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의 능너머 고분군이 앞으로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가 백제 초기왕릉으로 확인될 경우 동아시아 고대사는 다시 쓰일 것이 확실하다.
능너머 고분군은 2000년동안 베일에 가려온 백제 초기 도읍지 한성(漢城)백제(기원전 17∼475년) 하남 위례성의 수수께끼를 풀 결정적 열쇠일까. 고고학계가 주목하고 있는 능너머 고분군은 지명 ‘능너머’에서 보듯, 옛날부터 능이 있을 것으로 추정돼왔다. 춘궁동과 교산동주변 사방 수㎞ 평지에는 이곳외에는 어디에도 능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경주 다음으로 문화재가 많은 고장 하남이 위례성, 즉 한성백제 도읍지라는 주장은 학계에서는 비주류의 소수의견으로 묵살돼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하남이 2000년전 도읍지였을 것이라는 조짐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15년간 발굴작업이 진행중인 하남 서쪽의 이성산성,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목조 건물유적인 교산동 건물지가 능너머 고분에서 동쪽으로 불과 200m 위치에 있다. 한성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춘궁동의 천왕사지에는 최근 거대한 목탑지 2개가 발굴됐다. 현재 동양 최대의 목탑지로 논란을 일으킨 동사지등 하남시 문화재는 다른 곳에서는 볼수 없는 거대한 규모로 한 나라의 국력을 집중하지 않고서는 건립할 수 없는 건축물이라는 것이 백제문화연구회(공동대표 차옥덕 성신여대교수·한종섭 백제사연구가)측의 주장이다.
지하자원탐사업체 지오테크코리아는 지난해 4월 미국에서 도입한 최첨단 지하탐사장비로 고분내 금동관과 금 혁띠의 존재 가능성을 포착해냈다. 허찬사장은 “지난해 8월 최첨단 장비를 미국에서 도입, 현재 전세계적으로 가장 과학적인 유물발굴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며 “능너머 고분이 민간인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곧바로 탐사작업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지난달 15, 26일 2차례 실시한 지하탐사에 사용된 장비는 ‘지오 메트릭스 G858G’, ‘지오메트릭스 G856AX’등 지자기(地磁氣)탐사장비를 비롯, 지중(地中)레이더(GPR) 장비등이다. 물체 분석작업에는 지하물체에 전자파를 쏘아 주파수 데이터로 재질을 정확히 파악하는 다우징(PMR)기법등 최첨단 지질탐사방식이 동원됐다.
석실 규모(폭 2∼2.5m, 길이 3m)를 비롯, 금동관과 금 혁띠로 추정되는 물질 간격이 70∼80㎝로 정북 방향을 향한채 가지런히 놓여있다는 것은 왕과 왕비의 순장무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학계의 지적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2기의 석실에서 금과 동, 철 세라믹 물체가 포착된 것외에 석실 주변에 5∼10기의 석실이 더 있을 것이라는 자료가 속속 나오고 있다. 이것은 폭 50m, 길이 70m에 이르는 이 거대한 고분이 왕과 왕비의 무덤 외에 다른 왕이나 배총(倍塚·신하등의 무덤)이 더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실제 땅주인이 고분위를 불도저로 밀어 배총 유구들이 일부 훼손된 채 밖으로 나뒹굴고 있다. 현재 훼손된 부위에서 석실까지의 깊이는 불과 1.5m 정도에 불과해 도굴등의 위험성도 크다.
남한지역의 3대 도읍지는 1000년의 고도 신라 경주, 600년의 서울, 500년의 한성백제 하남 위례성이 꼽혀왔다. 그러나 하남 위례성의 위치를 두고 학계의 논쟁은 그치지 않았다.
고고학계 주류측은 지금까지의 발굴 성과를 토대로 하남시 북쪽에 위치한 한강 아래쪽에 위치한 풍납토성이 위례성이었다는 추측에 머물고 있다. 백제하면 떠오르는 공주는 63년, 부여는 122년간의 짧은 기간 백제 도읍지였다. 이에비해 493년간 도읍지였던 한성백제의 도성이 6만평 정도밖에 안되는 몽촌토성이나 22만평에 이르는 풍납토성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하남 위례성의 수수께끼를 20여년간 추적해온 사람들이 있었다.
