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고금도와 강진군 마량을 잇는 고금대교(교량 760m)가 개통되어 고금도와 약산도는 이제 육지가 되었다.
완도에는 1968년 완도대교를 시작으로 약산대교, 신지대교, 소랑대교, 고금대교에 이어 보길대교까지 여섯 번째 연륙교가 건설되었다.
조만간 노화-소안도 연도교와 약산-금일-금당-고흥간 연륙교 사업도 추진될 예정이어서 12개 섬이 하나로 연결되는 명소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완도에는 진산인 상황봉(644m)외에도 생일도의 백운산(482.6m)과 신지도의 상산(324.1m), 금일도의 망산(234.6m), 고금도의 봉황산(214.5m),
약산도의 삼문산(396.3m) 등이 있다.
비록 높이와 규모는 본섬의 상황봉에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 아름다움을 뽐내는 산들이다.
본섬의 상황봉을 제외하면 약산도 삼문산은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완도의 산들 중에 단연 돋보인다.
나지막한 봉우리지만 바위로 이루어진 주능선의 암봉들은 멋진 조망을 선사한다.
특히 산 위에서 보는 島島(도도)한 다도해 풍광이 아름답다.
서쪽으로는 고금도와 신지도, 완도, 해남으로 이어진 올망졸망한 산세가 아름답고, 동쪽으로는 생일도와 금일도, 금당도로 연결되는 섬들이 정겹다.
약산도(藥山島,일명 조약도(助藥島)는 삼문산을 중심으로 희귀한 약초가 많아 붙여진 이름.
망봉 봉화대터는 임진왜란 이후 돈대를 축성하여 당시 고금진의 망덕산(192m),신지진의 상봉(320m), 가리포진(현 완도) 상황봉(644m), 장흥의 천관산(723m),
강진의 관찰봉(389m)으로 봉화를 피워 연락하던 곳이다.
고금도(古今島)는 옛것을 숭상한 도덕군자가 많은 곳이라 붙여진 이름.
고금도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어느날 해난사고로 표류하는 일본인을 구해 주었더니 고구마 종자인 남감저를 주고 돌아갔다.
이 고구마 종자를 고금도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그 이름이 고금도의 고금마가 되었고,다시 고구마로 되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고금도는 정유재란 당시 마지막 수군 본영이었던 곳이며 명나라 수군과 조선 수군이 연합군을 이루어 왜군에 맞섰던 유서깊은 곳이다.
약산대교 인근의 고금도 충무사 (古今島 忠武祠)는 빠뜨릴 수 없는 충무공의 유적지.
고금도엔 덕암산과 봉황산이 있다.
봉황산의 정상부를 이루고 있는 커다란 봉황바위를 구멍바위(또는 바람바위)라 하는데,직경 1.8m와 0.5m 정도의 구멍이 두개 나 있다.
전설이 있는 이 바위는 氣가 넘치고 묘(妙)하기도 하여서 발품을 팔아 40여 분의 시간을 할애하였다.
완도 문화관광 http://tour.wando.go.kr
고금대교를 지나면...
바로 고금도 표석을 만난다. 고금도 입도(入島)를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다시 만나는 약산대교.(우리는 낚시마니아 세 사람을 다리 건너기 전에 내려 주었다.)
약산대교를 건너면 역시 약산도(약산면) 입도를 했다는 이야기.
우리는 샛길을 놓치고 조금 둘러 산행들머리인 등넘밭재에 당도를 한다. (네비엔 약산면 득암리를 입력하여 중간에 내렸다.)
산길 입구엔 작은 주차장이 있고...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망봉을 가리키는 세멘트 포장도를 타고 올라간다.
연어가 알을 낳기위해 물을 거슬러 오르듯 산꾼들은 본능적으로 산으로 오른다.
오르는 중간에 주차장과 번듯한 화장실도 있었다. 그리고 본격 산길입구인 이정표와 정자가 있는 곳.
이제 막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는 산길은 계곡으로 들어가는 길.
계곡 좌측의 바위지대에 흑염소 가족이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완만한 산길을 따라...
가볍게 오르면 만나는 옹리샘(120m) 갈림길을 만난다.
옹리샘갈림길의 이정표
우측으로 도드라진 암봉이 보이길래...
살짝 당겨보니 등거산(토끼봉)이다.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진을 치고 식사를 하는 움먹재. (좌측으로 오르면 바로 삼문산(망봉)이고,우리는 우측의 토끼봉으로 갔다와야 한다.)
움먹재의 이정표
우뚝 솟은 암봉과 돌무더기들로 구성된 등거산(토끼봉)이다.
