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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그러자 갑자기 까만 사팔눈의 여죄수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피고에서 최후의 발언이 허용되었을 때, 울음을 터뜨리던 그 모습! 그는 황급히 그녀의 환상을 지워 버리고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다시 새로 한 대를 붙여 물고 방 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와 함께 지냈던 여러 가지 일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녀와의 마지막 밤, 그 때 그를 지배하고 있던 동물적인 욕정, 그것을 만족시켰을 때 경험했던 환멸, 그런 것들을 생각해 냈다. '나는 그 날 밤에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름답고 순수한 애정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아니 그 전에도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가 고모네 집으로 가서 논문을 쓰고 있을 때부터 벌써 진심으로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당시의 자신을 상기했다. 그러자 싱싱하고, 젊고, 충만된 삶의 숨결이 휙 몰아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는 한없이 마음이 아팠다. 그 당시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와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시골 교회에 함께 갔을 때의 캬츄사와 오늘 여러 사람들이 재판을 한 상인을 상대로 술을 마시는 매춘부 캬추샤와의 사이에 생긴 차이에 못지 않을 만큼 큰 것이었다. 그 무렵 그는 발랄하고 자유로운 청년이어서 그 앞날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으나, 지금의 그는 어리석고 공허한, 목적도 없는 하찮은 인생의 굴레를 덮어쓴 채 벗어날 출구를 찾지 못하는, 아니 오히려 찾으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도 전에는 자기의 정직함을 자랑으로 알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신조(信條)로 삼아 왔다. 그리고 또한 실지로 정직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온몸이 허위투성이였다. 그것은 가장 무서워해야 할 허위, 주위의 사람들에게 진실이라고 인정되고 있는 허위인 것이다. 이 허위로부터 빠져 나갈 길은 전연 없었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그 속에 빠져 버려서, 그것과 친숙해졌으며, 그 속에서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마리아 바실리예프나와 그녀의 남편과의 관계를 해결하고, 그들이나 그들의 자식들 눈을 꺼리낌없이 똑바로 바라볼 수 있기 위해서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미시와의 관계를 거짓 없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토지 사유를 부정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어머니의 유산을 차지하고 있는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카추샤에 대한 죄를 보상할 수 있을까? 그 여자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자기를 사랑해 온 여자를 뿌리쳐 버릴 수는 없다. 변호사에게 돈을 주어 억울한 죄명으로 선고를 받은, 징역의 고통으로부터 구해 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돈으로 죄를 보상하다니 될 말인가? 그런 것은 그 때 내가 그녀에게 돈을 줌으로써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것과 똑같 은 일이다.' 그러자 그 때 복도에서 그녀를 쫓아가서 돈을 가슴팍에 찔러 넣고는 도망쳤던 일이 생생하게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아! 그 돈!” 그 때와 똑같은 공포와 혐오를 느끼면서 그는 그 순간을 상기했다. “아아! 그 무슨 더러운 짓이냐!” 역시 그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소리를 내어 이렇게 말했다. “악당이나 부랑자만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악당이다! 부랑자이다!” 하고 그는 소리를 질렀다. “정말 나는, 정말로 틀림없는 악당일까? 그렇지 않으면 뭐란 말이냐?” 그는 문득 발을 멈추고 자문 자답했다. '그리고 나쁜 일이란 이 일 한 가지뿐일까?' 하고 그는 계속 자기 자신을 비난했다. '마리아 바실리예프나와 그녀의 남편에 대한 관계는 비열하지 않단 말인가? 더러운 행위가 아니란 말이냐? 그리고 재산에 대한 태도는 어떠냐? 어머니로부터 받았다는 구실 아래, 불법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재산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게으르고 추잡한 생활의 전체는 어떠냐? 그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것은 카추샤에 대한 나의 행위다. 부랑자! 악당! 그렇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마음대로 비판하라지. 나는 그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최근에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느끼고 있는 혐오, 특히 오늘 코르차긴 공작이나 소피아 바실리예프나, 미시나, 코르네이에 대해서 느낀 혐오감은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놀란 것은 자기의 비열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이 감정 속에는 뭔가 병적이면서도 동시에 마음을 기쁘게 하고 안정시키는 것이 있었다. 네플류도프의 생애 중에는 이미 몇 번이고 그가 말하는 마음의 정화 작용(淨化作用)이란 것이 일어났었다. 그가 마음의 정화 작용이라고 부른 것은 다음과 같은 마음의 상태였다. 가끔 상당한 시일이 경과한 후 느닷없이 내적 생활의 지체(遲滯)나 때로는 정지를 의식한다. 그러면 그는 자기 마음 속에 쌓여서 이러한 정지의 원인이 된 쓰레기를 청소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각성이 있는 뒤에는 언제나 네플류도프는 스스로 자기의 생활 규범을 만들어서 영원히 이것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일기를 쓰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앞으로는 절대로 이 규범을 위반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며, 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펼쳐 나간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 생활의 유혹에 빠져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타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보다 더 깊은 곳으로 떨어져 버리곤 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몇 번인가 자기 청소를 하고 분기(奮起)했다. 그 첫번째는 그가 고모네 집에 갔을 때였다. 그것은 가장 발랄하고 환의에 넘친 각성이었다. 그 결과는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다. 두 번째 각성은 문관직을 내동댕이치고 한 몸을 희생시키려는 생각으로 전쟁 중에 복무했을 때 경험했다. 그러나 그 때는 쓰레기가 너무 빨리 쌓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군대를 나와 외국에 가서 그림 공부를 했을 때도 각성이 있었다. 그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화(淨化)의 기회가 없이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러므로 이렇게까지 그의 내부가 썩어빠진 적은, 이를테면 양심이 요구하는 것과 실제로 하고 있는 생활과의 사이에 이렇게까지 커다란 간격이 생긴 적은, 여태껏 한번도 없었다. 그는 그 간격을 느끼자 저도 모르게 겁이 덜컥 났다. 이 간격은 너무나 넓고 너무나 더러웠으므로, 처음에는 정화와 가능성에 대하여 절망을 느꼈다. '지금까지 자기 완성을 위한 시도는 여러 번 해 보았으나, 결국 성공하진 못했지 않느냐?'고 그의 마음 속에서 유혹의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시도해 볼 필요도 없지 않느냐?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들 그런 것이니까 말이야. 그것이 결국 인생인 것이다.' 하고 유혹의 소리가 속삭였다. 그러나 오직 하나밖에 없는, 영원히 자유로운 정신적 존재가 네플류도프의 내부에 눈뜨고 있었다. 