한성백제의 비밀을 파헤쳐온 구심체는 백제문화연구회.
하남시 일대 유적을 20여년간 뒤져온 한종섭(50)회장은 능너머 고분이 백제 초기왕릉이라고 주장해왔다. 한회장은 지금까지 하남시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일해왔는데, 지난달말 하남시측이 후임자에 대한 인수인계 절차도 없이 계약을 해지해 하남시에는 춘궁동 일대 유적지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전무한 실정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고대의 고구려와 신라를 비롯한 모든 왕도의 규모는 300만평 이상이라며 풍납토성이 왕성터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해왔다. 초기 백제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매우 강성한 국가로 역사서에 소개되는데, 시골 마을 단위에 불과한 몇십만평 정도의 토성이 왕성이라는 학설은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강변의 풍납토성은 침수지대에 위치해 수차례 물에 잠긴 흔적이 있어 상식적으로 왕도의 수비성이면 모를까, 왕성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백제문화연구회 회장을 지낸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강찬석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은 “하남시 일대 전체가 매장문화재의 보고”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재 능너머 고분군이 심하게 훼손돼 석실 유구까지 약 1.5m까지 남지않아 고분군이 완전 훼손될 위기에 처해있다”며 “문화재청과 하남시측이 향토유적등 문화지구로 지정해 시급히 발굴작업에 들어가야 도굴을 막을수 있다”고 지적했다.
“의심나는 곳을 파기만하면 어김없이 고대의 유물이 나온다. 하남은 제2의 경주로 손색없는 고대도시다.”
백제문화연구회 한종섭회장과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강찬석 문화유산위원회위원장이 20여년간 경기도 하남시 일대 유적을 이잡듯이 뒤지며 내린 최종 결론이다. 하남이 백제의 첫수도 한성(漢城)백제라는 한회장은 백제초기 왕릉으로 판단되는 춘궁동 능너머 고분군이 위치한 고골(춘궁동과 교산동) 일대가 왕궁터가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이곳은 최근 2∼3년새 고대도시의 흔적을 보여주는 건물터가 집중적으로 발굴되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왔다.
◈풍납토성 왕성은 식민사관의 유산〓우리나라 고고학계 주류측은 초기백제사 연구분야에서 몽촌토성(6만평)과 풍납토성(22만평)이 왕성일 것이라는 ‘환상’에 매달려온 것은 아닐까. 백제문화연구회측의 주장에 따르면 그동안 우리 고고학계는 ‘우물안 개구리’ 신세였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다. 그 환상의 배경에는 일제 식민사관이 똬아리를 틀고있다는 것이다.
“풍납토성이 있는 곳은 한강변의 상습 침수지대입니다. 왕이 풍납토성에 살고있다고 가정할 경우 한강 건너 아차산에서 굽어보면, 왕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수 있지요. 그런 위치에 왕도를 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겠습니까.”
한회장은 “풍납토성을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이라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들은 일제시대 일본학자들로 이들의 학설이 굳어져왔다”고 말했다. 한반도 남부에 일본이 경영한 임나일본부설등이 신빙성을 가지려면 백제의 왕도는 축소돼야 한다.
실제 일본서기 역사서에는 백제사 관련 기록이 무수히 많다. 시골마을 단위밖에 안되는 풍납토성 정도가 초기 백제 왕도여야 일본인은 뿌리깊은 ‘백제 콤플렉스’에서 해방될 수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성시기 백제는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되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였으며 근초고왕때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 깃발을 사용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할 정도로 강력한 정복국가였다. 더구나 중국 정사에는 서해 큰섬인 강화도를 발판으로 수군을 이용해 중국의 요서(療西), 양자강 하구지역으로 뻗어갔으며,, 왜국(倭國)으로 진출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4세기 들어 남진정책을 감행한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 끝에 475년 한성을 전면 공격, 개로왕이 전사하면서 수도가 함락당해 공주로 남천했다.
