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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26 - 주자학의 에도막부와 차의 센노 리큐에 단가의 마쓰오 바쇼!
1603년에 수립된 에도 도쿠가와 막부는 나가사키 데지마에 네델란드 상인에게 무역을
맡긴 외에 기본적으로는 쇄국주의였으며..... 조선과는 통신사로 선린 우호
관계를 유지하니 조선과 일본 사이에 260년은 세계사에서 가장 긴 평화시대 였습니다.
동서고금 5천년사에서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는 예외없이 철천지 원수지간이니, 두 나라 사이에
국력 (군사력) 이 비슷하면 평화가 유지되지만..... 한쪽의 국력이 강해지면 이웃나라에
집적대며 조공등 속국이 되기를 강요하고, 불응하면 침략전쟁에 나서는 것이니 100년
평화가 드문데 한국과 일본은 세계에서도 유일한 예외라고 말하는 오랜 평화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말을 몰고 전쟁에서 승리해 나라를 세웠지만 말 위에서 나라를 다스릴수는 없으니 전란의 시대가
끝난 평화시대인지라 유교 주자학을 통치의 근본이념으로 삼았으니 주자학을 일본에
전한 조선 선비 강항과 다도의 스승 센노 리큐에 단가 1인자 마쓰오 바쇼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쇼군의 시강 스승인 하야시 라잔
하야시 라잔 (林 羅山) 은 22세인 1604년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는데 후지와라 세이카는 정유재란으로
일본에 끌려온 성리학자 강항에게서 주자학을 전수 받았으니 후지와라는 라잔의 영민함에 감명을 받아
1605년 녹봉 2천석을 주며 자기를 초빙했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양하면서 제자를 천거 합니다.
이에야스는 23세로 약관의 라잔을 자기 곁에 두었고 도쿠가와가문 쇼군의 선생으로 발탁했는데, 라잔이
이에야스를 알현했던 곳이 교토의 니조성 이라고 하며 1607년에는 2대 쇼군 히데타다에게
유학 경전을 가르쳤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스승이 되었으며 이후 막부의 정치에도 관계합니다.
1614년 막부가 도요토미 히데요리 가문의 재력을 소진 시키기 위해 교토에 호코지 (方広寺) 절 건축허가
를 내주니 도요토미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호코지 대불전을 건립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호코지
대불전의 범종에 새겨진 명문이 문제가 되었으니 일명 “종명사건” 으로 저 하야시 라잔이 총대를 멨습니다.
글귀 가운데 "國家安康, 君臣豊樂(국가안강 군신풍락)" 이란 문구를 두고 이에야스 (家康) 의 이름을 두 글자로
쪼개고, 도요토미 (豊臣) 가의 이름을 거꾸로 넣은 것이므로, 이에야스를 저주하고 도요토미가의 부흥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는 역저주라는 음모론적으로 해석해 트집을 잡았으니 라잔이 권력에 곡학아세 한 것입니다?
하야시 라잔은 1635년에 무가제법도의 기초를 담당하였고 그 전인 1632년 우에노의 시노부가오카(도쿄) 에
학문소 및 선성전 (先聖殿) 등을 건립하였으니 쇼헤코 (昌平黌) 의 기원이 되는데, 라잔의 쇼헤코는
에도시대 유학의 총본산으로 유학을 장려하는 에도막부에 의해 최고 교육기관으로 훗날 도쿄대의 원류입니다.
다이가쿠노카미(大學頭) 라고 하여, 3대손인 하야시 호코 때부터 이후 라잔의 후손은 대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학문의 책임지게되니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군함 7척을 이끌고 나타나 막무에 일본의 갸ㅐ항을
요구했을때 막부 대표로 교섭에 나섰던 자는 하야시 가문의 후손으로 다이가쿠노카미 직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야시 라잔의 스승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성리학인 주자학을 전해준 이는 조선 선비 강항 (姜沆)
이니, 임금 선조에게 “간양록 (看羊錄)” 을 써서 올린 형조좌랑 강항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고니시 등 일본군 5만 6천이 전라도 내륙을 점령하자 식솔 60명을 배 2척에 태우고 바다로 피란 합니다.