현실의 그와,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그와의 간격이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한번 눈뜬 정신적 존재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아무리 비싼 값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속박하고 있는 이 허위(虛僞)를 깨뜨려 없애야겠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체의 진실을 말해서 그대로 행해야겠다.” 하고 그는 소리내어 단호하게 말했다. “미시에게는, 나는 음탕한 인간이며 그녀와 결혼할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을 괜히 어지럽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자. 마리아 바실리예프나(귀족 단장의 아내)와도 결판을 내자. 사실 그 여자에겐 더 할 말도 없다. 나는 그 여자의 남편에게 말하자. 자기는 부랑자며, 지금까지 그를 속여 왔다고 말이다. 유산에 대해서도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처리를 하자. 카추샤에 대해서도, 자기는 부랑자이며 그녀에게 지은 죄는 한량없으므로, 그녀의 운명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말하자. 그렇다. 그녀를 만나면 용서해 달라고 간청해야겠다. 그렇다. 어린애처럼 마구 용서를 빌어야겠다.” 그는 우뚝 섰다. “필요하다면 그녀와 결혼하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어릴 때 하던 것처럼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개 놓고 눈길을 하늘로 향하고는 누구에게 말하듯이 이렇게 뇌까렸다. “주여, 저를 도와 주소서. 저를 인도해 주소서. 저의 마음 속에 들어오셔서 저의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주소서.” 그는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면서 그를 돕고 그의 마음 속에 들어와서 그를 깨끗이 씻어 달라고 빌었으나 이미 그 소원은 그 동안에 성취되었다. 그의 내부에 존재하던 신은 그의 의식 속에서 눈을 떴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신으로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와 용기와 삶의 기쁨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선(善)의 힘을 마음껏 만끽했다. 모든 일,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착한 일은 그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느껴졌다. 그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을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었다. 그것은 선한 눈물이기도 하고 악한 눈물이기도 했다. 선한 눈물이라 함은, 최근 수 년간 그의 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정신적 인격의 각성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었기 때문이고, 악한 눈물이라 함은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감격, 자기의 선행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몸이 뜨거워 옴을 느껴졌다. 그래서 창문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창문은 뜰을 향해 있었다. 조용하고 상쾌한 달밤이었다. 거리에서 수레바퀴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창문 바로 밑에는 키가 크고 벌거벗은 포플러 가지의 그림자가 깨끗하게 쓸어 놓은 아담한 광장의 모래 위에 비치고 있었다. 왼편에는 밝은 달빛 때문에 하얗게 보이는 헛간의 지붕이 있었으며, 그 앞에는 나뭇가지들이 뒤엉켜 있는 사이로 담장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듯한 상쾌한 공기를 가슴깊이 들이마셨다. “아, 기분 좋군. 정말 기분 좋아! 정말로!” 하고 그는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것을 말로 표현했다. <후략> 요점 정리 작자 :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이철 옮김 갈래 : 장편 소설. 순수 소설 구성 : 복합 구성(교과서는 허위적 삶의 성찰, 자기 비판과 양심적 삶의 결심, 정신의 부활에 따른 환희) 성격 : 인도주의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배경 : 19세기 러시아 주제 : 한 인간의 정신적 부활. 도덕적 결단을 통해 영혼의 부활과 삶의 가치에 대한 추구 줄거리 : 어느 날 재판소의 배심원으로 나온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은 살인절도 혐의를 받아 재판을 받는 까츄샤를 만난다. 그녀는 청년시절에 자기가 정욕의 대상으로 유린한 순결하고 아름다운 그 까츄샤였던 것이다. 그녀는 임신을 하고 하녀 겸 양녀로 있던 집을 쫓겨나 타락하여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네흘류도프는 그 타락의 원인이 자기의 무책임한 행동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이 까츄샤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귀족사회에 속한 자기 생활 태도에 대하여 깊은 의혹을 품게 되고, 동시에 남의 노역으로 포식하게 되는 토지사유제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된다. 까츄샤의 감형운동을 위하여 감옥에 드나드는 동안에 그는 도움을 바라는 무고한 죄인들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냉혹한 불합리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일신상의 정리를 위해서 자기 영지에 내려가서 농촌의 궁핍을 눈앞에 보게 되고 또 뻬쩨르부르그에 가서 유력자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귀족 사회의 경박함과 부패를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재판소에서의 인상이 사회 비판과 현대 문명에 대한 규탄으로까지 확대된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서 제 1 부에서는 재판소와 감옥을 중심으로서 한 사법 형벌의 세계가 다루어지고, 제 2부에서는 자기 영지의 농민과 빼쩨르부르그 상류사회의 묘사와 죄인호송대의 출발 전후의 사건이 다루어지고, 제3부에서는 시베리아의 죄인호송 여행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다. 결국 네흘류도프라는 한 귀족이 까츄샤라는 한 창녀를 따라 괴로운 시베리아 유형을 자청하여 시베리아의 황막한 벽지에서 끝없이 바라던 용서의 정신으로 영혼의 부활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내용 연구 거리끼다 :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 또는 마음에 걸려서 방해나 상치(相馳)가 된다. 보상(補償) : 남의 손해를 메꾸어 갚아 줌. 상기(想起) : 지난 일을 도로 생각하여 냄. 부랑자(浮浪者) : 빈둥빈둥 놀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 비열(卑劣) : 성품과 행실이 천하고 용렬함. 혐오(嫌惡) : 싫어하고 미워함. 음탕(淫蕩) : 주색에 빠져 방탕함. 결판(決判) : 승부나 시비의 판정. 한량(限量)없다 : 그지없다. 간청(懇請) : 간절히 청함. 뇌까리다 : 불쾌하게 생각하는 남의 말을 그대로 되받아서 자꾸 뇌다. 만끽(滿喫) : 배불리 마음껏 먹음. 마음껏 욕망을 충족시킴. 아담(雅談)한 : 고상하고 깔끔한. 조촐하고 산뜻한. 헛간 : 문짝이 없는 광. 까만 사팔눈의 여죄수 : 카추샤를 가리킴. 네플류도프가 범했던 하녀 피고에게 최후의 - 터뜨리던 그 모습 : 카추샤는 네플류도프에게 정조를 잃은 후 매춘부가 되며, 살인 누명을 받아 법정에 선다. 이 대목은 그 당시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 인정되고 있는 허위 : 허위를 진실로 포장하고 있던 세태를 반영한 표현이다. 더욱이 그는 -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 허위 의식에 젖어 안일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토지 사유를 - 차지하고 있는 모순 : 네플류도프가 진보적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지식인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녀를 쫓아가서 돈을 - 넣고는 도망쳤던 일 : 재물로써 자신의 잘못을 덮어 책임을 면하려 한 비열한 행동 그리고 또 놀란 것은 - 것이 있었다 :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을 평화롭게 씻어 주는 일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 - 떨어져 버리곤 했다 : 인간의 의지란, 타성에 젖은 생활 앞에서는 참으로 무력한 것임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유혹의 소리 : 타성에 젖은 안일한 생활에 대한 유혹 오직 하나밖에 - 자유로운 정신적 존재 : 양심, 진실, 정의감 또는 신(神) '마리아∼똑같은 일이다.' : 네플류도프의 심리적 갈등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자신의 총체적 삶에 대한 도덕적 반성을 자문 자답의 형식으로 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속일 수는 없다. : 자기의 양심에 따를 행동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한 부분으로 자신에게 떳떳함을(이것은 양심이다) 찾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비판쯤은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문득∼것이 있었다. : 다른 사람에 대해 품은 혐오는 결국 자기에 대한 혐오였기에 자기 비판을 통해서 심리가 정화되며 안정적 기쁨을 느낀다. "미시에게는,∼용서를 빌어야겠다." : 네플류도프가 카추샤와의 만남을 계기로 도덕적으로 무감각하게 살아온 생활(이것은 대다수 귀족들의 생활이기도 하다.)