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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글 한마당 스크랩 나의 이름 편력기
클로버 추천 0 조회 27 10.01.27 11:0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나의 이름 편력기

박  창  원


어릴 적 내 이름은 석동이었다. 토속적 분위기가 물씬한 이름이다. 형이 석구여서 돌림자를 따라 짓다보니 석동이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취학 시기가 다가오자 부모님은 이름을 다르게 알려 주셨다. 호적에 홍석으로 돼 있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입학하기 전에 자기 이름 정도는 쓸 줄 알아야 한다며 누나가 쓰다 만 헌 공책에 ‘박홍석’이라는 이름 석 자 쓰는 연습을 시켰다.

그런데 막상 입학이 임박했을 때 내 이름은 홍석이가 아니라 창원이라 했다. 호적에 홍석으로 돼 있는 줄 알았는데, 창원으로 올라 있다는 이유였다. 갑자기 ‘박창원’으로 바꾸어 연습을 했다. 하지만 창원이란 이름은 입학식을 하는 운동장에서 한번 불려 졌을을 뿐 며칠 뒤 출석부엔 ‘창원’이 아닌 ‘창식’으로 올라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또 바뀌었구나’ 생각하며 그냥 부르는 대로 따랐다. 졸업할 때까지 6년 간 나는 창식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 원서를 낼 때 6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호적등본을 한 통씩 내라 했다. 아버지께 말씀 드렸더니 전에 떼어 놓은 게 있으니 그걸 갖고 가라시며 “호적에는 니 이름이 창식이가 아이고 창원이다.”라 하셨다. 그제서야 호적에 뭐라고 돼 있느냐가 중요한 걸 알았다.

호적등본을 담임 선생님께 내밀었더니, “어이, 창식이, 너거 집 등본에 와 니 이름은 없노? 니는 어데서 조오왔나?”하고 물으셨다. 얼굴을 붉혔다. “제 이름은 창식이가 아이고 창원이라 캅디더.” 내 말은 들은 반 아이들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선생님은 “와 내가 이런 거를 가 오라 카는지 인자 알겠제? 엉터리 이름이 쌔비?다 말이다.” 하시며 얄궂은 미소를 머금으셨고, 그 날 나 외에도 다른 한 명이 새 이름을 얻었다.

그 선생님 덕분에 비로소 호적에 기재된 내 이름을 찾게 되었고, 더 이상 이름을 바꿔 부르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다만 이름이 바뀐 사실을 모르는 마을 어른들이 계속 ‘석동’으로 부른다든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고향을 떠난 동기생들이 여섯 해 동안 부르던 ‘창식’을 그대로 쓴다든가 하는 불편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내 이름 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른 살쯤 됐을 때 집안에서 족보를 만들었다. 족보에 올릴 이름 석 자는 반드시 항렬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항렬을 따르지 않은 이름은 새로 지어야 했다. 항렬대로 하자면 끝에 ‘석(錫)’자가 들어가야 한다. 주석, 광석이란 이름을 가진 동생 둘은 본명대로 올릴 수 있었다. 형은 ‘석구’를 앞뒤 순서만 바꿔 ‘구석’으로 했다. ‘석’ 자가 한 자도 없는 나는 생판 다른 이름을 지어야 할 판이었다. 누군가가 아이디어를 냈다. 창원의 앞 자 ‘창’을 살려 ‘창석(昌錫)’으로 하자는 거였다. 그게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족보엔 창석이다.

지천명(知天命)에 이른 지금, 한 번씩 나와 인연을 맺었던 이름들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면서 석동-홍석-창원-창식-창원으로 바뀐 연유를 짚어 볼 때가 있다.

석동은 아명인 셈이었다. 그냥 집에서 편하게 부르는 이름이었다. 부모님께서 출생신고를 하면서 호적엔 ‘홍석’이란 이름으로 올리기로 하고서. 하지만 이름을 지은 부모님의 뜻과는 상관 없이 호적엔 ‘창원’으로 오르고 말았다.

그 당시 출생신고는 아이 부모가 직접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학교 문 앞에도 못가 본 대다수 아버지, 어머니들은 아이를 호적에 올릴 때 한글 해독이 가능한 동장에게 의뢰했다. 동네 사람들의 출생신고 부탁을 받은 동장은 이집 저집 아이 출생신고 부탁을 받아 뒀다가 읍에 가는 날 한꺼번에 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생년월일이 틀리기도 하고, 이름이 잘못 올라가기도 했다.