정유재란은 일본군 14만에 명군 11만 7천 및 조선군 3만 8천인데 일본군 13만이 진격할 때 막아선
조선군은 황석산성에 5백명과 남원성에 1천명이며 명군은 남원성에 3천명과 천안 북쪽 직산
에 4천명등 8천 5백명에 불과했는데.... 저 13만이 전주와 공주를 무혈 점령하자 모리등
4만은 천안으로 가토등 3만 4천은 충주로 북상하고 고나시등 5만 6천은 전라도로 남하한 것입니다.
강항의 배는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명량해전 대승리 7일 후인 1597년 9월 23일 우수영을 돌아 멀리 전라도
영광 까지 북상해온 왜군 배에 나포되어 무안과 순천을 거쳐 일본으로 끌려가는데, 무안항에는
이순신 장군을 추격해 올라온 왜군 선박 300여척이 정박해 있었으며 심문을 받았다고 간양록에 적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13척으로 왜선 31척을 부수는 대승리를 했으나.... 당일 바로
황급히 후퇴하는데, 군사들이 아침과 점심을 굶고 험한 명량의 풍랑과 하루종일 전투로 파김치가
됐고 저녁 때니 조선 백성들이 기다리는 우수영에 들러 밥 부터 먹이고 녹초가 된 몸을 쉬어야 합니다.
하지만 장군은 초죽음이 된 병사들을 재촉해서 죽자사자 노를 젓게해서 밤중에 당사도에 도착했으나
상륙하지 않고 배에서 자고는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다시 노를 저어 멀리 어의도에 가서 배에서
내려 비로소 "밥을 먹였으며" 그후 다시 북상해 금강 하구 군산 선유도로 후퇴 하는데, 왜군은
300척이 남았으니 일부가 진도 바깥 바다로 우회하면 포위당해 수군이 전멸할 것을 염려했던 것 입니다.
일본군은 9월 16일 명량해전 당일 저녁에 탐망선을 보내 조선 수군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다음날 바로
진격해와서는 우수영과 진도를 초토화시키고 이순신 장군의 행방을 쫓아 영광 까지 북진하며
조선 백성들을 약탈하고 살육하며 방화하니 전라도 해안은 아비규환 지옥으로 변하는데,
살육의 광풍이 지나간후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포로로 잡아 끌고가니 강항 일행등 수만명에 달합니다.
왜군은 임진왜란때 조선 내륙에는 포장도로 가 없는데다가 의병으로 보급이 안되고 명군의 참전에 겨울철
혹독한 추위로 고생했던 경험에 비추어 이번에는 울산에서 순천까지 남해안에 29개 왜성을 쌓고
늦봄에 출격해 경상, 충청, 전라 3도를 휩쓸고는 늦은 가을 남해안 왜성으로 돌아와 휴식하며 겨울을 납니다.
몇년만 되풀이 하면 이미 쇠퇴해 가던중이라 제 코가 석자인 멀리서 온 명나라 는 철수할 것이고 고립된
조선은 전국토가 피폐해져 더 버틸힘을 소진 하고는 화의에 임할수 밖에 없게되면 경상, 충청,
전라 하삼도를 얻을수 있다며 장기전으로 들어가는데.... 명나라는 7년간 연인원 25만 병력과 쌀을
실어 나르느라 재정이 파탄에 이르러.... 세금 폭징으로 농민 반란과 여진족에 대처 못해 나라가 망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음력 10월 2일까지 남해안 왜성으로 철수하라 명하니 충청도 직산까지
북상해 조선군이 도주한 가운데 명군 기병 4천을 격파했던 모리등 왜군 4만이
물러가고 영광까지 이순신을 뒤쫓아 추격해 올라왔던 왜수군도 순천과 여수로
물러가는데 왜군은 처음부터 서울로 진격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한양에서는 피난가느라 난리?