토끼바위에서 내려다 보는 조망은 가히 일품.
아래 득암항 건너 신지도가 지척이고 ...
좌로 눈을 돌리니 생일도가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리고 점점이 떠 있는 섬들.
토끼봉 정상에서 조망을 즐기며 한참이나 머문다.
방파제를 막아 형성된 약산호 너머로 본섬인 완도와 그 우측 뒤로 두류산이 아련하다.
신지도 너머 더멀리 청산도가 아슴하고 보길도는 완도 뒤에 숨었다.
육지인 듯 바다인 듯 휘도는 섬들을 뒤로하고 한반도는 멀리 땅끝으로 질주하고 있다.
토끼봉에서 바라보는 망봉(삼문산) 고스락.
움먹재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은 후 올라서는 망봉.
삼문산(망봉)엔 봉수대가 있었다.
봉화대는 전시(戰時)에 불을 피워 각 진에다 연락을 취하는 옛날의 통신수단으로 낮에는 연기,밤에는 불을 피웠다.
망봉에서 진달래공원으로 가는 길이 있다. (산행거리가 짧아 둘레길 등의 이름으로 늘린 코스)
돌아본 토끼봉과 신지도.
진달래공원 너머로 생일도와 금일도가 바다위에 한가로이 떠 있고,맞은 편에 제법 우뚝한 봉우리는 가사봉(368m)
망봉의 진달래공원 이정표 뒤로 우리가 진행할 능선이 이어지고 중간에 보이는 바위는 상여바위인가?
봄볕이 따스한 남쪽나라에서의 망중한이다.
바다로 내리닿는 능선 중간에 아까 보았던 상여바위(?)
진달래공원과 생일도.
길옆의 아름다운 야생화.
장룡산엔 공룡알 같은 바위들이 널려있다.
장룡산의 삼각점
장룡산의 이정표(신선골약수터를 따른다.)
이 분홍꽃도 누루귀이고...
이 하얀꽃도 노루귀이다.
복수초 (공부하면 까묵고,공부하면 까묵고 하였는데,이 날은 한덤님께 배웠고...)
신선골약수터를 따라서...
신선골약수터에 닿는다.
약수터의 커다란 바위에는 부처손이 덕지덕지 붙었고...
바위 아래엔 여름철 시원한 피서지로서 자리 깔고 책 한 권 들면 그저 그만일 것 같은데... 그 새도 거북이 입에선 연신 시원한 약수를 뿜어내고 있다.
동백꽃이 곱게 핀 등로를 따라...
조금만 내려서면 산길 입구.
등산로 안내도가 있고...
돌아보니 마애불이라도 새김직한 거대한 바위가 꾸뻑 인사를 하는 듯하다.
농사철을 맞아 밭엔 두엄이 한껏 깔렸는데, 이렇게 하면 올 농사는 꿔다논 당상이라.
돌아보며 바라본 우리가 내려온 길.
청천(靑天)하늘에 하얀 목련이 너무 곱다.
길 중앙에 우뚝 선 은행나무 한 그루. * 노란 체크를 한 슬라브 건물이 우리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죽선리 새마을회관이다.
우리는 좌로 돌아서 죽선리새마을회관을 우로 바라보며...
444번길 골목으로 나왔다.
우리 차가 대있는 죽선리새마을회관 앞의 전봇대에 등산로입구라는 팻말이 붙어 있네.
표시된 이 길을 바라보니 우리가 내려온 길이 열려있고,
돌아보니 다시 표시된 등산로 입구.
다음 이동지인 충무사를 가기위해 은근히 마음이 조급해지는데,일행들은 하산시간이 남았다고 쑥이랑 봄나물들을 캐며 여유를 부리고 있다.
* 하얀 화살표는 내려온 길이고 동그라미는 은행나무.
시간도 이르고,일정도 남아 뒷풀이는 다음 이동지로 미룬 채 "묘당도이충무공유적(충무사)"으로 이동을 한다.
이동중간에 약산대교에서 낚시하는 일행들을 태우느라 너무 시간이 지체되어 일단 충무사로 들어 왔다.
고금도에 있는 묘당도라는 자그마한 섬이었으나 간척지개발로 지금은 육지로 바뀌었다.
이순신은 2월 17일 삼도수군통제영를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고금도는 수군 진으로서의 형세가 한산도보다 좋으며 농사를 지을 땅이 많고, 6~7천명의 주민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사적 제 114호로 지정된 곳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 정유재란때(1598)왜군 30만 명을 무찌른 곳이다.