◈하남 고대도시의 흔적들〓몽촌토성, 풍납토성에 집착해오던 주류 학계가 하남시 유적에 눈길을 준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지난해 5월 하남시 서쪽 이성산성을 주제로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 김윤우 동양학연구소전문위원과 일본의 아라이 히로시교수등은 ‘이성산성이 삼국시대 이전의 건축물로 초기백제 수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백제 초기왕릉으로 추정되는 능너머고분은 남북 70m, 동서 50m의 장방형 구릉으로, 높이는 4∼5m이다. 이 능위에서 삼국시대 명문 기왓조각이 다수 발견됐다. 한회장은 ‘으뜸되는 지아비’를 뜻하는 ‘원부(元夫)’는 시조의 능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명지대 오순재(문화재관리학과)교수는 ‘왕을 지킨다’는 뜻의 ‘왕수(王戍)’라 쓰인 기와는 고구려 장군총 꼭대기에 있었던 것처럼 으로 보이는 향당(享堂)과 같이 이 능 정상부의 향당(享堂)에 쓰인 기와로 추정했다. 그외 ‘장해(丈解)’는 ‘10척이나 되는 태양’으로 거대한 태양과 같은 왕의 존재를 일컫는다. ‘수언유(壽言由)’는 ‘오래 살기를 빈다’는 뜻으로 고구려 천추능에서 나온 ‘천추만세(千秋萬歲)’와 비슷한 뜻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하남시 고골일대 도성체제 삼국사기 기록과 유사〓오교수는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대 기록을 토대로 ‘한성시대 왕성은 북으로는 강을 끼고 동으로 고악(高岳또는 숭산·崇山)을 의지하며, 남으로 기름진 평야를 갖고 서쪽으로는 머리바다(西海)를 끼고 있는 천혜의 분지임을 나타낸다’며 하남시 고골일대의 형태와 그대로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교산동 토성을 중심으로 한 하남시 고골일대는 북쪽에 한강이 흐르고 동쪽에 숭산인 금단산이 자리잡고 산 정상부근에는 동명묘(東明廟) 제단터로 볼수 있는 제사유적이 발견됐다. 남쪽으로는 한산(漢山)으로 볼수 있는 청량산과 남한산성이 있고 남한산성 남쪽 탄천변의 둔전동에는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오교수는 “한성백제 왕성은 고구려 침입에 대비해 한강 건너편의 수석리토성-안산성-역촌토성을 비롯, 왕궁 주변에 이성산성 일자산과 미사리 주변 강변을 따라 뻗은 토성, 한강 수로관리성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등이 겹겹이 에워싸고 최악의 경우 후방인 남한산성으로 대피하는 도성체제를 갖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머리바다(서해) 해풍을 헤치고 온 상선이 한성백제 영토로 접어드는 강화대도(大島)에서 한강의 세찬 물결을 거슬러 동쪽으로 한참 나아간다. 강 왼쪽 아차산성, 오른쪽 강변에 바짝 붙은 수비성인 몽촌토성·풍납토성, 길게 뻗은 제방 토성을 지나 곧바로 남쪽으로 꺾어들면 운하도시 덕풍천을 유유히 거슬러올라간다. 한성의 민가와 춘궁동 동사지등 사찰을 지나자마자 토성으로 된 내성과 중성 외성으로 둘러싸인 고도 하남 위례성(한성)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경기도 하남시 고골일대를 한성백제의 왕도로 지목해온 백제문화연구회(공동회장 한종섭·www.paekche.or.kr)의 한성 도성체제 청사진에 따라 묘사해본 한폭의 풍속도다.