을 하나하나 반성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네플류도프는 자신을 음탕한 인간, 부랑자 등으로 자인하며 냉철한 자기 반성을 하고 있다. "필요하다면 그녀와 결혼하자." : 네플류도프의 양심적 결단이 극대화된 대화이다. 이 대화의 앞 부분에서 네플류도프는 이전의 자기 행동에 대한 참회와 함께 양심적 삶을 살 것을 맹세하고 이어서 카추샤와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녀에 대한 속죄를 하려고 한다. 그는 하느님께 ∼떴던 것이다. : 인간의 본성에 잠재해 있던 양심이 인간의 결단에 의해 비로소 발휘되는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몸이 뜨거워 옴을 느꼈다. : 양심적인 결심에 따라 참된 환희와 삶의 의욕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창문은 뜰을 ∼시커멓게 보였다. : 진술 방법은 묘사에 해당한다. 세부 묘사로 주변 상황을 그려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네플류도프는 ∼들이마셨다. : 심리의 변화에 따라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변화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여기서 '상쾌한'은 작중 인물의 주관적 판단에 해당한다. 이해와 감상 이 소설은 네플류도프라는 귀족 청년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영혼의 부활을 이룩하는 경로를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네플류도프는 새로운 삶을 결심하는 동안에 타락과 향락에 젖은 귀족들의 삶과 가난에 시달리는 민중의 삶 사이의 모순을 인식하게 되는데, 작자는 이러한 주인공을 통해 당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각성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주인공은 도덕적 결단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고 동시에 참된 삶의 가치를 찾아 나가는 과정도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한 귀족 청년이 배심원으로 출정한 법정에서 바로 자신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망치고 어두운 삶을 살다가 마침내 죄까지 짓게 된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 후 청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혼의 눈을 뜸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한 인간의 도덕적 결단을 통한 영혼의 고양이란 측면에서 가치 있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당대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그려 낸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즉 한편에는 부정과 향락에 젖은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삶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에는 가난과 억압 속에 힘들게 삶을 영위하는 민중의 삶이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당대 현실의 모순을 그려 내고 있다. 감상2 1899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한 귀족 청년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추구하여 영혼의 부활을 이루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본문은 주인공인 네플류도프가 새로운 삶을 결심하기까지의 심리적 과정을 그린 부분이다. 이 작품은 당대 사회의 문제뿐만 아니라,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작가는 러시아 사회의 모순과 타락을 비판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한쪽에는 부정과 향락에 젖은 귀족들이 요란한 삶을 영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난과 억압에 찌든 민중이 고통을 겪던 것이 당대의 현실이다. 작가는 주인공 네플류도프를 내세워 이러한 모순을 깨기 위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은 한 인간이 도덕적 결단을 통해 영혼을 고양하고 삶의 가치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삶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 두 측면의 의미가 모든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부활"은 세계적 고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출처 : 오세영·서대석 공저 천재 교육 문학교과서) 심화 자료 부활의 창작 배경 당시 러시아 국교에 속하지 아니한 종파의 신자들이 병역을 거부하여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을 목격한 톨스토이가 참다못해 그들을 미국으로 이주시킬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썼다고 한다. 작품 중에 러시아 국교인 그리스 정교회의 신비적 형식주의를 비판한 대목이 있으므로 정부는 톨스토이를 정교회에서 파문(1901)하였으나, 톨스토이는 '여하한 권력도 신으로부터 파문할 힘은 없다.'고 하면서 굴하지 아니하였다. 톨스토이의 문학사적 가치 톨스토이는 한평생을 통하여 정신과 육체의 싸움에 괴로워하면서 늘 자연인이 되기를 동경하였으며, 물질 문명에 뿌리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던 작가였다. 그는 러시아의 땅에 깊은 애정을 느끼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철학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려고 하였다. 지주·귀족 출신이면서 농민의 넋을 잊은 적이 없이, 농부의 진실만이 러시아를 구한다.'고 믿고 있었다. 엄중한 리얼리즘의 길을 걸었으나 그와 동시에 드물게 보는 조화와 완벽을 과시하는 섬세한 예술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흙내가 물씬 풍기는 농민들의 매력적인 말에도 끌렸으나 문장의 연마에도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화와 완벽을 과시하는 드물게 보는 러시아의 작가로서, 스승으로 받들었던 푸시킨과 함께 러시아 문학의 쌍벽을 이루면서 세계 문학의 거봉을 이루었다. 끝내는 예술가로서의 자기를 부정하고, 그토록 자신을 사로잡은 '예술과육'의 세계에서 도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예술 작품은 구도자로서의 그의 한계를 넘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의 고뇌와 의문에 해답을 주고 있다. 인물의 유형
