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는 초고층 건물 완공시점이 되면 경기침체가 온다는 '초고층의 저주(skyscraper curse)'라는 게 있다. 1931년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완공 시점에 대공황이 전 세계를 흔들었다. 시카고 시어스타워가 문을 연 1970년대는 오일 쇼크로 인한 경기침체가 발생했고, 말레이시아에 페트로나스타워가 완공된 1998년에는 아시아 전체가 외환위기에 휩싸였다. 세계 최고층 부르즈 칼리파(옛 버즈두바이)가 완공된 두바이는 국가부도설까지 나돌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초고층의 저주'가 다시 한번 화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초고층의 저주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초고층 건물이 완공되기는커녕 제대로 착공조차 못 하기 때문이다. 지난 2~3년간 서울 용산역세권, 인천 송도 인천타워, 상암동 DMC랜드마크빌딩 등 10여개의 초고층 건물 계획이 잇따라 발표됐지만, 제대로 사업이 진행되는 곳이 없다. 용산 역세권개발사업 등은 금융위기 이후 자금조달 문제로 사업중단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초고층은 아니지만 판교신도시 복합단지, 아산시 복합단지 등 상당수 대형 개발사업도 자금조달 문제로 사업에 차질을 빚고 있다.
좌초 위기에 처한 사업들은 정부 기관이 지나치게 비싸게 토지를 매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코레일(옛 철도청), LH공사 등이 경쟁입찰 방식으로 토지를 매각하면서 땅값이 치솟았다. 용산역세권 사업은 당초 토지가격이 5조8000억원에서 8조원까지 뛰었다. 땅값이 치솟자 코레일은 토지 매각 대금으로 부채를 일거에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렜고 주변 집값도 폭등했다.
건설사의 책임도 크다. 건설사들은 아무리 땅값이 비싸도, 더 비싼 가격에 팔면 수익을 남길 수 있다는 부동산 불패론(不敗論)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고 분양가 상한제로 아파트 가격을 높게 받는 게 불가능해지면서 사업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의 땅장사식 토지매각과 건설업계의 주먹구구식 사업관행으로 인해 장밋빛 계획만 남발할 뿐 착공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한국형 초고층 빌딩의 저주일 것이다.
외국에서는 이런 위험성 때문에 정부기관이 땅을 매각하지 않고 임대하는 '민관(民官)합동개발 방식'으로 도시에 필요한 시설을 확충하기도 한다. 일본 후쿠오카 시청 앞에 있는 아크로스 빌딩은 14층 건물을 계단식으로 쌓고 외벽에 정원을 조성했다. 외벽 녹화 덕분에 냉난방비 절감까지 가능한 친환경 건물의 표본이 되면서 외국인들까지 찾는 관광코스가 됐다. 이 건물에는 국제회의장 등 공익시설이 상당수 있어 문화행사가 연중 열린다. 지방자치단체가 부지를 제공하고 민간업체들은 건물을 짓는 대신 상업시설과 사무실 임대를 통해 투자금을 회수하는 구조여서 공익시설이 들어설 수 있었다.
도쿄 미나미 아오야마 단지에는 민간 아파트뿐만 아니라 도서관·보육원·노인복지시설 등 다양한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토지를 민간업체에 70년간 장기 임대해주고, 민간업체는 아파트와 상업시설을 운영, 건축 투자비를 회수하는 구조이다. 한국에서도 여의도 국제금융센터의 경우, 서울시가 토지를 99년간 장기임대하는 방식으로 땅값 부담을 낮춰줬기 때문에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