이순신 장군은 왜군이 완전히 물러간 10월 3일 군산 선유도를 출발해서 우수영에 돌아온 날은
후퇴한지 24일째인 10월 9일로, 성 안팎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으니 영화 명량에서 응원하던 조선 백성들은 전부 학살되거나 포로로 잡혀 끌려간 것입니다라?
1598년 6월 강항은 도도 다카토라의 성인 에히메현 오즈성에서 교토 후시미성으로 이송되었으니
이안과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의 스승인 후지와라 세이카 등에게 성리학
(주자학) 을 가르치는데, 후지와라 세이카는 옛글도 잘 알아 통달하지 않은 글이 없었으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교토에 집을 짓고 해마다 쌀 2천석을 주고자 했으나 받지않고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강항이 주자 (朱子) 의 주석에 따라 훈점 을 표시한 “사서오경왜훈 四書五經倭訓” 은 다지마 성주가 재정을
후원하고 후지와라 세이카가 편찬을 총괄했으니 이 책은 일본 최초의 성리학 저서로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은 스승의 추천으로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강 (侍講) 이 된후 4대 쇼군까지 시강합니다
책이 출판된후 후지와라 세이카는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에게 청원해 강항 일행의 통행증명서를
발급받게 해주고 여행 비용 까지 대주니... 4월 2일 식솔 10명과 다른 선비와 사공등 38명은 교토
후시미성을 출발하는데 일본인들이 사공을 붙여 대마도까지 인도해 주어 1600년 5월 부산으로 돌아옵니다.
강항이 임금 선조 를 만나고 경과를 적어 올리는 책을 지으니 “간양록 (看羊錄)” 인데
조용필 이 부른 MBC 문화방송의 1980년 방영 드라마 “간양록 주제가" 입니다.
“ 이국 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2. 다도의 스승 센노 리큐
일본의 동북지인 센다이 (仙台 선대) 시 북쪽 해안에 1643년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처음 말한 니혼산케이
(日本三景 일본 3대 절경) 중에 첫째 마쓰시마 (松島 송도) 가 있는데, 나머지 2곳은 교토부 북쪽
아마노하시다테 (天橋立 あまのはしだて) 와 히로시마시 남쪽에 이쓰쿠시마(厳島 いつくしま) 입니다.
붉은 다리로 연결되는 섬 고다이도 五大堂(오대당) 에서 오시마로 가는 길은 바닷가인데 고다이도를 닮은
정자가 있으니 " 간란테이" 觀爛亭(관란정) 라고 하는데, 간란테이" 는 잔잔한 물결을 보는
곳이라는 뜻으로 16세기 말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사한 목조 다실로 센다이 영주의 휴식처였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센다이 번주 다테 마사무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내기 바둑(?)에서 이겨 교토에서 통째로
옮겨왔다는 다실 (茶室) 이라는 설도 전해 온다나요? 어쨌거나 간란테이 는 사람
들이 긴세월 달맞이를 하며 차를 마시던 곳으로 간결한 건물은 마쓰시마의 소나무 와 잘 어우러집니다.
센다이의 영주 다테 마사무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즈 오다와라의 호죠가 를 칠때 군사 동원을
요청받고도... 전세를 엿보는 기회주의자로 처신하다가 결국 감금되었는데 살피러 온
히데요시의 가신에게 다테 마사무네는 죽어도 좋으니 그전에 차(茶) 한잔 마시고 싶다고
말해 히데요시의 호감을 사서 풀려났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히데요시는 차 (茶) 를 좋아했습니다.