이 글의 특징 이 작품에서 톨스토이는 그 때까지 설교자, 적발자로서 써 온 모든 주장, 또한 도덕가, 문명 비평가로서 반대해 온 모든 것들을 예술적인 표현으로써 호소하고 있다. 거기에는 리얼리즘 작가 톨스토이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으며, 특히 상세한 심리 해부는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치법의 구사, 효과적인 간결한 필치, 70세가 넘은 노작가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싱싱한 서정적 묘사 등은 톨스토이의 건재를 나타내고 있다. '네플류도프의 제2권을 쓰고 싶다. 그의 활동, 피로, 자각하는 귀족 근성, 여자의 유혹, 타락, 실패···'라는 메모가 남아 있어서, 톨스토이가 이 작품의 속편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귀족과 농노의 대립이 심화된 혁명 전야였다. 톨스토이는 네플류도프 공작의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당시의 구조적인 모순을 극복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부활'의 뒷이야기와 작품의 특징 이 작품은 처음에 '코니의 수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즉, 어느 처녀를 유혹한 남자가 배심원이 되어 출두한 법정에서 자기가 옛날에 범했던 아가씨와 재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양심에 눈을 뜨게 된다는 이야기로서 작가가 코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골자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후 철저하게 개작되어 작품은 현재 보는 바와 같이 정치적, 사회적 테마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제정 러시아의 재판, 교회, 행정 등의 불합리를 고발하고 있다. 즉, 네플류도프 공작은 배심원으로서 재판소에 출두했다가 여죄수 마슬로바가, 일찍이 자기가 범한 처녀 카추샤임을 발견하고 그 날 밤부터 양심의 가책에 고민한다. 한편, 카추샤는 네플류도프의 주선으로 판결이 취소되고 특사의 혜택을 받게 되나 그녀는 같은 죄수 가운데서 알게된 정치범 시몬손과 함께 시베리아로 갈 것을 결의한다. 뒤에 알게 된 네플류도프는 성서 속에서 새로운 생활의 지침을 발견한다.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Graf Tolstoy) Tolstoy는 Tolstoi라고도 씀. 1828. 9. 9(구력 8. 28) 러시아 툴라 야스나야폴랴나~1910. 11. 20(구력 11. 7) 랴잔 아스타포보. 러시아의 작가·개혁가·도덕사상가. 세계적인 소설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불후의 명성을 안겨준 대표작 〈전쟁과 평화 Voyna i mir〉(1865~69)·〈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5~77)를 남겼다. 자신의 대립되는 성향 때문에 깊이 갈등했던 톨스토이는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만년에 가난한 농부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개인주의적 성향의 귀족으로서, 감각주의자로 시작해 엄격한 청교도로 삶을 마감했으며 보기 드물게 정력적인 사람이었지만 항상 죽음을 두려워했다. 이와 같은 유별난 이중적 성격으로 그는 중년에 작가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과격한 그리스도교도의 길로 접어들었고, 이후 수많은 평론과 소책자, 교훈적인 단편소설, 희곡 등을 통해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찬 삶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정부, 교회 등의 제도와 재산을 부정하는 자신의 견해를 전파했다. 초기생애와 결혼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60㎞ 떨어진 툴라 현에 있는 톨스토이 가문의 영지 야스나야폴랴나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의 손에서 자라며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16세 되던 해에 카잔대학교에 입학했으나 형식적인 수업에 실망한 나머지 영지를 관리하며 독학할 목적으로 1847년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왔다. 그러나 시골의 삶보다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떠들썩한 생활을 더 좋아해 이 2가지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인 죄악을 일기에 기록했는데, 이무렵 써내려간 항목들은 자신의 행동을 억압하는 동기를 사실적으로 탐구하는 뛰어난 분석력을 보여준다. 무절제한 생활에 염증을 느낀 톨스토이는 군인이었던 형 니콜라이를 따라 1851년 카프카스로 갔고 이듬해 자신도 군에 입대해 산악부족과의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는 여가의 대부분을 글을 쓰면서 보냈는데, 잡지 〈소브레멘니크 Sovremennik〉에 발표한 첫번째 작품 〈유년시절 Detstvo〉은 이 시기에 완성한 것이다. 〈유년시절〉의 소재들은 대부분 전형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다루어졌으며, 이무렵 그 자신이 일부를 번역한 영국의 소설가 로렌스 스턴의 〈센티멘털 저니 Sentimental Journey〉식의 서정성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이 작품은 나중에 씌어진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자서전적이지만 특히 중요한 세부사항에 대한 신선하고 정확한 묘사와 향수 어린 매력을 자아내며, 잊혀진 어린시절의 추억을 재현하는 데 뛰어나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유년시절〉의 속편인 〈소년시절 Otrochestvo〉· 〈청년시절 Yunost〉에서는 이 특별한 매력을 찾아볼 수 없는데, 아마도 청소년들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분석이 주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는 카프카스에서 겪은 경험을 전쟁에 관한 첫번째 단편소설인 〈습격 Nabeg〉·〈산림 채벌 Rubka lesa〉에 투영했다. 이들 작품의 주제는 젊은이 특유의 기백으로 다루어져 있으나 군사적인 행동에 관한 정확한 묘사는 잘못된 영웅주의에 대한 비판적 자각을 담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훗날 〈세바스토폴 이야기 Sevastopolskiye rasskazy〉(1855~56)의 주요특징으로 나타난다. 1854년 도나우 전선으로 배속되어 크림 전쟁중 세바스토폴 포위전에 참여했고, 이때의 경험을 〈세바스토폴 이야기〉에 서술하면서 일반 병사의 진정한 영웅적인 행위와 왜곡되고 과장된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대비시켰다. 1856년 전쟁이 끝나자 제대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간 그는 자신의 지지를 구하던 사회적·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경쟁 문학 그룹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러나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던 그는 이들 그룹의 합류 요청을 거절하고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갔다. 1857년 그는 프랑스·스위스·독일을 여행했다. 이때의 여행을 바탕으로 쓴 〈뤼체른 Lyutsern〉 등의 작품에 가해진 혹독한 비평으로 문학에 대한 관심을 잃었으나 창작활동은 계속했다. 1855~63년에는 도덕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 〈당구점수 기록원의 수기 Zapiski markera〉·〈두 경기병 Dva gusara〉·〈알베르트 Albert〉· 〈세 죽음 Tri smerti〉·〈가정의 행복 Semeynoye schastye〉·〈폴리쿠슈카 Polikushka〉·〈홀스토메르 Kholstomer〉(1886 출판) 등 일련의 단편들을 썼다. 이들 작품은 훗날 그의 관심사가 된 유물론적 사회가 자연적이고 오염되지 않은 인간에 미치는 해독에 관한 문제를 예시하고 있지만, 초기 작품보다 예술적으로 향상된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작품의 많은 부분에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주관적인 도덕을 강조한 점이 흠으로 남는다. 오로지 〈두 경기병〉에서만 이같은 주관적 논법을 자제하고 있는데, 여기서 작가는 작중인물의 한 사람에게 미치는 사회의 나쁜 영향을 교훈적으로 역설하기보다는 예술적으로 시사하고 있다.또 한 예외인 〈홀스토메르〉는 말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을 풍자했는데, 혈통 있는 말의 자연스러운 삶이 불합리하고 부자연스러운 인간의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는 내용을 통해 독자를 납득시키고 있다. 복잡해진 사회의 오염된 산물과 자연인의 대립에 큰 관심을 가진 톨스토이는 〈카자크인들 Kazaki〉에서 뛰어난 솜씨로 이를 다루었다. 이 작품에서 문명인인 주인공은 자신이 사는 마을의 자유분방한 카자크인들과는 반대로 괴로움에 시달린다. 이 카자크인 중 몇몇은 톨스토이가 창조한 가장 인상적인 인물에 속한다. 1850년대 후반 톨스토이는 농민의 열악한 교육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 외국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야스나야폴랴나에 농민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었다. 근대적이고 진보적인 교육을 예견한 그의 독특한 교육방법은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점차 교육연구에 빠져들었다. 1860~61년에 다시 유럽 여행을 떠나 독일·프랑스·이탈리아·영국·벨기에를 돌아보며 교육이론과 실상을 연구·탐사했다. 이 문제에 열중한 끝에 자신이 개발한 교육이론을 수록한 교육잡지를 발간하고, 간단하고 참신한 접근방식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교과서들을 펴냈다. 1862년 톨스토이는 폭넓은 지적 관심을 지닌 중산층 가정의 소냐(소피아의 애칭)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했다. 결혼과 동시에 교육활동을 그만두고 15년간 가정생활에만 전념했다. 