1958년 지방민의 모금으로 보수공사를 했으며, 충무공의 탄신일인 4월 28일에는 제사를 지내고 매년 11월19일에는 거군적인 행사로 순국제를 모시고 있다.
현재 주변 유적으로는 충무사(忠武祀)와 어란정, 월송대, 해남성, 봉화대, 훈련장 등이 남아 있다.
충무공은 1598년 2월 이곳에 고금진을 설치하고 전라도의 수군 8,000여 명을 모아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전열을 정비하여 노량해전에 출전,
대승을 거두고 7년여에 걸친 임진·정유 양란을 종결한 유서 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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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버스를 대고 작은 고개마루를 넘어서면서 만나는 동백꽃. 동백꽃도 이렇게 화려할 수 있는가?
그러다가 바닥에 꽃닢이 떨어져 선혈이 낭자한 모습은 충무공의 마지막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하늘을 향하여 곧은 기개로 불꽃같이 살며...
마지막 혼신의 힘으로 나라를 구하려다 우리의 영웅 이순신은 그렇게 순국하였다
하마비가 서 있는 입구를 들어가면 좌측 솔숲이 월송대이고 우측이 충무사가 있는 곳.
대소인원개하마비(大小人員皆下馬碑)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말에서 내려야 한다라는 말. (병오 7월에 중건되었다는데...)
충무사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건립된 사당으로 입구에 하마비가 있어 신성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좌측 솔숲에는 공이 노량해전에서 순국 후 영구를 모셨던 월송대가 남아있다.
작은 울타리를 쳐서 관리하고 있는 월송대(月松臺).
1598년 음력 11월 19일 이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본영이였던 이곳에 장군의 유해를 80여일간 임시로 안장하였다가 이듬해 충남 아산으로 옮겼다.
충무공 유해를 모셨던 이 자리는 아직도 풀이 자라지 않는데, 이는 이순신 장군의 氣가 서려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안내문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과...,동·서제가 나오고 내삼문을 지나면 동·서무와 정전이 있다
외삼문 앞에는 온통 중국어로 쓰여있는 안내판이 있다.
중국어는 간편 한자로서 우리가 배운 한문으론 독해하기가 상당히 까다롭다. "묘당도시 정유재란시기 이순신장군 솔영적 수군적 주둔지" 휴~
외삼문을 들면...
"관찰사 이공 규현 영세불망비(觀察使 李公 奎鉉永世不忘碑)'가 서있고,옆에는 "묘당도 이충무공유적"이라는 한글판 작은 석비가 있다.
관찰사(이규현 1808~1862)는 지금의 도지사로 고려 말엽에 생긴 제도이다.
조선시대에 관찰사 라고 불려졌다는데,어떻게 이 비가 여기 세워졌는지는 알길이 없다. 1842년 (헌종8년) 3월 25일 건립되었다.
충무사 현판이 달린 중삼문을 들어서면...
마지막 내삼문을 오르기 전에 우측에 현판이 달린 동제가,좌측에 현판없는 서제가 좌우로 건립되어 있다.
우측의 동제(東齊)와...
좌측의 서제.
이 서제 좌측 막대형 이정표에 "관왕묘비↑"가 표시되어 있다. 서제 뒤로 돌아가면...
관왕묘비각이 나온다.
닫힌 문을 슬그머니 열고 비석을 바라보니 글체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으나 우선 근접촬영 후에 집에서 확인을 한다.
1713년(숙종39년)에 세웠다고 한다.
맨 우측에 "고금도관왕묘비(古今島關王廟碑)"라 쓰여있고,
중앙 좌측에 "고금도관왕묘자(古今島關王廟者) 황명수군도독진공린(皇明水軍都督陳公璘ㅇㅇㅇ(소건야)/
통제사이공순신(統制使李公舜臣) 공어해도(共禦海道) 내둔차도(來屯此道) 묘건재기시야(廟建在其時也)
고금도의 관왕(관우) 사당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 공이 세운 것이다.
진린 공은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적을 토벌하여 위엄을 떨쳤으니 신령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신종 황제 만력 무술(1598)에 다시 군사를 내어 왜를 정벌함에 진공이 광동의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우리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바닷길을 막을 때 와서 이 섬에
주둔하였으니 사당을 세운 것은 바로 그때이다.
하물며 정성을 발하매 세상에 드물게 감동시킬 수 있었음에랴! <후략>
소재집(疎齎集)에 수록된 관왕묘비문을 참고하였음. (빨간 네모칸이 사진에 잡힌 글)
'고금도관왕묘비'를 근접촬영 하였다.
안내판
마지막 내삼문을 들어서면...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정전(正殿)인 충무사(忠武祠)를 바라본다.