"술 좋아하는 민족은 망하고 차 좋아하는 민족은 흥한다" 는 말은 영국을 본보기로 드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사랑은 센노 리큐 (千の利休) 를 만나고 부터이니.....
리큐는 히데요시가 주최한 다이토쿠사의 다회를 관장하여 천하 제일의 다인으로 칭송받습니다.
센노 리큐는 천하인(天下人) 이라 불리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극진한 신임을 받아 오사카 다회에서 제1석을
맡았으며..... 1590년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전쟁에 수행해 하코네 에서 "다회" 를 열었다고 합니다.
리큐는 무역항 사카이시 (堺市 계시) 에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로 부터 센(千) 이라는 성을 하사 받아
센리큐 (千利休) 라고 불린 일본 다도를 정립 하고 완성한 인물이니,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자문 역할을 하며 "차(茶) 스승" 으로서 일본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고 합니다.
茶具(다구) 를 디자인 하고 다실 을 새로이 꾸미는 등 차 전반에 걸쳐 혁신을 가져왔으며 화경청적
(和敬淸寂) 의 정신을 강조해 " 다도(茶道) " 를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게 만든 일등공신 입니다.
사카이시는 명(明)나라와의 무역 과 나라, 교토, 오사카 등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로 사카이의 차(茶) 를
두고 정치와 연관된 실용성을 띤 차 라고 말해 지는데, 리큐의 차 는 사카이의 실용성을 초월
하여 정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 하나의 의식으로 발전시켰으니 "차노유(茶の湯)" 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그는 와비차 (草庵茶, わび茶) 전통의 원조이니 다조(茶祖) 라 불리는데... 조화와 존경을 의미하는
화경청적 (和敬淸寂) 정신을 강조하고, 참선과 다법을 조화시켜서 "다도(茶道)" 를
완성한 센노 리큐의 덕을 기리기 위한 추모 행사가 420여년이나 지난 지금도 매년 열린다고 합니다.
센노 리큐는 교토의 다이토쿠지 (大德寺) 에서 선(禪) 을 배웠는데 1585년에는 천황(일왕) 앞에서 다회(茶會)
를 시연해 리큐(利休) 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1587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받아 차 우두머리
다두 (茶頭) 가 되었으나..... 강직한 성격으로 조선 출병을 반대하는등 히데요시와의 마찰 이 잦아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이토쿠사 절에 자신의 목상(木像) 을 안치했다는 빌미로 히데요시에게 질책을 받았으며, 결국
1591년 쿄토에서 할복자결하는데 혹은 조선출병을 반대하는 센노 리큐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히데요시가 마실 말차(抹茶) 에 "치사량의 독" 을 넣으려 했다고 누군가 투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센노 리큐와의 그간의 깊은 우정을 생각해 사형장에서 죄수처럼 처형하지 않고 "할복 자결"
을 할수 있도록 큰 "은전(?)" 을 베풀었던 것이네요? 그런데 독실한 기리시단(크리스챤) 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에서 자결을 금지하니 마다하고 처형장에서 목이 잘렸으니 장수들의 비웃음을 샀다고 합니다.
센노 리큐는 죽음을 앞두고 "최후의 다회 (茶會)" 가 열리는 운명의 날..... 슬픔에 젖은 손님들이
약속 시간에 정원의 마치아이(待合) 에 모여듭니다. 다실을 잇는 좁은 통로 로지 (露地)
는 정갈하게 빗질이 되어 있었으니..... 진기한 향내와 함께 손님들은 다실 안으로 청해졌습니다.
어둑한 다실 정면의 도코노마 에는 "세상의 헛됨을 설파" 한 고승의 걸개 그림이 걸려 있었으니...... 주인은
손님 한사람, 한사람에게 손수 차를 타주었습니다. 마침내 센노 리큐는 최후의 잔을 스스로 타서 마신후
자신의 다구와 걸개 그림을 손님들에게 나누어준후 자신이 마셨던 찻잔만은 던져서 산산히 부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한사람이 남자, 다회에 입었던 옷을 벗어 단정이 접은후 순백색의 자결복장으로
갈아입고는 이어서 피를 토할듯 시 한수를 읊고 나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띤채 칼날을 자신의 배에 대고는 “ㄴ 자로” 그어 올려서 죽었다고 전합니다.