내 경우는 후자에 해당했다. 아버지께선 ‘홍석’으로 적어 주신 모양인데, ‘창원’으로 올라가 버린 거다. 여태 풀리지 않는 의문이지만 한 가지 짐작되는 건 있다. 어머니가 황씨인데, 관향이 내 이름과 같은 창원(昌原)이라는 점이다. 아버지가 적어준 이름은 잊어버렸고, 호적에 있는 어머니의 관향을 따서 ‘창원’으로 해 버린 게 아닐까? 이렇게 추리하지 않고서는 부모님이 지은 이름과 아무 인연이 없는 ‘창원’으로 등재된 연유를 헤아릴 수 없다. 어머니의 관향을 딴 게 맞다면 아버지의 관향인 ‘밀양’으로 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입학식 때 운동장에서 창원으로 불러놓고 교실에 가선 왜 창식으로 바꿔 버렸을까? 아마도 출석부에 옮겨 적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인 듯하다. 그 때 당당히 “선생님, 제 이름은 창식이 아니고 창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했는데, 어리숙한 소년에겐 그럴 용기가 없었으니 선생님을 원망할 수도 없다.

가끔 홍석, 창식, 창원, 창석으로 이어지는 이름 편력을 이야기하면서 듣는 사람한테 어떤 이름이 제일 마음에 드는지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러면 하나같이 지금 이름인 ‘창원’을 으뜸으로 친다. 다른 이름은 아주 촌스럽다나. 그러니 이름을 엉터리로 올린 동장이나 면서기를 탓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분을 찾아 작명비라도 톡톡히 써야 할 판이다.

사회 생활을 하다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괜히 반갑다. 몇 년 전, 내가 있는 학교에 박창원이란 이름을 가진 학생이 있었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그 학생을 보면 마음 속으로 공부 잘하고 성실한 학생으로 커 주기를 바랐다. 그의 어머니가 학교에 오면 농담을 섞어 “아이고, 어머니 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곤 했다. 군에 있을 때 같은 내무반에 넉 달 선임인 박창원이 있었다. 도무지 꾀를 부릴 줄 모르는 성실한 분이었다. 사람들은 고참인 그분을 큰박창원, 나를 작은박창원이라 구분하여 불렀다. 그분도 동명이인인 나한테 친근감을 느꼈는지 특별히 아껴 주었다. 졸병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기합이라도 줄 땐 날 어디 심부름 보내 놓고 시작할 정도였으니까.

이름과 사람 됨됨이 사이에 연관이 있을까마는, 의외로 이름이 선입견을 갖게 할 때가 많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하다 보면 성실하고 공부 잘 하는 녀석은 이름도 예쁘게 보인다. 반대로 말썽꾸러기를 보면 괜히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 학생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에 태어났다고 자기 아버지가 이름을 ‘충무’라 지었다. 김유신이라는 친구도 있다. 충무공 같은, 김유신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일 거다. 의식하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은 이름에 주술 같은 게 작용한다고 믿는 듯하다. 이름 지을 때 철학관을 찾는 이유도 이 때문이겠지.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박창원’을 넣어 보았다. 조선 후기 시인이 한 명 보인다. 현존 인물 중엔 어느 대학 교수로 있는 국어학자가 한 명 있고, 한의사, 목사도 있다. 성이 다른 사람 중 지명도가 높은 이는 단연 신창원이다. 신출귀몰하는 탈옥수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을 때 학생들은 내 이름을 보고는 곧장 그를 떠올렸다. 이름으로 동일시하는 습성 때문이다. 아마 복도로 내가 지나가는 걸 보고 저희들끼리 “야, 야, 저기 신창원 간다.”며 낄낄댔을지도 모를 일이다. 성이라도 다르니 얼마나 다행인가.

사람 이름도 시쳇말로 하자면 일종의 ‘브랜드’다. 기업은 기업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브랜드 가치 향상에 엄청난 투자룰 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개인 브랜드인 자기 이름도 잘 가꾸어야 한다. ‘박창원’은 작명인이 분명치 않은, 다분히 운명적인 이름이다. 비록 누군가가 즉석에서 ‘뚝딱’ 하여 지은 것일망정 욕된 이름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게 내 이름에 대한 의무이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포항문학>>29호(20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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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0.01.28 21:59

    첫댓글 위의 글은 청하중학교 박창원 교장선생님의 블로그인 [관송 글방]에서 스크랩해 왔습니다. 이름에 얽힌 사연이 너무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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