◈운하도시 한성〓최근 덕풍천에 운하 유적이 발견돼 상류에 있는 왕성까지 이어진 흔적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001년 5월 덕풍천 지류인 교산동에서 오수관 매설공사를 하던 중 배를 정박할 닻줄을 매는 데 쓰던 석물 여러개가 발견돼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다. 도성 내부까지 배가 들어온 흔적도 드러났다. 배 닻줄 매는 석물은 높이 2m가 넘는 큰 돌로 윗부분을 가공해 밧줄을 맬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홈이 파여 있다. 이 석물은 상류쪽 하천 수위를 높여 덕풍천 상류에 배가 다닐 수 있도록 일종의 물막이 댐을 한 기초 흔적이 있었다. 배를 정박하도록 한 시설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길이 155㎝, 폭 67㎝, 두께 20㎝의 돌다리 석판과 함께 덕풍천을 이용해 운하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로 흔적이 하천바닥에서 약 3∼4m 깊이의 지하 몇곳에서 발견됐다. 당시 한성은 운하시설을 갖추고 동북아를 호령한 막강한 왕국이었다는 것이 백제문화연구회의 주장이다.
◈100만 인구의 거대도시〓500년을 지탱한 백제의 첫 수도 하남 위례성의 인구는 어느 정도였을까.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강찬석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은 삼국유사 기록 등을 근거로 대략 100만명 정도로 추산했다. 삼국유사에 고구려 전성기 가옥수는 21만508호, 백제 전성기는 15만2300호, 고구려와 백제의 차이는 5만여호에 불과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성백제 가옥수 76만호를 1가구당 식구 7명으로 계산할 때 당시 백제 전체인구는 50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76만호 중 서울의 가구수는 17만8900여호. 수도권 집중률이 23.5%에 이르러 한성 인구는 대략 1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삼국시대에 최대의 군사를 일으킨 광개토대왕(391∼413)의 군사가 5만여명, 백제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고 한성을 함락, 동북아 최강국을 이룬 장수왕(413∼491)의 군대는 3만5000여명,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죽이고 요서·산동·일본에 세력권을 형성, 동북아 강자로 군림한 백제 근초고왕(346∼375)의 군대는 3만여명이었다. 한성백제 왕도 규모가 당시 고구려나 신라의 왕도와 엇비슷해야 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중·일 고대도시는 평지성과 산성이 한 세트〓한·중·일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도읍지는 평지에 있는 ‘도성(왕성)’과 유사시에 높은 곳으로 대피해 항전할 수 있는 ‘산성’이 연계된 것이 특징이다. 건축학을 전공한 강위원장은 한·중·일의 고대도시 규모 등을 비교분석, 도시공학적 시각에서 왕도 한성의 도시구조와 규모를 체계적으로 조명했다. 압록강변의 고구려 집안 도읍지는 국내성-환도산성, 평양 도읍시기는 안악궁성-대성산성이 세트를 이룬다. 신라는 월성-명활산성, 고려시대는 개경-대흥산성, 조선시대는 한양성-북한산성이 한 단위다. 한성백제에서 천도한 웅진(공주)도성은 공산성, 웅진도성과 판박이인 사비(부여)도성은 부소산성외에 청마산성, 성성산성 등이 사방으로 방어망을 형성하고 있다.
웅진도성의 규모는 200여만평, 사비도성 규모는 약400만평이다. 고구려 장안성은 358만여평, 신라 왕경(경주)은 484만평, 발해의 상경 용천부는 420여만평이다. 몽촌토성(6만평), 풍납토성(22만평)은 주변에 산성이 없어 왕성이나 왕도의 입지조건이 못된다. 강위원장은 “풍납토성에는 도로 유구가 발견되지 않고 한성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서민 주거형태인 육각형으로, 대략 8000명의 인구가 거주한 것으로 추정돼 왕궁이나 사원의 일부로 보기에는 너무 옹색하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역사적 맥락에서 볼때 당시 한성의 인구가 웅진이나 사비보다 적었을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군사동원 능력에서 웅진·사비 시대에 한성백제의 근초고왕 때보다 더많은 군사력을 동원한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있다.