한국인들은 집 밖에서 죽는 객사(客死)를 끔찍하게 생각하는지라 편안하게 살며 곱게 늙은후 집의
안방에서 아들과 제자들이 임존하는 죽음을 최고로 치지만... 일본 사무라이들은
무사라면 마땅히 전쟁터에서 적군 장수의 목을 베고는 칼에 맞아 죽는 것을 최고의 죽음으로 여깁니다.
그러니까 늙어서 안방에서 죽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데.... 전쟁터에서 죽지 못한 것은 적진으로
돌격해야 할 때 후퇴했다는 것이니 무사로서 비겁한 일이었고, 패하면 소복한후 정갈한 의식을
거쳐 시 한수를 읊고 죽는게 전장에서 죽는 것 만큼 영광으로 여기며 참수당하는 것을 수치로 여깁니다.
그가 이룩한 다도 "와비 사비" 는 단순하고 소박 하며 오래된 것 들이 새것이나 화려한 것 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정신은 물질의 가장 내밀한 본질 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모든 것들을 들어내고 비워야 하는 것이니... 방의 아름다움은 "빈 공간" 에 있다는 믿음 입니다.
집을 짓는 건축의 소재 또한 소박 해야 하는데 정원 한구석에 풀잎으로 얼기설기 엮은 오두막 다실 은 "투박한
단순성과 빈 공간" 으로 인해 아름답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가운데 인생의 부침과 운명을 그냥
쓸쓸하게 받아들이는 정신은 현대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나 텅빈 공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센노 리큐는 간소하고 차분한 일본의 미의식인 와비(侂び) 의 개념을 정립했으니 다도(茶道) 는 작은 족자 하나
와 꽃 한송이 꽂힌 꽃병 이외엔 아무 장식이 없는... 작고 수수한 다다미 2장 짜리 다실과 소박하지만
기품있는 다기를 가지고 행하는 미(美)의식 추구를 바탕으로 차 달이기 의례적인 양식인 "다도" 를 확립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내지 못하였고 중국산 도자기는 지나치게 화려하여 소박한 미(美) 를 추구하는
일본 다도에 적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진왜란때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고 "조선 백자" 를 수집
하는데 혈안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니, 센노 리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을 반대해 미움을 산 것입니다.
조선 도자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원했던 이유는 당시 일본에서는 자체적으로 고령토나
백토의 산지를 찾지 못하고 있었으며.... 수요는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늦게 도자기가 발달했는데도 정작 다도는 융성하고 있었으니
하급 무사의 토지와 1년 녹봉 전체가 "다완 하나의 가치" 와 맞먹었을 정도 였습니다.
다도 (茶道, さどう) 는 일정한 법에 따라 주객이 마음의 공감을 나누면서 차를 마시는 일본의
전통 예술입니다. 다도 에서는 맛차 (抹茶, まっちゃ) 라는 분말 형태의 정제된
찻잎을 다기에 넣어 뜨거운 물을 붓고 대나무로 된 막대로 저어서 거품을 내어 마십니다.
다도의 예법에는 무사의 예법이나 노(能) 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는데 모양 보다도 마음을
중시하고 스스로를 버리고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다도의 마음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도의 예법 을 행하는 전용 공간인 다실과 다도구 (茶道具) 준비등 손님을 맞는
주인의 세심한 배려와 주의가 기울여지니..... 손님은 감사하는 마음 을 가져야 했습니다.
