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게 불성이 없다? / 월호 스님
개에게 불성이 없다?
일상생활 중에 무슨 일을 하면서든
오직 “어째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라고 한
화두를 끊임없이 들어,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뜻 길이 사라져
아무 맛도 없어지고 마음이 답답할 때가 바로
그 사람의 몸과 목숨을 내던질 곳이며,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대목이다.
- <선가귀감 15>
주해(註解):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조주스님은 “없다”고 답했다. 이 한마디는 우리 종문의
한 관문이며, 온갖 못된 지견과 그릇된 알음알이를 꺾어버리는 연장이다.
또한 모든 부처님의 면목이고 조사들의 골수이다.
이 관문을 뚫고 나간 후에야 비로소 부처나 조사가 될 수 있다.
옛 어른은 이렇게 읊었다.
‘조주의 무서운 칼, 서릿발처럼 번쩍이네.
무어라 물을 텐가, 몸뚱이가 두 동강나리.’
한 화두를 끊임없이 들어서
이치의 길이 끊어지게 하라
사족(蛇足):
더 이상 닦을 것도 깨칠 것도 없이 본래 그대로가
부처라는 것이 조사선의 입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선의 경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관문을 통과하지도 않고서
본래 부처라느니, 제거할 망상도 없고 진리를 구할 것도 없다느니
하는 것은 고목사선(枯木邪禪)에 불과하다.
따라서 참선을 통해 조사관(祖師觀)을 뚫어야 하며,
묘한 깨침을 통해 마음길이 끊어져 다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사관(祖師觀)이란 다름 아닌 무자공안(無字公案)인 것이다.
즉 무자(無字)라는 조사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의심덩어리를 지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몸조차 없는 듯 잊은 듯
‘안팎이 한 조각을 이루어 나가도록’화두삼매에 드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드는 것은 간절한 의심을 갖되
‘머리’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번뇌 망상을 배에 맡기고
화두에 맡겨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일체 처에 무심하면,
차별경계가 스스로 없어지는 것이다.
화두에 모든 것을 맡겨버려 잡을 곳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沒巴鼻 無滋味)뱃속이 고민할 때가
문득 이 좋은 시절인 것이다.
이와 같이 화두는 처음부터 의심을 지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의심을 지어 나가는 요령에서도
또한 우선은 화두 전체를 들어서 챙기고,
‘도대체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하셨거늘,
조주는 무엇을 인(因)하여 무(無)라 일렀을까?’,
‘어째서 무라 했을까?’, ‘어째서?’, ‘왜?’, ‘?’ 하는 식으로
지어 나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마치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리고
‘도대체 어디에다 두었을까?’하고 의심하고 의심해 나가듯이
의심을 지어 나가는 것이다. 다만 염(念)하는 것과
의심해 나가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어떤 일에 대하여 골똘히 의심하고 의심할 때,
혼침과 도거는 자연스레 사라지고 성성하고도 적적한 경지가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도 화두가 잘 들리지 않으면 다시 화두를
처음부터 끝 구절까지 들어서 수미일관하게 하고
다시 의심을 지어 나가되, 그래도 쉽사리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포단에서 내려와 한동안 거니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월호 스님 / 전, 쌍계사 승가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