세계고고학사에 빛나는 유적발굴의 금자탑을 쌓은 인물 중에는 ‘학자’가 아닌 ‘아마추어’들이 의외로 많다. 트로이 유적지를 발견한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은 어릴적 ‘호메로스’를 읽고 꿈을 키운 상인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유적지를 찾아낸 오스틴 헨리 레어드는 영국인 외교관으로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고 꿈을 꾸었다.
인류 최고(最古)의 서사문학인 길가메시 서사시를 발견하고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대홍수가 실제로 있었음을 증명한 조지 스미스는 지폐 조판공이었다. 이들은 고고학에 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위대한 고고학자라 불린다.
21세기 한국 고고학계에도 아마추어들의 거센 돌풍이 불고 있다. 학문적 편견과 선입관이 없는 이들은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새로운 발견이 가능하다. 순수한 열정과 불굴의 모험정신은 아마추어들의 최대 강점이다.
백제건국사를 연구하는 향토사학자인 백제문화연구회 한종섭(60)회장. 어찌보면 그는 무모한 일에 도전하는 우리 시대 돈키호테를 연상시킨다. 80년대초 급격한 도시개발로 파괴되던 하남시 유적보호에 앞장선 것을 계기로 백제 첫수도인 한성백제 도성 유적지를 찾아다닌 지 20년. 학계와 지방공무원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냉대와 무관심으로 대했다. 최근에야 그는 하남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회장은 묵묵히 발로 뛰며 89년 ‘한강서부와 백제건국’이라는 책을 집필했고, 하남 위례성과 관련한 논문 3편을 발표해 92년 ‘서울시민대상’‘향토문화대상’을 받는 등 학계에서 무시못할 존재로 자리 잡았다.
책상머리에 앉은 고고학 박사들이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경기도 하남시 고골(춘궁동과 교산동)일대와 서울 도봉구 방학동, 남양주시 등 초기 백제 유적지가 있는 산천을 쉬지 않고 발로 뛰며 고대도시의 형체를 밝히고 있는 그의 성과에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백제문화연구회 전문위원인 오순재(명지대)교수와 함께 고골일대가 가장 유력한 한성백제 도성이라는 학설을 제기한 한회장의 계미년(癸未年) 포부는 무엇일까.
그는 “우리 고고역사학계의 최대 미스터리인 백제시조 온조왕릉의 수수께끼를 풀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온조왕보다 훨씬 시대가 앞선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릉이나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릉은 발굴, 보존돼 있다. 올해는 고구려 장수왕의 피의 보복에 의해 475년 왕도가 철저히 유린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비운의 왕도 한성백제의 비밀이 풀리는 해가 될까. 초기백제가 부족국가에 불과했다는 한·일 고고역사학계의 통설을 뒤집고 백제가 초기부터 강력한 왕권국가였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동아시아 역사는 다시 쓰여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우리학계는 한반도 서남쪽의 마한이 4∼5세기까지 지탱했다고 주장한다. 일본학계는 초기 백제가 약체였다는 것을 근거로 한반도 남단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고 강변한다.
한회장은 “왕권국가였던 부여에서 남하한 초기 백제가 강력한 왕권국가였고, 한반도에서 여지껏 발견된 적이 없는 부여(지금의 만주일대)족과 연관된 유물, 유적에 대한 유력한 단서들이 하남일대 유적조사결과 서서히 확보되고 있다”고 운을 뗐다.