3. 단가의 1인자 마쓰오 바쇼
일본의 동북지방 센다이 (仙台 선대) 시 북쪽에 1643년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말한 니혼산케이
(日本三景 일본 3대 절경) 중에 첫째 마쓰시마 (松島 송도) 가 있는데.... 나머지
2곳은 교토부 북쪽 아마노하시다테 (天橋立) 와 히로시마시 남쪽에 이쓰쿠시마 (厳島) 입니다.
동북지방 기행중인 1689년 마쓰시마 (松島 송도) 를 찾은 시성(詩聖) 마쓰오 바쇼 는
자신의 기행문집에 송도를 일본에서 경치가 제일 아름다운 곳 이라고 예찬
했다고 하는데, 남해 한려수도와 비슷한 풍경이지만 섬들이 칼로 자른듯
바위가 드러나며 또 밀집돼 분재 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줍니다.
몇년 전에 센다이에서 마쓰시마에 도착해 엔쓰인(円通院) 과 다테 마사무네가 중수한
즈이간지 ( 瑞嚴寺 서엄사) 를 보고는 일본 3경 이라는 마쓰시마 松島(송도)
고다이도 五大堂 (오대당) 를 구경한후 걸어서 간란테이 觀爛亭(관란정)를 보았습니다.
다시 이나리 신사 渡荷神社(도하신사) 를 보기 위해 송도의 260개 섬 중에서 가장 크며 센노 리큐의
비가 있다는 오시마 (雄島 웅도) 를 찾아가는데, 이 매력적인 섬으로 들어 가자면 해변쪽에
개펄과 인접한 소로를 걸어 섬으로 연결되는 붉은 다리 인 도게쯔 다리 渡月橋(도월교) 를 건너야 합니다.
이제 섬 으로 들어 가자면 지도에는 도게쯔 다리 渡月橋 (도월교) 를 건너는 것으로 되어
있는지라 한참 헤메다가 소로를 발견하고는 걸어서 작은 언덕을
넘으니 그제사 앞서 간 일본인 커플을 발견하고 뒤따라 가니 저만치 붉은 다리가 보입니다?
시간이 늦었는지라 어둠이 내리니 저들 커플이 없었다면 우리 부부로서는 아무래도 불안해서 섬에
들어가기가 좀 어려웠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리에 이르는 흙길에는 "야생화" 가
아름답게 피어있는 모습을 보는데 섬으로 연결된 도케쯔 다리 渡月橋(도월교) 는 어찌나 붉은지....
섬으로 들어가 한 모퉁이를 돌아가 언덕 위에 마쓰시마(송도) 에 흩어진 여러 섬 들이 보이는데 그중에는 군함도
라고 불러도 좋을 섬이 보입니다. 섬에는 간판이 하나 서 있는데 오슈어도라이켄노비 (奧州御島 賢の卑) 라,
보니 웅도 묘각암주 라이켄 らいけん 의 덕행을 기리는 비라고 적혀있는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라나요?
가이드북에는 시인 바쇼 芭蕉(파초) 와 소라의 하이쿠 ( 俳句 : 단형 시 )를 새긴 비석이 있다는데 둘러보아도
어두운지라 얼른 보이지가 않네요? 시인 바쇼는 이가국 (미에현) 출신으로 하이쿠에 뜻을 두어 1678년
에는 하이쿠의 스승으로 독립하는데..... 하이쿠에 높은 문학성 을 부여한 이른바 쇼풍 (蕉風) 을 창시하였습니다.
1689년에 6개월 동안 동북 지방을 여행하고 체험과 감상을 하이카이 (俳諧) 와 하이분 (俳文) 으로 엮어 쓴
“오쿠노 호소미치(奥の細道)”는..... 고전기행 작품이라는데, 바쇼 에게 여행의 목적 은
옛 노래 "와카의 명소"를 방문하고 전란의 격전지 를 찾아 죽어간 선인들의 영혼을 "진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작품의 본문에는 자연의 실제 풍경 과 와카 속 에 읊어진 풍경이 중첩 되어 그려
지니... 옛 가인들의 시정(詩情) 과 교감하면서 자신의 문장으로 재현한 것이지요.