이 기간은 대체로 바쁘면서도 행복한 나날이었고 13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그는 영지를 훌륭히 관리하면서 창작활동을 다시 시작해 자신의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를 탄생시켰다. 위대한 소설들 톨스토이가 7년에 걸쳐 쓴 대서사시 〈전쟁과 평화〉는 일반적으로 세계문학에서 2~3번째로 꼽히는 대소설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 온 정열을 쏟아 이전 작품을 훨씬 능가하는 범주와 기법을 구사했다. 여기에서는 인생의 모든 소재가 짜여져 거대한 직물을 만들어내며, 풍부한 자료와 수많은 인물들이 탁월하게 객관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어쩌면 그 어떤 소설도 이 작품처럼 사실적인 세부묘사의 능숙함과 상상을 초월하는 정교함, 그리고 다양한 심리분석으로 인생의 전체적인 인상을 완벽하고 자연스럽게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전쟁과 평화〉의 시간적인 배경은 1805~14년으로 설정되어 러시아의 5개 귀족가문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들 가문의 구성원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생생한 배경 위에 묘사되고 있다. 이 웅대한 파노라마에는 귀족과 농민, 프랑스 황제, 외교관, 궁중신하, 도시생활, 농촌생활, 사실적인 전쟁의 묘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테마는 가문의 이야기에 부속되며 가족의 이야기는 출생·어린시절·성숙기·사랑·결혼·출산·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자연적 단계에 대한 당시 톨스토이의 긍정적인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두 가문의 모델로 자신의 친족을 채택했는데, 불멸의 여주인공 나타샤의 모델로는 처제인 타냐 베르스를 선정했다. 출판된 타냐의 일기를 읽기만 해도 가히 요술이라 부름직한 톨스토이의 예술이 어떻게 타냐를 생명력 넘치고 시적이며 또 '자연스러운' 여인으로 변형시켰는지 알 수 있다. 무능하고 지적 호기심이 강한 피에르, 세련되고 지적으로 오만한 안드레이, 이 두 주인공의 도덕적인 갈등은 톨스토이 자신의 갈등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선행을 해야 한다는 안드레이의 신념은 타인에 대한 봉사를 궁극적으로 믿는 피에르의 입장과 상반된다. 톨스토이는 묘사된 인간 유형에 따라 등장인물의 특징을 부여하는 사실적인 기술법을 다양하게 구사했다. 천박한 사교계의 미인에게는 유려한 외형 묘사를,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삼은 듯한 복잡한 정서를 가진 여자에게는 심층적인 심리분석을 사용하며, 러시아 민중의 소박함과 진실함의 화신이라 볼 수 있는 농부 플라톤 카라타예프에게는 예리한 상징주의 수법을 사용한다. 이 작품에서 비평가들이 자주 이의를 제기한 부분은 톨스토이가 자신의 역사관을 피력하고 전쟁 및 전쟁 구조를 이론화한 부분이다. 톨스토이는 이에 대비해 1868년 한 기사를 통해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행동에는 2가지 유형이 있는데, 인간의 의지로 되는 일이 있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는 최소한의 자유의지가 있으며, 이른바 역사를 만드는 이들과 군지휘관들의 행동은 수많은 보통사람의 행동에 종속되어 있고 따라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역사가들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책임을 이른바 '위대한 인물들'에게 돌리고 이를 영웅적인 선행이나 악행으로 규정하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라고 규정되어온 정의의 원칙, 형식적인 법과는 무관한 자연법이 자연 자체의 진행과정과 인간의 삶을 규정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므로 선택의 여지는 없다. 모든 것은 냉혹한 역사적 결정론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전쟁과 평화〉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예술적으로 흠을 남겼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안나 카레니나〉는 서술기법과 문체에서 〈전쟁과 평화〉와 비슷하지만 예술적인 통일성에서는 훨씬 돋보이는 작품이다. 톨스토이의 인생철학은 이 두 작품을 저술하는 동안 변화했다. 〈전쟁과 평화〉는 삶을 긍정하는 낙관적인 소설이며 주요등장인물은 도덕적으로 굳건하고 자기 내부의 갈등을 제어하는 데 능숙하다. 반면 1860년대 러시아 사회를 다루고 있는 〈안나 카레니나〉는 비관적이며, 그 주인공들은 흔히 내부갈등을 해소하지 못함으로써 때로 인간적 파멸에 이른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의 사랑은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라는 작품의 제사(題詞)는 전체 줄거리의 라이트 모티프이기도 하다. 안나가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은 도덕률을 깨뜨렸다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위선적인 상류사회가 불륜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관습적인 예절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브론스키를 향한 안나의 사랑은 깊고 지속적인 열정이다. 안나는 위선을 취할 수 없었기에 서슴지 않고 진실된 사랑으로 상류사회에 맞서지만, 상류사회의 독선적인 비난은 사건의 비극적인 결말을 의미한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행한 로맨스는 톨스토이 자신의 결혼생활을 바탕으로 기술한 키티와 레빈의 행복한 사랑과 결혼에 대비된다. 또한 삶의 의미에 대한 레빈의 고통스러운 의문, 뇌리를 떠나지 않는 자살 생각, 농부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욕망 등은 당시 톨스토이가 겪고 있던 갈등이 뚜렷이 반영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개혁가로서의 만년 톨스토이는 행복한 결혼생활과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리며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지만 〈안나 카레니나〉 집필을 마칠 무렵에는 자신에 대한 불만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젊은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온 삶의 목적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로 그는 정신적인 위기를 겪기에 이르렀다. 그는 〈참회록 Ispoved〉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추구하며 겪어야 했던 정신적인 고통과 도덕적인 고통을 통렬하게 이야기했다. 이러한 위기는 1879년에 절정에 올랐고 자살을 생각하게까지 되었다. 그는 체계적으로 섭렵했던 철학·신학·과학 서적에서는 별 도움을 얻지 못했으나 평소 큰 호감을 가지고 있던 농부들에게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농부들은 그에게 인간은 신에게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마침내 톨스토이는 〈신약성서〉에서 나타났듯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야말로 삶의 의미에 관한 자신의 질문에 해답을 담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인간 모두에게 선악을 식별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인간은 이 힘을 느끼고 있다고 선언했다 (→ 색인 : 선과 악). 인간의 이성과 양심은 이 힘에서 유래하며 지각 있는 삶의 목적은 이 힘의 의지를 실천하는 일, 즉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그리스도가 한 말의 원래 의미를 되찾기 위해 그 말을 정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5계명으로 제시했다. 이는 화내지 말 것, 색정을 품지 말 것, 맹세로써 자신을 구속하지 말 것, 악에 저항하지 말 것, 정의나 불의 모두를 잘 대할 것 등이다. 이 계율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훗날 그 자신의 행동과 가르침의 근간을 이루었다. 톨스토이는 새로운 확신에 기초해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고 영생설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결과 1901년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또한 강압으로 체제를 유지한다 하여 조직화된 정부 형태에 반대했으며, 소유는 힘에 의해 확보된 것이라고 보고 사유재산제도를 비판했다. 그는 자기 재산을 포기하고자 했으나 가족의 요구에 굴복해 법적으로 자신의 영지를 가족에게 양도했다. 정신적인 위기를 거친 톨스토이는 1880년 이후 자신의 종교관·사회관·도덕관·예술관의 여러 측면을 책과 소책자 및 기사로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쳤다. 