―한성백제 발굴등 백제건국사 연구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80년대초 제가 살던 서울 양천구 신정동 토성보존을 위해 경인지역 유적을 조사해나가던 중 고대의 소금 유통로가 하남 위례성과 연계됐다는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철과 소금은 고대국가가 가장 중요시한 전매품이었지요. 한반도 중심 한강권을 500년간 통치하고 가야까지 연합한 강력한 왕권국가로 한성백제를 볼 근거는 많습니다. 백제는 중국 일본등 해외 진출과 관련돼 있을 만큼 강성했습니다. 정사 기록에 남아있는 500년 왕도를 찾지 못한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는데, 우리 학계의 직무유기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 훼손이 심각한 하남시 춘궁동 고골 능너머고분을 한번 답사한 문화재청 관계자가 그것이 단순한 구릉일 뿐이라고 폄하하고, 문화재연구소측은 ‘토기 굽는 가마터’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92년 지표조사때 무덤에만 있는 호석(護石)이 발견됐고 물이 묻으면 접착제 역할을 해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하는 검은 주물사도 능 표면에 입혀 있는 것이 발견됐는데 10년째 방치되는 바람에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이르면 오는 3월중순부터 세종대박물관측이 고분주변 지표조사등 발굴을 위한 본격 준비작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능너머고분이 백제왕릉, 특히 백제시조인 온조왕릉일 가능성을 처음 제기한 근거가 있습니까.
“공주의 무령왕릉과 마찬가지로 이 고분도 교산동 왕궁추정지로부터 서쪽으로 200m에 있고, 지하탐사결과 아치형 석실로 추정됩니다. 고대의 도성안 왕릉은 해가 지는 서쪽에 있는 게 공통점입니다. 지하자원탐사업체 지오테크코리아의 최근 2차례 탐사결과 고분내 석실 2군데에서 금동관과 금혁띠 추정 물체가 70∼80cm 간격으로 정북 방향으로 놓여있는 것을 포착했는데, 이 지역은 고구려나 신라에게는 변방에 불과했고, 고려의 왕족이 무덤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고골일대 선법사 사찰에는 온조왕의 설화가 전해내려오고 있고, 임금이 마셨다는 ‘어용샘’도 있습니다. 교산동왕궁추정지 남쪽 배후성이 지금의 남한산성입니다. 백제 때 처음 축조된 남한산성에는 조선 인조임금의 지시로 지었다는 온조왕 사당이 있습니다. ”
―교산동건물지에서 4차 유적발굴을 해온 경기문화재단부설 기전문화재연구원은 이 일대를 고려시대나 통일신라시대 유적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3000여평에 이르는 교산동건물지의 대형 초석은 다듬지 않은 자연 초석입니다. 통일신라이후 건물유적지의 초석은 모두 잘 다듬은 인공 초석이지요. 능너머고분 일대에서 백제초기, 부여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교산동건물지 서쪽의 이성산성과 남쪽의 남한산성은 처음 성을 쌓을때 어디선가 화강암을 가져와 쌓았습니다. 남한산 일대에서는 화강암이 나오지 않습니다. 고골일대와 주변 미사리에서 백제 삼족토기등 유물이 발굴되는데 교산동건물지는 분명히 백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이만한 규모의 목조건축물이 있었다면 기록에 남아있지 않을 턱이 없지요. 이것은 군사용 건물이 아닙니다.”
―그동안 백제 건국사 연구의 가장 큰 성과를 꼽는다면.
“고대 왕도는 제정일치 사회에 부합되는 도시구조를 형성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남시 고골일대가 도시의 ‘신성(神聖)라인’을 갖춘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실제 신성라인에 부합되는 유적을 찾아내 현재 발굴작업이 진행중입니다. 신성라인이란 왕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사찰등 비중있는 건물이 배치된 구조이지요. 모든 왕도는 이러한 도시구조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제가 서울 도봉구 방학동으로 추정한 하북 위례성의 단서도 드러날 것입니다.”
―공무원, 향토사학자로서 발로 뛰면서 느낀 학계의 문제점과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수직으로 계열화되어 있는 우리 고고학계는 개인의 희생이 없으면 기존의 틀에서 한발짝도 벗어나기 힘든 연구 환경입니다. 더구나 발로 뛰는 현장학자가 드물지요. 하남시 역시 사유재산 침해를 우려하는 지역유지들 탓에 유적지대로 제한하기를 꺼립니다. 시민단체의 건의대로 하남시문화재보호특별법을 제정해 국가의 지원이 뒤따라야 합니다. 최근 일본 관광객들은 자신의 뿌리인 부여와 공주의 백제유적을 찾는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한성백제 유적이 본격 발굴될 경우 하남은 일본인이 가장 많이 찾는 수도권 관광명소로 떠오를 것으로 확신합니다.”