바쇼의 하이카이 세계는 세속을 떠나 자연 속으로 칩거 하면서도 자연에 몰입
하여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자연과 합일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바쇼의 하이카이 에는 세속적인 해학성 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고독과 우수 가 깃들어 있으니 바쇼는 자연을
접하고 그 속에서 생활하면서도 자연의 모습 보다는.... "인간의 이치" 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여행의 목적도 자연에 귀의하기 보다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예사람 정취에 공감 하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고 불리는 “하이쿠(俳句)” 는 5· 7· 5 단 열일곱 자 로
이뤄진 일본의 정형시 이니 바쇼의 하이쿠 일곱편을 옮겨 봅니다.
“유별나구나/ 향기도 없는 풀에/ 머무는 나비”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
“소금 절인/ 도미 잇몸도 시리다 /생선 가게 좌판”
“방랑에 병들어/ 꿈은 시든 들판을 /헤매고 돈다”
“가진 것 하나/ 나의 생은 /가벼운 조롱박”
“들판의 해골 되리라/ 마음먹으니 몸에/스미는 바람”
마쓰시마만 에는 소나무(松 마쓰) 가 무성한 무수한 섬(시마) 들이 점점이 떠 있으니 군 군데 자리한
민머리섬도 훌륭한 풍경을 만들어 내는데, 이렇게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방파제 역할을 해준
덕에 2011년 11월 3일 동북 일본 대지진 때도 마쓰시마 松島(송도) 는 피해가 작았다고 합니다?
센다이(仙台 선대) 를 생각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으니 다테 마사무네 (伊達政宗)
인데 일본 전통주인 청주 중에 대표하는 이름이 된 "정종(政宗)"
은 바로 다테 마사무네(政宗) 가문에서 제조한 술에 붙여진 이름이었다는 말도 있지만....
정종이란 상표 를 사케에 처음 사용한건 일본 효고현에 양조장 사쿠라 마사무네 (櫻正宗)
이니 메이지 시대에 상표 등록 제도가 생기면서 마사무네(正宗)를 정식으로 상표로
등록하려 했으나 다른 양조장에서도 많이 쓰고 있었기에 보통 명사로 취급되었다고 합니다.
사쿠라 마사무네 (櫻正宗) 사장 야마무라 타자에몬은 사케 새 레이블 이름을 구상하다가 사찰을 방문해 겐세안
스이코지 (元政庵 瑞光寺) 의 책상에 놓인 불교 경전인 임제정종(臨済正宗)에서 영감을 받았다는데, 正宗
(정종) 이라는 한자 발음이 세슈(セイシュウ) 로, 청주의 일본어 발음인 세슈(セイシュ) 와 유사하다는 점
때문이니,실제로는 正宗 을 마사무네(マサムネ) 라고 읽는 경우가 더 많아서 후자의 형태로 정착 되었다네요?
바쇼의 자취는 마쓰시마 외에 나라현 남부 요시노 나카센본에서도 보았고 아오모리의 도요다코와 교토 서북부
아라시야마에도 그의 자취가 있으며 야마가타현의 잇샤쿠지 절에서는 바쇼의 시비와 동상을 보았습니다.
만화에서 바쇼가 지은 엉터리 하이쿠 일부 입니다. (마츠오 바쇼가 지은 것은 아님!)
忍者かと思ってたら違ってた (닌잔가 하고/생각해 보았더니/아니었더라)
かさねちゃんファイト一発根性だ (아자 카사네/파이팅 한방이다/근성이 최고)
どうしてみんな私をバカというの (대체 어째서/모든 이들이 나를/바보라 하지)
野茂だもの逆から読んでものもだもの (만두먹두만/거꾸로 읽어봐도/만두먹두만)
예전에 동해에 후쿠이 (福井) 현 남부 쓰루가 (敦賀) 시를 찾았는데 “은하철도 999" 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동상이 있어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고는.....
