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저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시편 119(118),36.29)
오늘 복음 말씀은 어제 복음에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말씀입니다. 율법의 계명들을 설명해 주시는 예수님은 오늘 복음 말씀 안에서도 율법의 계명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관해 말씀해 주십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복음 말씀은 특별히 ‘침묵’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예’라고 대답할 것은 더 이상 무엇을 덧붙이지 말고 ‘예’라고만 대답하며, ‘아니요’라고 할 것 역시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말고 오직 ‘아니요’라고만 답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옥좌이며 발판인 하늘과 땅을 두고서도 맹세하지 말라며 엄하게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필요 이상의 말을 덧붙이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저주의 말 역시 서슴지 않고 내뱉으십니다.
말이라는 것이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다보면 하지 말아야 할 말,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또 어떤 경우에는 내가 왜 이런 말까지 했을까 후회가 될 정도의 말까지 다 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 말이란 대개 나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며, 다른 사람의 장점과 덕담을 칭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그 사람의 단점과 결함, 다시 말해 험담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한 말들은 신기하게도 말을 할 때에는 속이 시원하고 마음 속 모든 앙금이 풀어지는 듯 느껴지며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과도 진심을 나누는 듯 느껴지지만, 정작 대화가 끝나고 나면 마음 한 편에 구멍 뻥 뚫린 듯 공허함을 느끼게 합니다. 속 시원히 내 마음 속 모든 이야기를 나누었음에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채워지지 않는 허탈함과 공허함을 만들어내는 이 같은 불필요한 말들의 잔치를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엄중히 차단하시며 그 불필요한 말들은 모두 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이 아닌 악으로부터 비롯된 말, 하느님이 아닌 악한 것으로부터 비롯된 불필요한 말이라는 예수님의 이 설명은 우리가 그 긴 대화의 끝에 느끼게 되는 허탈함과 공허함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할까? 우리 대화의 소재는 그 자리에 없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가 내가 나누는 대화의 소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평소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던 그 사람, 주는 것 없이 밉고 그 사람만 없으면 나의 삶이 평화롭고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그 사람이 나의 대화의 소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고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시며 언제나 나와 함께 해 주시는 거룩하신 하느님이 내가 나누는 대화의 소재가 되어야 하며, 그 대화가 지향하는바 역시 그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며 듣게 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내 마음에 새긴 그 말씀을 영적 동반자인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누며 각자의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 우리 마음에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풍요로워지며, 그 말씀은 우리 안에서 놀라운 생명력으로 하느님이 일으키시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악이 아닌 선에게서 비롯되며, 둘이나 셋이 모여 나누는 그 대화에 성실하신 하느님은 언제나 함께 해 주심으로서,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자리를 축성해주십니다.
둘이나 셋이 모여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나누며 하느님의 축성으로 거룩해지는 대화.
그렇다면 그 같은 대화는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을까? 우리의 대화가 남을 험담하는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나누며 하느님의 축성으로 거룩한 대화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시편을 인용한 오늘 복음환호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시편 119(118,36.29)
시편의 이 말씀처럼, 쉽게 남의 험담으로 기우는 우리의 인간적 경향을 바로 잡아 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법이며, 그 법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풀이해 주시는 율법이고, 지금 우리 삶의 지침이 되어주는 교회의 가르침, 십계명을 위시한 교회의 교리입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하느님의 법, 그 계명들은 쉽게 악과 죄로 기우는 경향을 지닌 우리의 몸과 마음과 행동을 바로 잡아 주고, 그를 통해 우리 삶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합당한 삶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 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 예수님은 이번 주간 계속되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열왕기 상권의 말씀 속에서 예언자 엘리야가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에게 겉옷을 걸쳐 줌으로서 그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부른 것처럼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의 사랑의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사랑으로 다그치고 그 사랑이 우리를 부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를 구속하거나 속박하거나 얽매이게 하는 제약이 아니며,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고 세상이 주는 가짜의 기쁨과 희망이 아닌 우리에게 참된 기쁨과 참된 희망을 주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마음 속 모든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될 것입니다. 화해의 말씀을 남기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분과 화해하십시오. 그러면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가 넘치는 하느님이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아픔을 없애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우리의 작은 입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선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어 우리 영혼을 살찌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늘 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언제나 이웃과 나누는 대화 안에서 우리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생활함으로서 우리의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대화, 남을 칭찬하고 덕담을 나누며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대화를 이루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시편 103(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