2003/01/18
<사설>`한성백제` 고분을 보호하라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고골의 ‘능너머 고분군’에서 왕족부장품이 탐사장비에 의해 포착돼 그 역사적 가치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발굴 관계자들은 이 고분이 백제 초기의 왕릉으로, 500년 ‘한성백제(기원전 17~475년)’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도 2일 이같은 문화일보 보도가 나가자 관계전문가를 현지에 파견해 사실확인등에 나섰다. 우선 관계전문가의 현지조사와 상태및 훼손여부등을 파악키로 하고 하남시에 대해서는 현장을 보존토록 조치했다는 것이다. 이미 많이 훼손된 것으로 알려진 고분지역의 상황을 고려하면 때늦은 감조차 없지 않다. 이렇게 중요한 고분터가 무참히 파괴되고 있음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 조상의 수많은 유적들을 훼손해왔음에도 불구,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까지 백제의 최고(最古) 최대(最大) 유적지중의 하나로 알려져온 서울 송파구 풍납동의 ‘풍납토성’파괴가 이를 웅변한다. 토성이 뭉개져 쓰레기장과 주차장으로 변하는가 하면 당국의 방치로 황폐화되고 있다.
고골의 ‘능너머 고분’도 비슷한 일을 당하고 있다. 땅주인이 불도저로 언덕위를 깎아내리고 길을 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당국의 신속한 대응이 뒤따라야 한다. 여기에 우려되는 도굴등을 막기 위한 응급조치도 필요하다. ‘제2의 경주’로 불리는 하남지역의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해 당국은 보다 근본적이고 특별한 대책마련에 나서기 바란다.
정초부터 문화일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경기도 하남시 고골 일대 능너머고분 ‘백제 첫 수도 한성백제 왕릉 단서 포착’ 보도와 후속 기획시리즈가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문화재연구소측은 고분주변 유적지에 대한 대대적인 정밀조사를 계획중이고, 중견 고고학자들 역시 학계 비주류인 백제문화연구회의 연구성과에 큰 관심을 표명해오고 있라고 한다.
반면 우려스러운 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문화재청은 형체조차 찾기힘든 능너머고분이 단순한 구릉일뿐이라고 속단하기까지 한다. 1500년 이상 지탱해온 고분이 신라 왕릉처럼 진짜 능으로 보였으면 지금까지 도굴당하지 않고 보호할 능력이 과연 정부 당국에 있었을까. 문화재청과 하남시는 고골일대 백제유적지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또 보존 청사진은 세워놓고 있는지 묻고 싶다.
더 한심한 일은 능너머 고분군 인근에 있는 이성산성을 놓고도 학계는 백제성인지 신라성인지를 두고 옥신각신할 뿐 결론을 못내리고 있다. 86년부터 10차례 발굴작업이 진행돼온 이성산성에 대해 한 원로 고고학자가 17년동안 성의 축조연대도 밝히지 못한 발굴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보고서를 내던지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골을 둘러싼 사방 산성의 모양새, 평지에서도 삼족(三足)토기등 백제유물이 쏟아지고 있는 점, 아직 학계에 정식 보고되지 않았지만 한반도 남쪽지역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무덤·성문 문설주 등 고골 일대를 백제한성 도읍지로 판단할만한 증거들이 최근 2∼3년새 속속 드러나고 있다.
잃어버린 왕국의 원형을 복원하는 일은 동아시아 역사를 다시 쓰고 민족 자긍심을 높이는 대역사다. 그 본격적인 첫삽을 뜨는 능너머고분 발굴작업에 무녕왕릉 발굴때와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정부가 전면에 나서고 하남문화재보호특별법을 국회가 제정할 것을 제안한다. 문화관광부가 새정부 출범 첫해인 올해 한성백제 발굴은 우리 시대의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