이들 저술은 〈참회록〉처럼 개인적 경험에 대한 큰 관심이 결여되어 있으나 마찬가지로 명료한 산문체로 씌어 있으며, 많은 부분이 톨스토이 특유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뛰어난 논법을 보여준다. 이처럼 수없이 다양한 저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러시아 정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교조신학 비판 Issledovaniye dogmaticheskogo bogoslaviya〉, 자신의 종교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쓴 〈나의 신앙 V chyom moya vera〉, 작가 자신의 모스크바 빈민가 체험기이자 빈곤의 원인을 분석한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Tak chto zhe nam delat?〉,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를 종합적으로 기술한 〈신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있다 Tsarstvo bozhiye vnutri vas〉를 들 수 있다. 이 마지막 작품에서 그는 악에 대한 무저항 신념을 발전시켰고, 정부는 부유층과 권력층을 위해 존재하며 무력을 사용해 대중을 박해하고 전쟁을 통해 이들을 살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떤 에세이는 특정한 사회적·정치적 관행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왜 인간은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가? Dlya chego lyudi odurmanivayutsya?〉에서는 술과 담배의 사용을, 〈나는 침묵할 수 없다! Ne mogu molchat!〉에서는 혁명가들의 처형을 공박하고 있다. 그밖에 개혁을 요구하는 저술이나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가 제안한 토지세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헨리 조지에게 보내는 편지 Pisma o genre dzhorzhe〉가 있다. 1897년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Chto takoye iskusstvo?〉의 저술을 끝냈다. 이는 자신의 종교관·도덕관·사회관을 바탕으로 미학체계를 전개하려는 시도였다 (→ 색인 : 예술철학). 그는 한 작품이 예술가의 영혼으로써 독자·청중·관중을 '감화'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예술이라 할 수 있다는 논지를 폈다. 만일 예술가와 청중 사이에 '감화'를 통한 결합이 없다면, 즉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작품은 예술로서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가 인정한 예술의 단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종교예술'로서, 이것은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감정을 통해 인간을 감화시킨다.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나 바그너의 몇몇 작품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았다. 겸손의 징표만큼 긍지의 표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한 극단적인 일관된 신념에 따라 톨스토이는 자신의 대작들을 '저급예술'의 범주로 분류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이론의 도덕적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신적 위기를 체험한 뒤 톨스토이는 수많은 논픽션과는 별도로 도덕적인 목적을 지닌 이야기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은 이전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풍부한 세부묘사 없이 건조한 문체로 씌어졌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Chem lyudi zhivy〉·〈두 노인 Dva starika〉·〈악은 유혹하나 선은 인내한다 Vrazhye lepko, a bozhye krepko〉· 〈많은 땅이 인간에게는 필요한가? Mnogo li cheloveku zemli nuzhno?〉·〈3가지 질문 Tri voprosa〉 등은 이같은 새로운 문체로 씌어진 작품들이다. 농부의 삶에 초점을 맞춘 이 작품들은 구성이 훌륭한 작은 걸작으로 '우수한 세계예술'의 범주에 속한다. 이들 작품에는 도덕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줄거리의 예술적 통일성까지 침해하지는 않는다. 다른 방법으로 쓴 일련의 작품들은 교육받은 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예전의 소설문체에 훨씬 가깝다. 그중 가장 뛰어난 작품은 삶의 실패에 직면해 좌절한 인간을 신비롭게 치료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는 〈광인일기 Zapiski sumasshedshego〉와 상징적인 평범한 인간이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내면에 있는 믿음과 사랑의 불빛을 발견한다는 내용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Smert Ivana Ilicha〉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Kreytserova Sonata〉에서는 성(性)문제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진다. 사회의 청소년 성교육과 질투에 대한 성급한 논쟁을 설득력 있게 예술적으로 연구한 이 작품은 인간의 도덕적 건강은 순결이라는 이상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는 작가의 새로운 믿음을 기반으로 씌어졌다. 성문제는 톨스토이 자신의 삶에 일어났던 일화를 소재로 한 〈악마 Dyavol〉의 중심 테마이다. 사랑하는 젊은 아내가 있지만 남자는 아름다운 농부 처녀에 대한 욕정을 억제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욕정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남편의 모습을 특유의 뛰어난 심리묘사로 그려냈다. 톨스토이가 71세에 쓴 장편소설 〈부활 Voskreseniye〉은 그가 '개종'한 이후에 나온 대표적인 예술작품으로, 한 소녀의 정조를 유린한 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녀가 매춘부가 된 뒤 저지르지도 않은 죄의 범인으로 재판을 받게 되자 양심의 가책을 받은 주인공은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그녀를 따라 시베리아로 간다. 여인은 그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지만 끝내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작품에는 매혹적인 시적 분위기로 묘사되는 첫부분을 비롯해 뛰어난 부분이 많으며 재판장면 또한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부활〉은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의 예술적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작품은 증오의 형적을 담고 있으며 도덕 설교와 사법 및 수형 제도, 교회의 종교의식에 대한 신랄한 공격으로 작가보다는 논객 톨스토이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개종' 이후 톨스토이는 완벽한 성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자신의 일상생활을 새로운 견해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술·담배를 끊고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농부처럼 옷을 입었다. 그 누구도 타인의 노동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믿으면서 직접 자신의 방을 청소하거나 밭일을 하고 자신의 장화를 손수 짓는 등 가능한 한 자급자족하는 삶을 영위하려 했다. 또한 순결이라는 이상에 한층 가까워지고자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육체적인 욕망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또 기아구호조직 같은 박애주의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도덕과 종교 저술에서 보여준 능변과 아울러 그의 명성, 생명력 넘치는 인격은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았다. 제자들은 그의 계율에 따라 공동으로 생활할 수 있는 집단거주지를 조성했으나 톨스토이 자신은 그러한 조직적인 노력을 불신했다. 그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진리는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인간들에 의해서만 도달된다고 선언했다. 