 종교들과 그리스 스토아철학과 플라톤주의 철학
등이 오늘의 기독교를 형성하는데 일조를 담당한 것이다. 여기서는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만 추가로 설명하기로 한다.
▷ 이집트 종교
우리민족의 경우 불과 36년간의 일제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도 일본의 언어를 비롯한 일본
문화가 우리문화에 아주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데, 400여 년동안이나 이집트의 지배를 받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집트의 영향은 얼마나 클 것인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 종교가 유대교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부활, 심판, 동정녀 탄생, 유일신 교리 등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이시스교에는 ‘이시스’라는 여신이 육화되어 고통받아 죽다가 다시 부활해 인간을
심판한다고 한다. 이것이 기독교로 가서 메시아 사상이 나온 것이고 신의 출생 또한 인간과
구별하기 위해 단성생식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기독교의 동정녀 탄생신화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프타’라는 신은 ‘말씀’으로 천지창조를 하였다고 전해지는 신인데 기독교의 야훼역시
‘말씀’으로 천지창조를 한다. 이 교리 역시 다른 종교에서 빌어온 교리인 셈이다.
창세기부터 시작되는 모세5경을 쓴 모세가 이집트에 거주하고 있었을 때는, 이집트의 제19대
왕조가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었을 당시였다. 그보다 대략 1세기전의 제18대왕조의 이집트에서
는 아케나톤왕이 이집트의 모든 신(多神)들을 폐지하고 유일신 아톤만을 숭배하도록 함으로써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전환하게 된다.
이 유일신론이 모세에 의해 히브리의 유일신 사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원래 다신
체제였던 유대인들에게 유일신이 등장하게 된 것은 모세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유일신 사상을 받아들인 이유는 이집트에 오래 거주하면서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많이
동화된 상태였고(할례의 습관도 이집트에서 이어받은 풍속이다), 이집트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서 유대인들의 사상을 하나로 통합해야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로마에서도 황제의 권력강화와 부의 풍요로 환락으로 인해 정신이 해이해져 버린
로마인들의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다신교주의를 폐지하고
유일신을 믿는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삼았던 것에서 비슷한 부분을 볼 수 있다.
▷ 페르시아 종교
조로아스터교(배화교)는 세계최초의 이원론종교이고 유일신교이다. 이원론이란 것은 요즘의
기독교계열 혹은 이슬람계열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선과 악의 대립, 혹은 신과 악마의 대립 등,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초한 것이다. 조로아스타교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신 관념과 선과 악,
천사와 악마 등 이분법적 세계관은 당대 유대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교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로아스타교도들은 교리나 의식면보다는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와 선택권
에 중점을 두고 실천 윤리면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들은 신의 섭리나 예언 사상보다는 적선
(積善), 적악(積惡)에 의한 인과응보사상을 앞세우고 있었다. 최후의 심판이나 극락, 지옥같은
말들도 이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 바빌로니아 신화
바빌로니아 신화에서는 최초의 인간을 진흙으로 빚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라그마신의
피가 인간과 섞이면서 인간은 원죄가 생긴다고 한다. 신들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먹이고 입히며 또 자기들에게 봉사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천지창조 뒤
<심히 보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이 반복하여 나온다. 바빌로니아의 신화속 아다파왕은
영생의 기회를 얻었으나 에아신의 잘못된 충고로 영생을 얻지 못한다. 왕은 이것을 에아신의
잘못으로 탓하는데 이것 역시 아담이 이브를 탓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노아의 홍수이야기도 바빌로니아 홍수설화의 모방이며, 뱀에 대한 유별난
적의도 바빌로니아에서 온 것이다. 우주의 질서를 교란하는 것은 거대한 뱀이며 길가메쉬의
회춘초를 가로챈것도 뱀이다 기독교의 중요 교리는 바빌로니아 지배기 때 바빌로니아 신화
에서 빌어온 것이다. 바벨론에서 바벨로니아인들의 창조론과 우주론을 표절하였으며 페르시아
인에서 사단과 종말론을 도입한 것이다.
▣ 기독교와 사이비종교, 정통과 이단
1) 기독교와 사이비종교
기독교사전을 보면 사이비종교의 일반적인 특성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첫째, 이중 교리를 지니고 있고 둘째, 교주가 신격화되며 셋째, 시한부 심판설을 내세우고
넷째, 반사회적, 반윤리적 성격을 지니며 다섯째, 기성종교에 대해 적개심이나 증오심을 유발시
키고 여섯째, 교리를 무분별하게 혼합하고 일곱째, 신도로 하여금 숙명, 운명 등을 기대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자, 그럼 기독교에 해당되는 것은 없을까?
첫째, 기독교의 교파는 세계적으로 25,000여 개가 넘으며 교리도 제각각이다. 모두 성서에다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성서에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많으며 각각 자기네 교파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중교리가 아니라 백중, 천중교리는 될 것이다.
둘째, 예수는 이미 신격화가 되어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투쟁 속에서 로마의 공권력이 아타나시우스의 손을 들어 줌으로써 예수는
신이 된 것이다.