걸어서 게히진구 氣比神宮(기비신궁) 에 도착하여 시인 바쇼의 동상과 시비를 보았습니다.
「달밫 맑은데 휘적 휘적 가노라 모래 위의 길 月清し遊行のもてる砂の上」
「곳곳마다 8경 다시 보는 기비의 달 國々の八景更に氣比の月」
「고목 같은 이름 쓰누가, 그 곳의 가을달을 사랑하노라 ふるき名の角鹿や恋し秋の月」
「달빛에 들리는 신궁의 종소리 바다 속에 잠기노라 月いつこ鐘八沈る海の底」
「이름난 기비의 달, 별안간에 다시 찾아 왔노라 名月や北國日和定なき」
「중산을 넘어 월국(=후쿠이)으로 8월마다 가고 싶어라 中山や越路も月ハまた命」
「비 내리는 기비여, 달도 없고 씨름도 없네 月のみか雨に相撲もなかりけり」
「옷 압은 채 조개잡이 여덟 밫깔의 달 衣着て小貝拾ハんいろの月」
「눈물 난다. 갈 때마다 밟히는 모래벌의 이슬 なみだしくや遊行のもてる砂の露」
그러고는 오사카시 남부 스미요시타이샤 (住吉大社) 신사 앞에 스미요시코엔 ( 住吉公園
주길공원 ) 이 있는데 그 한쪽 구석에도 시인 바쇼의 시비가 서 있는걸 보았습니다.
시인 바쇼 芭蕉(파초) 는 1644년생으로 1694년에 죽었는데, 에도시대 하이쿠 시인 으로 이가국(미에현)
이가 출신이니 5· 7· 5의 17음(音) 형식으로 이루어진 하이쿠 俳句(배구) 시 에 뜻을 두어 1678년
하이쿠의 스승으로 독립하는데.... 하이쿠에 높은 문학성 을 부여한 쇼풍(蕉風 초풍) 을 창시 하였습니다.
중세 정형시 와카(和歌 화가) 는 유희적인 성격이 강한 렌가(連歌 연가) 로 되었는데 무로마치 시대에 접어들면서
하이카이 렌가 (俳諧連歌) 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하이카이 렌가는 전통적 궁정 문화의 틀 안에 있던 렌가의
소재를 세상으로 넓혀, 시형 (詩形) 이나 소재에 비근한 것을 조합함으로써 생기는 재미 를 목적으로 했습니다.
곧 '하이카이 (俳諧 또는 誹諧)' 란 말이 원래 '골계· 해학' 을 의미하듯이, 복잡하고 딱딱해진 렌가의
형식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읊으려는 경향 으로..... 하이카이 렌가가 생겨난 것 이라고 합니다.
하이카이 렌가 는 렌가의 지류로서 존재 하다가 야마자키 소칸 (山崎宗鑑) 에 의해서
널리 보급되고 유행했다는데, 하지만 하이카이 렌가 는 어떠한 소재라도 자유롭게
읊을 수 있는 반면에 재미를 이끌어 내는 과정에 거칠고 저속한 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다시 우아한 세계 로 이끌려고 노력한 사람도 나타났지만....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는데..... 17세기 에도 시대에 들어서 하이카이 는 마쓰나가 데이토쿠
(松永貞徳) 에 의해 렌가에서 문예적으로 독립 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하이카이(俳諧) 는 기본적으로는 렌가와 동일 하며 홋쿠(発句)· 렌쿠(連句)·하이분(俳文) 으로 이루어
지는데, 18세기에 하이카이는 더욱 융성하여, 전국 곳곳에 하이단 (俳壇) 이 만들어져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대중화 또한 진행되어 농한기의 오락으로서 농민들에게도 크게 환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