톨스토이의 명성이 높아져 러시아 전역은 물론 외국으로까지 그의 견해가 알려지자,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수백 명이 야스나야폴랴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아내와 장성한 아들들은 톨스토이의 견해와 변화한 생활태도를 못마땅해 했다. 톨스토이의 아내가 '속을 알 수 없는 이들'이라 부른 이 '개종자들'의 끊임없는 방문과 그들 중 한 사람인 V. G. 체르트코프의 집안문제 참견으로 톨스토이 부부는 자주 말다툼을 했다. 그의 희망과는 반대로 아내는 자신의 소유재산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고 금욕적인 그의 생활방식을 따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녀는 가족의 안락한 삶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남편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1880년 이전에 출판된 작품의 저작권을 얻어냈고, 이들 작품을 직접 출판함으로써 상당한 소득을 올렸다. 톨스토이가 말년에 여러 작품의 출판을 보류한 것은 스스로 작품에 만족하지 못했고, 또 저작권 소유문제로 아내와 다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지 1년이 지난 1911년에 발견된 이러한 작품들은 그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 가운데 길지 않은 장편소설 〈하지 무라트 KhadzhiMurat〉는 러시아군에 투항한 용감한 카프카스 전사가 비밀리에 아들을 만나보려 했다가 죽음을 당한다는 이야기이다. 생생한 서술방법과 서로간의 오해를 심리적으로 파헤친 점은 이 작품을 그의 걸작으로 손꼽게 만들었다. 이보다 짧기는 하나 마찬가지로 뛰어난 작품으로는 욕정과 오만을 극복하고 수도승이 되는 귀족의 이야기인 〈세르게이 신부 Otets Sergy〉, 악을 낳는 악의 힘에 비해 선은 어떻게 선행에 영향을 주는지 가상적인 예를 들어 연구한 〈위조지폐 Falshivy kupon〉, 온갖 불행을 말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는 한 젊은 농부의 이야기인 〈알료샤 고르쇼크 Alyosha Gorshok〉 등이 있다. 톨스토이가 죽은 후 처음 나온 유고집에는 몇 편의 희곡작품도 실려 있다. 톨스토이는 연극을 '아마도 가장 영향력이 큰 예술분야'라고 믿었고 여러 번 희곡 창작에 매달렸다. 그러나 극작가로서 필요한 자질이 부족했으며, 그의 희곡이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소설에 견주어 예술적으로 뒤떨어진다. 그의 희곡 중 가장 우수한 〈어둠의 힘 Vlast tmy〉은 1888년 처음 상연되었다. 이 작품은 '발톱만 붙들려도 새는 끝장 난다'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톨스토이가 만년에 즐겨 다루었던 주제인 농부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비극이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의 아내를 유혹함으로써 처음 죄를 짓기 시작해 또다른 죄를 짓고 결국에는 살인까지 하고 만다. 이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계몽의 열매 Plody prosveshcheniya〉는 귀족사회의 결함을 유쾌하게 풍자한 희극이다. 미완성의 〈빛은 어둠 속에서도 빛난다 I svet vo tme svetit〉는 주인공이 가족에게 자기 믿음의 현명함을 확신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다룬 점에서 자서전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살아있는 시체 Zhivoy trup〉(1902 집필)는 한 술꾼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은 아내에게 해를 끼쳤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죽은 체하나 경찰이 그가 살아 있음을 밝히자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그의 희곡에서는 노년기 작품에 나타나는 도덕 설교를 찾아볼 수 없으며, 대신 온화함과 인간의 실수에 대한 동정, 이해를 발견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나이가 들수록 가족이 누리는 편안한 삶과 자신이 원하는 삶, 즉 속세의 소유물로부터 해방되고 타인에 대한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은둔생활 사이의 괴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느꼈다. 그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자신이 공연한 우스갯거리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가정 상황이 악화되자 그는 어느날 밤 몰래 집을 떠났다. 주치의와 막내 딸 알렉산드라만을 데리고 더욱 가까이서 신을 섬기며 조용히 살 수 있는 피난처를 찾아 나섰으나, 며칠 후인 1910년 11월 20일 랴잔 역의 한 외딴 마을 아스타포보의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평가 문학가로서의 톨스토이의 탁월함이 비평가들에게 진지하게 의심받은 적은 없다. 그는 가장 위대한 세계적 작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톨스토이는 앞세대 러시아 작가들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외국 작가들, 이를테면 장 자크 루소, 스턴, 스탕달, 그리고 나중에는 윌리엄 새커리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사상가로서의 그의 명성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다. 오늘날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생들에게는 그의 도덕적인 발전과 정신적인 발전의 이중성이 보다 깊이 있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진리를 탐구하면서, 불완전한 지식과 불완전한 인간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결과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완벽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해내려는 강박관념 같은 의무감 때문에 그의 이론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역사·비폭력·교육·예술관을 논할 때도 이와 마찬가지였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대한 모든 체계적인 연구는 한결같이 그의 사상이 19세기 자유주의와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톨스토이는 지난 2,000년 동안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성장과 정부의 도덕적 타락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믿었다. 그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억압이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했고, 이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방법은 인간의 도덕적인 성장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계급과 국가가 없는 상태를 향한 진보적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인 경제결정론이나 폭력적 계급투쟁과는 반대로 모든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 도덕적 완성은 사랑이라는 지고의 법을 준수하고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성주의를 극단적으로까지 밀고 나가기는 했으나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컸던 19세기 도덕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다. E. T. Simmons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톨스토이의 인생과 예술 그의 인생이란 선에 대한 희구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인생의 의의는 선에 대한 노력 속에 있다는 것이다. 