충무사 본 건물은 선조 31년(1598년) 명나라 도독 진린이 그들의 군신 관왕을 모시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현종 7년(1666년) 수군절도사 유비연이 중수하고 동무(東廡)에는 진린, 서무(西廡)에는 충무공을 모셨는데...
해방 이후 고금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충무사 현판을 걸고 충무공을 정전에 모신 후 매년 4월 28일(양력) 탄신기념제와 11월 19일(음력) 순국제(殉國祭)를 봉행하고 있다.
우측 동무(東廡)엔 당시 가리포 첨사 양성(陽城)인 이영남(李英男)을 모셨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숨진 이영남(李英男·1563~1598)은 노량해전 이전부터 충무공을 보좌하며 10여 차례 해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명량해전 대승에도 힘을 보태 가리포첨사 겸 조방장으로 충무공과 운명을 함께했다.
이영남은 적 함상에 뛰어 올라가 1검으로 3적을 베어 죽였고 적의 창을 빼앗아 1창으로 5적을 찔러 죽이는 용감무쌍한 장군이였다고 한다.
잠긴 서무(西廡)
"고금도이충무공유적기념비"는 최근에 세워진 듯하고 그 뒤로 관리사와 언덕배기엔 월송정이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공이 고금도에 이르렀을 때는 군의 위세도 장했거니와 섬안의 민가만도 수만호에 달해 옛날 한산도 시대보다 오히려 10배나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노량(露梁)은 하동과 남해의 해협(露梁海峽)이고,명량(鳴梁)은 해남과 진도의 해협(鳴梁海峽,울돌목)이다.
<자료: 춘원 이광수가 고금도 충무사를 다녀와서 쓴 동아일보의 기사 내용.>
친일 반민족인사로 구분된 이광수이지만 고금도 충무사에서 크게 통분한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관우의 묘정사무(廟庭四廡)에 우리 충무공을 배향한 것이니 본말이 전도되었다고 하였다.
마치 충무공을 관우의 신하나 자식처럼 되었고,동무에 배향한 진린이나 등자룡보다도 하풍에 서게 되었다고 통분하였다.
또한 진린과 충무공을 함께 부를 때 이진(李陳)이라고 해야지 조선놈의 입으로 진이(陳李)라고 함은 실로 통분(痛憤)할 일이다 라고 하였다.
다음 일정으로 봉황산을 찾아간다.(낚시마니아 일행들을 태우고...)
네비엔 '봉암리노인정'을 찍는 것보다 들머리인 "완도군 고금면 회룡리 산101-1번지"가 편리하다.
네이버지도에 다음지도를 덧입혔다. 이는 네이버지도의 방파제 모습이 조금 이상했기 때문.
알기 쉽게 스카이뷰로 다시 한 번 확인을 한다.
차에서 내려 올려다 본 봉황산의 모습. 우측 쌍무덤 위의 능선으로 길을 찾아 보았지만 길은 없다.
가방은 벗어놓고 시간상 이 길을 되내려 오기로 하였다.
산길 입구에서 바라보는 쌍무덤(좌측의 차 뒤로)과 트럭이 지나가는 지점의 콘테이너 가건물,그리고 사진 우측의 파란 물탱크가 지형지물이다.
진달래가 피어난 제법 가파른 산길은 그리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듯하지만 오르기에는 무리가 없다.
바위전망대에 선 일행들 뒤로 본섬인 완도의 상황봉이 보인다.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진달래의 소박한 모습과 우뚝한 자태를 드러내는 봉황바위의 위용.
내려보면 고금도 상정리와 너머로 제법 우뚝한 신지도 상산이 보인다.
고개를 들어 봉황바위를 올려다 보면...
볼수록 氣가 넘치는 듯하다.
봉황바위 옆에서 상정리 끄트머리와 신지도의 새다리가 건설되는 곳을 바라본다.
(우리는 우측의 작은 능선을 타고 올라왔다.왼쪽 바위가 있는 산길로 내려가면 봉암리노인정으로 내려가는 길.)
뻥뚫린 구멍을 통과하여 카메라를 들이 댔다.
이 봉황산 정상을 이루고 있는 커다란 바위에 1.8m와 0.5m 정도의 구멍이 두개 나 있는 일명 구멍바위(바람바위)가 있다.
여기에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바다 건너 완도읍 대야리에서 보아 바위구멍이 막히면 그 마을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밤에 몰래 바다를 건너와 이 구멍을 막고는 하였는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고금도 처녀들이 바람이 나는 것이었다.
이런 연유를 안 고금도 사람들이 구멍을 다시 뚫어버렸고...