셋째, 성서 속에서 예수와 바울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 그 세대가 끝나기 전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얘기했으며, 그 당시의 신자들도 그렇게 믿었다. 즉 시한부 심판설을
믿었던 것이다. 신약성서가 예수가 죽자마자 쓰여진 것이 아니라 한참 후에 쓰여진 것은
이 때문이다. 종말이 임박했는데 책 따위를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신학자 ‘쿨만’이 얘기했
듯이 “신약성서 안에 모든 책들의 신학을 통일하고 있는 것은 ‘종말에 대한 기다림’이다”
종말에 대한 기다림이 없다면 기독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날이 몇년 몇월 몇일
이라고 공개적으로 얘기하면 사이비종교이고, 은근히 참고 기다리면 사이비가 아닌가?
넷째, 기독교의 반사회적, 반윤리적 성격에 대해서는 버트란트 러셀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교회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노예제도 폐지를 반대해 왔고, 오늘날 널리
선전된 약간의 예외를 가지고 경제적 정의를 위한 모든 운동을 반대하고 있다.
교황이 공식적으로 사회주의를 비난한 바도 있었다.”
“ 기독교 최악의 면은 성(性에) 대한 태도이다. ...... 나는 이러한 악마적 잔인성을 지닌 교리가
어떻게 훌륭한 도덕적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지 알 수가 없다.“
“교회의 주요 역할은 아직도 이 세상의 고통을 덜어 주는 모든 방면의 진보와 개선을
가로막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가정을 반대하는 부분은 마땅히 받아야 할 만한 주의를 받지 못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존경하기는 하나, 그리스도 자신은 이러한 태도를 별로 보이지
않았다. 즉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한복음 제2장 4절)란 것이 그리스도가
그의 어머니께 한 말이었다. 또한 그리스도는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태복음 제10장 35∼37절)라고 말하였다. 이 모든 것은 교리를 위하여
생물학적 가족관계를 끊을 것을 뜻하는 것이니, 이것이 즉 기독교가 전파됨에 따라 이 세상에
생겨난 편협과 깊은 관계가 있는 태도인 것이다.“
다섯째, 기성종교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기독교만큼 유발시킬 수 있는 종교가 어디에 있는
가? 그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짓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단군동상 목베고, 불상 훼손하고,
마리아상 훼손하고, 장승 훼손하고 .... 어느 종교가 기독교에 감히 대적하겠는가?
여섯째, 교리를 무분별하게 혼합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기독교는 혼합종교”라고 제목으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일곱째, 최후의 심판은 천지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정해진 일이라고 하며, 행실은
필요 없고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는, 사람이 구원받느냐 못받느냐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에 근거를 두고 생긴 것이라 한다. 그러니 신도로 하여금 숙명이나
운명을 기대하도록 유도하는 사이비 종교에도 역시 해당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는 자기들이 정의한 사이비종교의 특성에 모두 해당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야말로 사이비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2) 정통과 이단
소위 정통 기독교라고 자처하는 천주교나 개신교는 서로를 이단으로 본다. 기독교의 가장
큰 이단은 이 둘인 셈이다.
이 둘을 제외한 이단들은 그들만의 경전을 더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통일교는 <원리강론>을 가지고 있고 성경은 낡은 교훈집에 불과하다 하고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신세계 성경>을 가지고 있고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지옥을 부정한다.
몰몬교는 <몰몬경>을 가지고 있고 예수는 세 번이나 결혼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의 눈으로 보면 이들은 황당무계한 사이비 종교일 뿐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눈으로
보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경전 뒤에 <신약성서>라는 새로운 경전을 만들어 믿으면서 자기들의
경전은 옛날 계약으로 치부하고 그 중에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부분만 단어를 바꾸거나 해석을
달리해서 써먹고 있는 사이비 종교이다. 따라서 유대인에게 <신약성서>라는 경전은 본래의
<구약성서>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교리에 맞게 제멋대로 해석, 인용하거나 전혀 관계없는
구절을 들추면서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억지를 부리는 허위 투성이의 책일 뿐이다.
3) 예수의 말이 없는 성경에 ‘이단(異端)’은 있는가?
도올 김용옥 선생의 다음과 같은 얘기는 참으로 명쾌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 예수는 희랍어로 자기의 메시지를 발한 적이 없다. 예수와 그의 열두 제자는 당시 상층
지배계급이나 유식계급이 쓰던 ”헬라어“를 전혀 모르는 매우 무식한 인물들이었으며 당시
팔레스타인 하층민 대중에게 통용되던 페르시아어 계통의 아람어를 사용하던 인물들이었다.
예수의 메시지는 어디에 있는가? 희랍어 성경 속에 있는가? 나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의
결론은 이것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없다. 그 메시지는 역사적 예수가 존재했다면 약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어느 동네에서 아람어라는 음성적 규칙에 의하여 진동된 공기의 파장과 함께
증발하여 버렸다. 예수의 메시지는 없다. 이러한 예수의 메시지의 부재는 신학적으로 표현하자
면 예수의 메시지의 케리그마적 성격의 발견이라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발견이 20세기 신학의
가장 거대한 혁명이며 양식사학(Formgeschichte)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가
부재하는 이 마당에 예수의 메시지라고 상징되는 그 무엇에서부터 수 단계의 왜곡을 거친
한국말 『성경』을 놓고 이단(異端)을 운운하는 것은 참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