즉 선이 인생의 목적이며, 사람은 모두 이 목적을 향해서 전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 이 각자가 자기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성 ― 신의 활동인 사랑을 통하여 선이라는 목적을 향하는 노력, 이것을 톨스토이는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문제에서 출발하여 그는 이 목적에서 벗어난 그 어떠한 훌륭한 사상도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단정하고, 인생의 의의를 그릇되게 해석시키는 허위의 과학과 사이비 종교를 비난하면서, 개인적인 행복과 참된 행복과의 차이를 논한다, 또 동물적인 생존과 합리적인 생활과의 차이를 밝히고, 결국 인간은 이성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톨스토이는 루소 이후 그의 도덕적 저술로써 인간 양심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우리들의 개인적 생활(이기적 생활), 동물적 생활 속에서도 이성에 의해서 살아나가는 것이 올바른 인간생활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강조하는 그의 사상의 특색은 그 목표를 현재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상이 바로 실행임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의 활동이므로, 현재의 활동에 있어서 사랑을 표시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생활을 무시하고 미래의 행복을 약속하는 그러한 불합리를 그는 싫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행복론을 갖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되며, 남을 위해서, 인류 전체의 행복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인간이 자기 행복만 생각하고 살면 그 희망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다. 즉 이성의 활동인 사랑을 가지고 일반 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적이며 그 가운데 올바른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부활》에서는 자비로 나타난다. 네흘류도프가 시베리아 여행 중에 느끼게 된 사랑은 오직 자비심의 발로였다. 그것은 만인에 대한 자비인 것이다. 온갖 생활의 체험을 지닌 네흘류도프가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악과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네흘류도프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마태오의 복음서》 제5장과 제18장에서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제3부 28장). "사람은 누구든지 죄가 없는 사람이 없으며 따라서 사람을 처벌하거나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항상 모든 사람을 몇 번이고 끝없이 용서해야만 한다." 는 이 한 가지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네흘류도프는 이 생각의 확증을 얻기 위하여 산상의 설교를 읽는다. 이 설교는 지극히 간단하고 실행하기 쉬운 것이며 만일 이대로 실행만 한다면 폭학도 없어지고 인류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즉 지상천국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활》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볼 때, 톨스토이의 사실적이면서도 생명이 약동하는 듯한 묘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까츄샤의 나이브한 첫사랑의 장면, 네흘류도프가 꺄츄샤를 유혹하는 안개 낀 부활제의 밤, 캬츄샤가 네흘류도프를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비바람 치던 심야의 정거장, 변기에 앉아 있는 여죄수들의 모습, 감옥 안에서 진행되는 허식적인 종교의식, 죄인면회소의 광경, 영지에서 목격한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 시베리아 감옥에서의 정치범들과 일반죄인들의 심리조사 등에 능란했던 톨스토이는 그의 주인공은 물론 한번 등장했다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 사소한 인물들, 예를 들어 재판관, 배심원, 시골의 촌장, 전옥의 딸 등과 같은 사소한 인물에까지도 각자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부조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 육체의 모든 비밀을 꿰뚫고 있어서 심리적인 뉘앙스를 그에 대응하는 육체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활》에서 까츄샤의 육체적인 외견이 그녀의 도덕적인 정신 상태에 따라 점차적으로 변해 가는 모습이 여러 번 묘사되고 있다. 즉 매력적인 까만 사팔눈이 반짝이는 귀엽고 순진한 둥근 얼굴은, 한때 살이 찌고 들떠서 매춘부의 음탕한 추파를 던지지만, 이윽고 시베리아 유형 길에서 도덕적인 갱생의 힘이 작용하게 되자. 또다시 그녀의 얼굴에서 예전의 활기가 넘쳐흐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가장 뛰어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자연과 인간에게서 볼 수 있었던 일체의 형이하적인 특질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또 달리 강하게 느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보는 모든 것이 그의 감각에 호소하고 매혹시켰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러시아 문학에 있어서 톨스토이만큼 철저한 사실주의자는 없었고 또 그만큼 구체성과 이 세상의 생존의 색조에 애착을 가진 작가도 드물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소설에 그토록 발랄한 생명감을 부여해 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톨스토이 예술의 또 하나의 커다란 특징은 그의 작품의 자서전적인 요소에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현실과 공상을 결합시킨 타인들을 주로 묘사하면서 자기의 사상과 불안을 표현했지만, 철저한 사실주의자였던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과 그의 생활에 있었던 실제의 사건을 주로 묘사했다. 그의 초기 3부작 《유년시대》(1852년) 《12월의 세바스또뽈리》(1855년)에서 톨스토이는 자기를 니콜렌까라는 이름으로 묘사했고, 《까자흐 사람들》에서는 올레닌으로, 《전쟁과 평화》에서는 삐에르로, 그리고 마지막 작품 《부활》에서는 네흘류도프로 자신을 그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화상의 묘사는 흔히 객관적인 실재성을 결여할 우려가 많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완숙한 이 작품도 몇 가지 결함이 지적되고 있다. 첫째 결함은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객관적인 실재성을 구비하지 못한 점이다, 이런 결함은 톨스토이 자신의 이상이 구현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전쟁과 평화》의 삐에르, 《안나까레니나》의 레빈보다 네흘류도프는 특히 모순이 많다. 그 까닭은 앞의 두 작품의 주인공의 나이는 집필한 당시의 톨스토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던 데 비하여 70세의 노인이 35세의 네흘류도프를 쓰자니 부자연스러워질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또 하나의 결함은, 로망 롤랑이 지적했듯이 엄밀한 사실적 관찰이 주가 된 제3부에 쓸데없는 복음서적인 결론이 너절하게 나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발표 당시에도 독자들의 그 같은 불만이 컸던 것으로, 이에 대해서 톨스토이는 "나 같은 노인이 그처럼 긴 세월을 보내고 작품을 쓸 때는 사람들이 잊고 있던 복음서 구절을 한번 회상케 하려는 생각이 어찌 안 들겠느냐?"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부활》에서는 작가의 서정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부활》은 인간에 대한 고민의 가장 아름다운 시이다. 그래서 로망 롤랑은 "모든 작품 중 나는 이 작품 속에서 톨스토이의 가장 맑고, 바로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날카롭고 엷은 회색의 눈동자를, 그리고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신을 보는 눈길을 느낀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사랑을 기조로 한 예술에서 출발하여 종교에 몰입한 작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문호임과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이며 종교가였던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세계문학사상 불굴의 영광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항시 인생에 대하여 절박한 고민을 체험하고 그 사상을 실현하느라고 애쓴 작가이다. 그리하여 그는 문학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교육·난민구제의 방면에도 힘을 기울였다. 러시아의 부조리, 러시아의 크나큰 죄악에 대해서 행동으로써 속죄하려고 했던 것이다. (李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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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톨스토이를 이제야 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